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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 22:1-11
속단하지 말라
--어떤 일에 대해서 속단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벌써 잘못된 일입니다. 왜냐하면 어떤 경우든지 속단하는 것에는 깊은 사려와 성찰이 없으며, 앞뒤의 일에 대한 고려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대개의 속단은 큰 오류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한 사냥꾼이 숲 사이를 헤쳐 다니다가 멀리 동료 사냥꾼을 보고서 그것을 사냥물로 오인하여 총을 겨냥하고서 방아쇠를 당겼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때 그 결과가 얼마나 끔찍스러운 것이겠습니까?
이처럼 잘못된 속단은 많은 문제점과 폐단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와 같은 문제가 욥을 향한 엘리바스의 말에서도 그대로 드러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점들을 속단하면 안 될까요? 이제 그 점들을 들어보면서 우리의 경계로 삼고자 합니다.
##### 1.남의 인격을 속단하면 안됩니다
본문 5절에 보면 < 네 악이 크지 아니하냐 네 죄악이 극하니라.>는 말이 있습니다.
친구 엘리바스는 욥을 향하여 세번째 공박을 시작하면서 그를 가리켜 대뜸 <불의한 자>라고 단정하고 있습니다.
물론 엘리바스의 이 말은 그야말로 겉만 보고서 내린 속단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뿐만 아니라 이런 일은 심지어 종교가 같고 교단이 같은 사람들 사이에서 조차 심심치 않게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아무리 신앙의 관점이 서로 다르더라도 그것 때문에 상대편의 인격까지 싸잡아 무시하거나 짓밟으려고 들어서는 절대로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드러난 어떤 겉모양만 보고서 상대편을 지탄해서도 결코 안 될 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못하여 심지어 자기에게 맞지 않으면 상대편을 악마라고 규정하는 일까지 있을 정도입니다. 정녕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죄없는 하나님의 아들이었지만 유대인들에게서 신성 모독 죄라는 엄청난 죄를 뒤집어 쓰고서 처형을 당하셨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무릇 다른 사람의 인격을 함부로 속단하면 안 되지만 종교 사회 안에서 신앙 차이나 외모만 보고서 인격 모독이 자행되면 더욱 안 될 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불행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삼가 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 2.남의 행동을 속단하면 안됩니다
엘리바스의 입에서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 욥에 대한 속단이 이번에는 구체적인 행동면으로 거침없이 이어졌습니다. 본문에 언급된 '까닭없이 형제의 물건을 불모잡아 헐벗은 자의 의복을 벗기며'(6절)라고 한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말은 욥이 소유했던 많은 재산이 도적질한 것 혹은 탈취한 것이었다고 강하게 암시적으로 단정한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의인으로서 동방에서 가장 큰 자를 가리켜 날강도로 몰아 붙이다니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것입니까! 사실 애국자가 간신배로 몰리고 정직한 자가 사기꾼으로 몰리며 멀쩡한 사람이 정신병자로 몰리고 자선가가 도둑으로 몰리며 선량한 사람이 배신자로 몰리고 의리가 강한 사람이 변절자로 몰리며 정숙한 부녀가 음녀로 몰리고 건전한 신앙인이 이단자로 몰리는 등의 세상 각처에서 수없이 일어났고 지금도 일어나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하여 일어날 것입니다. 왜냐하면 참으로 사람들의 마음이 그만큼 사곡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남의 말과 행동을 속단하는 경향이 많기 때문에 그런 일이 꼬리를 물고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남의 행동을 확인해 보지도 않고서 자기의 생각과 추측만 가지고 이러쿵 저러쿵 폄론하는 것은 절대로 안 될 일입니다.
예전에 어떤 저명한 판사 한 분은 자기의 잘못된 재판 때문에 죄없는 사형수 하나가 처형당한 사실을 알고 나서 판사직을 버렸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런 일을 거울삼아 우리는 남의 행동에 대하여 악한 속단을 내리는 불행이 절대로 없어야 할 것입니다.
##### 3.남의 양심을 속단하면 안 됩니다
엘리바스는 이번엔 욥의 양심에 관한 일에까지도 속단하여 마지 않았습니다. '권세 있는 자가 토지를 얻고 네가 과부를 공수로 돌아가게 하며 고아의 팔을 꺾는구나"(8,9절)라고 한 것이 그것입니다. 그는 욥을 가리켜 세력만 누렸을 뿐 가련하고 불쌍한 자들에게는 조금도 동정을 베풀지 않았던 무자비한 자라고 몰아 붙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점에서도 그의 판단은 엉뚱하게 빗나가고 말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참으로 행동은 밖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목격하기 쉽지만 양심은 안으로 감추어져 있어서 알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참된 선행은 자기 왼손도 알기 어려운 것이어서 좀처럼 단정하기가 어려운 법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처럼 속단한다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절대 남의 양심에 대하여 속단하면 안됩니다.
