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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8-16
바닥나지 않는 축복 / 변한규 목사
유명한 찬송 작시자 죤 뉴먼의 경험담입니다.
어느 날 교회에서 장로님들과 목사님들이 서로 다투는 것을 보고 마음에 큰 상처를 입었습니다. 생각다 못해 그 교회를 떠날까했고 겸사 겸사 여행길을 떠났습니다. 당시에 배는 바람을 이용해서 가는 범선인데 어쩌다가 대 서양 가운데쯤에서 바람이 멎은지라 배도 멎었습니다.
그때 승객은 태반이 신자들인데 이 뉴먼도 그들과 합세해서 선장에게 항의를 했습니다. '세상에 이럴 수가 있습니까? 햇볕은 너무 따갑고 견딜 수가 없습니다. 이제 어찌해야만 합니까?'
그때 선장이 미소를 지으면서 '여러분 우리 함께 하나님을 믿지 않소, 하나님은 한 걸음 한 걸음 우리를 지도하실 것입니다. 바람이 멎으면 멎어서 그동안 우리가 성경을 읽고 찬송하고 기도하면 되지 않소? 우리 모두가 믿음으로 함께 하나님 앞에 맡기는 것과 기다리는 것을 배워야겠습니다.'
이렇게 권유를 했을 때 뉴먼은 마음에 가책을 받고 곧장 갑판으로 올라가 무릎을 꿇고 지난 날 죄까지 참회하면서 성령의 감동을 받아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이 우리 모두가 부르고 있는 찬송가 429장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찬송가 429장에는 제목 외에 굵은 글씨로 나의 신앙고백이라고 적어 놓았습니다.
♬이전에 방탕하게 지낼 때 교만하여
맘대로 고집하 던 이 죄인 사하소서
내 지은 죄 다 기억 마시고
주 뜻대로 늘 주장하소서♬
하나님은 하 나님의 백성들을 뉴먼뿐만 아니라 모두를 한 걸음 한 걸음 인도하십니다.
본문에서도 하나님의 종 엘리야를 그렇게 인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향해서 그릿 시냇가로 숨 으라고 했을 때 그는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까마귀를 통해서 아침에도, 저녁에도 떡과 고기를 운반해서 그릿 시냇가에 머물러 있는 동안 엘리야의 생계를 책임져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근심 걱정 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의 생계를 책임져 주시는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릿 시냇가에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땅에 비가 내리지 아니하므로 얼마 후에 그 시내가 마르니라"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그릿 시냇가로 인도하셨는데 그릿 시냇가가 말라버렸습니다. 위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떡과 고 기는 있지만 마실 물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위기 속에서도 더러는 IMF상황 속에서도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한 문을 닫으실 때는 그대로 끝나지 않으시고 다른 문을 열어 두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본문 말씀이 우리 모두에게 이런 교훈을 주고 있 는데 세 가지 내용으로 묵상하면서 은혜를 사모하고자 합니다.
첫째, 엘리야의 순종.
엘리야는 위기를 만났지만 꼼짝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리고, 사람의 때보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믿음 때문입니다. 마침내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습니다. "가라" 하셨을 때에 엘리야는 지체하지 않고 행동을 개시했습니다.
우리 모두가 엘리야를 본받아 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줄 알고 하나님 말씀이 임할 때 움직일 줄 알아야 합니다.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어떠했습니까?
구름기둥이 진행해야 진행했습니다. 구름기둥이 멎으면 두말 할 것 없이 멎었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대로 한 걸음 한 걸음 진행하는 믿음이어야 될 것입니다. 내 뜻대로 살지 않고 주님 뜻대로 살아야 할 우리이기 때문입니다.
기다리는 엘리야에게 드디어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지 않았습니까?
8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가라사대"라고 했습니다.
목말라 하는 사슴에게 하나님의 내리시는 단비가 필요하듯이 엘리야에게 하나님께서 은혜의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그 말씀이 은혜스러운 말씀 같지도 않습니다.
9절을 보십시오.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유하라 내가 그곳 과부에게 명하여 너를 공궤하게 하였느니라" 까마귀를 동원해서 먹이시고 인도하셨던 하나님이 이제는 과부를 통해서 공궤하겠다는 것입니다.
엘리야야 배가 고프냐? 목이 마르냐? 이제 일어나 사르밧으로 가라. 그리고 거기 유하라, 한 과부가 네게 먹을 음식을 주고 마실 물을 주리라. 그러나 엘리야는 따지지를 않았습니다.
10절에 보면 "저가 일어나 사르밧으로 가서"했는데 이것은 그의 즉각적인 순종을 뜻합니다.
