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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1-13
해바라기 신자 / 김창인 목사
우리가 잘 알다시피 해바라기 꽃은 필 때부터 해를 향해서 핍니다. 그리고 항상 해를 바라보고 해지기까지 해를 따라 움직입니다. 그러니까 태양을 향해 항상 피고 열매 맺고 시드는 꽃이 해바라기입니다. 해바라기 신자라 하면 우리의 태양 되신 예수님 혹은 하나님, 우리 믿음의 꽃인 하나님을 향해서 피고 하루 스물네 시간 일년 삼백 육십 오일 늘 하나님을 바라보는 그런 신자를 해바라기 신자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안식을 누리는 신자(1-5절) 이사야서 42장 25절에 "너희 땅 끝의 모든 백성들아 여호와를 앙망하라" 했습니다. 앙망하라는 말은 바라다보라는 말입니다. 해바라기가 해를 바라보듯이 하나님을 바라보라, 그리하면 너희가 구원을 얻으리라.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다보는 신자입니다. 누구나 구원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다보는 신자가 구원을 얻습니다. 그런데 바라다보는 데는 밑천이 안 듭니다. 내가 재산이 얼마나 많으냐 적으냐 상관없고 내가 학벌이 좋고 나쁘고 상관없고 가문이 얼마나 좋으냐 나쁘냐 상관없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기만 하면 됩니다.
사방의 안식 이런 해바라기 신자는 하나님의 주시는 안식을 누리게 됩니다.(1-5절) 1절에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사방 대적을 다 멸하시고 안식을 이스라엘에게 주신지 오랜 후에 여호수아가 나이 많아 늙은지라" 여기 보면 하나님께서 안식을 주신지 오래 되었다고 했습니다. 우리 인간이 참으로 누릴 수 있는 안식, 그리고 오래 오래 누릴 수 있는 안식, 이것은 사람이 주는 것 아닙니다. 내 남편이 주는 것도 아니고 내 부모가 주는 것도 아닙니다. 물론 그들이 주는 것이 일시적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안식은 오래 오래 누리는 영원하고 참된 것입니다.
다시 설명하면 그 안식의 내용이 뭐냐 하면 사방의 대적을 다 멸하시고 난 후에 안식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이야기하면 사방의 대적을 다 멸해주시는 안식!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온 후에 광야 생활 40년 끝에 여호수아의 인도를 따라 가나안 땅으로 들어갑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니 일곱 족속들이 버티고 사는데 하나도 이스라엘 편을 드는 사람이 없습니다. 전부 대적뿐입니다. 사방이 전부 대적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대적을 전부 멸하시고 안식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대적을 남겨 놓고 우리에게 안식을 주셨다면 항상 불안합니다. 그러나 그 대적을 전부 멸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일곱 족속을 다 멸하여 내쫓으신 후에 살게 하신 완전한 안식입니다. 이것이 하늘 안식의 모형입니다.
우리의 주위를 살펴보십시다. 우리들에게도 대적이 너무너무 많습니다. 이 육신이 얼마나 귀한 것입니까. 내 육신을 파멸시키는 병마라는 대적이 있습니다. 또 내 믿음을 항상 도둑질해 가는 마귀라는 대적도 있습니다. 내 사업을 망하게 하는 악의의 경쟁자도 있습니다. 잘 되라고 내버려 두질 않습니다. 선의의 경쟁자가 얼마나 좋습니까, 악의의 경쟁자도 많습니다. 그리고 내 영혼을 파멸시키는 온갖 죄악들, 주님께서 다 멸하신다는 것입니다. 죄악, 마귀, 병마, 악의의 경쟁자도 다 멸하시고 우리에게 안식을 주십니다. 그래서 내 부모가 주는 안식, 내 남편이 주는 안식도 안식일 수 있지만 하나님이 대적을 멸하신 후 주시는 안식이래야 영원한 안식인 것입니다.