--사루비아 꽃 옆에서 서로 사랑하는 한 쌍의 연인이 사랑을 속삭이고 있었다. 여자가 사루비아 꽃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꽃은 정말 정열적이요?" 그러자 남자가 뭔가 생각난 듯이 사루비아 잎을 따며 말했다. "이 잎으로 이를 닦으면 아주 깨끗해진다더군!" 그러면서 사루비아 잎을 이빨에 대고 문질렀다. 그런데 갑자기 남자는 신음 소리를 내며 쓰러지고 말았다. 너무나 놀란 여자는 쓰러진 남자의 몸을 계속 흔들며 "정신 차리세요"! 라고 외쳤지만 끝내 남자는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남자의 죽음을 알게 된 마을 사람들은 분명히 여자가 남자를 독살한 것이 틀림없다고 수군거렸다. 여자는 사랑하는 사람이 죽은 것도 가슴이 찢어질 지경인데 남자를 죽였다는 오해까지 받게 되어 더욱 괴로웠다. 그러던 어느날 여자는 비장한 각오를 하고 마을 사람들 앞에서 그 사루비아 잎을 따서 이를 문질렀다. 그러자 그 여자도 신음 소리를 내며 쓰러져 죽고 말았다. 사람들은 모두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니 저 사루비아 잎 때문에 젊은 두 남녀가 죽은 거잖아!" 마을 사람들은 그 사루비아 꽃을 뽑아보니 글쎄 커다란 두꺼비 한마리가 붙어 있는 것이 아닌가!
"아.., 이 두꺼비가 내뿜은 독기로 인해 사루비아 잎에도 독이 있었던 거로군." 우리 때문에 괜히 여자마저도 생명을 잃게 되었군 어쩌면 좋지..... 저마다 이 안타까운 청춘 남녀의 죽음을 애도하며 명복을 빌었다. 이후로 사람들은 두 사람의 영혼을 위로하며 사루비아 잎으로 닦게 되었다.
성도 여러분!
사람의 눈은 무엇이나 잘 보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누가 무엇을 본다고 했을 때 그는 대상을 그대로만 보지 않고 자기의 선입견과 편견을 가지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특히 남의 인격과 행동과 양심에 대해 절대로 속단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그런 속단은 상대편에게 실로 엄청난 피해를 끼치기 때문입니다.
욥 22:12-30
세상것을 버려야 하늘의 것을 얻습니다
모파상의 '진주 목걸이'라는 작품은 흥미진진하면서도 깊은 의미를 담고 있는 작품입니다. 한 부인이 친구에게서 진주 목걸이를 빌려 걸고 무도회에 갔다가 그만 그것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똑같은 목걸이를 구하기 위해 9년 동안이나 고된 일을 하여 그것을 보상했는데 그때서야 비로소 9년 전에 잃어버린 목걸이가 가짜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사실 사람들은 진주나 금은보석 따위를 세상에서 가장 값진 것으로 알고 있어 그것들을 가리켜 보배라고 지칭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엘리바스는 자기 나름대로 욥을 충고하던 중에 사람이 어떻게 해야 참된 보배를 얻게 되는지 그 과정을 잘 일러 주었습니다 그렇다면 엘리바스의 말을 통해 우리가 버려야 할 것은 무엇이고, 얻어야 할 것은 무엇인지를 교훈 받도록 하겠습니다.
##### 1.세상의 보배라고 하는 것들은 버려야 합니다
본문 24절에 보면 < 네 보배를 진토에 버리고 오빌의 금을 강가의 돌에 버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을 문자적으로만 들으면 누구에게나 어이없게 들리기 마련입니다. 금은보배를 진흙탕에다 버리라니 이는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도 마태복음 6:19에서 <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고 하셨고, 누가복음 14:33절에서도 보면 < 이와 같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자기의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누구나 하늘의 참된 보화를 얻으려면 먼저 세상의 보배 따위는 지푸라기처럼 버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자기 손에 든 것을 먼저 버리지 않으면 다른 귀중한 것을 받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실로 하늘의 참된 보화에 비하면 세상의 것은 아무리 진귀한 것이더라도 별것이 아닌데, 사람들은 그것을 버리지 아니하고 그 위에다 하늘의 것을 더 받으려는 욕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 찾아와서 영생에 관해서 물었던 청년은 < 네가 가진 것을 다 버리고 나서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자기의 재산을 버리기가 싫어서 그대로 물러가 버렸습니다.
