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당 시문학관과 인촌 김성수 생가
최금철
지금 여러분들께서 밟고 계신 이곳은, 1000편 이상의 서정적인 시로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세계에 알린 미당 서정주 선생님이 살으셨던 생가 마당입니다. 선생님은 전라북도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에 있는 바로 여기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뒤로는 소요산이 병풍처럼 둘러있고, 앞으로는 곰소만과 변산반도가 바라보이는 확 트인 전망 속에 치마폭처럼 펼쳐져 있는 아름다운 질마재 마을, 이곳 선생님의 고향 마을은 생가와 묘소, 외가, 그리고 시문학관이 함께 어우러져 있는 세계적으로 희귀한 곳으로, 선생님의 삶과 죽음, 그리고 평생 이룩한 시의 세계가 오롯이 모여 있는 곳입니다. 이제 미당 시문학관으로 발걸음을 옮겨 안내를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시문학관 입구 안에서]
오른쪽 벽을 보시면 미당의 연보를 간단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1915년 5월 18일 고고의 성을 울리며 태어나 2000년 12월 24일까지 86세를 일기로 우리의 곁을 떠나셨습니다. 살아 생전에 1000편 이상의 시와 15권의 시집을 남기셨습니다. 안쪽으로 이동하시는 곳곳에 선생님의 시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보시면서 오른쪽 통로로 이동하시겠습니다. 앞에는 조각가 박재소님께서 1991년 미당의 화사집 출간 50주년 기념식에서 헌정한 선생님의 흉상이 있고, 앞쪽에는 선생님의 시와 삶에 관한 글과 저서들이 있습니다. 선생님은 미발표작을 합하여 약 1300여편 이상의 시를 다작하였습니다. 다작에도 불구하고 한 편, 한 편의 시 모두가 한국 시 문학의 정점에 서 있다고 평가받고 있습니다.
[영상관]
이 곳은 선생님에 관하여 약 4분 30초 정도로 소개하는 영상이 상영되는 영상관입니다. 들어가시기 전에 오른쪽에는 선생님이 시 창작을 위해 사용했던 타자기, 위쪽에는 문우들과 후학들이 말하는 선생님의 시에 관한 칭송의 글들이 있습니다. 최고 찬사의 글들이 우리의 눈을 감싸 안아 줍니다. 그럼 영상관에서 잠시 영상을 감상하도록 하시겠습니다.
[1층 전시실]
이곳에는 선생님과 그의 가족들이란 주제로 전시가 되고있는 곳입니다. 선생님은 가족들을 매우 사랑했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부인 방옥숙여사를 지극히 사랑하셨다 합니다. 그래서 방옥숙 여사가 2000년 10월 10일 먼저 작고하시자 사랑했던 부인을 밤낮으로 그리며 모든 곡기를 끊고 오직 맥주만을 드시다가 70여일이 지난 12월 24일에 부인의 곁으로 가시어 지금도 영원한 사랑을 나누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방옥숙여사와 중매결혼을 하셨습니다. 그전에 흠모하던 여대생이 있었지만 짝사랑으로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가슴앓이를 하시다가 고향 고창으로 내려오시게 되었습니다. 선생님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결혼시키려고 사방으로 며느리 감을 찾으시던 중에 정읍에서 마땅한 규수를 보고 집에 오셔서 "처자가 채전을 씻는데 여러 번 헹구어 깨끗이 하는 것을 보니 정갈하여 정주 짝을 삼아도 좋을 것 같다“는 말씀을 듣고 당시에 유행하던 화투점을 쳐 보시는데요. 칠싸리와 팔공산이 떨어졌답니다. 칠사리는 중매장이고 팔공산은 임이어서 ‘내가 중매로 장가갈 팔자구나’하며 결혼을 작정하셨다는데 국화 넉 장의 술과 단풍 넉 장의 근심도 함께 떨어졌다고 합니다. 미당 생가 오른쪽 집에 8살 아래의 동생 우하 서정태님께서 거주하시다가 안타깝게도 2020년 3월 11일 97세로 영명하셨습니다.
