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로 보는 환경
인구 증가와 산림
그러나 이렇게 식물의 종류가 풍부한 산림도 대륙으로부터 한반도로 인구가 유입됨과 동시에 숲에 대한 이용도 증가하게 되었기 때문에 변화를 겪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한반도에 거주하였던 인구를 시대별로 추산하면 다음과 같다. 즉 구석기와 중석기 시대(3만-1만 년 전)에는 인구밀도가 5km2에 1명으로, 남북한을 합하여 전체가 겨우 4만 명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신석기 시대(1만-4천 년 전)에는 총 인구가 22만 명으로 인구밀도는 1km2당 1명에 달하게 되었다(김준호, 1995).
이러던 것이 우리의 관심사인 삼국 시대에는 약 300만 명, 통일신라와 고려 때에는 450만 명, 조선 중기에서 말기에는 750만 명이 거주했을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한주성, 1990). 이 같은 인구의 증가는 세계의 다른 나라에서와 같이 농업생산성의 증가에 의하여 가능했던 것이다.
농경은 돌낫과 돌보습 등의 농기구와 탄화된 곡물이 함께 출토된 점으로 미루어 신석기 시대에 처음으로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청동으로 농기구를 만들어 사용하면서 신석기 시대의 돌로 만든 농기구보다 훨씬 높은 농업 생산성을 획득하였고, 청동기 시대 후기와 겹쳐지는 철기 시대로 들어서면서 농업 생산성은 더욱 향상되었다. 청동기와 철기가 바로 한 부족의 흥망을 결정하는 중요한 산업이 된 것이다. 청동기나 철기를 다룰 줄 아는 세력이 패권을 차지하게 되었다. 청동기나 철기 문명은 광석을 녹이기 위한 땔감으로 엄청난 양의 목재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청동을 만들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구리를 1kg 얻기 위해서는 162kg의 숯이 필요했고, 그만 한 양의 숯은 큰 소나무 10그루가 소모되어야 얻을 수 있었다. 1,200kg이나 되는 많은 양의 판장쇠가 금관총에서 출토되어 신라 시대의 철 생산 규모를 짐작하게 하였다. 철광석을 녹여서 쇠를 이렇게 많이 생산하려면 1만 그루가 넘는 소나무가 필요하였을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산림 파괴 없이는 청동기 문명과 철기 문명이 지탱될 수 없었던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기원전 500-400년경에 처음으로 철기가 사용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바로 고구려, 백제, 신라의 건국은 철기문화의 유입과 같은 시기에 이루어진 것이다. 철기를 생산할 수 있는 기술력을 가진 부족이 그렇지 못한 토착 세력들을 통합하는 과정을 통해서 고대국가가 성립된 것이었다. 기원전 1세기경에 부여와 고구려에 전파된 철 야금기술은 그 후, 시차를 두고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에서 더욱 발전하면서 철제 농기구나 무기의 생산이 박차를 가하게 되었고, 그 결과로 농업생산의 괄목할 증가를 실현시키면서 인구가 증가하였던 것이다.
철제 농기구의 개발·이용으로 그 이전에는 손도 대지 못하던 토지까지 개간 할 수 있게 되면서, 경작지 면적이 급속하게 늘어났다. 가속된 경작지 확대는 동시에 산림 파괴도 놀라운 속도로 증가시켰다. 철기 생산에 필요한 땔감을 확보하기 위해서도 산림이 파괴되었지만, 철 제도구로 목제생활용품을 많이 만들어 사용하게 된 것 역시 산림의 훼손을 부채질하였다. 즉, 철기 문명의 도래는 철의 생산에 필요한 산림의 파괴뿐만이 아니라 철제 농기구에 의한 경지확대와 목제품의 제조 등에 의하여 산림 훼손을 크게 부추기게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인구 증가와 산림 (역사로 보는 환경, 2009. 3. 10., 김정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