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성한 자유 (잠 22:7-9)
7 부자는 가난한 자를 주관하고 빚진 자는 채주의 종이 되느니라 8 악을 뿌리는 자는 재앙을 거두리니 그 분노의 기세가 쇠하리라 9 선한 눈을 가진 자는 복을 받으리니 이는 양식을 가난한 자에게 줌이니라
이 시간에 “풍성한 자유”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주신 최대의 선물은 죄와 사망의 종이 된 우리 인간에게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자유를 주신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온갖 고통 속에서 주님을 찾아 만난 사람들은 모두 자유함과 기쁨을 누렸습니다.
그래서 갈5:1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했고, 눅4:18-19에서는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했습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를 풍성하게 누리는 길은 무엇입니까?
1. 더욱 경외함으로 믿음에 부자가 되는 것입니다.
7절 “부자는 가난한 자를 주관하고 빚진 자는 채주의 종이 되느니라” 부자가 지닌 다양한 이익과 가난한 자가 당할 수밖에 없는 손해를 대조시키는 말씀입니다. 즉 잠언 기자는 게으르지 말고 성실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복 받아서 종속되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자존심이 강해도 가난하면 부자에게 종속될 수밖에 없습니다. 당장에 생존이 불가능하잖아요. 거기에는 인간답게 살 자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미국의 제 32대 대통령 루스벨트는 1941년 1월 6일 의회에 보내는 연두 교서에서 4가지 자유를 주장했습니다. 그 자유는 언론의 자유, 신앙의 자유, 결핍으로부터의 자유, 공포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신령하고 복된 은혜를 자유롭게 누리려면 믿음의 부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럼 믿음이란 무엇일까요?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성경의 약속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조금이 아니라 많이 많이 모두 믿으세요. 그래야 믿음의 부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구속의 진리를 나를 위한 것으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지키는 것이 믿음입니다. 돈 벌어도 도둑이 가져가면 될까요? 지켜야 내 것입니다. 다니엘과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보세요. 그들은 어떤 가운데서도 믿음을 지켰습니다. 말씀을 지키고 주일을 지키고 마음을 지키고 자기 사명을 지키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는 것이 믿음입니다. 놀며 부자 되나요? 열심히 모여 예배하며 생활 속에서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주의 일에도 충성하시기 바랍니다. 헌신하는 것을 보면 믿음의 유무를 압니다. 믿음이 있으면 하나님을 위해 희생하며 아깝지 않게 생각합니다. 사람에게 인정을 받는 것보다 하나님께 인정 받기 원합니다. 이 땅의 것보다 하나님 나라의 상급을 먼저 생각합니다. 이런 믿음의 부자만이 하늘에 예비하신 온갖 아름다운 복과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2. 자유를 풍성히 누리려면 죄에서 떠나는 것입니다.
8절 “악을 뿌리는 자는 재앙을 거두리니 그 분노의 기세가 쇠하리라”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계시기에 사람은 반드시 자기 행위대로 보응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악인이 쇠퇴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세상에서도 악행하면 옥에 가두어 자유를 빼앗습니다.
그래서 마5:26에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하셨습니다. 이것이 세상법이기도 하고 하나님 나라의 법도 그렇습니다. 진정한 자유를 위해서는 죄와 상관없이 회개해야 합니다.
육신의 자유를 원하십니까? 약5:16에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했습니다. 늘 회개하면 건강을 위한 길을 열어주십니다. 문제가 절실하다면 철야가 됐든 한 끼 금식이 됐든 작정해 놓고 기도하세요.
능력의 자유를 원하십니까? 진실로 나태에서 돌이켜 하나님을 전심으로 경외하세요. 사40:29-31에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했습니다. 아합처럼 둘 사이에 머뭇거려서는 안 됩니다.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할 때 사람들 중에는 박해를 피하기 위해 맘에는 없지만 거짓으로 참배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믿음일까요? 사람 앞에서 하나님을 부인하면 하나님께서도 그를 모른다고 부인하십니다. 그 결과 어땠습니까? 하나님의 능력은 그들에게서 떠나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하나님 멀리하고 얼마나 큰 고난이 닥쳐왔습니까? 자유롭다고 다 자유가 아닙니다. 새는 하늘에서 가장 자유롭고, 물고기는 물에서 가장 자유롭고 행복합니다. 나무도 마찬가지입니다.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있을 때 가장 복되고 자유로워집니다.
유명한 탐험가 밥 바틀렛이 많은 새들을 잡아 배를 타고 돌아오다 새 한 마리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몇 시간 후 새가 다시 돌아왔는데 새가 맥이 빠져 숨을 헐떡이며 갑판 위에 쓰러졌습니다. 망망대해에서 새가 가면 어디로 가겠습니까? 가는 것은 곧 죽음일 뿐입니다.