[2층 서재 입구에서]
여기는 30년간 미당 시의 산실의 모태가 되었던 서울 남현동 자택의 서재를 재현해 놓은 곳입니다. 서재 안에 있는 지팡이, 도자기, 가야금 등을 보시면 선생님께서 다양한 취미 활동을 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선생님의 시 창작 작업을 상상해 보시며 이동하시겠습니다. 2층부터 6층 계단 벽에는 산의 사진들이 낮은 산부터 높은 산 순서로 전시가 되어 있습니다. 노년의 미당은 치매에 걸리지 않기 위해 전 세계에 있는 1,628개 산의 이름과 높이를 암기하여 집 마당에서 매일 아침마다 정원에서 3,40분씩 큰소리로 하늘을 향해 낭송하며 산들의 기운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구할 수 있는 산들의 사진을 구하여 아래쪽에 산이름과 높이를 적어 보관하였는데, 바로 그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아울러 이곳 전시동 건물은 문학관 뒤의 소요산을 형상화하여 건축되었습니다. 그래서 위로 올라갈수록 산의 좁아짐을 계단의 좁아짐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소요산을 올라가시는 느낌으로 한계단 한계단 올라가시면서 여러분들께서도 소요산의 기운을 듬뿍 받으시길 바라겠습니다.
[3층 전시실]
이곳은 선생님의 교우 관계를 엿볼 수 있는 곳입니다. 미당의 교우 관계 사진들과 주고받은 편지들이 우리들의 옛 추억을 새록새록 돋아나게 합니다. 문학가 김동리, 박목월, 화가인 운보 김기창, 천경자, 큰 스님 성철 등 우리나라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분들과의 친분을 나타내는 사진들 및 고창고보 때의 사진이 특히 눈에 들어옵니다. 또한 선생님이 주고 받으신 편지들도 비록 색이 많이 바랬으나 선생님의 따사로움을 느끼기에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4층 전시실]
이곳은 가슴이 먹먹해지는 곳입니다. 안타깝지만 1943년부터 44년까지 선생님이 보였던 친일적인 시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한 평가는 여러분들의 몫으로 남겨드리고, 이 시기에 관해서는 선생님이 담시로 엮은 자서전인 ‘팔할이 바람’이란 책에 써 놓고 있습니다. 아울러 선생님의 저서들이 이곳에 함께 전시되고 있습니다.
[5층 전시실]
이곳은 선생님이 평소 사용하셨던 여러 가지 물건들이 전시되고 있는 곳입니다. 예술인들의 상징인 모자들과 담뱃대들 그리고 낙관에 사용했던 도장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선생님은 제자들이나 후배들이 담뱃대를 선물로 드릴 때 가장 좋아하시고 함께 어울러 막걸리잔을 기울였다고 합니다. 벽에는 선생님이 돌아가셨을 때 신문에 실린 추모의 기사가 전시되고 있습니다.
[6층 전시실]
선생님은 1977년 11월부터 1978년 9월까지 제 1차 세계 여행, 1984년 부인 방옥숙 여사와 제 2차 세계 여행을 다녔습니다. 그 때의 사진들과 여권, 그리고 팜플렛 등이 전시되고 있습니다. 여행을 다니시면서 많은 문물들을 경험하시고 그 여행기를 경향신문에 연재하시고 책으로도 출간하였습니다.
[전망대]
여기는 시 문학관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전망대입니다. 이곳은 항상 바람이 세게 불기 때문에 이어령 교수님이 ‘바람의 전망대’라는 이름을 붙이셨습니다. 앞쪽을 보시면 TV예능 프로 ‘패밀리가 떳다’ 등 많은 프로에 등장했던 안현 돋음별 마을이 보이고 그 뒷산 소나무 숲 아래에 선생님과 사모님의 묘소가 있습니다. 이곳은 매년 가을철이면 예쁜 국화꽃으로 뒤덮여 우리의 눈을 황홀하게 만들어 줍니다. 옆쪽을 보시면 초가집의 미당 생가가 보이고 그 위쪽으로 옛이야기를 통해 선생님의 시 세계가 열리는데 많은 영향을 끼쳤던 외할머니가 사셨던 외가가 있었던 장소가 보입니다. 그리고 뒤쪽의 산이 소요산으로서 이 주변을 질마재라 부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미당을 ‘질마재의 시인’이라고도 합니다. 멋진 풍광을 잠시 감상하시고 다시 1층으로 내려가시겠습니다. 오른쪽으로 가시면 미당의 대표적인 시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마음껏 감상하시며 휠링하시기 바랍니다.
