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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예화
▣ 최고 계급자에게 순종하면 돼
대학 다니다가 군에 들어간 육군 신병이, 내가 이 3년 동안 군인생활을 하면서 일생 추억에 남을 만큼 좋은 군인생활을 하고 싶다는 마음에 선배되는 병장에게 물었습니다. “군인 생활을 좀 깨끗하게, 명예롭게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좀 자세하게 가르쳐주십시오.”
선배되는 병장은 껄껄 웃으면서 간단하게 대답했습니다. “군인 생활은 그렇게 복잡하지 않아. 오직 상관의 명령에 복종하면 되느니라. 명령 떨어지는대로만 시간시간 복종하면 돼. 네 앞에 할것까지 미리 걱정할 것은 하나도 없어.” “아, 간단하군요.”
가만 있다가 이 머리좋은 청년이 다시 질문합니다. “그런데 여러 사람이 동시에, 이 사람은 이렇게 하라, 저 사람은 저렇게 하라 하고 여러 상관이 명령을 각자 다르게 내리면 그때는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이 사람아, 별걸 다 걱정하는군. 그럴 때는 말이야, 최고 계급자에게 순종하면 돼.” 대단히 중요한 예화입니다.
▣ 이것이 예수믿는 것이다
왜 우리의 신앙 생활이 나약해지는 것입니까? 도대체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믿음이란 하나의 관계성입니다. 윌리암 바클레이는 이 문제에 이렇게 대답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심판자를 이제는 아버지로, 그리고 항상 두려워하던 하나님을 이제는 사랑하는 하나님으로, 공포의 대상을 사랑의 대상으로, 그리고 이웃에 대해서는 증오의 대상을 사랑의 대상으로, 이기적인 생각에서 봉사하는 마음으로, 질투나 앙심에서 용서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아주 쓸모없는 존재로 알았으나 예수 안에서 이제는 소중한 존재로, 실패한 것이 아니고 모든 것은 성공한 것이라고 이해하고, 허무한 것이 아니라 여기에 막중한 의미가 있다는 것으로 생각이 바꾸어지는 것, 이것이 예수믿는 것이다.”
▣ 그 말씀만 믿고 살았습니다
선교사 리빙스턴은 아프리카에서 복음을 위해 수고하다가 1896년에 영국으로 돌아왔다. 이때 글래스고 대학에서는 그에게 박사 학위를 수여했는데, 그는 아프리카에서 사자에게 찢기어 병신이 된 팔을 그대로 안고 단상에 섰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높이 칭찬할 때, 그는 답사하기를 “저는 다시 아프리카로 가렵니다. 지금까지 저는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신 주님의 그 말씀만 믿고 살았습니다. 앞으로도 그렇게 살 것입니다.“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 인류에게 봉사하였다
여러분, 나는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설교를 좋아한다. 그분은 마지막 설교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성대한 장례식을 원치 않습니다. 나의 장례식을 집전하는 분은 부디 너무 길게 하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조사에서는 나의 노벨 평화상에 관하여 말하지 말아 주십시오. 그것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학위, 명예 등에 관해서도 말하지 말아 주십시오. 그것도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오직 정의를 위해 외쳤다고만 해 오직 인류를 사랑하고 인류에게 봉사하였다고만 말해 주십시오.”
▣ 동생이 알렉산드리아의 주교가 되었습니다
모두가 인정할 만큼 정결하고 경건하게 일생을 살아 온 한 수도사가 있었다. 마귀들이 그를 시험하였다. 돈으로 시험하고, 여자로 시험하고, 직위로 시험하고 별의별 방법을 다 써서 시험하였으나 수도사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마귀들도 속수무책이었다. 이럴 때에 어느 마귀가 자신있게 나섰다.
“내가 시험을 걸겠다”하고 수도사에게 다가갔다. “수도사님 !” 하고 인사를 했다. “왜 그래 ?” 수도사가 의연한 태도를 보인다. 마귀는 점잖게 말한다. “수도사님의 동생이 알렉산드리아의 주교가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대번에 수도사의 얼굴빛이 달라지더란다.
