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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일상 신도비(李一相神道碑) 박세채(朴世采)
경기도 가평군 상면 태봉리(京畿道 加平郡 上面 胎封里) 산 115-1번지에 자리한 이일상묘역(李一相墓域)에 있는 이일상신도비(李一相神道碑)이다. 이일상묘역에는 조부(祖父) 이정구(李廷龜)와 아버지 이명한(李明漢)의 신도비 도 나란히 서 있는데, 이들은 삼대가 모두 대제학(大提學)을 지낸 것으로 유명하다. 1703년(숙종 29년)에 세워진 이일상신도비는 박세채(朴世采)가 글을 짓고, 조상우(趙相愚)가 글씨를 썼으며, 김창협(金昌協)이 전액(篆額)을 쓴 것으로, 비문은 박세채의 문집인 『남계집(南溪集)』에도 기록되어 있다. 이일상(1612~1666년)은 1628년(인조 6년) 알성문과(謁聖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으나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1633년(인조 11년)에 검열(檢閱)에 임명되면서 관로(官路)에 들어섰고, 이후 정언(正言), 부제학(副題學), 대사간(大司諫), 대사성(大司成)과 예조판서(禮曹判書) 등을 역임하여 문형(文衡)을 장악하였다. 1654년(효종 5년)에는 정조 겸 진하부사(正朝兼進賀副使)로 청(淸)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귀국하여 청나라의 실정을 보고해 효종이 북벌계획을 수립하는데 도움을 주기도 하였다.
유명조선국 정헌대부 예조판서 겸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 의금부 춘추관 성균관사 오위도총부 도총관 동지경연사 증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우의정 겸 영경연사 감춘추관사 시문숙 이공신도비명 병서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좌의정 겸 영경연사 감춘추관사 박세채(朴世采)는 글을 짓고,
자헌대부 의정부 우참찬 조상우(趙相愚)는 글을 썼으며,
가선대부 이조참판 예문관제학 김창협(金昌協)은 전액을 함.
고 대종백 태학사 연안(延安) 이공의 휘는 일상(一相)이오 자는 함경(咸卿)이며 호는 청호(靑湖)이다. 황조의 의종 원년(인조 6, 1628년)에 알성문과 제 사명(四名)으로 합격하였으니 우리나라 인조대왕 6년에 해당한다. 그때에 대부(大父) 문충공(文忠公)은 방금 우의정에 올랐고, 아버지 문정공(文靖公)은 학사에서 남양부사로 나가게 되었다. 공의 나이 겨우 17살이었으니 아마도 국조가 열린 이래로 일찍이 없었던 바였으므로 온 세상이 부러워하였다. 그러나 공은 소년등과가 불행하다 하여 일체 벼슬을 하지 않은 채 문을 닫고 방에 들어앉아 경전과 역사서만 읽었고, 문충공과 문정공 두 분도 도와서 공의 학문이 성취케 하였다. 그 동안 비록 잠시 괴원, 한원, 옥당에 선임되기는 하였지만 공은 모두 원치 않았다. 집안에 거처한 지 5년이 지난 뒤에서야 비로소 공은 설서를 배수하여 검열로 옮겨 전적으로 올랐다. 이후 병조 좌랑 부수찬에 전직되어 병자년(인조 14, 1636년)에 전언을 배수하였는데, 규론할 때에 신분이 귀하고 친분이 있는 것을 꺼리지 않았다. 공이 아뢰기를, “나랏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특별히 인재를 가려 선발해서 일의 완급에 대비하고 죄를 지었던 사람도 선발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임금께서 엄중한 교지를 내리자 공은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곧 이어 공은 임금께 크게 분발하고 진작하겠다고 청하였다. 이에 유념하고 헤아려 처리하겠다는 비답이 내려졌다. 공이 거듭 전하의 처분을 촉구할 즈음 청나라가 강을 건너왔다. 공은 임금께서 그 날로 정전에 납시어 군신들을 독려하고 전쟁과 방어의 계책을 깊이 논의하게 해서 후회가 생기지 않도록 하기를 청했다. 그러나 임금은 또 공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개 그 때에는 이미 청나라의 사신을 거절하고 물리쳐서 오히려 사태가 걷잡을 수 없게 되었기에 공의 말이 이와 같았던 것이다.
공이 수찬으로 옮겨서는 동료들과 함께 상차(上箚)하여 사심을 버리고 성실에 힘써야 한다는 말로 극진히 간하였다. 헌납을 돕고 사간원 대사간 윤황(尹煌)에게 각 관사의 물품을 절약해서 다른 부분의 남는 비용으로 군비에 충당할 것을 요청하였다. 그 때에 조정에서는 정탐이라는 핑계로 다시 청나라와 내통하려고 하자, 공은 비분강개하면서 각자 의견으로써 논쟁을 하니 사간 정태화(鄭太和)가 기뻐하지 않았다. 공은 또 장계를 올려 아뢰기를, “지난번에 적 청나라가 참칭하는 칭호를 써서 치서(馳書)하였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전하께서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분발하셔 엄중한 말로 밝히 물리치시고 모든 곳에 알려 깨우치시며 천조인 명나라에 자문을 구하셨다. 이는 참으로 위태로운 상황을 평안한 상황으로 돌리는 대전환기였습니다. 그런데 아직 몇 달이 채 못 되어서 잘못된 의론이 들끓고 조정에서는 사람을 차출하여 서자를 보내려 하니 행동이 의심스럽습니다. 이는 혹 아래로는 우리 백성들을 속이고 위로는 황조 명나라를 저버리는 것이 어찌 아니 되겠습니까?”하여 말의 논지가 매우 바르니 듣는 사람마다 모두 탄복하였다.
