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시 주요명소
유람선그랜드선착장(창선)
보물섬 남해의 새로운 해상관광지로 떠오른 창선유람선은 남해를 찾는 관광객들에게 시원한 바다여행의 즐거움과 추억을 선사한다.
창선대교타운내에 위치한 창선유람선은 선착장을 출발하여 단항대교-소풀섬-율도-토끼섬- 마도-삼천포대교를 1시간 40분동안 운항하는 동안 승객들에게 창선도 주변의 아름다운 비경을 보여준다
남해군 창선면 창선 유람선선착장
창선유람선사무실 055-867-7094 남해군청 문화관광과 055-860-8601
대국산성은 현성(縣城)이었던 성산성에서 동북방향으로 설천면과 고현면의 경계지점, 해발 376m의 대국산 정상에 있다. 산성으로 가려면 고현면 남치, 관당마을에서 가는 길과 설천면 정태, 내곡, 동비, 진목마을에서 가는 길이 있다.
이 산성은 머리만한 자연석를 사용하여 겹겹이 쌓아올리고 내부에 흙과 자갈로 메워 토루를 만들어 직선형 성곽을 이룬 타원형 성곽이다. 형태나 지형적으로 보아 현 소재지 가까이 있어 현성의 외곽성 역할을 한 것 같다. 평상시에는 성 아래에서 거주하다 왜구의 침입을 받으면 산성으로 들어가 방어하고 공격을 하였을 것이다.
산성 성곽 위의 망루와 봉수는 외적이 침입할 때 감시와 경계구역으로, 중앙에 있는 건물지와 연못지는 지휘소와 식수를 해결하기 위한 곳으로 쓰인 자리이다. 축성 방법 과 성의 형태로는 삼국시대 산성으로 추정하고 있다. 성안에는 지금도 여러 종류의 기와조각과 토기(土器), 자기(磁器) 조각들이 발굴되고 있다.
대국산성에는 '천 장군과 일곱 시녀'의 전설이 전해온다. 조선경종 때, 천씨 성을 가진 뛰 어난 장수가 이곳을 지키고 있었다. 하루는 천 장군이 일곱 시녀와 성 쌓기 내기를 했다. "너희들 일곱이서 저녁밥을 짓는 일과 내가 성을 쌓는데 누가 빨리 끝내는지 내기를 하자" 마침내 내기가 시작되자 일곱 시녀가 팔을 걷고 밥을 짓는 동안, 천장군은 부채 하나를 들 고 산허리에 올라서서 바다 쪽을 향하여 천천히 부채질을 하기 시작했다.
'저 사람이 내기 에서 이길 생각이 없나 보지?" 일곱 시녀가 내기에 이겼다고 좋아할 때 쯤, 이게 웬 일인가? 바다 속에 있던 커다란 바위 들이 새까맣게 날아와 소낙비 처럼 산꼭대기에 떨어져 저절로 성이 쌓이는게 아닌가? 일곱 시녀가 짓는 밥은 아직 채 김이 오르기 전인데...
이 전설이 사실이라 믿고 싶은 사람에게 더 말해 주어야 할 것이 있다. 대국산성의 성돌에는 아직도 굴껍질이나 조개껍질이 붙은 것을 발견할 수가 있다. 바다 속에서 날아온 돌이니까
그렇겠지.
남해군 설천면 진목리 산18-4 남해군청 문화관광과 055-860-8631
무민사
"지조 지킨 충신, 최영 장군 기리는 사당" 무민사는 최영 장군을 모신 사당이다. 남해대교를 지나서도 40분 정도 달려 남해군의 끝자락 미조면. 무민사는 아름다운 미조 항이 내려다 보이는 왼쪽 언덕에 자리잡고 있다. 최영장군은 고려의 유명한 충신인 최유청의 5대손으로 충숙왕 4년(1317)에 출생하였다. 1358년에 양광전라도 왜구체복사가 되어 서해안과 남해안에 침입하는 왜구들을 격파하는데 큰 전과를 올린 명장이다. 1380년에는 해수도통사가 되어 삼남지방을 순찰, 왜구의 침입을 막기도 했다. 1388년에는 지금의 총리인 문하시중이 되었다.
최영 장군은 문화시중이 되어 자신과 고려왕조의 운명을 결정한 요동정벌 계획을 세우게 된다. 그는 왕과 비밀리에 의논하여 원나라를 도와 요동을 정벌하기로 결정했다. 최영 팔도도통사, 이성계 우군도통사, 조민수 좌군도통사. 이렇게 구성된 요동 정벌군 3만으로 원정을 떠났다. 고려말의 혼란을 극복하고 새왕조를 건설할 야심에 차있던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역사적인 회군을 하여 왕을 폐위시켰다. 최영 장군도 이성계의 손에 파란만장한 생을 마쳤다.
