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와 빈대의 전쟁사
오늘날 빈대는 밤에 활동하는 야행성이지만, 원래는 정반대 였다고 한다. 곤충학계는 오래 전 중동의 어느 동굴에서 박쥐의 피를 빨던 빈대 (시멕스 아드융투스)가 인간의 피를 빠는 빈대(시멕스 렉툴라리우스)로 진화했다고 보고 있다.
야행성 박쥐가 잠잘 때 피를 빠느라 낮에 활동 하던 놈들이, 어느 순간 그 동굴을 거처로 삼았을 원시인류의 피 맛 을 보면서 인간이 잠자는 밤에 피를 찾아다니게 됐다 는 것이다. 박쥐에서 인간 으로 숙주를 바꾼 건 탁월한 선택 이었다.
집단 거주의 도시 문명은 빈대에게 마르지 않는 혈액 공급원이 됐고, 인류의 여정을 따라 세계로 퍼져 나갔다.
이 성가신 동반자 를 떨쳐내려고 유황 훈증법부터 수은 스프레이 까지 온갖 독한 방법을 동원했지 만 번번이 패하던 인류는 2차 대전 무렵 마침내 승기 를 잡았다.
전쟁은 역시 혁신의 보고였다. 전투보다 전염병 에 더 많이 희생 되던 병사들을 지키려고 개발한 아주 독한 살충제 DDT가 제대로 먹혀들었다. 살포한 자리에 길게는 1년까지 잔유물이 남는 DDT의 특성은 빈대가 발붙일 곳을 남겨두지 않았고, 전후(戰後) 태어난 베이비부머는 빈대의 생김새를 모르는 첫 세대가 됐다.
하지만 생체 리듬 까지 180도 바꿨던 빈대의 적응력 은 DDT의 공습 속에서 그에 맞설 변이 유전자를 만들고 있었다. DDT는 생체막의 미세한 이온통로 로 침투해 빈대의 신경계를 파괴 하는데, 이 구멍을 닫아 살충제를 차단토록 진화한 놈들이 등장했다. 빈대계의 ‘전후세대’격인 살충제 내성 빈대 는 종전 반세기 만인 1996년 뉴욕에 출몰하더니, 2000년대 미국 전역으로, 2010년 대 유럽 각지로 퍼졌고, 이제 아시아 끄트머리 의 한국까지 왔다.
정부가 빈대 방역 에 나섰다.
국내 연구진이 내성 빈대용 살충 성분을 찾아냈다는 소식도 들리는 걸 보면, 인류와 빈대의 오랜 전쟁 에서 새 라운드가 시작됐지 싶다. 말로만 듣던 낯선 놈들이라 실제 피해보다 공포와 히스테리가 더 큰 듯한데, 당황하지 말자. 코로나바이러스의 숨가쁜 변이에 비하면 이놈들의 전술은 심플한 편 이다.
태원준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