그해 겨울에 청나라가 대대적으로 쳐들어왔는데, 임금은 다행히 남한산성으로 피하였고 공은 왕의 어가를 따랐다. 마침 곧 강화도로 옮긴다는 말을 듣고 공은 먼저 출발하여 어머니 박씨의 위중한 병을 잠시 위문하였다. 그리고 나서 바로 성 아래에 당도했는데, 임금께서는 이미 성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와서 성문은 닫혀 있었다. 공은 심지원(沈之源) 등과 함께 방황하며 눈물을 흘리며 울다가, 부득이하게 샛길로 빠져나와 강화도의 분사(分司)에 의지 하였었다. 이듬해 임금께서는 성을 나왔고 조금 후에 공은 모친상을 당하였다. 대간에서는 미처 왕의 어가를 따르지 못했던 사람을 추론하였고 동시에 척화를 주장했던 여러 신하들의 죄를 다스리고 있었는데, 공의 이름도 그 안에 끼여 있어 임금께서는 영암으로 멀리 귀양 보내라는 특명을 내렸고, 다시 평안도의 위원(渭原)으로 이배되었다. 공은 슬픔을 머금고 수 천리 먼 곳으로 귀양을 떠났으나, 오히려 능히 이치로 따져 스스로 이기면서 아침저녁으로 소리내어 슬피우는 시간을 제하고는 성현의 경전에 힘을 기울였다. 더욱이 회암(晦庵: 朱子)의 유서를 부지런히 외우고 학습하였고, 작금에 일어난 일들을 생각하며 분한 마음에 답답해했으며 무료할 때에는 간혹 글도 지어 공의 속 마음을 비쳐보이기도 하였다. 모친상의 삼년복을 벗고 죄인의 신분에서 풀려났는데, 그 때 문정공이 천관(天官)이 되었기에 공은 볼모로 심양에 들어가게 되었다. 공은 심양에서 돌아오자마자 직강에 복직되어 교리를 거쳐 얼마 후 외직으로 김제군을 맡았는데, 이 때 문정공의 상을 당하였다. 상복을 벗으니 검상과 사인에 제수되어 사간 겸 필선으로 옮겼다. 공은 궁궐 보수에 참여한 공으로 품계가 통정(通政)에 올랐고 조금 후에는 금성현을 맡아 나갔다가 오래지 않아 그만두고 돌아왔다. 이때 마침 인조께서 승하하셨다.
이후 공은 공조 참의를 거쳐 동부승지로 옮겼고 우부승지에 올라 조금 후에 예조참의를 제수 받았다. 공은 다시 정원으로 돌아와 청음(淸陰) 김 문정공을 만류하여 조정의 새로운 변화에 보탬이 되게 하자고 청하였다. 이어 공이 상소하기를 “유계(兪棨)의 일에 대해서는 아직 가납치 않으셨고, 또 송시열의 진언에 답하신 것에도 화평한 기상을 많이 잃으셨음이 보입니다. 포용하는 도량에 흠이 있을까 두렵습니다”라고 하였다. 공은 또 효사(孝思: 상복을 입고 돌아가신 부모를 기리는 행위)를 조금만 억제하고 성궁(聖躬: 임금의 몸을 높여 부른 말)을 보양하셔서 여러 신하들의 바램에 부응할 것을 청하였다. 공의 뜻이 간절하고 독실하여 임금께서 부드럽고 칭찬하시는 비답을 내린 후 거듭 전교하기를, “지난번 상소에서 너에게 정이 있었을 나는 심히 가상하게 여기노라”하였으니 대개 상께서는 잠저(潛邸)에 있을 때부터 공의 현명함을 알고 있었기에 이와 같이 받아들이셨던 것이다. 공이 배사(拜謝: 삼가 감사를 드림)하고도 진언하기를, “이제부터는 천변(天變)이 매우 혹독할 것이니 중추적인 일이 잘 이뤄지기를 예측키 어려울 것입니다. 믿을 바는 임금의 총명하심 뿐입니다”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나왔다. 그 때에는 김자점(金自點)이 곧 청나라 사신과 결탁하여 청음 등 여러 선비들에게 원한을 풀려고 벼르고 있었기 때문에 공이 그렇게 말한 것이다. 공은 다시 병조참의와 대사간으로 옮겨 민심을 진정할 도리를 상소하여 아뢰었고, 이어 장법(贓法: 관리의 아름답지 못한 일로 그 직책을 더럽힌 것을 다스리는 법)을 엄히 밝혀서 무너진 기강을 진작시킬 것을 청하였다. 공이 우승지로 돌아와 홍무적(洪茂績)이 일을 논하다가 견책을 당해 처벌받음이 마땅치 않다고 상소하여 진술하니 임금께서 바로 대면하시고 위로하고 타이르셨다. 공은 형조참의를 거쳐 간원으로 다시 와서 김자점의 역옥을 다스리는 데 참여하였는데 바른 의론을 유지하려고 힘썼다. 그리고 공은 품계가 가선에 올랐으며 부제학 겸 비변사 당상을 배수하여서는 동료들과 함께 화를 그치고 평안을 이룰 수 있는 계책을 아뢰었으며, 도승지로 옮겨서는 인재를 천거한 사람을 연좌시키는 법을 신명할 것을 청하였다.
