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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광염
자족의 비결
빌립보서 4:10-13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생활에 만족하십니까? 지금의 교회생활에 만족하십니까?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발간한 ‘2015 보건복지정책 수요조사 및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50대 남성의 삶의 만족도가 국민 전 세대·성별 중 가장 낮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습니다.
보고서에 따르면 “50대의 삶의 만족도가 가장 낮다는 점은 베이비부머 세대인 이들의 애환을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결과”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지금 삶 속에서 가장 큰 걱정거리가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건강문제가25.2%로 으뜸이었고, 자녀교육이 20.1%로 그 다음으로 많았습니다.
연령별로는 20대의 경우 일자리가 37.4%로 가장 큰 걱정거리라고 답했고, 30대와 40대는 ‘자녀교육’을 꼽았는데 “30대 31.3%, 40대 36.2%”비율로 나타났습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만족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무엇인가 모자라고 부족하고 불만족스러운 것이 이 세상의 삶입니다.
여러분 만족이든 불만족이든 어디서 비롯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이것은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마음을 비우면 만족이오고 마음을 비우지 못하고 욕심으로 가득 차 있으면 불만을 느끼는 것입니다.
옛날에 거지 부자가 동냥을 하려고 길을 떠났습니다.
한참을 걸어가고 있는데 어느 마을 어귀에 도착해보니 어떤 집에 불이 나서 활활 타오르고 있습니다. 온 동네 사람들이 나와서 불을 끄느라고 야단법석입니다.
지금은 화재가 나면 불자동차가 출동을 해서 화재를 진압합니다만 옛날 시골에 화재가 나면 동네 사람들이 양동이를 들고 나와 우물에서 물을 길어서 불을 껏습니다.
이 모습을 본 거지아들이 아버지에게 말을 합니다.
아들왈 “아버지 지는 참 무척 행복해유!”, “뭐가 그리 행복하냐?”, “우리는 집이 없으니까 불 날 염려가 없잔어유!” 이 말을 들은 거지 아버지 왈 “야 이 녀석아 그게 다 이 애비 덕분인줄 알아라!” , “ 맞아유 아부지 참 고마워유!”
이 두 부자의 대화 속에서 우리는 한 가지 교훈을 얻습니다.
만족이란 많이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어떻게 갖느냐에 달려있다고 하는 점입니다.
많은 것을 소유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마음을 비우지 못하면 만족이 없는 법이고, 조금 가졌다 할지라도 마음을 비우면 만족한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만족은 저 멀리 달아나 버리고 욕심만 점점 더 커지게 되고 욕심이 과하면 결국은 화를 불러오게 된다는 초욕초화라는 사자성어도 있습니다.
성경에서도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약1:15절에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과 같이 이 세상 사람들은 모두가 많이 가지려는 소유욕에 휩싸여 욕심을 부리고 살지만 단 한 사람 바울은 욕심을 버리고 가난한 가운데서 만족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본문 11절에 보니까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 11절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 배경을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사도 바울이 2차 전도여행을 하면서 세운 마케도니아에 있는 교회입니다. 사도 바울이 처음 여기에 갔을 때 박해 때문에 그리 오래 머물지 못하고 떠나야 했었는데
떠나올 때 이 빌립보 교인들은 떠나는 바울에게 전도사역에 보태 쓰라고 헌금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후에도 주기적으로 바울에게 헌금을 보냈습니다.
그러다가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체포 되어 로마로 압송되면서 소식이 끊겼다가, 정말 오랜만에 바울이 감옥에 있는 동안, 빌립보 교인들이 에바브로디도라는 사람을 통해서 다시 헌금을 보내 왔는데 이 헌금을 받고 바울이 지금 이렇게 기뻐하는 겁니다.
