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3년(선조6) 가을, 고죽 최경창((孤竹 崔慶昌 1539~1583)이 북도평사가 되어 한양에서 천리 길, 함경도 경성으로 가는 길이다. 북도평사는 함경도 병마사(兵馬使)를 보좌하는 벼슬이다. 도중에 홍원군에 들르니, 군수가 축하연회를 베풀어 준다. 기녀가 술을 올리고 창을 한곡 하였다. 이어 또 다른 기녀에게 창을 권하자 “저는 창보다 시를 더 좋아합니다.”라고 한다. 최경창이 “누구 시를 좋아하느냐?”고 물으니 고죽의 시를 좋아한다고 한다. 그러면서 기녀 홍랑이 고죽의 시를 한 수 읊는다. 시가 끝나기를 기다려 군수가 “이 분이 바로 고죽 선생님”이라고 소개한다. 작자와 독자인 시인과 여인의 만남, 고죽과 홍랑은 서로 놀랐다. 수작(酬酌)이 이렇게 되면 연분이 안날수가 없다. 학자요, 시인이며, 음률을 알고 피리를 불던 조선 팔대 문장가 고죽 최경창과 시를 알고 교양과 미모가 빼어났던 기생 홍랑은 그 자리에서 운명적 사랑에 빠지게 된다. 조선 최고의 로맨스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이 이야기는 조선후기의 학자 남학명이 문집 <회은집(晦隱集)>에 기록을 남겨 널리 회자되었다.
두 사람은 경성에서 꿈같은 나날을 보내다가 고죽의 임기가 다하여 이별의 날이 찾아왔다. 눈물로 밤을 새운 홍랑은 떠나는 고죽을 따라 며칠 길을 가다가 쌍성에서 결국 이별한다. 돌아오는 함관령(咸關嶺) 고개에는 산버들이 피어나고 있었다. 날은 저물고 비가 내렸다. 홍랑은 시(묏버들가)를 지어 산 버들과 함께 고죽에게 보낸다.
「묏버들 가려 꺾어 임에게 보내오니
주무시는 창가에 심어두고 보시오서
밤비에 새 잎 나거든 나인가 여기소서」
기생의 신분으로 넘지 못할 사랑을 하고 있는 홍랑에게 또 하나 슬픔이 더해졌으니, 서울로 떠난 고죽이 병석에 누워 일어나지 못한다는 소식이다. 몇날 며칠을 걸어 홍랑은 서울로 찾아간다. 병석에 누워 신음하는 고죽을 찾아가 병수발을 든다. 고죽은 그 정성 덕에 건강에서 회복되는데 그 즈음 홍랑을 첩으로 삼았다는 소문이 퍼진다. 홍랑은 당시 함경도 평안도 사람들의 서울출입을 금하는 ‘양계의 금’을 어겼고, 고죽은 당시 명종왕비인 인순왕후의 국상 중에 첩을 삼는 죄를 범한 것이다. 고죽은 파직을 당하고, 홍랑은 경성으로 돌아간다. 고죽은 이별의 시 두 편, <증별(贈別)>과 <우(又)>, 그리고 홍랑의 묏버들가를 한역한 <번방곡(飜方曲)>을 지어 홍랑에게 준다.
증별(贈別)
「옥 같은 뺨에 두 줄기 눈물로 봉성을 나서니
새벽 휘파람새도 이별을 알고 슬피 울어주네
비단적삼 좋은 말을 타고 강산 넘어 떠나는 길
저 멀리 아득한 풀빛만이 외로운 길 전송하네」
우(又)
「말 없이 마주보며 난초(幽蘭)을 주노라. 相看脈脈贈幽蘭(상간맥맥증유간)
이제 하늘 끝으로 가면 언제나 오려나 此去天涯幾日還(차거천애기일환)
함관령에서 옛 노래 더 이상 부르지 말아라. 莫唱咸關舊時曲(막창함관구시곡)
지금까지도 구름비에 청산이 어둡나니. 」 至今雲雨暗靑山(지금운우암청산) .
최경창은 파직을 당한 후 종3품의 종성부사로 임명되지만 동인들의 끝없는 모함으로 강등되어 귀경하다가 1583년 경성 객관에서 객사하고 만다. 향년 45세.