도와주시는 안식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이 모든 나라에 행하신 일을 너희가 다 보았거니와 너희 하나님 여호와 그는 너희를 위하여 싸우신 자시니라"(3절)
과거에 싸워 주셨다는 내용입니다. "보라 내가 요단에서부터 해지는 편 대해까지의 남아있는 나라들과 이미 멸한 모든 나라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제비 뽑아 너희 지파에게 기업이 되게 하였느니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희 앞에서 그들을 쫓으사 너희 목전에서 떠나게 하시리라"(4절).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안식을 주시고 도우시는데 계속 계속 도우시는 안식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여호수아가 살 동안에 일곱 족속을 내쫓고 열두 지파가 그 땅을 고스란히 받은 것은 아닙니다. 여호수아가 살다가 죽기까지 아직도 일곱 지파가 기업을 못 받았습니다. 그래서 남은 일곱 지파는 아직도 일곱 족속을 쫓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정탐꾼을 보내서 지형을 전부 조사해 오게 한 후에 그것을 지도로 그려 제비를 뽑아서 나누어 준 것입니다. 멸한 족속도 있고 아직도 남아 있는 족속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지금까지 기업을 차지한 지파는 하나님이 싸워서 얻어 주었지만 남은 일곱 지파도 하나님께서 싸워서 쫓아내 주시고 기업을 주시되 완전히 승리할 때까지 계속 도와서 안식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한번만 도와주시고 만다면 내일은 내가 망할 차례가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내일도 금년도 내년도 현재에도 과거에도 미래에도 도와주시는 이 도움이 귀중합니다. 그러니까 과거에 요단강 동편에서도 도우셨고 현재 요단 서편에서도 도우시고 일곱 지파에게도 도우시리라는 계속 적은 도움을 통해서 주시는 안식입니다.
이전에 천호 지구에 있는 어느 장로님이 회갑연을 하는데 저에게 설교를 부탁했습니다. 참석하였더니 목사님들도 여러분이 계셨습니다. 인사를 하는 중에 저와 친분이 있는 목사님도 아닌데 저에게 제가 죽었다는 소문을 들었답니다. 하기야 나도 죽었다 산 적이 여러 번 있습니다.
나는 꼭 죽을 뻔했다가 살아난 것이 세 번 있습니다. 첫째로 중 3때 장질부사 걸렸을 때입니다. 요즘은 장질부사는 병도 아닙니다. 그런데 8.15 해방되고 6.25 사변 전 이북에서는 약이 없어서 이남에서 넘어오는 다이아진이라고 하는 약을 쌀 몇 말씩 주고 구입하면 만병 통치약이라고 먹을 때입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사람 웃기는 것 아닙니까. 다이아진이 요즘도 약입니까. 그때에 장질부사 걸리면 그 집안 그 동네 다 전염됩니다. 그래서 어느 집안에 장질부사 걸렸다 하면 새끼줄 치고 통행 금지시킵니다. 그런데 제가 걸렸습니다. 15일만에 정신을 차리고 살아났습니다. 한번 정신 들었다가 잃고는 15일 만에 살아난 것입니다.
그런데 저의 사촌 누님은 출가해서 예수 믿었습니다. 어떻게 열심히 믿는지 정신들어 보니까 그 누님이 와서 예배드리고 있습니다. 친척 중에서 아무도 안 옵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이 과연 다르긴 다릅니다. 사촌이라도 믿는 사촌은 믿지 않는 사촌과는 다릅니다. 그때 죽는 줄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 집안 다 무사하였고 동네 누구도 전염되지 않고 무사했습니다.
두 번째로 제가 유격대 생활할 때, 섬에 있다가 인민군에게 포위 당해 탈출을 하게 됐는데 수십 명이 한꺼번에 탄 배가 바다 한가운데서 그만 가라앉고 말았습니다. 옷 입은 채로 어떻게 합니까. 헤엄도 못 치는데 꼭 죽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바다 위로 드러나지 않은 바위에 걸리게 해서 살았습니다.
그 다음 제가 폐병에 걸려서 죽을 뻔했습니다. 고비 고비마다 넘겨주시고 때마다 일마다 과거에도 도와 주셨거니와 현재에도 도와주시고 앞으로도 도와 주실 줄로 믿습니다. 그런가 하면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과거, 현재, 미래를 통틀어 끊임없이 도와 주었던 것처럼 하나님의 도움은 여러분들에게 안식을 주십니다.