공이 대사성 겸 동지의금부사를 거쳐 대사헌을 배수하였다. 이 때 사헌부의 금리(禁吏) 중에 뇌물을 받은 자가 있어 조사를 하였으나 그들이 불복하자, 장령 서원리(徐元履)가 원통히 여겨 뇌물을 준 자까지 무겁게 다스리려 하였다. 그러자 공이 이르기를, “그렇게 하면 금리로 하여금 더욱 교만케 하여 함께 풀려나가기를 바라게 될 것이다”하였다. 서원리가 공이 사사로운 뜻을 갖고 있는 줄로 의심하고 계사를 올려 공을 논척하였다. 임금이 그 말을 받아들여 공에게 관직 삭탈을 명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공은 병조참판으로 복직되었고, 부개(副价)로 차출되어 연산(燕山)에 다녀왔으나 돌아올 때는 텅 비어 있었다. 임금이 명하신 일에 대해 보고하고 좌윤 겸 동지경연을 배수하였는데 공은 계사를 올리기를, “신이 이번 걸음에 적들의 형세를 가만히 살펴보았는데, 지난 날 때보다는 크게 달라진 듯하였습니다. 청컨대 역설을 보내서 적들의 정세를 몰래 탐문케 하십시오”라고 하니 임금이 공의 말을 따랐다. 공은 이조참판을 거쳐 다시 대사헌이 되어 경연에 입시하였는데 임금께서 왕안석(王安石)이 나라를 그릇되게 한 것을 하늘의 운명 탓으로 돌렸다. 그러자 공이 이르기를, “그것은 그렇지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송나라 효종은 재능이 있었던 임금이지만 마침 금나라에 틈이 없어 끝내 중원을 회복하지 못하였습니다. 참으로 한스러운 일입니다”라고 하였다. 그 때에 『시경』의 박벌(薄伐)에 대한 일을 강로하고 있었는데 임금께서 이르기를, “나라 안이 다스려진 다음에라야 밖으로 오랑캐를 물리칠 수 있다. 지금의 급히 힘써야 할 일은 인심을 얻는데 있다”라고 하였다. 공이 대답하기를, “그 요체는 역시 인재를 얻는데 있습니다. 문무를 겸한 길보(吉甫)가 어찌 유독 주나라 때에만 나온다 하겠습니까? 다만 선왕(宣王)께서 그를 등용할 수 있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 근본을 미루어 보면 또한 부모에 효도하고 형제에 우애했던 장중(張仲)에게 있었습니다. 더욱 유념하시기를 바랍니다”라고 하니 임금이 훌륭하다고 칭송하였다. 대개 임금이 바야흐로 법도를 회복하는 데 뜻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공이 아뢰었던 말이 모두 이와 같았던 것이다.
공은 예문관 제학을 겸하였다가 다시 옥당의 장이 되었고 실록청 당상을 겸하여 인조실록 편수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경기도 관찰사로 외직에 나갔다가 이조참판으로 돌아왔다. 그 때에 임금께서는 마음을 단단히 차리고서는 산림의 행적이 바른 유학자들을 다시 부르고 우재(尤齋) 송시열(宋時烈)을 천관(天官: 吏曹)에 발탁하였다. 송공이 계를 올려 공의 도움을 요청하자, 공도 마음을 합해 서로 도우니 협심 상조하니 조정과 백성들 사이에서 그들을 칭송하였다. 이에 앞서 윤휴(尹鑴)가 벼슬이 없이도 대단한 명성을 얻고 있음을 공은 마음속으로 기뻐하지 않았다. 공은 문충공이 윤휴의 부친에게 속임을 당한 일을 인용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도 자못 해를 끼칠 사람이 아니겠느냐?”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 때에는 송공이 세상의 여론을 따라 7등급의 관직을 올려서 그를 등용하려고 하였다. 공이 그것은 불가하다고 역설하였으나 송공이 듣지 않았다. 훗날 윤휴가 좌천되자 사람들은 공의 선견지명에 감복하였다. 오래지않아 홍문관과 예문관의 대제학에 임용됐는데 공은 제수의 명을 듣고 근심하면서 사직하는 상소를 올리기를, “신의 할아버지가 선조 임금 대에 다행히도 문묵(文墨: 글과 글씨)으로 지우(知遇: 자신의 학식을 남이 알아 후하게 대함)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대를 이어 문단의 주맹(主盟)이 되신 신의 아비도 일찍이 이를 불안해하였는데 제가 어떻게 감당하겠습니까?”하고 다섯 번이나 끊임없이 상소하였다. 그러나 임금께서는 부드럽게 비답만 내리고 허락하지 않았다. 공이 비록 출사(出謝)하기는 했지만 마음은 하루도 편안할 날이 없었다. 조판서 경(絅)이 탄복하며 말하기를, “대제학의 직책을 이처럼 사양하였다는 것은 옛날에도 듣지 못했던 바이다. 이공은 참으로 현인이로다”라고 하였다.
효종이 승하하니 공은 빈전도감 당상에 차출되었다. 일을 마치자 품계가 가의(嘉義)에 올라 다시 아전(亞銓: 이조참판의 별칭)을 배수하였으나 공은 누차 사양하였다. 그래서 공은 예조로 옮겨졌는데 대제학만은 또 다시 간절하게 사양하였다. 대개 공은 자기의 집안이 대대로 귀하게 되었고 여러 종형제들이 모두 영예로운 자리에 나가 있었다고 여겼기 때문에 한결같이 모든 중요한 관직을 힘써 사양했던 것이다. 때마침 정언 이지익(李之翼)은 전라수사 이동현(李東顯)이 배에 쌀을 실어다가 이조참판의 처소에 일제히 보냈다고 하면서 붙잡아 문초하기를 청하니, 임금의 윤허가 내려졌다. 이보다 앞서 이동현의 서신에서 “배를 물리고 이미 팔아버려서 공께 부응해 드리지 못하겠다”고 한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고 현재 관직을 맡고 있는 이공 응시(應蓍)에게 전해 물었더니 이공 또한 받지 않은 일이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 함께 공문을 발송하여 그 연유를 물었다. 그러자 대답하기를, “변응립(邊應立)이란 자를 시켜 서신을 전하게 하였는데 당초에는 그런 거짓을 말했을 것으로는 생각되어지지 않습니다. 이번에 살펴보니 서신의 봉투 안에 과연 공의 이름을 도용하였던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변응립이 조금 후에 붙들려 왔기에 근거를 캐어보니 죄상이 양영남(梁穎南)에게까지 미쳤는데, 문초를 한 후 곤장을 쳐서 귀양 보냈다. 그 때에 공은 효종실록의 편수를 맡고 있었는데 오래도록 죄를 짊어지고 있으니, 총재관 이공 경석(景奭)이 걱정이 되어 조정에 물어 처리하기 청하였다. 임금께서 이르기를, “이모가 만일 참으로 청탁이 있었다면 어찌 그 서신을 응시에게 보내려 했겠는가?”라고 하였다. 만약을 몰라 호조와 공조의 낭관으로 하여금 쌀을 실은 배가 있었는지 없었는지를 대조해 보라 하였더니, 금년에는 전라도 수영의 배가 경강에 온 일이 없었다고 알려 왔다. 다시 대신들에게 의논하라 명하니 영의정 정태화(鄭太和)가 아뢰기를, “만일 동현을 문초하려 한다면 이모는 반드시 나오지 않을 것 입니다. 또 지금 대론(臺論: 사헌부나 사간원에서 관리의 탄핵한 것)도 없던 일로 돌리고 있으니 불문에 부치기를 청합니다”라고 하니 임금께서도 이에 따랐다. 그러나 공은 상소를 올려 대죄하고 관직을 삭탈하기를 청하였다. 임금께서는 비답하기를, “내가 이미 그대의 사정을 헤아렸으니 그대는 안심하고 사직치 말라”고 하였고, 바로 정원에 패초(牌招: 승지가 임금의 명을 받아 관원을 부를 때 사용하는 나무패)를 명하니 공은 마지못해 명에 따랐다. 효종실록을 편수하는 일이 끝나자 공은 품계가 자헌(資憲)에 올랐고 예조판서를 제수하였으나 공은 대제학까지 사퇴하였지만 윤허하지 않았다.