남학명의 <회은집(晦隱集)>과 이능화의 <조선해어화사>에 따르면 고죽 사후에 홍랑은 스스로 얼굴을 상하게 하고 무덤 곁에서 시묘살이를 했다. 3년 상을 마친 뒤에도 임의 무덤을 떠나지 않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죽의 시편들을 챙겨서 피난했다. 전쟁이 끝난 뒤 홍랑은 고죽의 유작을 해주최씨 문중에 전한 뒤에 그의 무덤 앞에서 자진함으로써 생을 마감한다. 시집 <고죽집>은 이런 곡절을 거쳐 빛을 보게 된 것이다.
죽음조차 갈라놓을 수 없었던 홍랑의 순애보는 양반문중을 감동시켰고, 문중은 홍랑을 고죽의 무덤 아래 묻어 주었다. 경기도 파주시 교하면 율하리에 고죽과 부인 임씨의 합장묘가 있고 그 아래 홍랑의 묘가 남아있다. ‘시인 홍랑지묘’라 새긴 묘비 뒷면에는 홍랑의 <묏버들가>와 그들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를 적어 놓았다. 고죽은 전남 영암 구림마을 태생으로, 그의 사당이 있는 ‘동계사’ 입구에도 두 사람은 하나의 돌이 되어 서 있다. 돌의 뒷면은 ‘홍랑가비(洪娘歌碑)’로 <묏버들가>가, 앞면은 ‘고죽시비(孤竹詩碑)’로 <묏버들가>를 한역한 <번방곡>이 새겨져 있다.
최경창은 백광훈·이후백과 함께 양응정의 문하에서 공부했다. 1555년 17세 때 을묘왜란으로 왜구를 만나자 퉁소를 구슬피 불어 왜구들을 향수에 젖게 하여 물리쳤다는 일화가 전한다. 1568년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북평사가 됐다. 예조·병조의 원외랑을 거쳐 1575년 사간원정언에 올랐다. 학문과 시와 서화에 뛰어난 재주를 보였다. 이이·송익필·최립 등과 무이동에서, 정철·서익 등과 삼청동에서 교류하여 당대 8문장으로 꼽혔으며, 백광훈·이달과 함께 삼당시인(三唐詩人)으로 불렸다. 시가 청절하고 담백하다는 평을 얻었다.
무제(無題)
「임은 서울 계시고 첩은 양주에 살아
날마다 임 그리워 취루에 올라보면
방초는 짙어지고 버들은 쇠어가니
비낀 석양에 강물만 바라보는 빈 눈길」
최경창이 홍랑이 되어서 쓴 시다. 앞 두 행은 정(情)이고, 뒤 두 행은 경(景)이다. 둘이 나란히 앉아 홍랑은 정을 쓰고, 고죽은 경을 쓴 것 같다. 그러면서 합일(合一)에 이른 듯한. 살아서 함께 하지 못한 많은 세월들이 죽어서는 흙이 되어 함께 묻혀있고, 두 사람이 쓴 시는 돌에 새겨져 하나가 되어 있다.
경기도 파주시 교하면 율하리에 고죽 최경창과 부인 임씨의 합장묘가 있고 그 아래 홍랑의 묘가 있다. 죽음조차 갈라놓을 수 없었던 홍랑의 순애보는 양반문중을 감동시켰고, 문중은 홍랑을 고죽의 무덤 아래 묻어 주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2,000년 고죽의 후손들이 신도시 개발에 밀려 조상의 묘소를 이장하는 과정에서, 홍랑의 무덤 속에서 부장품으로 묻었던 ‘묏버들’ 시의 원본을 비롯해 고죽의 육필 원고들을 다량으로 발견하였다는 점이다.
오늘날 고죽의 작품들이 비교적 많이 남아 있는 것은 이처럼 기생 홍랑의 공로가 크다. 새롭게 이장된 고죽부부와 홍랑의 묘소 앞에는 그들이 생사를 초월한 풍류의 반려였음을 밝히는 시비(詩碑)가 자랑스럽게 길손을 맞고 있다.
출처 : 작가 이광이 <대한민국 정책브리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