최영 장군은 고려 우왕 때 남해군 평산포 수군 진영(만호가 주둔하던 곳. 지금의 해군기지)을 순시한 뒤 미조항에 들러 수군들을 격려한 사실이 기록으로 남아 있다.
무민사는 조선 중기에 지은 사당으로 알려졌다. 미조진항을 지키던 첨사(종3품)는 어느날 꿈을 꾸었다. 꿈속에 나이가 많은 노인이 나타났다. 노인은 "최영장군의 영정과 칼이 바닷가에 있으니 찾아서 잘모셔 놓으라" 고했다. 첨사는 꿈에서 깨어나 수문 장인 봉장군에게 꿈이야기를 들려 주고 찾아볼 것을 지시했다.
봉장군은 급히 바닷가에 나가 나무로 만든 궤짝을 발견했다. 뚜껑을 열어보니 최영 장군의 영정과 칼이 들어 있는 것이 아닌가. 첨사는 이것을 짚으로 싸서 모셔 놓았는데 어느날 갑자기 불이 나자 영정이 날아 올랐다. 그리고 현재의 무민사 자리에 영정이 내려 앉았다. 첨사는 이곳에 조그마한 사당을 지었다. 그리고 이름을 '무민사'라 했다. 끝까지 목숨을 바쳐 나라를 지킨 장군을 기리기 위해 봄, 가을 두 번 제사를 지내고 있다.
남해군 미조면 미조마을
남해 척화비
척화비란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승리로 이끈 흥선대원군이 서양사람들을 배척하고 그들의 침략을 국민 에게 경고하기 위해 서울 및 전국 각지에 세우도록 한 비로, 이 비도 그 중의 하나이다. 낮은 사각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맨 위에 지붕돌을 올려놓아 다른 척화비와는 다른 모습이다. 이는 당시 대원군의 명으로 척화비를 곳곳에 세우자,
이 지역의 관청에서 그것을 본 떠 세우면서 양식을 달리한 것으로 보인다. 척화비를 일제히
세우던 고종 8년 (1871)에 함께 세운 것으로, 대원군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납치된 후 세계 각국과의 교류가 이루어지면서 대부분의 비들이 철거되었으나,이 비처럼 몇기의 비들이 여전히 남아 그 속에 담긴 역사적인 의미를 말해주고 있다.
남해군 설천면 노량리 410-18
남해군 문화관광과 055-860-8631
단항 왕후박나무
창선면 단항마을에 영검있는 나무 한 그루가 500여년 넘게 의연한 모습으로 서 있다. 천연기념물 제299호 왕후박나무는 높이 9.5m에 밑동에서부터 뻗어나온 가지가 무려 11개로 한쪽에서 다른쪽까지 가지 길이가 21m나 되는 마치 우산을 펼쳐 놓은 것 같은 장방형의 우아한 자태가 기품이 넘친다.
옛날 단항마을 어부 한사람이 고기잡이를 나갔다가 큰고기 한마리를 잡았는데 뱃속에서 씨앗이 나와 뜰에 심었더니 하루가 다르게 나무가 자랐다. 주민들은 이 나무를 동제나무라 칭하며 해마다 음력 섣달 그믐날 정성스레 동제를 올리며 풍년 풍어를 빌었다. 단항마을 정자나무는 노동의 피로를 씻는 쉼터요, 마을문화가 꽃 피는 정자며 농사정보센터이며 마을이란 공동체를 밀고 가는 힘의 원천이다.
화가 손장섭의 그림에는 '남해창선 왕후박나무'가 나온다. 그는 일찍이 현실비판적인 시각을 견지해 광주의 비극, 시위현장, 철책선 등의 주제로 화폭을 장식했다. 그가 그린 신목들은 민중들의 삶과 역사의 이미지다.
남해군 창선면 대벽리 699-1번지
남해군청 문화관광과 055-860-8631
창선대교타운
남해안 한려수도의 한가운데에 위치한 창선면 대벽리 일원에 조성되어 있는 『창선대교타운』 2003년 4월 28일 총연장 3.4Km인 『창선·삼천포대교』의 개통과 아울러 대교 입구에 조성 하였고 총면적 204,100㎡를 개발촉진지구로 지정하여 공용주차장 조성, 공중 화장실, 오수 처리시설등의 공공시설을 설치하여 관광객의 편의제공과 먹고 쉴수 있는 공간을 마련했다.
현재 창선대교타운은 창선대교의 "백만불의 야경"과 함께 범선모양의 활어 위판장, 고급레스토랑, 활어회센터, 특산물 판매장, 자동차 극장 등 다양한 시설이 완비돼 있고, 특히 창선대교 타운내에 위치한 창선유람선 선착장에서 유람선을 승선하게 되면 창선도 주변의 아름다운
비경을 만끽할 수 있어 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다.
남해군 남해읍 창선대교타운
창선유람선사무실 055-867-70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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