기업의 안식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대로 너희가 그 땅을 차지할 것이라"(5절 하).
이스라엘 백성들은 양과 소를 기르는 목축업을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와서 방황할 때에 양떼 소떼는 많았지만 땅 한 평 하나님이 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유목민의 생활로 이 들판 저 들판 방황합니다. 그리고 애굽에 피난 갔다가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까지 내내 방황하는 생활을 한 것입니다. 어디서 짐을 풀어놓고 살지를 못합니다. 먹을 것 꺼내려면 짐 보따리 풀어놓고 꺼낸 후에는 또 묶어야 합니다. 왜? 밤에도 가고 낮에도 가니까 항상 짐 보따리를 싸놓고 사니, 그것이 얼마나 괴로운 일입니까.
요즈음은 좀 낫습니다. 셋방살이 서러움 말입니다. 법으로 정해서 일 년 계약을 하기로 했으니까요. 그런데 얼마 전까지만 해도 셋방살이 얼마나 서러웠습니까. 6 개월 지나면 나가라 하고 또 세를 올려 달라고 하니 얼마나 괴로움 당했습니까. 짐 보따리를 제대로 풀어놓고 살지를 못했습니다. 6 개월도 이렇게 서러운데 하루하루를 짐 보따리 풀지 못하고 살아야 하니 괴로움은 컸던 것입니다. 그런데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가나안 일곱 족속 다 멸하시고 안식을 주고 땅을 준 다음 장막 짓고 농사를 하면서 짐을 풀고 살게 됐으니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이 말은 오늘날 우리들을 두고 이야기하게 되면 삭월세 방에서 독채 전세를, 그 다음에는 좋은 집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남의 집에 가서 월급받으면 천대받던 일자리마저도 없던 나에게 일자리 주고, 그런 일자리 주었던 자에게 좋은 기업을 주어서 우리들로 하여금 좋은 기업을 누리며 이제는 편히 짐 풀고 마음껏 살게 해 준다는 그런 뜻으로 믿습니다. 그런가 하면 영적인 뜻으로 영원한 하늘나라 기업을 주십니다. 진짜 우리들이 보따리를 풀고 마음 놓고 살 수 있는 곳은 하늘나라 기업입니다. 그곳에 가면 죄의 보따리는 다 풀어놓고 사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하늘나라 기업을 보증해 주시는 말씀으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무나 안식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안식을 누리는 신자, 즉 해바라기 신자, 하나님을 늘 바라보고 사는 신자의 안식은 사방의 대적을 멸해 주시는 안식이고 계속 도와주시는 안식이며, 기업을 주시는 안식입니다.
하나님의 정도를 달리는 신자(6-7절) 큰 마당에 눈이 오면 발자국이 나타납니다. 그럴 때에 저기 갔다 오라고 하면 목표를 정해 놓은 사람은 곧바로 갔다가 곧바로 옵니다. 왜? 목표를 정하고 목표를 향해 가니까 곧바릅니다.그러나 목표없이 가는 사람은 왔다갔다 합니다. 하나님을 목표 삼아 촛점을 맞춰 놓고 하나님을 해바라기의 태양처럼 바라보고 사는 사람은 항상 왔다갔다 하지를 않습니다. 곧바로 갑니다. 이게 정도입니다. 바를 정(正)자 길 도(道)자, 바른 길을 가는 사람입니다.
크게 힘쓰는 정도 하나님을 해바라기의 태양처럼 바라보는 신자가 늘 바른 길을 가게 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는 신자는 자기가 자기의 표준이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목표로 해서 가는, 즉 바른 길을 가는 신자는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크게 힘써 모세의 율법 책에 기록된 것을 다 지켜 행하라"(6절) 왜냐하면 하나님이 정해 놓은 길은 험하고 좁은 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길 좁은 길과 넓은 길이 있고, 좁은 문과 넓은 문이 있는데, 넓은 길 넓은 문은 멸망으로 직결되는 문이고, 좁은 길 좁은 문은 바로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라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이 설정해 놓은 코스, 이 루트는 좁은 길입니다, 좁은 문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데는 힘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정해 놓은 길을 가는 데는 힘이 듭니다. 그래서 우리는 크게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저 가나안 땅을 설정해 놓고 루트를 그려 주었습니다. 그 길은 홍해를 지나고 광야를 지나야 하는 너무도 험난한 길입니다. 물 한 방울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길은 곧 생명의 길입니다. 다른 길은 이스라엘 백성이 안식을 얻지 못하는 길입니다. 반드시 그 길로만 가야 기업을 얻고 생명을 얻고 축복을 누리는 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설정해 놓은 가나안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루트를 따라갔다면 우리들의 영원한 가나안은 하늘나라입니다. 우리는 험하고 좁을지라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생활 40년 끝에 가나안 땅에 가서 승리를 얻은 것처럼 이 좁은 문을 가면서 가나안 땅 영원한 하늘 나라의 영광과 축복에 동참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크게 힘써야 합니다.