▣ 거룩한 십자가가 되었습니다
재미있는 설화 한 도막을 소개하겠습니다 요단강 계곡의 경사면에 세 그루의 나무가 서 있었습니다. 이들 나무는 저마다 나름의 소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첫번째 나무는 예루살렘으로 가서 세공을 받아 하나님의 성전의 재목이 되고 싶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와서 경배하는 하나님 성전의 한 부분이 됨으로 나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높이높이 찬양되기를 소원했던 것입니다.
두 번째 나무는 바다로 가고 싶었습니다. 곧 범선이 되어가지고 사람들의 왕래를 도울뿐 아니라 온세계로 두루 다니면서 소중히 여김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에 쓰임받기를 소원했습니다. 세 번째는 나무는 “나는 여기 남고 싶다. 높이높이 자라나 하늘을 향해 가지를 쳐들고 있겠다. 그리하여 이 산을 오르는 사람들이 내 그늘에 앉아 쉬면서 하나님을 사모하게 해주겠다” 라고 소원을 밝혔습니다.
세월이 지나갔습니다. 예루살렘으로 가고 싶어했던 나무는 찍혀서 베들레헴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세공을 받아 작은 구유가 되었습니다. 나귀가 핥아먹고 개가 핥아먹고 하는 먹이통이 되어 마굿간 한귀퉁이에 팽개쳐지는 슬픈 신세가 되었습니다. 두 번째 나무는 큰 배가 되어 대양으로 나가고 싶었는데 서글프게도 찍히고 깎이어 조그마한 조각배가 되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갈릴리 호수로 가게 되어, 쬐죄죄한 어부들이나 올라타고 비린내 나는 생선마리나 싣고 다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뿐입니까 ? 일 없을 때에는 쓸모없이 버려진 채 호숫가에서 따분한 시간을 보내야 했습니다.
세 번째 나무는 그 자리에 그냥 있고 싶어한 소원과는 달리 어느날엔가 웬 사람들이 와서 결국은 찍혀버렸고, 그리고 다듬어져서 엉뚱하게도 저주받은 죄인들을 매달아 죽이는 형틀, 십자가가 된 것입니다. ‘아, 나는 왜 하필이면 이렇듯 비참한 신세가 되고 말았단말인가’ 하고 그는 탄식해 마지않았습니다.
그런데 이것 보십시오. 어느날,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만백성을 구원하시고자 만왕의 왕으로 오시는 예수님께서 숱하게 있을 좋은 처소를 다 놔두고 하필이면 그 천덕꾸러기 말구유에 태어나시는 것이어서, 첫번째 나무였던 그 말구유가 결국은 더할 수없이 큰 영광을 입은 것입니다.
다시 세월이 더 흘러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실 때입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호수에 오셔서는 그 보잘것없는 조각배에 올라 앉으시고 하나님나라의 이야기를 하시는 것이어서, 두 번째 나무였던 그 조각배가 그렇듯 주님께 강단을 드리는 뜻밖의 영광을 입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3년쯤의 세월이 더 흘렀습니다. 세 번째 나무였던 그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못박혀 달리심으로 길이길이 만백성의 추앙을 받는 거룩한 십자가가 되었습니다 --- 이런 내용의 설화입니다.
▣ 저는 구두를 만들던 사람이 아니라 깁던 사람이었습니다
윌리엄 커레이라고 하는 유명한 선교사가 있습니다. 그는 영국사람으로 인도에 가서 선교 활동을 많이 한 분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선교사의 한 분입니다. 그는 언어에도 능통하여 성경을 34개 국어로 번역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그는 기독교인은 물론 모든 영국인들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높이 존경하여 그를 만나고자 했으며 또한 그의 말씀을 귀담아 들었습니다.
어느날, 큰 만찬회가 열렸습니다. 윌리엄 커레이를 모시고 베푸는 환영회였습니다. 사람이 많이 모인 곳에는 으레 못된 사람이 끼게 마련인가봅니다. 그곳에도 윌리엄 커레이가 모든 사람의 존경을 받는 것에 배가 아파서 망신을 주려고 하는 여자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그분에게 참으로 무례한 질문을 합니다. “선생님, 당신은 젊었을 때에 구두를 만드는 직공이었다면서요 ?” 과거를 들춥니다. 모든 사람의 존경을 받고 있는 순간에 이렇듯 불쾌한 질문을 한 것입니다. 이 물음에 윌리엄 커레이는 껄껄 웃으면서 평화로운 얼굴로 대답합니다. “자매님께서는 잘못 알고 계십니다. 저는 구두를 만들 줄 모릅니다. 저는 구두를 만들던 사람이 아니라 깁던 사람이었습니다. 남들이 신다가 헤진 구두를 깁는 직공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저를 부르심으로 주님의 사람이 될 수 있었고, 선교사가 될 수도 있었습니다.” 일순 장내는 물을 끼얹은 듯 숙연해졌습니다.