[미당시문학관의 관람을 마치며]
이상으로 미당 시문학관의 모습을 여러분들과 같이 되새겨 보았습니다. 끝까지 경청해 주심에 대단히 감사드리며 다음 기회에 다시 한번 방문하시면 시문학관 주변과 앞 동네 안현 돝음별 마을과 미당의 묘소도 아울러 돌아보시면 추억거리가 더 풍성해지리라 생각합니다. 이제 버스에 승차하셔서 약 2Km 정도 거리에 있는 인촌 김성수 생가로 향하도록 하겠습니다.
미당 생가
미당시문학관 전경
[버스 안에서]
가시는 동안에 고창의 관광자원 및 특산물을 잠깐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우리 고창에는 세계문화유산인 고인돌과 판소리, 그리고 천혜의 갯벌 등을 비롯하여, 내장사, 내소사 등의 유명한 절을 말사로 거느리고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 24교구 본사인 선운사, 1453년에 축성되어 우리나라 읍성 중 가장 보존이 잘되고 아름다운 고창읍성, 청보리가 필 때면 전국의 관광객들이 어린 시절의 추억 속에 묻혀보시기 위해 방문하시는 학원농장 청보리밭 등 짧은 시간에 도저히 말씀드릴 수 없는 많은 관광자원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또한 맛과 영양이 으뜸인 풍천장어와 항아리가 깨진다는 복분자 그리고 수박, 땅콩, 해풍고추, 황토멜론 등을 비롯한 많은 특산물들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고창에서 나오는 산물은 모두 미네랄이 풍부한 황토에서 나오기 때문에 전국의 산물 중 품질이 가장 우수하다고 자신있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위의 산물들을 활용해 만든 식품들은 ‘높을고창몰’ 사이트에서 언제든지 편하게 구입하실 수 있습니다. 꼭 방문해보시길 적극 권장드립니다. 말씀드리는 사이에 인촌 김성수 생가에 벌써 도착했네요. 버스에서 내려시면 되겠습니다.
[인촌 김성수 생가 앞에서]
지금 보시고 계신 인촌 김성수(1891~1955) 생가는 전북 고창군 부안면 인촌안길 30에 위치합니다. 인촌 생가는 1977년 전북 기념물 제 39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울산 김씨인 인촌(1891–1955)은 당시 호남 최고 부자인 아버지 김경중과 어머니 고흥 고씨의 넷째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위로 세 명의 형은 모두 어릴 때 안타깝게 죽었고 아래로 동생 김연수(1896-1979)가 있었습니다. 인촌의 큰 아버지 김기중이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인촌을 세 살 때 양자로 입양하게 되었습니다. 안으로 들어가서 보시겠지만 양아버지 김기중과 친아버지 김경중은 한집의 울타리 안에서 위채와 아래채에서 함께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양자로 입양되었다고 해서 친부모를 떠나 자란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어린 아들 성수가 친어머니 곁에서 자고 싶어 아래채로 가더라도 친어머니가 엄히 말려 반드시 큰댁에서 잠자게 함으로써 인촌에게 분별력을 가르쳤습니다. 이러한 영향으로 인촌은 후일 모든 일에 공·사를 구분하는 분별력을 기르게 되었습니다. 매사에 공선사후의 신념을 가지고 행동하여 큰아버지이자 양부인 김기중의 지극한 사랑과 신뢰 그리고 친부의 후원으로 자신의 사업과 우리 민족의 역량을 키우는데 일에 매진할 수 있는 절대적 지지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인촌은 민족사학이라 할 수 있는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 한때 민족정론지로 평가받았던 동아일보, 국내 최초의 주식회사로 주식 모두를 조선인이 소유하여 민족기업의 상징이었던 경성방직을 설립한 인물입니다. 1951년에는 국회에서 제 2대 부통령에 선출되는 등 우리나라 정치, 경제, 언론, 교육, 문화계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습니다. 김성수 선생의 호인 인촌은 그의 고향 마을 이름을 딴 것으로, 석재 서병오 선생이 지어 주었다고 합니다. 석재는 인촌에게 “인의예지 중 인이 으뜸으로 공의 그 겸손하고 관인 대도한 도량과 어짐은 공이 태어난 고향의 정기를 받아서 그러한 듯 싶소. 인을 받들어 사업을 펼쳐 가면 꼭 성공할 수 있을 것이오.” 이리하여 김성수는 인촌이란 아호를 쓰게 되었다고 합니다. 저와 같이 안으로 들어 가실까요?