다 지켜 행하는 정도 하나님의 정도를 가는 신자는 하나님의 법을 다 지켜 행하는 신자입니다. 6절에 보면 "크게 힘써 모세의 율법 책에 기록된 것을 다 지켜 행하라" 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신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성경, 모세의 율법을 다 지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 율법의 내용은 목사도 모르는 것이 많습니다. 그것을 다 지키려면 어떻게 합니까, 다 알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지키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 뿌리를 알면 됩니다. 뿌리에서 전부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뿌리는 사랑이라고 하는 뿌리입니다. 율법을 주신 것은 사랑으로 주신 것이지, 우리를 망케 하는 멸망의 뿌리에서 나온 줄로 알면 안 됩니다. 그래서 네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웃을 사랑하라, 이것이 율법의 축소판 아닙니까. 하나님 앞에 다른 신을 두지도 말고, 절하지도 말고, 망령되이 그 이름 부르지도 말고, 안식일을 잘 지키라는 것은 한 마디로 하나님 사랑하라는 말씀이고 부모를 공경하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 이것은 이웃 사랑입니다.
로마서 13장 8절에서 10절까지를 보면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룬 것이니라" 했습니다.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습니다. 율법 몇 조 몇 조에 뭐 있는지 다 알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 사랑하면 다 되는 것이고 사람 사랑하면 다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다 이룬 것입니다. 그리고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어 있습니다. 계명이 아무리 많아도 사랑이라는 두 글자 속에 다 들어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모세 율법에 기록한 그 모든 것을 다 지켜 행하라는 것은 사랑의 실천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아느냐 모르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이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다 지키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 하나님은 사랑의 근원이요, 하나님이 곧 사랑인 까닭에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이 이웃에게 미쳐 이웃을 사랑하게 되어 율법을 완성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치우치지 않는 정도
6 절에도 "그것을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했는데 이 치우치지 말라는 말씀이 귀합니다. 사람이 참 묘합니다. 이 육신은 짐승과 똑같습니다. 저도 며칠 전에 배운 것이 많습니다. 피난 오면서 족보를 못 가지고 와서 제 족보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집에 있는 개는 족보가 있습니다. 우리 교인이 진도개를 갖다 줬는데 족보까지 가져 왔습니다. 그러나 여러 해를 지나다 보니 늙어서 할아버지가 되었습니다. 병원에 가니까 이제 늙어 쇠약하였다고 합니다. 다음 대를 이어야 되겠다 싶어 어디서 구하나 했더니 마침 부목사님의 개가 새끼 낳았다고 한 마리 가져 왔습니다. 이 놈은 먹기도 잘하고 짖기도 잘합니다. 그래서 개밥을 따로 해주었더니 먼저 있던 개가 집이 좋으니까 자꾸 나오라고 짖어대는 것이었습니다. 어린 개가 양보하여 비껴 주고 다른 데 가서 잡니다. 잠자리 좋게 해주니까 좋다고 꼬리 흔듭니다. 그것은 감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좋아하는 것과 감사하는 것은 다릅니다. 고구마 껍질을 개에게 주면 꼬리를 흔들지요. 그것이 감사하다는 뜻입니까. 믿지 않는 사람들은 좋다고는 얼마든지 합니다. 그러나 감사는 안합니다. 그러다가 얼마 지나서 이 조그만 개가 나오지도 않고 먹지도 짓지도 않습니다. 병들었습니다. 그래서 병원에 갔더니 감기 걸렸다는 겁니다. 개가 감기 든다는 말 처음 들었습니다. 의사가 들었다니 그런 줄로 알았습니다. 주사를 한 대 놓았는데 하루가 지나고 나니 꼬리를 흔들어 대고 나와서 먹을 것을 내라고 짖어댑니다. 진짜 감기였습니다. 내 육신도 개나 이런 짐승의 육신과 똑같습니다. 먹을 것 달라고 짖어대서 주면 좋다고 하고 안 주면 계속 짖어대고 감기 들어 주사 놓으면 낫고 꼭 같습니다.
