요엘 2,22-24.26ㄱㄴㄷ; 묵시 14,13-16; 루카 12,15-21
+ 찬미 예수님
한가위를 맞아 합동 위령 미사를 봉헌하기 위해 와 주신 모든 교우 여러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다른 지역에서, 부모님 댁에 오셨다가 미사에 참례하신 분들도 계시지요? 모두 환영합니다.
우리가 집에서 지내는 제사는 우리 조상들을 위해 우리끼리 지내는 것이지만, 합동 위령 미사는 하느님께 제사를 봉헌하면서 우리 조상들만이 아니라 미사에 나오신 다른 분의 조상을 위해서도 함께 기도드립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형제자매이기 때문입니다.
제대 앞에, 우리 부모님, 형제, 친지, 조상님들을 써 놓았습니다. 각자 자기 지향과 함께 서로 서로의 부모님과 친지들을 위해서도 기도드리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형제자매이기 때문에, 제대 앞에 이름을 모신 모든 분이 다 우리 가족입니다.
오늘 복음은 한가위 때마다 듣게 되는 말씀인데요, 솔직히 저는 불만입니다. 부모님과 조상님을 기억하는 위령 미사에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이런 복음을 읽어야 하는지, 교황청은 추석을 지내지 않기 때문에 이 복음은 우리나라에서 정한 것인데요, 꼭 이 복음으로 정했어야 했는지, 해마다 명절에 이 복음으로 강론해야 하는 사람의 심정을 아는지 물어보고 싶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이 언뜻 이해가 잘 가지 않는 이유는, 이 부자의 잘못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기 때문입니다. 많은 소출을 거두었기 때문에 곳간을 헐고 더 큰 것들을 지어 곡식과 재물을 모아 두려고 마음먹었다, 이것이 왜 잘못일까요? 사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는 우리에게 이 부자의 행동은 매우 상식적으로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유념해야 할 것은 ‘나 자신’ ‘너’ ‘네 목숨’으로 번역된 말이 본래 다 같은 단어라는 것인데요, ‘프시케’라는 단어입니다. 영어로 심리학을 뜻하는 ‘싸이컬러지’의 어원이 프시케이고요, 이 말은 영혼, 생명으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 자신에게 말해야지. ‘자,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먹고 마시며 즐겨라.’ 그러나 하느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목숨을 되찾아 갈 것이다.’> 이 구절에 세 번 나오는 프시케를 ‘영혼’으로 번역하면, 이렇게 됩니다.
“내 <영혼>에게 말해야지. ‘<영혼>아,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먹고 마시며 즐겨라.’ 그러나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되찾아 갈 것이다.’”
이렇게 보면 부자의 잘못이 무엇인지 더 명확해 지는 것 같은데요, 부자는 모든 것을 자기 것으로 여겼고, 영혼도 자기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되찾아 갈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영혼의 본래 주인은 하느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부자가 혼잣말을 하면서 가장 많이 사용한 낱말은 ‘내’입니다. 내 소출, 내 곳간, 내 곡식과 재물, 내 영혼. 이처럼 부자의 관심은 오로지 내 것입니다.
그는 하느님과 이웃과 피조물에게 관심이 없습니다. 첫째,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거나, 많은 소출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여쭙는 기도는 전혀 하지 않습니다. 둘째, 주위에 굶주린 이웃이 있는지 살피지 않을뿐더러, 그 많은 소출을 거두느라 고생했을 종들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습니다. 오히려 종들은 새 곳간을 짓느라 더 노동해야 할 판입니다. 셋째, 그 소출은 땅이 낸 것입니다. 레위기에서 하느님께서는 안식년에 땅을 묵혀 종들과 품꾼과 식객, 가축, 그 땅에 사는 짐승들도 먹게 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부자의 안중에 있는 것은 단 하나, 내 재산입니다.
부자는 이처럼 하느님과 이웃, 피조물에 관심이 없고 근본적으로 감사하는 마음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결국 자기 자신과의 관계마저 왜곡되는데요, 그는 자기 자신이 아니라 자기가 가진 것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네 영혼이 네 것이 아닌데, 그 많은 재물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우리가 미사를 봉헌하며 기도하고 있는 우리 부모님과 조상님들은 당신의 생명과 믿음과 사랑을 우리에게 물려주셨습니다. 복음의 부자와는 정반대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셨습니다. 혹 부모님이 신자가 아니셨더라도, 그러셨습니다. 왜냐하면 부모님으로부터 보이지 않는 대상에 헌신할 수 있는 가치를 배우지 못했더라면, 나는 신앙을 갖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이 자리에 있다는 것 자체가, 지금 형제자매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우리 부모님이 잘 살아오셨고, 나를 잘 키우셨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나도 부자처럼 골방에 앉아 나의 소출만 셈하고 있었을 테니까요. 부모님은 한평생 지으신 농사의 소출을 세상을 위해 내놓으셨습니다. 그 소출은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한평생 당신의 삶에서 최선을 다하신 우리 부모님과 조상님들께서 하느님 나라에서 평안한 안식과 기쁨 누리시기를 기도드립니다. 2독서의 말씀을 다시 들어보겠습니다.
“‘이제부터 주님 안에서 죽는 이들은 행복하다.’고 기록하여라.… 그렇다, 그들은 고생 끝에 이제 안식을 누릴 것이다.”(묵시 14,13)
첫댓글 신부님 감사합니다. 좋은 말씀으로 위로 받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