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한국교회에서는 추도예배를 공식적으로 장려하는 교회도 있고 드물기는 하지만 절대 금하는 교회도 있다. 그래서 적지 않은 크리스챤들이 혼동을 일으키고 있는 듯 하다. 즈음하여 성경적 이해를 위한 제시가 필요하고 그와 함께 현실적 적용을 위한 제안이 필요하다고 본다. 우선 추도예배가 성경적 관념과 배치되는 점들을 지적하고 싶다.
첫째, 어원 자체가 비신앙적이다. 사전적 의미로 볼 때 '추도(追悼)'는 죽은 사람을 슬퍼하며 따른다(좇는다)는 뜻이고, '추모(追慕)'는 죽은 사람을 사모하여 따른다는 뜻이다. 추도예배를 드리는 자들이 누구를 대상으로 드리든 그 어원의 의미는 죽은 사람과 죽은 혼령을 대상으로 애도하고 기리고 예배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지나치다고 할지 모르나 죽은 사람의 넋에게 음식을 차려 놓고 의식을 베푸는 '제사(祭祀)'와 크게 다르지 않다.
둘째, 예배학적 의미로 볼 때도 비신앙적이다. 예배는 '엎드림, 따름, 섬김, 경배'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성경은 오직 하나님께만 예배하라고 말하고 있다 (마4:10). 예배할 때는 우상적인 방법과 우상적인 태도와 우상적인 정신을 가지지 말라고 하고 있다 (출20:3-7). 추도예배는 죽은 자를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옳지 못하다. 설사 하나님을 대상으로 드린다고 해도 어원적인 의미 자체가 잘못되었으므로 '예배'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 자체가 옳지 않다. 혹 살아 있는 유가족을 위로하기 위해 드린다 할지라도 조상이 죽은 날을 택하여 예배를 드리는 것은 제사하는 사람들의 의식을 본받는 것이 되기 때문에 옳지 못하다.
셋째, 성경 말씀들의 정신에 비추어 볼 때도 비신앙적이다. 성경은 죽은 자를 위해 이교도처럼 슬퍼함을 금하고 있고 (레19:28, 신14:1, 겔24:17), 죽은 자에 대한 헌납을 금하고 있고 (신26:14), 죽은 자를 기념하는 것을 금하고 있고 (시31:12, 유1:9), 우상과 관련된 모든 종교적 행위를 금하고 있고 (출22:18, 신13:13-15, 레20:2,27), 우상적 종교 기념일을 폐하라고 했다 (골2:18,20-23, 벧전1:18). 성경의 문구적으로 추도예배를 드리지 말라는 말은 없지만 성경의 전체적인 사상이 추도예배를 금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대로 살려는 마음으로 연구하는 자는 누구든지 금방 느낄 수 있다.
추도예배에 대한 긍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이런 관점이 너무 일방적인 논리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들은 아마 '추도예배'에 대해 설명하기를, 추도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이고, 살아 있는 유족을 위한 예배이고, 믿음 좋았던 부모의 신앙을 모본 삼기 위한 예배라고 할 것이다. 비록 그런 좋은 의도를 가진 예배라고 해도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좋은 의도로 시작하더라도 분별력이 없는 사람들이 범죄하는데 사용될 가능성이 있는 것은 교회에서 법제화, 제도화, 의식화, 전통화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왜 모세의 시체를 없애려 했는지, 그리고 사단은 왜 그 일을 방해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신34:6, 유1:9). 모세는 신정시대에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였고 하나님의 뜻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달한 자였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해낸 자였고 이스라엘이 범죄하여 징계받을 때에 중보기도로 살게 해 주었던 자이다. 당시에 이스라엘이 신앙적으로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가 죽게 되자 하나님은 천사를 시켜 모세의 시체를 없애게 했다. 그것은 모세의 시체(무덤)을 두게 될 경우, 이스라엘이 좋은 의도를 가지고 무덤을 찾아 기념할지라도 후대에 가서는 우상숭배의 도구로 전락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었다. 그런 가능성은 모세가 만든 놋뱀이 잘 보여 준다 (민21:4-9, 왕하18:4).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죄를 범하므로 불뱀에 물려 죽게 되었을 때 모세가 하나님의 지시대로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높이 달았고 그것을 쳐다보는 자는 다 나았다. 이스라엘은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놋뱀을 성전에 보관해 오게 되었는데 그 놋뱀이 믿음없는 후대에 가서는 우상숭배의 도구로 변하고 말았다. 그래서 선한 왕이었던 히스기야왕이 우상을 철폐하면서 그 놋뱀을 부수어 없앴다.