우리 영이라고 하는 것은 천사와 같습니다. 천사는 결혼을 못하기 때문에 아내가 없고 남편이 없고 자식이 없습니다. 그래서 천사는 오직 하나님밖에는 모릅니다. 천사는 하나님 떠나면 죽는 줄 압니다. 그래서 천사는 먹지도 입지도 자지도 않습니다. 집이 필요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입니다. 우리의 영이라고 하는 것은 꼭 천사와 같아서 하나님 떠나면 죽는 줄 압니다. 두 가지를 뭉쳐 만들어 놓은 것이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은 천사와 같을지라도 육신을 가졌기 때문에 천사는 아니고, 육신은 꼭 짐승과 같아도 영을 가졌기 때문에 짐승도 아닙니다. 사람은 묘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면 안됩니다. 너무 육신에 치우쳐서 육신의 건강, 물질, 이것만이 축복의 전부인 줄 알면 안됩니다. 이것은 물론 축복입니다. 건강도 물질도 높은 벼슬도 축복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축복의 전부인 양 생각할 때 문제입니다. 그것은 치우치는 것입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영이 있습니다. 영적인 축복이 육신적인 축복보다 귀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영은 하나님 없으면 죽는다고 합니다. 그러기에 이것을 잘 조화시키는 사람, 너무 영에 치우쳐서 천사처럼 살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천사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잘 조화시켜 나가야 합니다. 치우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선 순위는 분명히 정해야 합니다. 치우치지 않되 둘 중에 어디에 우선을 둘 것인가 하는 우선 순위는 분명히 두어야 됩니다. 하나님을 바라다보는 사람은 크게 힘써 가고 하나님의 계명인 율법의 근본인 사랑을 실천하며 절대로 영적이든 육적이든 일방적으로 치우쳐서 믿음 생활하면 안됩니다. 항상 정도를 걸어가야 합니다.
. 공부를 잘하는 신자(8-13절)
"오직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친근히 하기를 오늘날까지 행한 것같이 하라"(8절)
그런데 여기의 친근이라고 하는 말은 룻에게서 실감하게 되는 내용을 봅니다. 룻이라고 하는 모압 여자 며느리가 나오미라고 하는 과부된 자기 시어머니를 좇을 때에 어떻게 좇아갔습니까? 붙좇더라, 바짝 달라 붙어 좇았더라 했습니다. 붙좇다라는 말과 본문의 친근이라는 말은 우리 말로는 달라도 원문 히브리어 성경에는 '다바크'라고 해서 똑같은 말입니다. 번역만 다르게 했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하나님을 친근히 한다는 말은 룻이 나오미를 붙잡듯이 하나님께 달라붙어 좇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놓치면 다 망합니다, 죽습니다. 이런 자세를 가리켜 본문에서는 친근이라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 친근히 해야 합니다.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래야 합니다. 하나님께 달라붙어서 하나님 떨어지면 죽는 줄 알고 붙좇아 가는 신자, 바로 하나님을 항상 바라다보고 사는 신자는 친근 곧 붙좇는 신자입니다. 하나님께 달라 붙는다는 것은 운명을 같이 한다는 사실임을 배워야 합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조심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11절).
