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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하나님의 본성을 품으면 천사처럼 선한 사람이 되고 악마의 본성을 품으면 사악한 사람이 됩니다. 이 세상에는 어떤 사람도 선한 사람이 없습니다. 다 본질적으로 타락한 인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마음이 하나님을 닮으려고 하면 천사처럼 선한 사람이 되지만 마귀의 악성을 품으면 악마적 존재로 전락하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불쌍히 여겨지는 마음'을 긍휼이라고 말합니다. 긍휼은 하나님의 본성입니다. 은혜는 하나님이 죄인을 향하여 품는 사랑의 마음이라고 말한다면 긍휼은 죄의 결과로 인간이 처한 비참함에 대하여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긍휼은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자애로운 마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긍휼하심 때문에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긍휼은 불행한 사람들에 대한 동정심만이 아니라 불행한 사람들의 괴로움에 함께 참여하는 마음입니다.
사랑은 그 대상에 따라 다르게 표현됩니다. 우리가 어른에게는 '존경'이라는 표현을 쓰고, 친구나 같은 부류의 사람들에게는 '우정'이라는 표현을 쓰고, 나보다 어렵고 불쌍한 사람에게는 '긍휼'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가지신 예수님의 생애는 긍휼의 생애였고, 예수님의 긍휼을 우리에게 가장 극적으로 표현해 준 곳이 십자가였습니다.
이 세상은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의 긍휼로 존재합니다. 냉정히 생각하면 인간은 불쌍한 존재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죄인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자식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고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이 은혜요, 그것을 믿고 나아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긍휼히 여김을 받을 자가 누구입니까? 지위의 높고 낮음과 빈부귀천에 관계없이 죄인들은 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어야 됩니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엡 2:4-5)
하나님은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그 긍휼의 풍성함을 우리에게 친히 몸으로 나타내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긍휼의 일생이었습니다. 그가 말구유에 나심이 가난하고 천한 인간에 대한 긍휼이었고, 그의 삶의 모든 애통하는 마음이 하나님의 긍휼을 표현한 것이며, 목자없는 양처럼 유리하고 방황하는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고 가난하고 병들어 천대받는 자를 향해서 친히 나아갔던 모든 마음이 다 하나님의 긍휼이었습니다.
주님은 많은 병든 자를 고쳤습니다. 병을 고쳐주신 것은 어떤 기적이나 신의 표적을 보이려는 것이 아니었고 불쌍히 여김으로 나타나는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믿는 자가 가져야 할 도덕적 양심, 인간의 품성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구약의 율법을 보면 형법, 민법이 있는데 형법은 죄인들을 처벌하고 악한 자를 심판하는 법이요, 민법은 서로가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법입니다. 그런데 또 하나의 법이 있는데 그것은 도덕법입니다. 도덕법은 인간의 양심이 나타내는 법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은 인간이 하나님을 품성을 지니고 이렇게 살아야 된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애굽에서 종 되었던 때를 생각하라 너희는 애굽에서 종살이 하면서 천대받고, 멸시받고, 인간 대접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너희가 하나님의 은혜로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토지를 소유하고 농사를 지으며 살게 되었다. 그러니 너희가 농사를 지어서 곡식을 거둘 때에 밭에 한 뭇을 잊어버렸거든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해서 그대로 남겨두라. 감람나무 열매를 딸 때에 다 따지 말고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해서 좀 남겨두어라. 포도열매를 딸 때 혹시 덜 딴 것이 있더라도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해서 남겨두라. 너희가 애굽에서 종 되었던 때를 생각하고 그런 자비로운 마음을 가져야 된다."
이것을 어기는 사람은 법에 저촉되든지 어떤 처벌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인간의 동정심에 호소할 뿐입니다. 이런 자비를 베푼 자에게 주는 축복에 대하여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네가 밭에서 곡식을 벨 때에 그 한 뭇을 밭에 잊어버렸거든 다시 가서 취하지 말고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버려 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복을 내리시리라"(19절)
우리는 예수 믿고 복 받아야 됩니다. 복 가운데 최고의 복은 하나님의 마음을 품는 복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복입니다.