▣ 오른빰을 치는 자에게 왼뺨을 돌려대는 것은
1920년에 김인서 장로가 독립운동을 하다가 감옥에 갇혔습니다. 감방에는 또 한 사람의 독립운동가가 있었는데, 바로 그 유명한 윤병구 선생입니다. 이 사람은 비폭력과 무저항주의에 대해서 비난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김인서 장로를 만나게 되자, 대뜸 한마디 합니다.
“성경에 보면, 누구든지 네 오른빰을 치면 왼뺨을 돌려대라 했는데, 그따위로 해가지고 어떻게 독립운동을 하겠소? 폭력을 쓰는 자는 폭력으로, 무력을 쓰는 자는 무력으로 대항해야 될 게 아니오?” 그 때에 김인서 장로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뺨을 치는 자에게 마주 대하여 치는 것은 혈기의 용맹이요, 소인의 용맹이요, 필부의 용기일 뿐입니다. 또, 한 사람밖에 대적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오른빰을 치는 자에게 왼뺨을 돌려대는 것은 거룩한 용기요, 만인을 감복하게 하는 대용(大勇)이요, 영적 용기입니다.” 이 말을 듣고 감동해서 윤병구 선생은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 스스로 물러선 기독교인
콘스탄틴 대왕은 로마에 기독교의 자유를 선포한 역사적인 인물이다. 그의 부왕이 왕위에 오르면서 보니, 그의 신하인 문무 백관들 가운데 기독교 신자들이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비기독교인이었기에 부하들에게 관직과 기독교 중 하나만 선택하도록 명령했다. 기독교를 따르려면 관직을 포기하고, 관직에 있으려면 기독교를 버리라는 것이다.
이 때에 상당한 기독교인들이 왕께는 죄송했지만 관직보다는 예수님을 택했다. 물러서는 그들의 표정은 더없이 밝고 편안했지만 왕은 대단히 괴로웠다. 이제 남아 있는 사람들을 살펴보았더니 그 중에도 역시 기독교인들이 많이 남아 있었다. 그들은 예수를 등지고 관직을 택했던 것이다.
왕은 깊이 생각한 끝에 남아 있는 변절자들을 다 내어 보내고 오히려 스스로 물러선 기독교인들을 다시 불러 선정을 베풀었다고 한다. 결국 그의 아들 대에 이르러서는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선포하는 역사적인 일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 기왓장 만큼이나 마귀가 많더라도
마르틴 루터가 종교재판을 받기 위해 재판소를 향해 갈 때의 일이다. 이 재판은 생사를 가늠하는 무서운 재판이라 루터의 친구들이 간곡하게 만류했다. 그 때 루터는 말했다.
“재판정 기왓장 만큼이나 마귀가 많더라도 나는 재판정에 서리라”. 그리고 재판정에 서서는 “오, 하나님이여 ! 나 여기 서 있습니다”라는 외마디 기도를 했다고 전해진다. 하나님만 의지하기에 나의 최선을 다한 다음에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깨끗이 맡겨야 한다. 그래야만 놀라운 용기가 생기는 것이다.
▣ 예수는 좋으나 교회는 싫습니다
저 유명한 인도의 정신적, 민족적 지도자였던 간디는 독실한 예수 숭배자이면서도 정작 기독교인은 아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그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 숭배하면서 왜 전형적인 교인이 되지 않고, 교회에 나가지 않습니까?” 그는 그때마다 입버릇처럼 이런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예수는 좋으나 교회는 싫습니다.”
