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흥차사를 마감시키다 (출처 : 영의정실록, 박용부, 지식공감)
사람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심덕心德 하나로 운명을 스스로 결정한다 했다. 이성계와 비록 나이 차이는 세 살이 많았으나 성석린의 인품에 끌려 친구가 된 경우였다.
이성계는 어지러운 고려조정에서 묵묵히 제 할 일을 다 하고 있던 성석린을 매우 믿음직스러워했고, 특히 글씨에 뛰어나 명필로 알려진 성석린의 해서체와 초서를 매우 좋아하였다. 태종 즉위년, 이성계가 왕자의 난에 마음이 상해 옥쇄를 거머쥔 채 함흥으로 들어가 나오지 않고 모시러 가는 사신마다 함흥차사가 되니 성석린은 노구를 이끌고 이 난제를 풀고자 발 벗고 나서서 태종의 근심을 덜어주었다.
유난히 무더운 여름, 성석린은 한 사람의 시종도 거느리지 않고 흰 수염을 날리며 길을 떠나는데, 등이 몹시 구부러진 그의 뒷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눈시울을 젖게 하였다. 함흥 거처에서 성석린을 맞은 태조도 성석린만큼은 어쩔 수 없어 마음을 바꾸어 옥쇄를 지니고 도성으로 돌아오지 않을 수 없었다.
1401년 태종 1년 4월 17일 창녕 부원군 성석린을 안변에 보내 태상왕의 회사를 권유케 하다.
창녕 부원군 성석린을 보내어 태상왕의 임시거처에 문안하였다. 이때 성석린이 어미의 상례가 끝나지 않았는데, 임금이 박석명을 그 집에 보내서 말하기를, “부왕父王께서 오래도록 동북에 머무르시니, 생각하고 연모하여 마지 못한다. 부왕께서 믿고 중히 여기는 사람은 경 같은 이가 없으니, 경은 사정에 따라 상복을 벗고, 궁온(술)을 싸 가지고 가서 모시고 돌아오라.” 하였다.
성석린이 명령을 받고 길을 떠나니, 임금이 일렀다. “태상왕께서 본래 경을 중하게 여기시니, 경의 말은 반드시 따르실 것이다. 바라건대, 문안드린 끝에 은근한 말로 잘 아뢰어서 돌아오시게 하라.”
처음에 태상왕이 동북에 오랫동안 머무를 뜻이 있었는데, 마침 단주에 숯 비가 내린 괴변이 있었고, 또 가뭄과 흉년으로 인하여 백성이 굶주려 죽는 사람이 많으므로 돌아오려고 하였다. 4월 26일 성석린이 그곳에 이르니, 태상왕이 기뻐하여 말하기를, “일찍이 문안하는 자를 보아도 역시 기쁘지 않았었는데, 이제 경을 보니 반갑고 기쁘기 그지없다.” 하였다. 석린이 곧 궁온을 바쳐 헌수하고, 술이 얼근히 취하여, 조용히 돌아가시기를 청하는 뜻을 아뢰었더니, 태상왕이 웃으며 말하기를, “경이 돌아가자고 청한 것이 내가 돌아가려고 작정한 뒤이다. 경이 먼저 가라. 내가 뒤를 따르겠다.” 하였다. 성석린이 대답하기를, “주상께서 날마다 돌아오시기를 바랍니다.” 하였더니, 태상왕이 선뜻 고쳐 말하기를, “그렇다면 마땅히 경과 함께 돌아가겠다.” 하였다.
성석린이 머리를 조아려 사례하고, 곧 사람을 보내어 이 사실을 아뢰었다. 임금이 이를 듣고 감동하고 기뻐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태상왕의 가마가 장차 도착될 것이므로, 나가서 마이천에 머물러 축하연을 갖추고 기다렸다. 4월 28일 태상왕이 안변으로부터 이르니, 임금이 임시막사에 연향을 베풀고, 종친과 대신들이 잔치를 베풀었다. 조계승 익륜도 또한 참여하여 극진히 즐기고 파하였다. 성석린에게 안마를 내려 주었다. 태상왕이 먼저 서울로 들어오고, 임금이 따라 태상전에 이르러 문안하였다.
-태종실록 1년 4월 1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