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소개
추억의 영화
15. 현해탄은 알고 있다(The sea knows, 1961)
<현해탄은 알고 있다>는 서울대 의대 출신 감독이었던 김기영이 한운사의 同名의 라디오 드라마를 각색하고 연출한 1961년 당시로서는 엄청난 블록버스터영화이다. 난 초딩 때 이 영화를 봤는데 영화 후반부의 폭격기 공습장면에서 시가지가 불타고 그 속에서 사람들이 타서 죽고 시체가 쌓이고 그 시체에 또 불을 지르고 하는 장면들이 너무나 무섭고 긴장되어 간을 졸이고 긴장하며 봤던 기억이 있다. 나는 그때 그 장면들을 실제인 것으로 알고 숨죽여 봤던 것이다. 얼마나 실감이 났겠는가? 영화를 하나도 모르던 어린 내가 이 영화를 보게 된 것은 하나의 행운이었다. 이 영화야 말로 한국영화사의 고전 중 고전이다.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4년 1월, 조선인 학도병으로 일본 나고야에 있는 수송부대에 끌려온 아로운(김운하)은 과거 총독에게 대들었던 요주의 인물로 찍혀 일본의 고참병 모리(이예춘: 이 영화로 1회 대종상 남우조연상)에게 엄청난 학대를 당한다. 당시 군국주의를 표방한 일본의 군대란 학대와 모욕적인 기합이 일과였던 것이다. 특히 미운 털이 박힌 한국인인 아로운은 그 학대의 표본이었는데 두들겨 맞고 군화발을 핥는 등 인간이하 취급을 당하지만 내성적이며 비타협적인 성격 때문에 그 박해는 점점 더 심해간다. 이런 아로운에게도 절친인 이노우에(이상사)와 마음씨 좋은 고참 나까무라(김진규)가 소개해준 그의 여동생 히데꼬(공미도리: 재일동포 배우)가 있어 나름 위로를 받는다. 히데꼬의 어머니(주증녀)는 이 교제를 극구 반대하지만 이들은 휴가 때 집에서 냉수를 떠 놓고 결혼식을 올리고 마는데....귀대한 아로운은 더 심한 박대 속에 결국 전방부대로 전출되는데 때 마침 닥친 미국 폭격기들의 대공습으로 온 시가지가 불바다가 되어버리고 그 공습의 대폭발과 화재 속에서 아로운을 학대하던 군국주의는 실제로는 약해빠진 나약한 실체를 드러내며 부숴지고 공습으로 당한 수많은 시체들을 불태우는 곳에서 아로운 만이 혼자 살아남아 시체더미 속에서 걸어 나오는데.....
해방 이후 한국영화를 이끌었던 감독 big 3는 신상옥, 유현목, 김기영이라는데 모두 제마다의 색채를 달리하는 감독들이다. 나 개인적으로는 해방 이후로는 신상옥, 유현목, 김기영 외에 김수용과 이만희까지 넣어 big5로 얘기하고 싶다. 김수용과 이만희가 그들에게 전혀 밀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중 김기영은 의대출신이어서 그런지 분석적이고 실험적인 그 색채가 특이하다. 여기서 감독의 색깔까지 얘기하고 싶지는 않지만 이만희의 대표작 <만추>를 김기영이 리메이크한 <육체의 약속>만 봐도 그 비교가 확연하다. 김기영 감독은 자신의 최고의 히트작 <하녀(下女)> 이후부터 이공계출신 답게 분석력을 갖추고 인간의 근원적인 본능을 추적하고 있다. <현해탄은 알고 있다>에서 그는 일본 군국주의의 집단적인 권력지향을 대표하는 군대라는 집단 속에서 거대한 집단에 홀로 맞서는 개인의 저항정신을 그리고 있다. 아마 집단적으로 학대를 받던 아로운이라는 개인이 바로 식민지배로 고통 받던 식민지 국민들을 대변하는 것은 아닐지! 이 영화는 장르 분류상 멜로드라마로 분류되어 있지만 그보다 이것은 민족적인 저항정신을 말하고 불의한 집단에 맞서는 개인의 저항을 얘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결국은 전쟁은 참혹하며 그 속에서 인간성은 철저히 말살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뒤에 상관에게 미움을 당해 전방부대로 전출되려는 즈음에 애인의 설득으로 탈영을 하고 숨어 버리고 이를 상관(박암)이 끝까지 추적하여 싸움이 벌어지는데 그 순간 미군의 대공습이 벌어지고 온 세상이 불타고 파괴되는데.....이 장면들을 보면 미국영화 <지상에서 영원으로>가 생각이 난다. 거기에도 상관(에네스트 보그나인)에게 학대당하는 몽고메리 클리프트는 탈영하여 애인(도나 리드) 집에 숨고 친구 프랑크 시나트라는 맞아서 죽고 그 때에 진주만 공습이 벌어지고 아수라장이 되는데.....비슷하다. ㅎ
전쟁이라는 특수 상황 속에서 벌거벗긴 채 선 인간들의 원초적인 본능과 집단 권력의 폭력성을 들여다보며 전쟁의 참혹함 속에서 인간성도 같이 파괴된다는 상황을 깊이 있게 표현해 내고 있다. 물론 이 영화는 당시 극장가에서 엄청난 대 흥행을 기록했다. 이 영화는 중간에 영상과 음향이 유실되어 최근 한국영상원에서 복구작업을 하기도 했다.
김기영 감독이 이 영화를 제작한 것은 1961년인데 당시 동명의 라디오 드라마를 원작으로 하는 이 영화는 4.19혁명(1960)이후 배일, 반일 감정이 다소 누그러지고 일본 분위기의 유행이라는 시대문화적 흐름 속에 제작되어 5.16 군사사태(1961)직후라는 정치적 전환기에 촬영이 이루어졌기에 국가의 검열이나 사회적 여론의 비판을 피할 수 있었다고 한 연구논문은 말하고 있다. 때문에 이 작품은 1960년대에 걸쳐 제작된 다양한 서사와 주제의 이와 비슷한 영화들 중에서도 선구적인 역할을 한 영화로서 흥행에서 대 히트를 쳤다. 이 영화는 원작 드라마에 비해 스토리가 간단, 평이해 졌지만 후반부 대폭격 장면의 클라이막스에서는 스펙타클한 볼거리를 강조하여 드라마와는 확실한 차별성을 내 보인다. 어릴 때 이 영화를 본 나는 후반부의 그 장면들만 기억 속에 가득하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감독 자신의 의지나 희망이 크게 투영된 부분이 큰 것으로 1960년대 국내의 문화비평 수준이 크게 높아진 것을 고려하면서도 상업적인 흥행성과를 놓치지 않은 것으로 영화의 수준을 다소 일반인의 눈높이로 낮춰 다양한 관객층을 끌어들인 교묘한 감독의 상업적 재능을 눈여겨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서도 감독은 당시의 대중문화의 환경과 한국사회가 강하게 가지고 있던 식민지에 대한 열등의식과 식민지 의식 같은 것들의 기억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강한 의지를 내 비치고 있다. 이 영화는 그야말로 한국의 고전명화이다. 그래서 나는 김기영 하면 <화녀>가 아니라 <현해탄은 알고 있다>를 대표작으로 꼽는다.
*사족: 이 영화에 김지미가 나온다는데 나는 아직도 어디에 나오는지 모른다.
또 주인공인 김운하(가끔 조연)와 공미도리는 그 후 영화에 잘 나오지 않아 더 보기가 힘든다.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