반면 성(聖) 프란시스는 본래 부유한 자였으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 위하여 자진하여 알거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를 따르던 마태오, 베르나드, 지네프로 등도 마찬가지로 모든 것을 버리고 나섰습니다.
마태 16:24-26을 보십시오. <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 자기 목숨을 구원하려고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어버리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또 사람이 무엇으로 자기 목숨을 바꾸겠느냐?> 그랬습니다.
여기에 보면 예수님의 역설적 법칙이 명확히 나타납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목숨을 잃고 죽는 것보다는 얻고 사는 데에 관심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
--북극 추운 지방에서 얼음과 눈 속에 사는 에스키모 인종들의 생활법칙, 특히 그들의 生과 死에 대한 생각 또한 우리들의 그것과는 크게 다릅니다. 우리 민족의 역사에도 보면 고구려 시대에 전설로 남아 있습니다만, 고려장(高麗葬)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부모가 나이가 아주 많아지면 산 속에 깊은 곳에 업어다 놓아서 거기서 죽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실제로 우리 조상들이 그렇게 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에스키모인들에게는 이런 고려장과 비슷한 풍습이 오랫동안 존재해 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떤 효성이 지극한 아들이 고민합니다. 그들의 풍속에 따라 연로한 어머니를 추운 얼음집 바깥 얼음 위에 업어다 놓을 때가 되었는데, 또 어머니가 그렇게 하라고 성화인데 이 아들은 도저히 그렇게 할 수 없어 미루다 미루다 어머니의 거역할 수 없는 엄한 분부에 따라 그를 업어다가 눈밭에 앉혔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아들은 그러지 말고 집으로 가시자고 그의 사랑하는 어머니에게 호소합니다. 이 때 어머니는 조용히 말씀하십니다. < 네가 몰라서 그러는 것이다. 내가 여기 곰의 밥이 되지 않으면 곰이 굶어 죽고 곰이 굶어 죽고 없어지면 너희들 나의 자손들은 먹고 살 식량이 없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은 오래 전부터 이렇게 얼음 위에서 곰의 밥이 되는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여기 에스키모인들이 사는 곳에 겨울에 얼음을 짓고 사는 사람들이 있고, 추위에도 사는 곰이 있습니다. 곰은 이 추운 겨울에 사람 고기 외에는 다른 먹을 것이 없고 사람은 곰고기 외에 먹을 음식이라고는 없는 곳에서 생긴 풍속입니다. 이러한 환경에서 나이 많은 늙은 부모가 자식들의 음식이 되기 위해 곰에게 잡아 먹히는 것은 땅에 떨어져 죽은 한 알의 밀 알과 같은 의미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대속적인, 구속적인 죽음이라는 말입니다.
이 에스키모인들의 옛날 풍습의 빛에서 볼 때에는 예수님의 이 삶과 죽음의 역설적인 진리를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진정 우리의 신앙은 가치관부터 바뀌어야 합니다. 예전에는 세상의 것을 보배로 삼고 있었다 하더라도 신앙은 그것을 허망한 것으로 바라다 볼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것을 버려야 합니다.
##### 2.그래야만 하늘의 보배를 얻습니다
본문 25절 이하의 말씀에 보면 < 그리하면 전능자가 네 보배가 되시며 네게 귀한 은이 되시리니...>라고 말씀합니다.
여기 '그리하면' 이라는 접속사는 참으로 절대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만약 세상의 보배를 버리지 않으면 절대로 참된 보배를 얻을 수 없다는 단서를 만들고 있는 말입니다.
그런데 엘리바스의 말에는 또 하나의 중대한 점이 있습니다. 전능자, 곧 하나님께서 직접 하늘의 참된 보배가 되신다고 지적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기서 하늘의 보배란 천국도, 생명도, 사랑도 아니라 하나님 자신임을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누구나 세상의 보배를 버리고 나면, 하나님을 자기의 보배로 소유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요한복음 12:24-25절을 보십시오.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그랬습니다.
세상의 것을 진토처럼 버린 자만 하늘의 보배 곧 하나님의 소유하게 됩니다. 자기에게 맡겨진 것들을 아까워서 주저하거나 숨기려기 하는 사람은 절대로 참된 참된 보배를 얻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비밀을 알았던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알고 나서는 세상의 모든 것은 다 배설물처럼 알고 버렸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보배로 소유하기 위하여 세상의 모든 것들에 연연하지 말아야 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죽어야만 산다'는 말씀과 함께 '버려야만 얻는다'는 말씀도 기독교 진리의 원칙입니다. 바라기는 우리가 이왕 예수를 믿었으면 세상의 것을 미련없이 버리시고 그런 자들에게 허락하시는 하늘의 신령한 것으로 충만히 채움받는 축복된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글쓴이: 옥련지침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