본문을 통해서 배워야 할 사랑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조심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되 조심하여 사랑해야 합니다. 조심하라는 것은 너희가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우상처럼 사랑할까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한편으론 우상 사랑하고 있을까 조심하라는 뜻도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하나님 위치에 놓고 사랑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의 남편을 사랑할 때 남편을 사랑하는 위치가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목사를 사랑할 때 목사를 사랑하는 위치가 있습니다. 그 위치를 바로 놓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위치에 바로 놓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위치에 다른 것 갖다 놓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위치를 바꾸어 놓고도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할 수 있습니까? 그것이 곧 우상입니다. 하나님 위치에 돈을 갖다 놓아도 안 되고 하나님 위치에 내 남편 갖다 놓아도 안 되고 하나님 위치에 내 아들, 딸 갖다 놓아도 안 됩니다. 하나님은 항상 하나님 위치에 놓고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항상 바라보는 해바라기 신자가 될 때는 하나님을 항상 제 위치에 놓고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너희가 만일 퇴보하여 너희 중에 빠져 남아 있는 이 민족들을 친근히 하여 더불어 혼인하며 피차 왕래하면 정녕히 알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민족들을 너희 목전에서 다시는 쫓아내지 아니하시리니 그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며 덫이 되며 너희 옆구리에 채찍이 되며 너희 눈에 가시가 되어서 너희가 필경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이 아름다운 땅에서 멸절하리라"(12-13절)
분문에서 "만일"이라는 말씀의 주의하고 "만일"이라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믿음에는 만일이라는 것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왜? 만일이라는 것은 만분의 일이라는 말입니다. 만일 "천당이 없다면" 믿음이 용납 안 합니다. 만일 "지옥이 없다면" 이것은 용납 안 됩니다. 만일이라는 것은 통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만분의 일이라도 너희 주위에 있는 이방인들과 내통을 하고 결혼을 하고 그래서 믿음이 손상당할 때 망할 줄로 알라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과 더불어 타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믿음을 놓고 타협하지 않아야 합니다. 불신앙적인 요소를 놓고 믿음과 혼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눈에 가시가 된다는 것입니다.
눈의 가시에 대해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제가 얼마 전에 눈이 계속 아팠습니다. 2년 전 미국에 갔을 때에도 눈이 아플 때 안약 넣으면 낫곤 했습니다. 눈에 가시가 들어간 것 같은데 들어간 적이 없어 안약 넣으면 괜찮다가 또 아프고 그러다가 천호동에 있는 안과에 갔더니 안약을 넣어 주어 일주일 만에 좀 나았습니다. 그때 안동 부흥회를 갔는데 다시 아파 못 견디겠습니다. 부흥회를 한창 인도하는데 눈이 아파오고 시뻘개져서 견딜 재간이 없습니다. 마침 그 교회 정 장로님이 안과 의사이기에 그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병원으로 가서 검사하더니 눈썹 하나가 안으로 났다는 것입니다. 밖으로 나게 되어 있는 눈썹 하나가 안으로 자라고 있었습니다. 다른 병원에서는 안약만 넣어 주니 나을 수가 있습니까? 뽑고 나니 그렇게 시원합니다. 뿌리가 빠져서 안 나올 수도 있고 또 나올 수도 있답니다. 아직은 괜찮은데 모르겠습니다.
눈에 가시라는 것이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은데 그렇게 못 견디겠습니다. 여기 보니까 너희들이 바로 불신자와 믿음을 놓고 양보하며 타협을 할 그 때에는 좋을지 모르나 그것이 함정이 되어 그것 때문에 망하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불신앙적입니다. 이런 것에는 절대 타협하지 말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해바라기처럼 바라다보는 신자는 절대 믿음을 양보하는 타협이 없습니다. 항상 믿음 굳게 가지고 하나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립니다. 항상 하나님을 바라보고 사는 신자는 안식을 누리게 됩니다. 그 안식은 사방의 안식이요, 하나님이 계속 도와주시는 안식이요, 기업을 통해서 누리는 안식입니다. 그리고 해바라기 신자는 하나님께서 설정하신 정도를 달려갑니다. 하나님의 정도를 달려갈 때에는 크게 힘써야 하고, 말씀은 꼭 지켜야 하고, 치우치지 않아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이 시키시는 공부를 잘해야 하는데, 친근을 공부하고, 사랑을 공부하고, 만일을 공부해야 합니다. 이처럼 해바라기 신자는 믿고 살아갈 때 축복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