긍휼은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신앙고백입니다.
긍휼은 하나님의 인격을 닮는 복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긍휼의 성품을 보여주신 인격자요, 최고의 복을 받은 분입니다. 물론 우리는 돈 잘 벌고, 땅에서 출세하고, 잘되면 복받았다고 말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속에 악한 인간성을 지녔으면 우리는 '복없는 자구나!' 이렇게 말해야 됩니다. 아무리 인물이 잘나고, 호화로운 영화를 누리고 있다고 하더라도 악하게 사는 자에게는 '복없는 자, 불쌍한 자' 이렇게 말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자는 '복있는 자' 이렇게 볼 수 있어야 됩니다.
남을 미워하고 사는 사람은 복없는 자요, 남에게 악하게 하는 자는 복없는 자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마음속에 모실 때 주님이 우리에게 주는 은혜가 뭡니까? 긍휼입니다. 이것은 복있는 마음입니다. 긍휼과 자비는 주님의 마음입니다. 며느리를 사랑하는 시어머니는 복있는 시어머니입니다. 시어머니를 긍흉히 여기는 며느리는 복있는 며느리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선한 마음을 가질 때 '나는 복있는 사람이지' 이런 생각을 해야 됩니다. 선하게 사는 것이 복입니다.
예수님께서 팔복을 선언하실 때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라"(마 5:7)고 말씀하셨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복은 하나님께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는 복입니다.
세익스피어는「베니스의 상인」에서 긍휼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긍휼의 마음은 강요되지 않는 것이니
그것은 하늘에서 땅에 내리는 단비처럼 이중의 축복이 된다.
베푼 자에게 축복이요, 받는 사람에게도 은혜가 된다.
그것은 강자 중의 강자요, 보좌 위에 앉은 왕관보다 귀하다.
긍휼은 이 세상의 임금의 지위보다 더 위에 있고
그것은 왕의 가슴 속에 군림한다.
그것은 하나님 자신의 본성이다.
성도는 긍휼의 은혜를 입었으므로 긍휼을 베풀어야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형제를 용서해주어야 된다고 말합니다. 용서하는 마음을 가질 때 복있는 사람이요, 만약 남을 용서하지 못하고 억울하게 한맺혀 있으면 복없는 자가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를 복없는 자로 만들어 살지 말고 복있는 자로 만들어 살아야 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모든 원수를 용서했습니다. "아버지여 저들은 아지 못하여 그러하오니 저들의 죄를 사하소서"
우리는 예수님께 큰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이 용서를 다른 사람에게 베풀어야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용서받은 자의 확증이 됩니다.
중국의 맹자는 "인간의 선은 측은히 여기는 마음"(측은지심)이라고 했습니다. 남을 측은히 여기는 마음이 바로 복있는 마음이요, 선한 마음입니다.
저에게 큰 영향을 준 한 분이 있는데 그 분이 바로 김홍섭 판사입니다. 그가 쓴 책 중에 「사도 법관 김홍섭」, 「무상을 넘어서」라는 책이 있는데 그는 판사였지만 사도 법관이라 불려졌습니다. 법의 속에 성의를 입은 판사, 그는 재판할 때 피고인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도 하나님 앞에서는 죄인이요. 그러나 내가 대한민국의 법관이 되었기에 그대들에게 법을 선고하노니 이해해 주시오." 그는 법에 의해서 선고를 내리지만 단상을 내려가서는 피고인들에게 이렇게 격려했습니다. "당신이나 나나 똑같은 죄인이오. 하나님을 믿으면 용서 받을 수 있소."