사도 바울은 일종의 자비량 선교사 아닙니까. 즉 다른 사도들처럼 정기적으로 교회에 재정 지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스스로 돈을 벌어가면서 전도를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모든 것이 부족하고 궁핍했는데 보내오는 헌금을 받으니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그래서 10절에 그 보내온 선교비에 대한 감사의 말을 하는 겁니다.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이말은 내가 기뻐하는 것이 단지 너희들이 보내 온 그 돈 때문에 기뻐하는 것은 아니다. 돈 보다 너희들이 나를 생각하는 그 마음이 너무나 갸륵해서 기쁜 것이다.” 라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바울은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도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고 자신의 마음을 털어 놓습니다.
바울은 이미 물질의 경지를 뛰어 넘은 사람입니다. 가난도 궁핍도 배고픔도 고난도 죽음까지도 초월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경지에 들어간 사람은 돈이 있고 없고가 뭐가 그리 중요하겠습니까?
그는 어떠한 환경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터득한 사람입니다.
바울은 누구보다도 많은 것을 가진 부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가진 육적인 풍부한 조건에 대해 빌립보서 3:4-8에 고백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히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신분이 좋은 온전한 유대인이었습니다. 당시 최고의 랍비였던 가말리엘의 문하생이었습니다. 그는 로마시민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다고 자부할 수 있는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 때문에
교만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믿고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위치에 있던 그가 자신의 모든 지위를 버리고 복음을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도 버릴 각오로 복음전파에 열심을 다했습니다.
그가 이와 같이 목숨을 걸고 복음 증거에 매달릴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일까요?
빌3:7~9절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난 뒤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 바울은 지금까지 자신이 누리고 살았던 모든 삶이 헛된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출신 배경, 자신의 학문, 자신의 위치 모든 것들을 배설물과 같이 여기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일평생 헌신을 다짐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을 핍박하던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체험하고 난 뒤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보람있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축복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예수의 핍박자가 예수를 전도하는 전도자로 바뀌었습니다.
지금 까지 살아온 삶은 풍요속에 빈곤을 맛보아야 하는 삶이었고, 예수님을 만나고 난 뒤에 만족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다는 고백입니다.
그의 열정을 보여주는 대목이 행 20:24절에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한 것임을 깨달은 그는 모든 세상 것들을 배설물과 같이 여기고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이 발견 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돈은 많은데 왜 만족이 없습니까?
남들이 부러워하는 넓은 평수의 아파트에 살면서 왜 만족이 없습니까?
자식은 많은데 왜 만족이 없습니까?
사회적으로 성공했다는 말을 듣는데 왜 만족이 없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셨고, 예수님을 보내주셔서 죄에서 구원해 주셨고, 우리의 삶의 근본이 주체가 되십니다.
그런데 우리 삶에 주체되신 예수가 없기 때문에 만족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시간 예수님을 만나는 시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을 내 삶에 주인공으로 모시고 살면 만족이 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야 변화가 됩니다.
예수님을 만나야 헌신의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을 만나야 자족하는 삶을 터득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만나야 보람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야 축복의 사람이 됩니다.
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그의 삶에 주체가 세상 것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그이 삶에 만족이 없고 짜증나는 삶을 살게 되었고, 분풀이로 기독교인들을 잡아 죽이는 핍박자로 전락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만나고 예수님이 그의 삶에 주인이 되시고 나니까 자족할 수 있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다윗도 시편23편에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으로 나를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 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 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르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다윗의 고백은 부족함이 없는 환경과 조건에 대한 고백이 아니라 부족함이 없는 사람에 대한 고백이었습니다.
즉 여호와 하나님이 자신의 목자가 되어 주시기 때문에 아무런 걱정과 근심과 염려가 없다는 고백입니다. 부족함이 없는 풍족한 삶을 살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가진게 없어도 여호와가 자신의 목자가 되시기 때문에 근심걱정 염려가 없다는 고백입니다.
양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목자입니다. 양은 목자의 음성만 들으면 됩니다. 음성을 듣고 따르기만 하면 목자 되신 주님께서 푸른 초장으로 인도 해 주시고, 맑은 시냇물가로 인도하사 배고픔이 없고, 목마름이 없는 풍족한 삶을 영위할 수 있게 됩니다.
여러분 자족의 비결은 돈을 많이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가 아닙니다.