엘리야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우리 모두가 되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스스로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엘리야의 입장에 처했을 때 우리 같으면 어찌했을까? 혹시는 불평하고 불만을 토했을지 모릅니다. 하나님 저는 하나님이 인도하셔서 그릿 시냇가로 오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마실 물조차 말라버렸으니 이것이 주님의 사랑입니까? 이것이 주님의 은혜고 주시는 축복이라는 말입니까? 항의할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조금도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믿음이 보배로운 믿음일 것입니다. 그는 끝까지 인내하면서 주님의 인도를 기다렸습니다. 그릿 시냇가에서 사르밧까지는 주석가에 의하면 약 120㎞ 사막길이라고 합니다. 가령 광주에서 송정리까지 가려면 4㎞를 걸어야 합니다. 그러면 송정리까지의 거리 30배를 뙤약볕 밑에서 꾸불꾸불한 광야 길로 걸어야만 합니다. 우리 같으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 피곤에 지쳐있습니다.
그런데 그 머나먼 길을 낙타하나도 없고, 수레 하나도 없는데 걸어서 가라는 말입니까?'라고 항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묵묵히 주님의 명령대로 순종을 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그 곳 과부에게 명하여 너를 공하게 하였느니라" 하나님의 치밀한 계획이요, 사랑입니다. 그 때에 엘리야가 이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부요한 과부를 선택해서 목말라 하는 내게 풍성한 것으로 먹게 하시나보다. 그러나 이것은 오산입니다. 본문 10절 이하의 말씀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가서 보니 나뭇가지 줍는 가난한 과부입니다. 먹을 떡도 없고 통에 가루 한 움큼, 병에 기름 조금 이것 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그것으로 마지막 음식을 만들어 먹고 아들과 함께 죽어버리기로 작정했다는 너무 비통한 이야기입니다. 엘리야는 불평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 너무하십니다. 마실 물도 없는 형편의 나를 이렇게도 가난하고 불쌍한 과부에게 보내시다니 왠 말입니까? 그러나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 날 구멍이 있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지금도 먹이시고 지금도 인도하시는 엘리야의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하나님의 백성 된우리 모두를 인도하시고 먹이시고 목말라할 때에 생수를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믿음으로 엘리야는 사르밧까지 갔습니다. 가난한 과부를 만났습니다. 순종하는 믿음입니다.
그러면서 첫 번 입을 열어서 불쌍한 여인을 향하여 13절에 "두려워 말라"고 격려했습니다.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향해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미국 뉴욕에서 일어난 테러 참사, 하나님께서 두려워 말라는 말씀으로 위로를 주실 줄로 압니다. 두려워 말라 이 말씀은 오늘을 사는 세계 인류를 향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음성인 줄도 모릅니다. 여기 두려워 말라는 본래의 뜻은 뚫고 나갈 길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 가는 앞길이 어찌 막힐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가시밭길을 열어서 신작로 되게 하시는 분입니다. 없었던 곳에서 길 만드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할 때에 광야에 무슨 길이 있습니까? 그러나 그때그때 마다 한 걸음 한 걸음 길 인도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없었던 곳에서 길 만드시는 능력으로 우리 모든 고달파하는 인생들에게 길 만들어 주시고 계십니다.
낙망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둘째, 사르밧 과부의 순종.
그는 너무도 가난했습니다. 현실이 극박했습니다. 그런데 엘리야의 말이 무엇입니까? 13절에 보면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을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선후가 바뀐 것 같지 않습니까?
우선 배가 고픈데, 마지막 음식 먹고 죽을 판인데 내게 먼저 가져오고 그 후에 네가 먹으라 너무 가혹한 분부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기 먼저라는 단어에 유의해야 합니다. 이 주문은 사르밧 과부에게는 너무도 어려운 믿음의 시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
이러한 경우에 나는 어떨 것인가? 묻고 싶지 않습니까?
내 양식을 하나님의 종이라고 줄 수 있겠습니까?
내가 먹을 것을 먹지 않고 엘리야에게 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르밧 과부는 어떠했습니까? 15절을 보니까 "저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라고 했습니다.
사르밧 과부도 엘리야처럼 순종하는 믿음을 지닌 것입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습니다. 하나님은 남은 찌꺼기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먼저 하나님께 드리는가를 물어야 되고 먼저 하나님께 가장 좋은 것으로 드리는 믿음 생활하고 있는가를 물어야 할 것입니다.
어쩌면 여기에 먼저 드리는 십일조의 원리가 있기도 합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바른 물질 관을 지녀야합니다. 그리고 그 물질을 잘 사용하는 청지기 사명도 감당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
물질이 없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 그 물질도 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물어야 합니다. 물질 문제 때문에 혹시 죄를 범하지는 않고 있는지, 하나님께 먼저 드려야 할 것을 내가 먼저 취하는 일은 없는지 백 번을 물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축복할 자를 축복하십니다.
우리가 잘 아는 록팰로우는 세계의 부호입니다.
그런데 그는 어른이 되어 큰 사업을 하면서도 자기를 낳아준 어머니의 말씀을 절대적으로 순종을 했다고 합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 하면서 부호가 되었다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록팰로우 어머니 열 가지 교훈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첫째, 하나님을 친아버지 이상으로 섬기라.
둘째, 목사님을 하나님 다음으로 섬기라.
셋째, 주일예배는 반드시 본 교회에서 드리라.