공은 공조판서로 옮겨서 왕대비의 옥책을 지었으며 품계가 정헌(正憲)에 올랐다. 공이 실록을 태백산에 봉안하고 돌아와 성 밖에 당도하여, 일을 논의했던 간관들이 지평을 배수하고 공동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공도 다시 상소를 올려 처벌을 기다리니, 임금이 비답하기를 “이미 변명이 된 일에 너무 혐의를 둘 것이 없으니 사직치 말고 마음 편히 들어오라”고 하였다. 이것은 대개 이지익(李之翼)이 그 동안 충청도 군막의 막좌로 나가 호서(충청도) 사람 변극휴(卞克休)를 꼬드겨 공을 공격하는 상소를 올리도록 했고, 지금의 피사(避辭)에서도 이동현의 죄목을 불문에 붙인 것은 오로지 공이 권세 있고 귀한 지위에 있기 때문이며 아울러 제공이 붕당을 지어 서로를 두둔하여 사실을 은폐하고 조정과 백성들을 현혹할 계책을 꾸미고 있다고 공격했기 때문이다. 사간원에서 이지익의 출사를 계청하니 유계(兪棨)가 옥당에 있으면서 상소하기를, “헌신(憲臣: 대간)이 조정의 의론이 이미 결정되었는데도 오히려 미혹시키고 있습니다. 진실로 원망이 있어서가 아니라 필시 고집스럽게 끈질긴 성품 탓일 것입니다. 하물며 간원이 일을 처리할 때 공적인 의론을 이처럼 무시한다는 것은 관리가 조정에서 취해야 할 행동거지가 아닐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지익이 재차 변론하면서 처음에 보내온 쌀 몇 포 베 몇 필의 실제를 거론하였고, 또 “배안에서 그 일가되는 사람들이 돌려보낸 곽을 실었는데, 그것을 직접 본 사람이 많았었다”고 말하니 대신들도 이제 와서는 탄핵해야 한다고 하였다. 드디어 양영남과 이졸까지를 아울러 붙잡아 문초하자, 공도 그들과 똑같이 의금부의 신문을 받겠다고 소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동현이 신문에 대답하기를, “관을 실은 배는 본래 작은 배를 사용했으며, 고양에서 관을 내려주고 바로 돌아갔었다”고 하였고 이졸들을 문초 해봐도 별다른 지적이 없었다. 또 전라수영의 장부를 조사 해봐도 모두가 이지익의 피사(避辭)와는 맞지 않아 결국 이지익까지 문초하라고 명하였다. 이지익의 변명서에서도 목격자의 성명을 거론치 않았고 홍명하(洪命夏)를 심하게 공격했는데 홍공이 가장 억울하게 생각했다.
공은 또 판의금부사가 되었다. 오랜 뒤에 임금이 수상 정공에게 이르기를, “양영남이 누차 엄한 신문을 당해 일의 시종을 자백하였다. 그 일은 이모가 직접 작성한 서신이 아니였음은 분명하다”라고 하며, 양영남만 북쪽 지방으로 유배케 하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풀어주었다. 그 때에 공은 이미 동관(冬官: 공조의 별칭)을 체직하고 있던 때였다. 처음 양영남이 국문을 받게 되었을 때 국구 김우명(金佑明)이 비밀리에 사람을 시켜 동정을 살피게 했다. 홍공이 사람을 보내 그 까닭을 물었다. 이에 국구가 소장을 올려 스스로 조급하게 홍공을 매우 배척하였는데, 그것은 대개 국구는 그 일에 대해 논의를 주도하는 자들과 가까운 친척이었으며 또 공을 둘러 싼 한 무리의 사류들을 매우 미워하였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임금의 마음도 조금 변하였고, 언로를 주관한 사람들도 헌관을 붙잡아 문초한 일을 허물하였으며 여론도 분분하였다. 유공(兪公)이 이른바 협잡한 자가 있다고 한 말이 여기에 이르러서 징험이 된 셈이니 식견이 있는 사람들은 외척이 차츰 전횡하는 것을 더욱 걱정하게 되었다. 최후에는 우재 송공이 이를 논하기를, “문로공(文潞公)은 비록 등롱금(燈籠錦)이 있다는 비방을 받았지만, 의연히 송나라를 융성하게 만든 뛰어난 신하가 되었다. 하물며 애초부터 등롱금이 없는 사람에 있어서랴?”라고 하였는데 듣는 사람마다 옳은 말이라고 하였다.