깊이 새겨 들어야 할 말입니다. 그가 교회에 안나가는 이유 가운데 이런 말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의 친구 중에 안두루스라고 하는 영국 선교사가 있었는데 간디는 그와 인간적으로 매우 친했고, 그에게 전도를 받고, 설교도 듣고, 성경에 대해서도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주일날 간디는 교회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예배당 문지기가 유색인종이라고 해서 그를 밖으로 내쫓았습니다. 그후로 그는 교회에 다시 나가지 않았답니다.
▣ 중생없는 용서를 전하는 철학적 기독교
어느 신문기자가 유명한 구세군 창립자인 윌리암 부드 대장에게 물었습니다. “다가오는 미래에 닥쳐올 가장 큰 위험은 무엇이겠습니까?” 마침 윌리엄 부드는 나이가 많아 임종을 가까이 두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신중하게 대답했습니다.
“이제 세계가 직면하게 될 가장 큰 위험은 중생없는 용서를 전하는 철학적 기독교입니다. 추상적인 지식만을 전하는 말만 하는 철학적 기독교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둘째는 그리스도 없는 교회입니다. 교회라고 하지만 그 교회에 가서 그리스도를 만날 수 가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 없는 정치, 지옥없는 천국을 말하는 잘못된 교리, 이런 것들이 앞으로 문제될 것입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러한 문제에 부딪히고 있습니다.
▣ 교회의 오해
일반적으로 교회에 대해서 몇 가지로 큰 오해가 있다. 에밀 브루너의 <교회의 오해>라는 책에서도 여러 번 지적하고 있듯이,
첫째, 교회를 학교(institute)로 오해하기 쉽다는 것이다. 교회에서는 그룹별로 여러 가지 성경 공부를 가르치고 배우지만 그것 자체를 교회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성경 공부와 교회는 별개이다. 진리를 가르치고 배운다고 해서 교회를 학교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헬라식의 판단이다.
둘째, 친교(koinonia, fellowship)하는 곳을 교회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성도들이 모여서 차를 마시며 친교하는 것이 교회라는 것은 망상이다. 물론 성도의 교제가 있지만, 이것이 결코 교회의 본질은 아닌 것이다.
세째, 교회를 자선사업 단체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교회를 향하여 “도대체 교회가 무엇하고 있느냐 ?”고, 교회가 돈을 내놓지 않는다고 야단을 한다. 자신들은 한푼도 내지 않으면서 교회가 돈을 쓰지 않고 무엇하느냐고 원망인 것이다. 크게 잘못된 생각이다. 교회는 구제할 뿐이지 구제를 위한 기관은 아니다.
네째, 불의에 항거하는 어떤 저항단체로 착각하는 경우도 있다.
▣ 그렇다면 가게
어떤 사람이 도시에 나와 공부하는 가운데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은혜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되고 보니까 ‘이 귀한 복음을 어떻게 나만 듣고 있겠는가, 내 고향에는 아직 교회도 없고 믿는 사람도 없으니 내가 선교사로 고향에 가서 예수를 전해야 되겠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한 스승을 찾아가 뜻을 털어놓았습니다. “제가 우리 고향에 선교사로 가렵니다.” 그러자 스승은 고개를 가로저었습니다. “그거 어려울걸세. 고향에 가서 예수를 전해보아야 누가 자네 말에 귀나 기울여주겠는가. 예수님도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하셨는데 ---” “귀를 기울이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조롱하지만 않는다면 만족하겠습니다.”
“글쎄, 조롱도 할 것이고 욕을 할지도 모르는데 ?” “욕을 먹어도 괜찮습니다. 돌을 던지지만 않으면 그런대로 위로가 되겠습니다.” “만약에 돌을 던지면 어떻게 하겠는가 ?” “돌을 던진다면 칼로 찌르지 않는 것만으로도 고맙게 여기겠습니다.” “칼로 찌른다면 ?” “칼로 찌르더라도 목숨만 붙어 있다면 그것으로 감사하겠습니다.” “죽게 된다면 ?” “예, 그렇다면 저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내 사랑하는 고향 사람들의 구원을 위하여 죽는다는 것으로 인하여 영광스럽게 그 죽음을 맞이할 것입니다” 그제야 스승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렇다면 가게”.
[출처] 강단설교예화: 곽선희목사편(8)|작성자 선한목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