넷째, 오른쪽 주머니는 항상 십일 조 주머니로 정하라.
다섯째, 아무도 원수로 만들지 말라.
여섯째, 아침에 목표를 세우고 기도하라.
일곱째, 잠자리에 들기 전 하루를 반성하고 기도하라.
여덟째, 아침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라.
아홉째, 남을 도울 수 있다면 힘껏 도우라.
열째, 예배시간에는 항상 앞자리에 앉으라.
그는 어머니의 교훈을 항상 마음에 두고 순종을 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도 순종하는 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다시 본문을 살핍니다.
사르밧 과부가 어떻게 했습니까?
엘리야의 말에 순종을 했습니다.
본문 15절을 다시 봅니다. "그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엘리야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순종했다는 것입니다. 사르밧 과부는 내 뜻대로 살지 않았습니다. 비록 가난하지만 주님 뜻대로 살았습니다. 먹을 것이 없는 것이 약간을 불행이지만 반대로 먹을 것이 많다고 인생이 꼭 행복하겠습니까? 결코 아닙니다.
우리의 찬송가 가사가 교훈 합니다.
♬주 떠나가시면 내 생명 헛되네♬
주님이 날 버리시면 내 가진 것이 무엇입니까? 헛되고 헛될 것뿐입니다. 내가 누리는 영화가 무엇입니까? 잠깐 있다가 시들어버리는 박넝쿨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물질 관에 대하여 바른 교훈을 지녀야 할 것입니다.
셋째, 순종의 결과.
엘리야가 순종을 했고 사르밧 과부도 순종을 했습니다. 그 순종의 결과가 무엇입니까? 엄청난 축복입니다. 바닥나지 않는 축복입니다.
16절을 보면 "통의 가루가 다하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고 했습니다.
특별히 유념할 것이 있습니다.
15절에 보면 "저와 엘리야와 식구가 여러 날 먹었으나"라고 했습니다.
여기 여러 날은 장구한 날을 뜻합니다. 날마다를 뜻합니다. 어쩌면 사르밧 과부의 남은 생애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바닥나지를 않았습니다. 구멍이 뚫리지 않았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 죽을 형편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
이러한 축복을 저마다 사모하지요?
그렇다면 본문 13절 말씀을 함께 순종을 해야 할 것입니다.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하나를 만들어 내게 가져오라".
순종해야 할 세 단어가 이 짤막한 말씀 속에 있습니다.
첫째는 먼저,
둘째는 작은 떡,
셋째는 하나.
그렇습니다. 먼저 하나님께 드리는 순종이 있어야합니다.
항상 하나님이 먼저요, 나는 나중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뿐만 아닙니다. 먼저 하나님께 작은 떡을 드리는 순종이 있어야 합니다.
여기 작은 떡, 형편 대로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 큰 것 드릴만한 힘이 없습니다. 과부의 두 렙돈 정도입니다. 벳세다 소년의 오병이어 정도뿐입니다.
베드로가 이적을 행하면서도 말을 했습니다.
“내게는 은과 금이 없다. 그러나 있는 것 자랑했습니다.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우리에게 이러한 자본은 있습니다. 작은 것이지만 정성껏 드려 질 때에 이적이 나타납니다. 사르밧 과부가 이것을 체험 할 수가 있었습니다. 비록 작은 떡이지만 먼저 드렸을 때에 날마다 먹어도 가루 통에 바닥이 나지 아니하고 날마다 사용해도 기름병에 바닥이 나지 않았습니다. 또 하나 먼저 하나님께 하나를 드리는 순종이 있어야 합니다.
여기 하나가 무엇입니까?
잃은 양 비유에서는 백분의 일에 해당합니다.
생각하면은 이것은 영적인 해석인데, 나의 재산 백분의 일, 하나님께 바칠 용의는 없는가?
이 교회에 모든 성도들이 지닌 재산 백분의 일을 하나님께 드릴 수만 있다면 성전 건축은 이미 끝나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여기 하나가 무엇입니까?
드라크마 비유에서는 십분의 일에 해당합니다. 다시 말하면 소득의 십분의 일을 뜻합니다.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이라고 말라기서에 기록하고 있습니다.“그것을 내 것으로 취하는 자는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자라”고 까지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이것을 바쳐서 네 창고가 넘치나 시험하라 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은 하나를 드리는 믿음을 보시고 삼십배, 육십배, 백배로 축복하십니다.
단 하나 조건이 있습니다.
순종하는 믿음입니다. 순종하는 믿음이 무엇입니까?
먼저 믿음이요, 작은 떡 믿음이요, 하나 믿음입니다.
순종하는 믿음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으로 부터 바닥나지 않는 축복을 받아 내리는 손입니다.
사르밧 과부가 이 믿음으로 이러한 축복을 받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 성도님들의 건강, 지혜가 바닥나지 않기를 원합니다.
성도님들의 기쁨과 평화와 사랑이 바닥나지 않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가루 통, 기름병이 바닥나지 않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