그는 또 감방을 찾아가서 죄수들을 격려했습니다. "당신이 법을 어겼기에 내가 당신에게 실형을 선고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나도 당신과 똑같이 죄인이오." 그는 자기 월급의 대부분을 죄수들을 위해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죄수들이 그에게 판결받는 것에 대하여 영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존경받는 법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51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박정희 대통령도 그의 죽음에 애도의 뜻을 표할 정도로 모든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는 한가지가 있었습니다. 긍휼의 마음을 가졌습니다.
이 세상이 악해지고 있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눈물이 말라가고 있습니다. 인정이 메말라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회복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긍휼의 마음, 인정을 회복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긍휼은 나를 행복하게 합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 복이 있나니 저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요"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길 때 내 마음속에 평화가 옵니다.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길 때 내 마음속에 하늘의 은혜를 담아 주십니다. 그래서 긍휼히 여기는 마음 자체가 나를 한없이 복되게 하는 것입니다.
나에게 가장 행복한 순간이 어느 때냐고 묻는다면 나는 눈물을 흘릴 때라고 말할 것입니다. 눈물을 흘릴 때는 하늘을 담는 순간이요, 눈물을 흘릴 때는 가장 진실한 순간이요, 눈물을 흘릴 때는 가장 신비한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해서 흘리는 눈물, 다른 사람을 생각하면서 흘리는 눈물은 나에게 한없는 은혜와 행복을 줍니다.
뉴욕에 가면 나과다 공항이 있습니다. 이 이름은 '나과다'라는 뉴욕 시장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인데 '나과다 공항'이라는 이름을 짓게 된 동기가 있습니다. 이 분이 판사로 재직하던 어느날 노인 하나가 법정에 끌려왔습니다. "그대는 무슨 죄로 여기에 왔소?" "예, 뉴욕거리에서 빵을 훔쳐 먹은 죄로 여기 붙잡혀 왔습니다." "왜 빵을 훔쳐 먹었소?" "너무 배가 고파서 저도 모르게 훔쳐먹었습니다." "당신은 남의 것을 훔친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오." "잘못인 줄 알지만 살아야 되겠기에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대가 남의 것을 훔쳤기에 그 죄값으로 벌금 10불을 명합니다." "판사님, 나는 돈이 없습니다. 나를 용서해 주십시오." 그러자 판사는 주머니에서 10불을 꺼내면서 "내가 당신 대신 벌금을 내겠소."라고 하면서 거기에 모인 방청객을 향하여 "미국 거리에 이토록 굶주리고 헐벗은 형제들이 너무나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혼자 잘 먹고 잘 쓴 것에 대하여 죄책감을 느끼는 방청객은 나와 같이 벌금을 내는 심정으로 이 모자에 헌금을 하시오."라고 하면서 모자를 돌렸습니다. 나과다 판사는 모금된 돈을 노인에게 주면서 "형제여, 이 돈을 가지고 가서 사시되 다시는 이곳에 오지 마시오."라고 말했습니다.
나과다 판사는 긍휼의 마음을 담아서 공의를 선포하면서 자기 속에 있는 사랑을 나타내 주었기에 그는 결국 존경받는 뉴욕시장이 되었고 후에 뉴욕 시민들이 그의 이름을 따서 나과다 공항이라 이름을 지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용서해 줌으로 나 자신이 사랑과 존경을 받고 역사에 남는 위대한 그리스도인, 행복한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끝까지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천국에 가야 됩니다.
스데반 집사는 죽으면서 돌로 자기를 치는 원수들에게 "주 예수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하면서 악한 짓을 하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면서 천국에 갔습니다.
