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13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묵상: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이 구절은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도 한두 번 들어본 말일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어떤 의미일까?
바울은 이 세 가지가 항상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 항상 있을 것이란 무슨 의미일까?
이 세상이 존재할 동안에는 항상 있을 것이라는 의미일까?
아니면, 이 세상이 끝난 다음 저 세상에서도 항상 있을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성경 해석학의 가장 기본 중의 기본은 문맥에서 그 의미를 찾는 것이다.
13절과 연관된 12절을 보면, 여기서 말하는 항상에 대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바울은 12절에서 "지금"과 "그 때"를 비교해서 말하고 있다.
12절,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12절,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12절,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12절,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여기서 말하는 "지금은" 당연히 바울이 살았고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이 세상 속의 역사일 것이다.
반면, "그 때에는" 이 세상의 역사가 끝난 후 저 세상을 말하는 것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아는 것은 이 세상에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저 세상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중요한 것은
"지금"과 "그 때"라는 단어를 사용한 후에
바울이 "항상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여기서 말하는 "항상"은 문맥 상,
이 세상뿐만 아니라 저 세상도 포함하는 것이며,
그 결과,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이 세상뿐만 아니라 저 세상에서도 존재한다고 해석하는 것이 논리적이다.
혹시 천국에서의 삶이 궁금한 사람이 있는가?
여기에 그 힌트가 있다.
천국에서도 믿음이 존재할 것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믿음은 예수님을 구주로 믿어 구원받는 믿음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믿음은 이 세상에서 구원받기 위해 필요한 믿음이기 때문이다.
또한 천국에서도 소망이 존재할 것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소망은 이 세상을 떠나 천국에 가는 소망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천국에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천국에서 존재하는 믿음과 소망이 무엇인지 그 의미를 정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천국에서도 믿음과 소망이 존재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 세상에 죄가 들어오기 전 에덴 동산을 생각해 보자.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에게도 믿음과 소망이 있었을까?
당연히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가진 믿음은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구원받는 믿음이 아니었고,
그들이 가진 소망은 죽어서 천국에 가는 소망도 아니었다.
그들은 죄가 들어오기 전이었지만 믿음이 있었고,
에덴 동산에서 그들은 하나님을 믿었고, 서로를 믿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동산을 가꾸면서
더욱 더 아름다운 동산을 만들기를 소망했을 것이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문화 명령에 대한 소망을 가졌을 것이다.
사랑도 마찬가지이다.
죄가 들어오기 전 에덴 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서로를 사랑하는 삶을 살았을 것이다.
이러한 종류의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천국에서도 존재할 것이라고 우리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그런데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강조하는 것은 "사랑"이다.
13절,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믿음과 소망과 사랑 중에서 사랑이 제일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제일이라는 의미는 무엇일까?
첫 번째라는 순서적 의미일까?
아니면 가장 크다는 최상급적 의미일까?
문맥상 후자일 가능성이 더 높다.
고전 12:30,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이겠느냐 다 벙언을 말하는 자이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이겠느냐"
고전 12:31, "너희는 더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바울은 "더 큰 은사를 사모하라"는 말을 한 후에,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설명해 주었기 때문이다.
고전 12:31에서 "더 큰"에 사용한 헬라어와
고전 13:13에서 "제일"에 사용한 헬라어는 기본형이 똑같은 단어이다. (megas)
단지 다른 것은 비교급이냐 최상급이냐만 다른 것이다.
그러니까,
사랑은 다른 모든 은사보다 더 큰 은사라는 것이고,
믿음과 소망과 사랑 중에서도 제일(가장 크다)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왜 사랑이 가장 큰 은사이고, 왜 사랑이 제일일까?
왜 바울은 지금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이 말을 하고 있을까?
그 이유는
고린도교회 안에서 발생한 대부분의 문제는 사랑으로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왜 그럴까?
그것은 사랑이 가진 특징 때문일 것이다.
고전 13:4~7,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로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교회 안의 대부분의 문제는
오래 참을 때, 온유할 때, 시기하지 않을 때,
자랑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을 때, 무례히 행하지 않고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을 때,
성내지 않고 악한 것을 생각지 않을 때,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진리와 함께 기뻐할 때 해결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시작과 끝은 "오래 참고 견디는 것"이다.
가장 중요하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진 성도를 만났을 때, 오래 참고 견디고 있는가?
그렇다면, 우리에게도 사랑이 있는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우리에게 사랑이 있다고 말하지 말아야 한다.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사랑을 추구하라고 권면한 이유는
그들이 사랑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서 교회가 하나되는 모습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 가지만 더 생각해 보자.
고린도전서는 하나의 편지로 원래는 각 장이 분리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다른 성경도 마찬가지이다.
고전 13장이 끝난 후,
고전 14장의 맨 앞에 "사랑을 추구하라"는 명령문이 나온다. (고전 14:1)
그러니까,
바울이 원래 쓴 편지는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는 평서문으로 단락이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그 사랑을 추구하라"는 명령문으로 단락이 끝났다는 것이다.
그리고, 헬라어 성경에는 "그"라는 정관사가 "사랑" 앞에 있어,
지금까지 앞에서 말한 "그 사랑을 추구하라"고 바울이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바울은 단순히 사랑이 무엇인지에 대한 지식을 전하지 않았던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사랑이 무엇인지 알고 그 사랑을 추구하는 삶을 살기를 원했던 것이다.
우리는 어떤가?
우리는 사랑을 알고 있는가?
우리는 사랑을 추구하고 있는가?
그래서 우리의 사랑으로 교회를 든든히 세워나가고 있는가?
주님,
주님을 닮아 오래 참고 견디는 사랑을 추구하기 원합니다.
사랑없이 그 어떤 것도 주님의 교회를 든든히 세워나갈 수 없음을 믿습니다.
가장 큰 은사, 믿음과 소망과 사랑 중에서도 제일인 사랑을 추구하는 저희 모두가 되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