[작은댁 안채 안에서]
큰댁 안채는 1861년 11월, 동쪽 사랑채는 1879년 6월, 작은댁 안채는 1881년 10월에 김성수의 할아버지인 김요협이 지었습니다. 큰댁 사랑채의 문간채는 양부 김기중이 지었으며, 작은댁 사랑채는 1903년 3월에 친부 김경중이 지었습니다. 40여년에 걸쳐 지어진 방대한 규모의 큰댁 사랑채, 작은댁 곡간 등 당시 전라도 토호의 집 규모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인촌 생가는 마을 사람들에게 맡겨 관리 보존해 오다가 1977년 8월 수당 김연수가 자비를 들여 옛 모습 그대로 보수하면서 건물을 복원하였고, 노폭 5m의 진입 도로도 개설하여 완공하였습니다. 대지는 남북으로 긴 장방형을 이루고 있는데 낮은 담을 경계로 북쪽에 큰 집 남쪽에 작은집이 세워져 있습니다. 작은댁은 큰댁에 비해 곡간채만 없을 뿐 집의 크기(규모)나 격식에 큰 차이가 없습니다. 작은댁은 큰 집과 달리 각 건물이 하나의 축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안채는 “ㅡ”자형이고 부엌, 큰 방, 대청, 건넌 방 순으로 구성되어 있고 큰 집 안채와 비교할 때 큰 차이가 없지만, 대청의 규모가 한 칸이고 건넌방 뒤쪽에 도장방(안채의 부엌이 붙어 있는 방으로 여자들이 거처하는 처소)이 있는 것이 다른 점입니다. 사랑채는 “ㄱ” 집으로 앞면에 돌출된 누마루까지 갖추고 있어 큰집보다 격식을 갖추었습니다. 왼쪽부터 부엌과 골방, 안방, 대청 건넌방과 윗방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건넌방 앞에 누마루가 있습니다. 삼면에 세살문이 있고 누마루 주위에는 난간을 설치하였습니다. 안채와 사랑채 사이에는 안 문간채가 있으니, 남녀유별에 따라 공간을 확실하게 구분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촌 생가는 북향 명당입니다. 주산은 소요산(444.2m)으로 호남정맥인 정읍 내장산(763.2m)에서 비롯됩니다. 내장산의 입암봉에서 호남터널 위 갈재를 건너 방장산(743.2m)과 벽오봉을 거쳐 소요산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북쪽으로 산맥이 내려와 학봉(또는 매봉)이라 불리는 아담한 현무봉을 만들고, 그 중심 용맥(산맥)에 인촌 생가가 위치합니다. 용맥을 따라 위채와 아래채 두 집을 지었는데 구조와 형태는 똑같습니다. 그러나 맥의 끝은 아래채에 있습니다. 따라서 위채는 생기가 흘러내려가는 곳이고, 아래채는 기가 모이는 곳입니다. 인촌의 큰아버지는 위채에서 살았고, 아버지는 아래채에서 살았습니다. 아래채가 진혈이라는 증거가 있습니다. 바로 사시사철 마르지 않고 솟아나는 여기에 있는 샘물입니다. 이 곳은 용맥을 보호하며 따라온 수맥이 합수한 곳입니다. 보통은 땅속으로 스며 흘러가는데 용맥의 기운이 강 한데서는 지표면으로 솟아나는 것입니다. 이를 풍수에서 진응수라 하며, 진응수가 있으면 그 위쪽은 대지의 증거로 삼습니다. 야트막한 청룡과 백호가 감싸주며 보국을 형성하여 집은 평화롭고 화기가 넘침니다. 북향집이지만 뒷산이 낮아 아침부터 저녁까지 햇볕이 잘 들어 따뜻합니다. 다만 흠이 있다면 줄포만 건너 변산의 바위산들이 이 집을 넘나보고 있습니다. 변산은 불을 상징하는 화산입니다. 이를 비보했다면 더 편안한 집이 되었을 것입니다. 머리 아프시죠? 어려운 이야기는 우물물에 흘려 보내시고 큰댁 안채로 발걸음을 옮겨 보실까요?
[큰댁 안채에서]
큰집에는 안채, 사랑채, 곡간채, 안 문간채, 바깥 문간채, 솟을 대문 등이 있으며,인촌 생가의 가장 안쪽에 있는 큰집의 안채는 팔작지붕의 “ㅡ” 자형 홑집입니다. 남부 지방의 일반적인 민가처럼 부엌, 안방, 대청, 건넌방의 순으로 되어 있습니다.