집을 여러 채 소유했느냐가 아닙니다.
땅을 많이 가지고 있느냐가 아닙니다.
대기업의 총수가 되었느냐가 아닙니다.
교회의 규모와 교인 수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란 것을 우리에게 확실하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자족의 비결은 오직 예수님을 목자로 모시고 살고 있느냐 아니냐 내 삶에 주인이 되시느냐 아니냐가 자족 할 수 있는 비결의 열쇠가 된다는 사실을 기억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대궐 같은 집에 살고 돈을 주체 할 수 없을 정도로 쌓아 놓았다 할지라도 예수님이 마음속에 안 계시기 때문에 우리 삶은 허탈하고 만족이 없는 것입니다.
대형교회라 할지라도 그곳에 예수님이 없으면 그 교회 교인들은 영적으로 배고프고 허탈하고, 병들어 죽어간다는 말씀입니다.
교회는 작고 성도수가 적더라도
예수님이 함께 하시는 교회에 만족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가득한 교회에 웃음꽃이 만발합니다.
예수님의 자비가 풍성한 교회에 은혜가 넘칩니다.
예수님이 함께하시고 예수님의 말씀이 살아 역사하는 교회에 부흥이 불길이 타오릅니다.
여러분!“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하는 다윗에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본문에서 바울사도가 말하는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도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고 하는 고백이 저와 여러분의 고백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합니다.
여러분 바울이 자족할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입니까?
이 비결을 알면 오늘 우리에게도 바울과 같이 만족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1)예수님을 본 받았기 때문입니다.
빌2:5절에서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말씀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바울은 예수님에게서 자족의 비결을 배웠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이시지만 자신을 비워 종의 형체를 입으시고 사람의 모양으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시고 인류의 죄를 대속하신 어린양이 되셨기에
바울도 예수님을 본 받아 자신의 모든 지위와 명예를 배설물로 여기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일평생 헌신하다가 순교하는 자리에 까지 들어 갔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형편을 돌아보면 도저히 불만족스럽고 자족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예수님을 본 받으면 풍성한 삶, 만족한 삶을 살 수가 있다는 것이지요.
고린도후서 11:23-27의 고백처럼 바울은 누구보다도 자신의 삶 속에서 무수히 많은 어려움들을 겪으며 춥고 배고프고 목마르고 정처없는 비천의 자리를 체험한 사람이었습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에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 벗었노라”고 말하면서 ---
그러나 그는 그 어려움 속에서도 낙심하거나 원망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실로 비천에 처할 줄 아는 비결을 배웠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이러한 비결들을 누구에게서 배웠습니까? 바로 예수님에게서 자족의 비결을 배웠던 것입니다.
여러분 자족하는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까?
이 시간 저와 여러분 예수님을 본 받고 만족을 누리며 살아가는 축복의 하나님의 백성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자족의 비결은 가치관의 변화에서 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 바울의 초기 생활의 가치관은 세상 것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고 난 뒤 그의 가치관은 달라졌습니다.
그는 “이전에 유익하게 여기던 것들을 지금은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겼다”고 빌 3:7-8에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왜 유익하던 것을 버렸다고 생각하십니까?
왜 세상에 속한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길 수 있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바로 가치관의 전환입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예수님에 대해 깨닫고 난 뒤에 이 세상에서 예수님을 아는 지식을 가장 고상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가치관의 전환입니다. 바울의 가치관이 변했기 때문에 그는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에게 일어나는 가치관의 변화입니다.
예수를 알기 전 좋아 하던 모든 것들이 이제는 덧없음을 깨닫게 되고, 예수를 알기 전 귀하게 여겼던 세상 것들이 가치 없음을 깨닫게 되니까 변화가 되는 것입니다.
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 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가치관을 전환시키지 않으면 새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세상으로 다시 돌아가게 됩니다.
가치관을 세상 것에서 하늘의 것으로 바꾼 사람만이 예수님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성령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 시간 우리의 가치관을 새롭게 변화시키는 시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바울과 같이 그리스도의 일꾼으로서의 사명을 받았으니, 사명을 완수하는 신실한 성령의 사람, 성령의 종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3 자족의 비결은 긍정적 마인드를 가지는 데서 옵니다.