공은 드디어 양주의 풍양으로 나아가 진정의 소를 올렸으나, 임금은 부드러운 비답만 내리고 윤허치 않았다. 공이 다시 병을 핑계 삼아 대제학을 비롯한 모든 소임을 사양하였는데 오랜 뒤에야 비로소 윤허가 내렸다. 이로부터도 우참찬, 대사헌, 한성 판윤, 겸직으로 동지경연사, 지의금부사, 춘추관사를 지내고 호조판서에서 예조판서에 다시 올랐다. 병오년(현종 7, 1666년) 정월 초하루에 병으로 성동의 옛 집에서 돌아가시니 향년 55세였다. 마침 일찍이 시약(侍藥)을 맡은 공로가 있어 품계가 올라야 하였다. 대신들이 임금께서 애도하는 예절을 베풀기를 청하니, 의정부 우의정이 특별히 증직되었다. 공은 가평(嘉平) 조종현(朝宗縣)의 선롱(先壠)에 장사 지냈다가 22년 후인 정묘년(숙종 13, 1687년)에 문충공의 묘 뒤편에 개장하였다.
이씨의 가계는 당의 중랑장 무(茂)에게서 나왔으니 실은 농서(隴西) 사람인 것이다. 우리 조선 때 들어와서는 휘 석형(石亨)은 삼장(三長: 과거의 初試, 覆試, 殿試) 장원하였고 좌리공에 책훈되어 연성부원군에 봉해졌는데 공에게는 육세조가 된다. 증조 휘 계(?)는 증 영의정이며, 이 분이 문충공 휘 정구(廷龜)를 낳으니 좌의정까지 올랐고 문장과 덕업으로 일대의 이름난 대신이 되었다. 문정공 휘 명한(明漢)은 벼슬은 총재에 그쳤으나 풍류가 넉넉하여 선조의 아름다운 기풍을 잘 계승하였다. 박부인은 반남(潘南)의 큰 가문인 우참찬 동양(東亮)의 따님인데 지극한 성품과 높은 학식으로 일컬어졌다. 공은 안산 이씨(完山李氏) 영의정 성구(聖求)의 따님과 먼저 혼인하였는데, 부인은 지조가 바르고 굳세어서 오랑캐가 강화도를 함락하자 칼을 뽑아 자결하였다. 나라에서 부인에게 정려가 내려졌다. 공은 부인과의 사이에 일녀를 두었는데 승지 김만균(金萬均)에게 출가하였다. 이어 공은 다시 문화 유씨(文化柳氏) 군수 인성(仁聲)의 따님과 결혼하였는데, 아녀자의 덕을 겸비하여 공을 섬김에 한 번도 도리에 어긋나게 간섭한 일이 없었으며 여러 아들들을 가르치고 훈계함을 더욱 엄히 하였다. 공은 부인과의 사이에서 3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 성조(成朝)는 군수요, 증조(重朝)는 일찍 죽었으며, 해조(海朝)는 진사이다. 장녀는 현령 조헌주(曺憲周)에게 출가하고 차녀는 원몽은(元夢殷)에게 출가하였다. 공의 첩에게서도 1남 2녀가 있는데 아들은 우조(羽朝)이다. 김만균은 1남 3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진옥(鎭玉)이다. 성조는 4남 3녀를 두었은데, 아들은 우신(雨臣), 주신(舟臣), 여신(礪臣), 매신(梅臣)이다. 해조는 2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징신(徵臣), 숭신(崇臣)이다. 조헌주는 5남 3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하중(夏重), 하성(夏盛), 하망(夏望), 하종(夏鍾), 하정(夏挺)이다. 원몽은은 1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명설(命卨)이다. 우조는 4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호신(?臣), 규신(奎臣), 용신(龍臣), 웅신(熊臣)이다.
공은 사람됨이 엄중하고 크고 훌륭하며, 기운이 영특하고 빼어나서 공을 보는 사람마다 바로 대인임을 알 수 있었다. 공은 어려서부터 타고난 성품이 빨리 깨우쳤다. 민응건(閔應騫)은 사계(沙溪) 김선생 문하의 제자로 엄하고 굳세며 법도가 있었다. 문정공이 민공에게 나아가 『소학』을 배우게 하자 공은 게으름을 피우지도 않고 부모의 뜻을 잘 받들었으니 벌써 부모를 섬기고 어른을 공경하는 도리를 알았던 것이다. 장성해서는 기옹(畸翁) 정공에게 수업하여 문학이 날로 진취하였다. 집안에서의 몸가짐도 독실하여 문충공과 문정공을 효도로 공경하여 섬겼으며, 모부인 박씨께서 병이 위독하였을 때 늘 배를 먹고 싶어 하였는데 배를 구해드리지 못한 긋을 한스럽게 생각하여 공은 평생토록 배를 먹지 않았다. 양친의 상을 당한 후로는 소복으로 일생을 마쳤고, 문정공이 만년에 갑작스런 변고로 돌아가시자 선묘(문충공의 묘)에 비를 못 세운 것을 한탄하였다. 공이 그 뜻을 받들어 이루어 드렸다. 공의 막내 고모가 늙고 가난하게 살았는데, 공은 날마다 음식을 보내어 공양하였다. 중씨(仲氏: 氷軒公)와 숙씨(叔氏: 琴谷公)가 일직 별세하였음을 서럽게 여겨 중씨에게는 작은 아들을 주어 후사를 잇게 하였고 숙씨에게는 문충공의 옛집을 나눠주어 고과(孤寡)로 하여금 생업을 잇게 하였다. 그리하여 여러 형제들과 화락하는 것에 틈이 생기는 일이 없었으나, 혹 실수가 있으면 엄하게 꾸짖었다. 평소에 집 사람들의 살림 속은 물은 일이 없이 다만 죽정(竹亭) 한 채를 짓고 손님이 오면 반드시 술을 내오라 하여 시를 읊으며 유유자적하니 사람들이 그 청아하고 아름다운 풍치에 감복하였다.