큰 방과 부엌의 한쪽 모퉁이에 부엌방이 있으며 그 옆에 도장방이 있습니다. 건넌방은 전면에 벽장을 달아 심벽(기둥 중심을 기준으로 골조를 도드라지게 만든 벽체를 의미)으로 처리한 것이 특이하며, 측면에는 툇마루를 두었습니다. 안채 마당을 사이에 두고 곡간채가 마주하는데 정면 5칸 측면 한 칸의 규모입니다. 각각 2칸씩의 곡간과 헛간 그리고 온돌방이 있으며, 헛간에는 디딜방아가 놓여 있습니다. 사랑채는 안채 동쪽의 문간채들과 함께 별도의 일곽을 이루고 있습니다. 사랑채는 “ ㅡ ” 자형 팔작집이며, 칸살은 큰 방 대청 건넌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앞면과 측면 모두 툇마루가 있으며, 안방 뒤에는 조그만 골방을 덧달아 냈습니다. 이와 같이 큰방 뒤쪽에 골방이나 도장방을 만든 것이 이 집의 공통된 특징입니다. 북쪽의 큰집은 작은 집과 비교하면 곡간 한 채가 더 있을 뿐 규모나 치장에 사용된 부자재는 거의 같습니다. 하나의 대지 안에 독립된 생활을 할 수 있는 두 집을 함께 지은 점이 특이합니다. 현재까지 보존 상태가 매우 좋으며, 상당한 규모를 갖춘 인촌 생가는 당시 전라도 지방 토호의 부유한 환경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인촌에 대한 평가]
인촌 김성수는 오늘날 여러 평가가 있으나 삼일 만세 운동의 시발점이 된 1919년2월 8일 도쿄 조선인 기독교 청년 회관에서 열린 조선인 독립 선언에 일조하여 백관수에게 자금을 보내 불쏘시게 역할을 하였으며, 중앙고보 숙직실에서 3∙1 독립 만세 운동을 기획하고, 민족의 지도자와 종교계를 망라한 대표단을 구성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하여 노력 했으며, 성공을 위해 자금을 대는 등 혼신의 힘을 다하였습니다. 민족의 교육을 위해 중앙고보 보성전문을 인수하여 고려대학으로 성장 발전시켰고, 한때 민족의 정론지로 평가받았던 동아일보, 국내 최초의 주식회사로 주식 모두를 조선인이 소유하여 민족기업의 상징이던 경성 방직을 설립하였습니다. 동생 김연수는 경성 방직을 운영하고 삼양사를 설립하여 형 김성수가 민족을 위해 교육 언론 산업 진흥에 매진할 수 있도록 많은 경제적 도움을 제공한 것 역시 사실입니다. 오늘날 인촌과 수당에 대한 여러 평가가 있을 수 있지만, 인촌이라는 거목이 일제의 압제 속에서 우리 민족의 독립과 장래를 위해 고민하고, 나라를 이끌 인재 양성을 위해 많은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여 나라의 큰 재목으로 성장하기를 고대하였으며, 민족의 독립과 자존을 위해 경영이 어려운 중앙고보 보성전문을 인수하여 정상화하고, 관리나 월급쟁이가 아닌 나라를 이끌 사장으로 자라서 우리나라가 잘 살 수 있게 하는 사람으로 교육시키고자 하였으며, 동아일보를 창간하여 민족의 계몽과 자존의 기틀을 마련하려고 온갖 고난과 핍박을 받으면서도 쉼 없이 매진한 점 또한 우리 고창의 큰 선배로, 스승으로 커다란 울림을 주는 것 또한 사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안내를 마치며]
이상으로 미당 시문학관과 인촌 김성수 생가에 관하여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경험하신 곳이 여러분들 모두에게 기억에 남는 추억의 한 페이지로 장식되셨으면 합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우리 고창에는 너무나도 많은 관광자원과 특산품이 있습니다. 그래서 살기 좋은 고창이라고 소문이 나서 많은 분들이 귀농과 귀촌을 하고 있습니다. 다음 기회에 꼭 고창을 다시 방문해주시어 한반도 첫수도 고창의 이모저모를 살펴보시고 알아가는 계기를 마련하시면 더욱 즐거운 인생이 되리라 확신합니다. 여러분들의 가정에 행복이 가득하시길 바라며 오늘의 안내를 마치겠습니다. 지금까지 전북문화관광해설사 ○○○이였습니다. 감사합니다.
인촌 생가 안내도
인촌 생가 작은채 솟을 대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