지극히 작은 자에게 긍휼을 베풀 때 하나님의 긍휼이 내게 임합니다. 예수님은 작은 자에게 긍휼을 베푸는 삶에 대하여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내 아버지께 복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마 25:34-36) 그러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40)
빅토리아 여왕이 나이팅게일에게 준 기념 훈장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긍휼을 행하는 길은 하나 뿐이 아니다. 말로도 할 수 있고, 돈으로도 할 수 있다. 돈도 없고 말로 할 수도 없거든 눈물로 하라"
긍휼은 세상을 살려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푼 최상의 긍휼은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긍휼은 내 이웃에게 복음을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묻습니다. "네가 굶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주었느냐, 목마른 자에게 마실 것을 주었느냐, 헐벗은 자에게 입을 것을 주었느냐, 나그네를 맞이해 주었느냐" 전부 주었느냐고 묻습니다. 최고의 긍휼은 복음을 주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불쌍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죽은 자입니다. 오늘날 하나님 없이 죽은 자들에게 불쌍한 마음을 갖는 것이 최고의 긍휼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보면서 아직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을 향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물론 가난하고 병든 자도 불쌍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가난해도 죽어 천당 가면 불쌍한 사람이 아닙니다. 병들어도 천당 가면 불쌍한 자가 아닙니다. 오히려 건강하면서 하나님 없이 지옥으로 가는 자가 불쌍한 자입니다. 불쌍한 자를 보고 흘릴 눈물이 있기를 바랍니다. 복음을 받지 않는 사람들을 향해서 흘릴 수 있는 눈물이 있어야 됩니다. 부모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식을 향해서 울 수 있어야 됩니다. 아내는 안믿는 남편을 향해서 울 수 있어야 됩니다.
슈바이처 박사는 어린시절에 잠자리에 들면서 이런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이 밤에 추위에 떨고 있는 저 둥지의 새들, 그리고 저 들 가운데서 추위에 떨고 있는 소들에게까지 자비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이 종은 신학교를 졸업하고 시골교회에 가서 날마다 울고 다녔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예수 안믿고 지옥에 갈 일을 생각하니 눈물이 비오듯 쏟아졌습니다. 제가 날마다 울고 다니니까 사람들이 "전도사님, 제가 믿어줄게 울지 마세요."라고 말했습니다. 저들은 예수를 믿지 않는다는 이유로 어린 전도자가 흘리는 눈물을 받으면서 은혜를 입었습니다.
불쌍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이 불쌍한 사람입니다. 구약에서 불쌍한 자가 누구입니까? 객과, 고아와, 과부입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나그네와, 부모없는 자녀들과, 남편없는 여인들이 불쌍한 사람입니다.
당시에 집없는 나그네들은 먹을 것이 없습니다. 고아들도 굶주리고 헐벗었습니다. 과부들은 모든 생계를 유지하던 남편이 세상을 떠나므로 생계가 막막했습니다. 그러므로 객과, 고아와, 과부에게 자비를 베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객이 누구입니까? 나그네, 다른말로 말하면 집없는 사람입니다. 고아가 누구입니까? 아버지가 없는 자녀들입니다. 과부가 누구입니까? 남편없는 여인입니다. 이 사람들은 어느 때더 불쌍합니까? 낮에는 그래도 돌아다니면서 먹을 것도 있고 활동할 수도 있으니까 괜찮습니다. 그런데 밤이 오면 나그네나 고아는 갈 곳이 없습니다. 과부도 낮에 일할 때는 괜찮습니다. 그러나 밤이 오면 사랑하는 임이 생각나고 그립습니다. 뭘 얘기합니까? 살아있을 때는 상관없습니다. 죽음의 밤이 올 때 하나님이 없는 자들은 갈 곳이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영혼의 나그네, 영혼의 고아입니다. 밤이 오면 임을 만나야 되는데 임이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영혼의 과부들입니다. 우리는 죽음의 밤이 왔을 때 하나님 아버지 집을 찾아가야 됩니다. 신랑되신 예수님에게 사랑받으러 나아가야 됩니다.