임금을 섬길 때는 속이지 않는 것을 위주로 하였다. 더욱이 풍치로써 스스로 힘써 병자년과 정묘년의 나라안의 여론에서는 적과의 화의를 주장하는 의론의 잘못을 극론함으로써 공을 귀양 보내자는 논의가 있었지만, 뉘우침은 없었다. 난리를 치루고 조정에 돌아온 뒤로는 마침 효종이 성심성의껏 정치를 하니 선한 선비들이 몰려들었다. 공도 임금의 특별한 사랑을 입어 낙정(樂靜), 시남(市南), 창주(滄洲), 기천(沂川) 등 여러 제공들과 함께 앞뒤로 잘 협력하였으며, 오직 나라의 계책과 사론을 북돋기에 힘썼으며 현명한 유학자들을 등용하는 일에도 많이 간여하였으니 서로 의로운 뜻도 잘 맞았다. 공은 그 때 비록 나이가 들고 겸손하여 삼가느라 일을 운용한 흔적은 볼 수는 없었으나, 위로 돕고 아래로 영향을 미치는 것에서는 일세의 깊이 의지하는 바가 되었음을 볼 수가 있었다. 기해년(효종 10, 1659년)과 경자년(현종 1, 1660년) 이래로는 점차 흥망성쇠의 염려가 있어 걱정을 숨기고 깊이 탄식하였다. 경륜으로써 보호될 길을 생각하였으나, 횡역을 당한 후로는 더욱 물러나서 은거하려는 생각이 간절하였는데 이루지 못하고 말았다. 임인년(현종 3, 1662년)간에 청나라 사신이 명나라의 영력제가 해를 입었다는 것을 알리자 공은 비분을 이기지어 못하여 시를 지어 우재(尤齊)에게 부쳤다. “백일은 서쪽들에서 병장을 물들이고 돌아갔다니, 중원의 소식에는 용안도 울었으리라! 충신열사의 가슴이 무너지는 슬픔은 응당 궁산의 험한 절벽과 저 먼 바다 사이에 엉켜 있으렸다!” 하였는데 글의 뜻이 매우 격렬하고 엄했다. 나중에 우재도 화답하니 이 시가 세상에 입으로 전해져서 암송되었다. 명하기를,
덕이 밝고 성의가 있으신 큰 성씨는 농서(隴西)에서 비롯했도다.
저헌(樗軒: 李石亨, 1415~1477) 의 명세로, 후손들 미혹치 않게 됐도다.
아름답도다! 문충은 더욱 번성하여,
문으로는 세상의 스승이 되고 덕으로는 세상을 덮었도다.
태재(太宰)가 됨에 이르러서는, 전무(前武)에도 빛이 됐도다.
공이 이어서 일어나니,
단혈(丹穴: 단사가 나오는 구덩이로 봉황이 나오는 곳을 말함)에서 나온 우인이로다.
어린 나이에 벼슬에 나아간 경우 예로부터 쓰러지는 바로다.
그래서 공은 자기 생각을 억누르고 몸을 숨겨 은둔하며, 경전과 역사를 탐구했도다.
조정에 발붙였을 때에는, 나라가 마침 굳세지 못했도다.
여러 차례 간절히 상소를 올렸는데, 그 뜻이 엄하고 의기는 정대했도다.
저 아득한 서쪽 변방에서는 오히려 풍운이 격앙했다가, 전쟁은 이미 진정이 되었도다.
성인과 같은 임금께서는 보좌에 있으면서
나이 지긋한 명철한 신하를 도탑게 등용하고, 현명한 유학자들도 불러 들였도다.
오직 이 대의만을 숭상하고 부지하셨다.
공은 그 사이에 있으면서, 조용히 하는 일 없는 듯 하였도다.
그러나 때때로 한 말씀씩 올림이, 어찌 도움이 없었다 할 손인가?
그래서 총애도 받고, 세상의 문맹도 되었도다.
명을 듣자 두려움뿐 이었으니, 어찌 담장을 맴돌뿐이었으랴?
일이 뜻하지 않게도 확대되어 더욱 어렵게 되었도다.
법대로 실상을 엄격히 조사하니, 하나도 밝혀지지 않음이 없었도다.
비유컨대 형벽같거늘, 무엇이 갈고 닦을게 있다던가?
사도와 질종등, 지위와 인망이 아울러 극진했도다.
시종이 거의 여일하였으니, 조상들에게 욕됨이 없으리로다.
조종(朝宗縣)의 산기슭은 산도 높고 물도 깊도다
. 나는 큰 돌에 명을 새기노니, 어리석고 몽매한 자들을 단단히 삼가게 하고자 함이다.
백세 뒤에라도, 지나는 자 공을 본받을지어다.
숭정 기원후 76년(현종 29, 1703년) 계미년 8월 일 세움.