바울은 긍정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본문 13절에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고 긍정적인 고백을 하였습니다.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말은 직접적으로는 풍부한 삶이나 궁핍한 삶이나 모두 적응할 수 있다는 표현이지만, 더 나아가서는 주님과 동행하는 삶 속에서 얻은 무한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하기에 능력 있는 삶을 살 수 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고백보다 더 긍정적인 고백은 없습니다.
바울은 어떤 불가능한 상황도 부정적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우리 앞에 놓인 장애물을 바라 볼 때에 긍정적으로 보느냐 부정적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장애물을 극복하는 결과가 다르게 나타납니다.
모세가 민족을 이끌고 가나안땅 앞까지 갔는데 그곳에서 정탐꾼 12명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정탐을 마치고 돌아온 12사람 가운데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나머지 10명의 정탐꾼들은
그 땅의 사람들이 자신들보다 강하고 그들에 비하면 자신들은 메뚜기에 불과하다고 하는 등 부정적인 보고를 했습니다.
이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을 애굽에서 이끌어낸 모세와 아론을 원망 하였습니다.
심지어는, 장관을 다시 세워서 이집트로 돌아가자는 말까지 하였습니다.
반면, 여호수아와 갈렙은 여호와를 배반하지 말고 그 땅 백성들을 두려워하지 말자고 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 함께 하실 것이라 하였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회중은 그들을 돌로 치려 하였습니다.
그 때, 여호와의 영광이 회막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나타났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여호와께서는, 여호수아와 갈렙 외에는 어른들 중에는 아무도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될 것이라 하셨습니다.
결국 원망한 자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여호수아와 갈렙만 그 땅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나머지 정탐군은 그토록 바라던 가나안을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40년을 유리 방황하며 고생 고생하다가 최후를 맞이하게 되지않았습니까?
왜 10일이면 들어 갈 수 있는 땅을 40년 걸려 들어갔냐는 것이 의문 아닙니까?
그들은 긍정적인 생각을 갖지 않고 부정적으로만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민14:34절에보면 “너희는 그 땅을 정탐한 날 수 40일의 하루를 일년으로 쳐서 그 사십년간 너희의 죄악을 담당할지니 너희는 그제서야 내가 싫어하면 어떻게 되는지를 알리라하셨다 하라”
결국 긍정적인 마인드를 상실하면 멸망 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1:12-18에서 그는 감옥 속에 갇혀 있는 자신을 통해 오히려 복음을 전하는 일에 활력소가 되었다고 생각하며, 감옥 밖에 있는 성도들을 격려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로마서 8:28에서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라고 긍정적인 삶을 고백하였습니다.
탈무드에 “승자가 즐겨 쓰는 말은 다시 한번 해 보자 이고, 패자가 즐겨 쓰는 말은 해봐야 별 수없다 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막9:23절에 귀신들린 아이를 데리고 와서 하실 수 있거든 이 아이에게서 귀신을 내어 쫓아 달라고 하는 제자들을 향하여 “할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말씀하시고 그 아이에게서 귀신을 내 쫓아 주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분문에서 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고 했습니다.
여러분 어떠한 상황이 주어질 때 긍정적인 사고를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자족의 비결은 많이 가졌다고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먼저
1) 예수님의 생애를 본 받아 예수님 중심적인 삶을 살고,
2) 세상 것을 좋아하던 생활에서 벗어나 영적인 것에 중심을 두는 가치관을 변화시키고,
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긍적적 마인드를 가질 때
우리의 삶 속에서 행복이 찾아오게 되고, 자족할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 우리 모두 바울과 같이 세상 것을 배설물과 같이 버릴 수 있는 용기와 결단으로,
예수님 중심의 삶을 살아 모든 일에 자족 할 수 있는 삶을 살아 가시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다 되어서 하늘의 신령한 복과 땅의 기름진 복을 받아 누리는 축복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