여기 곡식이 뭡니까? 양식입니다. 감람나무가 뭡니까? 기름을 짜는 것입니다. 포도나무가 뭡니까? 포도즙을 짜는 것입니다. 곡식, 감람나무, 포도즙은 인간에게 없어서는 안될 일용할 양식입니다. 이 양식 때문에 우리는 사는 것입니다. 말씀의 양식을 먹고 삽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죄사함 받습니다. 성령의 기름으로 능력을 받아 세상을 이깁니다. 그래서 객과, 고아와, 과부는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자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가 없는 자요, 성령의 기름부음이 없는 자입니다. 이 불쌍한 자들을 위해서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만 혼자 독차지해서 말씀을 먹고, 보혈의 피로 죄사함 받고, 성령의 능력으로 취해있지 말고 저들도 함께 먹을 수 있도록 남겨주어라"
20세기 말 감동적인 영화로 쉰들러리스트가 있습니다. 이 영화는 히틀러의 유대인 대학살 사건을 다룬 작품입니다. 히틀러가 유대인들을 학살할 때 쉰들러는 유대인 한 사람이라도 더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재산을 다 팔아 살려놓는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많은 유대인들의 학살을 당했습니다. 그는 한 사람이라도 더 구하지 못한 것을 안타깝게 여기며 이렇게 흐느꼈습니다. "내가 조금만 더 노력했더라면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릴 수 있었을 것을..." 이것은 이 영화에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입니다. 자신의 재산을 팔아서 유대인들을 구해준 쉰들러가 "내가 조금 더 노력해서 한 사람이라도 더 살렸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면서 통곡하는 장면은 모든 사람들의 심금을 울려주었습니다.
"내가 살았을 때 가진 물질로, 시간으로, 노력으로 한 사람이라도 더 살려주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것이 우리가 마지막 주님 앞에 섰을 때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됩니다.
오늘 여러분 속에 눈물이 말라가고 있습니까 인정이 말라가고 있습니까 날마다 무엇에 미쳐 살고 있습니까 눈물을 회복하십시오. 인정을 회복하십시오.
얼마 전에 전남 곡성에 있는 변화산 기도원에서 집회를 인도하였습니다. 집회를 마치고 숙소에 있는데 목사님 내외가 나를 찾아왔습니다. "어떻게 나를 찾아왔소?" "목사님 뵙게 되어 너무 기쁩니다. 저는 저 섬에서 목회하고 있는 종입니다. 제가 10년 전에 성남에서 목회할 때 목사님의 설교집을 읽고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특히 목사님께서 고부에서 목회할 때 입에 사과를 넣으면 가난한 교인이 걸려서 목에 안넘어 가고, 밤에 이불을 덮고 자면 추위에 떨고 있는 교인이 걸려서 잠이 잘 오지 않았다는 대목을 읽고 한없이 울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이 목사님이 기독공보에서 '섬에 있는 어린양들이 목자를 찾고 있다. 유리방황하는 양떼들을 위하여 누가 갈꼬?'라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그것을 보고 이 목사님은 전혀 망설임없이 '내가 지금 섬기는 교회에는 내가 없어도 올 목사가 많다. 그러나 섬엔 갈 사람이 없으니 내가 가야지' 하고는 가지 말자는 자식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명령으로 알고 그곳에 갔습니다. 가서 은혜로 살고 있다는 얘기를 제게 들려줄 때 나는 하염없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시골에서 목회할 때는 그 마음을 가졌는데 서울에 올라와 기름진 음식을 먹고 좋은 옷을 입고 사니 긍휼의 정이 말라가고 있건만 목사님은 이 종을 감동했던 주님의 마음으로 섬에 들어가 양들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당신은 하늘이 보낸 나의 스승이요, 하늘이 보낸 사자입니다."
여러분, 복있는 자가 누구입니까? 좋은 집에 사는 자입니까 돈을 많이 가진 자입니까 주님의 마음을 품은 자, 다른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는 자가 복있는 자입니다. 이 복으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출처: 갑천뉴스타트 자연치유원 글쓴이: 엘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