李一相神道碑
有明朝鮮國正憲大夫禮曹判書兼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義禁府春秋館成均館事五衛都摠府都摠管同知 經筵事 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右議政兼領 經筵事監春秋館事謚文肅李公神道碑銘幷序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兼領 經筵事監春秋館事 朴世釆撰
資 憲 大 夫 議 政 府 右 叅 賛趙相愚書
嘉 善 大 夫 吏 曹 叅 判 藝 文 館 提 學金昌協篆
故大宗伯延安李公諱一相。字咸卿。號靑湖。當皇朝毅宗初元。年甫十七歲。中謁聖文科第四名。實我仁祖大王六年也。時大父文忠公方位端揆。父文靖公由學士出守南陽府。殆國朝以來所未有。一世艶稱之。乃公以少年高科爲不幸。遂不仕。一切閉戶讀經史。二公勖而成之。雖間有槐院,翰苑,玉堂之選。皆不顧也。居五歲。始拜說書。移檢閱。至奉敎。陞典籍。轉兵曹佐郞,副修撰。丙子拜正言。糾論不憚貴近。又言國事至此。宜特甄拔人才。以備緩急。其在罪者。亦可調敍。上有嚴旨。公引避。仍請大奮發大振作。又批以留念量處。乃申白殿下量處之際。虜當渡河。願卽日出御正殿。策勵群臣。熟講戰守之策。毋貽後悔。上亦不納。蓋時已斥絶虜使。而尙事泄沓。公言如此。移修撰。同諸僚上箚。極陳破私意務誠實之說。轉獻納。與諫長尹公煌。請節損諸司及外方宂費。以補軍需。會朝廷託以偵探。欲復通虜。公慷慨倡議爭執。司諫鄭太和不從。公又啓言。頃者賊虜僭號馳書。乃幸殿下赫然奮發。嚴辭明斥。告諭八方。咨奏天朝。此誠轉危爲安之大機也。曾未數月。橫議蜂起。至於差人送書。擧措疑惑。是不幾下欺吾民。上負皇朝乎。辭意正大。聞者歎服。其冬虜果大至。上議幸南漢。公當從駕。會聞將移江都。乃計暫省母夫人朴氏危疾。旋到行在。則上已回蹕入南漢。城門閉矣。與沈公之源等。彷徨涕泣。不得已由間路往依江都分司。明年上出城。俄遭母夫人喪。旣而臺諫論未執靮者削黜。時方治斥和諸臣罪。公名亦在焉。上特命遠竄靈巖。移配渭原。公銜恤流徙西南幾千里。能猶以理自勝。朝夕哭泣之暇。乃得肆力於聖賢經傳。尤喜晦菴遺書。孜孜誦習。又痛念時事憤鬱無聊。間或著文以見志。服闋蒙宥。文靖公時爲天官。公遂入質于瀋陽。比歸復直講,校理。俄出守金堤郡。遭文靖公憂。服闋薦拜檢詳,舍人。移司諫兼弼善。以與修闕勞陞通政階。尋出監錦城縣。未幾棄歸。而仁祖禮陟矣。由工曹參議移同副承旨陞右副。尋除禮曹參議。還政院。請留淸陰金文正公。以輔新化。仍上疏言兪棨等事。旣未虛納。又答宋時烈進言多失和平。恐欠包容之量。且請少抑孝思。保養聖躬。以副群下心。旨意懇篤。優批後申敎曰。頃疏予甚嘉爾有情。蓋上自在潛邸。素知公賢。故開納如此。公拜謝進曰。目今天變孔棘。事機難測。所恃者聖明耳。因垂涕而出。時自點將因北使逞怨於淸陰諸賢然也。移兵曹參議,大司諫。疏論鎭定民心之道。繼請嚴明贜法。以振頹綱。還右承旨。疏陳洪公茂績不宜以論事被譴。上卽賜對慰諭。由刑曹參議復長諫院。與治自點逆獄。務持正議。陞嘉善階拜副提學兼備邊司堂上。偕諸僚陳弭災召和之策。移都承旨。請申明擧主延坐法。歷大司成兼同知義禁府事。拜大司憲。禁吏有受賂者。按治不服。掌令徐元履冤之。將重究其賂者。公謂是當使禁吏益驕。欲並放焉。元履疑公有私啓斥之。上累入其說。命削職。未幾敍復兵曹參判。充副价赴燕山。歸橐蕭然。復命。道拜左尹兼同知經筵。啓言臣於今行。竊觀彼中形勢。大異前日。乞命譯舌。密探敵情。從之。由吏曹參判復長憲府。嘗侍經筵。上欲以王安石誤國歸之天數。公曰此恐不可。然如宋孝宗可以有爲。適値金國無釁。遂不能恢復中原。誠可恨也。時講詩薄伐事。上曰內修然後可以外攘。方今急務在於得人心。公對曰其要亦在於得人才。文武吉甫。豈獨生於周時。只是宣王能用之耳。然若推其本。又在於孝友張仲。願加聖念。上稱善。蓋上方有志於規恢。公之前後進言乃如此。兼藝文館提學。復長玉堂兼實錄廳堂上。與修仁祖實錄。出爲京畿道觀察使。還拜亞銓。時上益圖治理。復召山林儒賢。擢尤齋宋公時烈天官。宋公啓請公自助。公亦協心相濟。朝野稱之。先是尹鑴以布衣負盛名。公心不喜。引文忠公見欺於其先人事曰。此殆成父子歟。至是宋公欲循外議超七階進用。公又力言不可。宋公不聽。及後鑴敗。人多服公先見。未幾進兼兩館大提學。聞命愀然。疏辭言臣祖在宣廟朝。幸以文墨知遇。至於繼世主盟。臣父亦嘗憂縮。況臣安敢當。五上章不已。優批不許。後雖出謝。其心未嘗一日安也。趙判書絅歎曰辭文衡至此。古所未聞。李公其賢矣。孝廟昇遐。公哀痛待甚。差殯殿都監堂上。事竣陞嘉義階。復拜亞銓。累辭移禮曹。復辭文衡益懇。蓋公自念家世踵貴。諸從兄弟皆通榮籍。由是一皆力辭淸要焉。會西江人有流言全南左水使李東顯載米于船。並送亞銓所。正言李之翼請拿問。允之。