이처럼 사람은 하나님 안에 있을 때만 자유롭습니다. 물을 떠난 고기가 살 수 없듯이 하나님을 떠난 심령은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복을 받으려면 회개하고 하나님을 떠나지 마시기 바랍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게을러 하나님 멀리하거나 범죄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 프란시스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프란시스의 친구 ‘베르나르도’가 찾아와서 하룻밤을 같이 자게 되었습니다. 베르나르도는 침대에 들어가 큰소리로 코를 골며 먼저 깊은 잠에 빠진 척했습니다. 베르나르도는 성자인 프란시스가 어떻게 기도하는가하는 호기심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성 프란시스는 베르나르도가 잠이 든 것으로 알고 살며시 일어나 눈과 손을 하늘 높이 쳐들어 작은 소리로 그러나 지극한 경건과 타오르는 열정으로 “오, 나의 하나님, 나의 모든 것”이라고 말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프란시스는 한참 말이 없다가 다시 기도합니다.“오, 나의 하나님, 나의 모든 것” 하고는 눈물을 주르르 흘렸습니다.
그리고 또 다시 한참을 아무 말이 없다가“오, 나의 하나님, 나의 모든 것”하고 같은 말을 되풀이 하는 것이었습니다. 친구 베르나르도는 성 프란시스의 기도가‘오, 나의 하나님, 나의 모든 것’ 이란 말 외에는 아무런 다른 말이 없다는 것을 알고는 크게 실망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성자라고 해서 기도를 잘하는 것이 아니다. 성 프란시스의 기도는 한 마디 뿐이던 걸.” 하고 소문을 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프란시스의 기도만큼 훌륭한 기도가 어디 있겠습니까? 이보다 더 순수하고 온전한 기도가 어디 있었습니까? 아무리 청산유수와 같은 기도일지라도 눈물로 하나님을 나의 모든 것으로 고백하는 그 기도야말로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온갖 아름답고 풍성한 자유를 누리는 최선의 길입니다.
3. 풍성한 자유는 더 낮은 곳에서 사랑함으로 누릴 수 있습니다.
9절 “선한 눈을 가진 자는 복을 받으리니 이는 양식을 가난한 자에게 줌이니라.” 여기 선한 눈이란 남을 불쌍히 여기고 친절과 사랑을 베푸는 따뜻한 마음을 의미합니다. 이런 사람이 복을 받는 것은 역시 지극히 당연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왜 그럴까요? 예수님께서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마5:7)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용서하는 자와 함께 하시며 또 사랑하는 자와 함께 하십니다. 그래서 형제를 사랑하는 자가 하나님을 만납니다.
채근담에 “은혜를 베풀려거든 그것을 갚지 못할 사람에게 베풀어라.” 했습니다. 이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눅14:13-14에 “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 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 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
그러므로 항상 낮은 곳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사도행전 10장에 백부장 고넬료는 하나님을 경외할 뿐 아니라 백성을 많이 구제한 사랑의 사람이었는데 꿈에 지시를 받아 베드로를 만나 이방인으로서 최초로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그는 하나님을 가장 낮은 곳에서 만났습니다.
그곳에 우리 주님이 계십니다. 동방박사들이 예수님을 찾으러 왔지만 예수님은 예루살렘 왕궁에도 거룩한 성전에도 계시지 않았습니다. 가장 낮게, 가장 작은 마을, 가장 작고 낮은 사람의 가정에, 가장 천한 말구유에서 예수를 만났습니다.
어떤 제자가 스승에게 물었습니다. “제게 왜 기쁨이 없습니까? 왜 다른 사람들이 제게 행복을 주지 못합니까?” 스승은 말했습니다. “그대는 어찌 한 되짜리 그릇을 갖고 한 말의 쌀을 받아 오려고 하는가. 한 조각의 천을 들고 옷 만드는 집에 가서 한 벌의 옷을 지어 달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매사를 찡그린 얼굴로 대하면서 기쁨이 있기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다정한 이웃, 베푸는 사람이 되지 않고서 어찌 다른 사람이 행복을 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만나 자유를 누렸습니다. 여러분의 삶이 고단하고 힘드십니까? 자유가 필요하십니까? 지금도 이 은혜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힘써 하나님을 섬겨 믿음의 부자가 되고, 철저히 죄에서 떠나 마음을 씻어 성결하게 하고, 주님이 함께 계신 낮은 곳으로 더 낮은 곳으로 내려가 섬김으로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서 성령으로 주시는 온갖 아름다운 자유를 풍성히 누리는 사랑하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출처:한국강해설교연구원글쓴이:agase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