사단이 노리는 것이 바로 그런 점들이다. 그러기에 성경의 신앙적 인물들은 그 누구도 죽은 날을 기념하여 예배하지 않았다. 족장들이든 제사장들이든 선왕들이든 선지자들이든 사도들이든 말이다. 그런 점을 이해하고 있는 미국의 청교도인들이나 한국의 초대교회들은 추도예배를 드리지 않았다.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에서도 몇 십 년 전만 해도 추도예배를 범죄 행위로 규정하고 추도예배를 허용하는 교회는 징계하기로 가결한 바 있다. 나름대로 신실한 그리스챤들은 그 이후에도 계속 추도예배를 거부해 왔다.
한국교회가 추도예배를 시작한 것은 박정희 대통령이 이순신 장군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추도식(追悼式)을 국가적으로 거행한 다음부터라 생각된다. 그 이전에는 '추도예배'란 용어 자체를 사용하지 않았다. 당시 한국교회의 상황은 유교적 문화가 강하게 지배하고 있는 때였다. 교회에 나가는 많은 사람들이 가문으로부터 핍박을 받았다. 가장 주된 이유는 조상과 부모도 몰라본다는 것이다. 특히 조상 제사를 거부한다는 이유로 가정에서 쫓겨나는 며느리들이 많았다. 사후에 제사를 받는 것을 가장 귀하게 생각하는 그들에게 제사를 거부한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제사 문제로 핍박받는 것도 큰 문제였으나 전도의 길이 막혔던 것도 큰 문제였다. 제사 문제 때문에 교회에 나오지 못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런 상황 속에서 교회들은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핍박받는 것을 줄여 주고 전도의 길을 넓히기 위해서 추도예배를 만든 것이다. 이른바 '제사를 기독교식으로 드려 준다'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목회자들이 추도예배 자체가 성경적으로 옳다고 생각해서 선택한 것이 아니었고 차선책으로 선택한 것이었던 것이다.
당시 상황에서 교회들의 선택은 나름대로 가치있는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 추도예배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교회 안에서 제도화되었고 오늘날에 와서는 범죄의 수준에 이르게 되었다. 추도예배 날짜를 제사 날로 잡는 것, 음식에 고춧가루를 넣지 않는 것, 죽은 자의 사진을 걸어 놓는 것, 사진 앞에 향을 피우는 것, 사진 앞에서 절을 하는 것, 죽은 사람을 위한 기도해 주는 것, 유족이 흰 옷을 입고 있는 것, 물론 교회마다 차이점은 있다. 그렇지만 아마 추도예배를 처음 도입한 목회자들은 이런 형태로까지 변질되리라고는 상상치 못했을 것이다.
우리는 그런 신앙적 탈선을 방지하기 위해 이에 대한 생각을 분명히 해야 한다. 교회들과 그리스챤들이 기본적으로 '추도예배'는 성경적으로 옳지 않는 예배라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 그런 다음에 전도의 효과를 생각하여 우상숭배의 형태를 띠지 않는 범위 안에서 특수하게 부분적으로 인정해 주어야 한다. 가정의 일원 모두가 기독교인이라면 추도예배는 드리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구성원 중 일부만 기독교인인 경우에, 믿지 않는 가족이 제사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혹은 믿지 않는 가족을 예배를 활용하여 전도하기 위해서라면 한시적으로 허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럴 때에라도 '기독교식 제사'의 개념을 갖지 않도록 해야 하며 순수하게 예배와 애찬(음식 먹는 일)으로만 드려야 한다. 그리고 차츰 가정이 신앙화되어 가면서 추도예배를 드리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것은 마치 술 담배를 끊지 못해서 교회에 나오지 못한다는 사람에게 술 담배를 하면서라도 나오라고 전도하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처음엔 그렇게 시작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신앙의 성숙도가 더해가면서 끊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지 않겠는가!
끝으로 원컨데 모든 교회가 진리 수호를 위해 추도예배의 부당성을 과감히 가르치기를 바란다. 그리고 추도예배를 드리고 있는 성도들은 자신이 드리고 있다 할지라도 그것이 기본적으로 옳지 않다는 의식을 가져야 하고, 곧 끊어야 하겠다는 결심이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추도예배를 드리지 않는 성도들은 추도예배를 드리는 자에 대해 함부로 정죄하기 보다는, 추도예배를 건전하게 드릴 수 있도록 도와주고 그들이 신앙적 분별력을 가질 때까지 인내하면서 권면하는 자세를 가지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