先是東顯有書言退船已賣不克副。公異之。使傳時任李公應蓍亦不知。遂同發書問其故。答謂有邊應立者傳書。初不料其僞。今謹封內。果用公名焉。應立俄就捕。根究跡到梁穎南。乃刑訊徒配。時公掌修孝廟實錄。久在引罪。摠裁官李公景奭以爲憂。請詢廟堂處之。上先令戶工二曹郞覈米船虛實。歸對今年無湖營船到江者。又命議大臣。領議政鄭太和啓言若問東顯。李某必不敢出。且今臺論歸虛。請勿問。從之。公陳疏待罪。仍乞削職。批曰予已洞燭。卿其安心勿辭。旋命政院牌招。公黽勉承命。事竣陞資憲階拜禮曹判書。辭並及文衡。不許。移工曹。以撰王大妃玉冊陞正憲階。奉安實錄於太白山。歸到城外。聞前論事者拜持平引避。公陳疏待罪。批曰已卞之事。不必深嫌。宜勿辭安心入來。蓋其人間出佐湖幕。未幾有湖士卞克體者疏攻公甚力。衆已疑之。至是避辭專致不問東顯罪。目以公權貴。而並斥諸公朋比壅蔽。爲眩惑中外之計。諫院啓請出。兪公棨在玉堂上疏言。憲臣於朝論旣定之後。猶且迷謬。苟非有挾。必是執拗。況諫院處置乖當如是。恐非朝家擧措。遂乃再避。始擧所送實數米幾包布幾匹。又言船中實載其一家歸櫬人多目見者。至是諸大臣亦曰可覈。遂並拿穎南及吏卒等。公疏請一體就理。不許。東顯對獄言流言在季春。載櫬船在仲夏。本用舴艋。解櫬高陽而歸。吏卒等考掠無異指。竟與避辭相左。遂命逮問。供辭又盛攻洪公命夏。以洪公素冤公。又方判金吾也。久之未決。上謂首相鄭公曰。穎南累自引服。其移配北道。他皆放釋。時公已遞冬官矣。初穎南被鞫。國舅金佑明密使人覘察動靜。洪公因人問之。國舅乃上章自辨。仍深斥洪公。蓋國舅爲論事者近戚。而深思公一隊士類故耳。由是上意稍變。而主言路者亦咎其逮問憲臣。餘論紛然。識者益以戚畹漸橫憂之。最後尤齋宋公論此謂文潞公雖亦有燈籠錦之謗。然潞公依舊爲盛宋名臣。況其初無燈籠者耶。聞者是之。公遂轉往楊州之豐壤。上章陳情。優批不許。久而後始許自是累歷右參贊,漢城判尹,兼同知經筵,知義禁府,春秋館事,戶曹判書。還禮曹乃以丙午正月朔。疾卒城東舊第。壽五十五。會當以侍藥勞陞資。大臣請推隱卒典特贈議政府右議政。從葬加平朝宗縣先壟。後二十二年丁卯。改葬于文忠公墓後。系本出唐中郞將茂。入我朝有諱石亨。三場壯元。策佐理功爲延城府院君。於公爲五世祖。曾祖諱棨縣監。贈領議政。是生文忠公諱廷龜。後進位左議政。文章德業。爲一時名相。文靖公諱明漢。官終冢宰。風流篤厚。克繼先美。朴夫人潘南大族。右參贊諱東亮之女。尤以至性高識稱。公娶完山李氏。領議政諱聖求之女。志操貞固。虜陷江都。夫人引佩力自決。事聞旌閭。生一女適承旨金萬均。繼娶文化柳氏。婦德甚備。事公未嘗以非義干。敎戒諸子益勤。生三男二女。男成朝郡守。重朝早歿。海朝進士。女適縣令曺憲周,元夢殷。側室男羽朝。女適具文徵。公爲人嚴重宏偉。氣韻雋爽。見者輒知其大人也。幼性敏悟。閔公應騫。沙溪金先生門弟也。嚴毅有法度。文靖公令就受小學。公服膺不怠。已知事親敬長之禮。旣長質業于畸翁鄭公。文學日進焉。內行篤至。事文忠公及文靖公孝謹。母夫人疾谻。思嘗生梨不得。公遂不忍食。及喪兩親。服素終其身。文靖公晩遭喪亂。恨不克樹碑先墓。公繼志以成之。有季姑窮老在堂。必日致饋養。痛仲叔早世。一與小子爲後。一分文忠公舊宅。業其孤寡。以及諸兄弟。湛樂無間。至或有失。規戒加切。素不問家人生產。唯搆一竹亭。賓至必命酒哦詩以自適。詞氣橫逸。所與遊盡一時名流。人服其淸致。事君主於不欺。尤以風裁自厲。丙丁之訌。極論和議之非。以至淪謫而無所悔。自經喪亂還朝。會値孝廟厲精。善類彙征。公又特被眷遇。乃克與樂靜趙公,市南兪公後先協力。唯國計士議是扶。及于儒賢登庸。亦多與之志義相符。公雖時已老成謙愼。未見運用之跡。其上輔下逮。爲一世所倚重者可見也。己庚以來。漸有消長之憂。亦必隱憂深歎。思所以彌綸調護。自遭橫逆。愈欲引退丘樊而不及遂。壬寅年間。北使告以永曆帝被害。公不勝悲憤。寄詩尤齋曰。白日西郊彩仗還。中原消息泣龍顏。忠臣烈士崩心痛。應在窮山絶海間。辭意激切。後尤齋和之。世皆傳誦。銘曰。
顯允大姓。肇自隴西。樗軒之鳴。俾後不迷。猗歟文忠。儀于盛際。文爲世師。德爲世庇。以洎太宰。有光前武。公乃嗣興。丹穴其羽。弱歲策名。振古所靡。克思晦藏。硏經訂史。比躡臺端。國適不競。累貢忠懇。辭嚴義正。逖彼西塞。猶自激仰。喪亂旣夷。聖主在上。優容耆喆。收召賢儒。惟茲大義。乃崇乃扶。公在其間。斂若無爲。時進一言。亦豈無裨。于以畀之。世主文盟。聞命祗懼。奚啻循墻。事或非意。展轉愈阨。按覆如法。無一不白。譬諸荊璧。何有磨磷。司徒秩宗。位望並臻。庶幾終始。無忝先人。朝宗之麓。山峙水湛。我銘大石。稚昧是飭。百世在後。過者之式。
崇禎紀元後七十六年癸未八月 日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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