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청의 환아정은 진주 촉석루와 밀양 영남루와 함께 옛 영남 3대 누각으로 꼽힙니다.1395년 산청현감인 심린(沈潾)이 산음현(현 산청읍의 옛지명)의 객사 서쪽에 건립하였다.
환아정(換鵝亭)이라는 정자의 이름은 권반(權攀)이 중국 왕희지의 고사를 인용하여 작명하였고 글씨는 당대 최고의 명필로 알려진 한석봉(韓石奉)이 썼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왜군에 의해 정자가 소실되었고 42대 산음현감 권순(權淳)이 새로 짓고 우암 송시열(宋時烈)이 기문을 썼다.
환아정은 주변의 경호강과 함께 산수(山水)가 아름다운 곳으로 유명했으며 조선 중기 선비들이 풍류를 즐기던 곳이었다. 50여명의 선비들이 이곳을 찾아 70여 편의 환아정 찬미 시를 남겼다고 전해진다. 1950년 3월 10일 화재로 불타버렸다.
화재로 소실되기 전까지는 전국 선비들이 이곳에 와서 지은 한시 120여 개가 전시돼 있을 정도였다고 알려졌다.
누각은 현)산청초등학교 부지에 있었으나 군청사 뒤편 산청공원 정상부로 자리를 옮겨 46억원의 사업비를 투입해 착공 1년만인 2022.6.27일 준공하였다.
[카카오맵] 환아정
경남 산청군 산청읍 옥산리 4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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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희지는 351년 회계내사(會稽內史)로 이곳에 부임을 했다. 회계내사로 있을 때 한 도사가 그의 글씨를 흠모하여 많은 예물을 보내 ‘황정경(黃庭經)’을 써주길 부탁했지만 거절했다.
그 후 이 도사는 왕희지가 흰 거위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아내어, 손수 이 거위를 그에게 보냈다. 왕희지가 흰 거위를 보고 매우 즐거워했다는 소식을 듣고 도사는 즉시 글씨를 쓸 좋은 비단을 준비했다. 이번엔 왕희지도 거절치 않고 즉석에서 ‘황정경’을 써 주었다. ‘흰 거위와 글씨를 바꾸다’(白鵝換字)의 이야기는 유명한 일화로 회자되고 있다.
5) 회계(會稽) : 회계는 원래 중국 절강성 소흥현에 있는 산 이름으로 북쪽에 산음(山陰)이라는 경치가 빼어난 고을이 있었다. 그 때문에 여기에서의 회계는 옛 이름이 산음이었다
.현 경상남도 산청군을 가리킨다.
6) 환아정(換鵝亭) : 회계산 산음 마을에 거위를 기르는 도사가 살았다. 동진(東晉)의 명필 왕희지(王羲之)가 거위를 너무 좋아하여 『도덕경(道德經)』을 손수 써 가지고 가서 그 도사의 거위와 바꾸었다는 고사에서 '환아(換鵝)'라는 말이 생겼다고 전한다.
<김일손_속두류록(續頭流錄)>
○ 1489년 4월16일, 갑진일.
환아정(換鵝亭)에 올라 기문(記文)을 보니, 북쪽으로 맑은 강을 대하니, 유유하게 흘러가는 물에 대한 소회가 있었다. 그래서 잠시 비스듬히 누워 눈을 붙였다가 일어났다. 아! 어진 마을을 택하여 거처하는 것이 지혜요. 나무 위에 깃들여 험악한 물을 피하는 것이 총명함이로구나. 고을 이름이 산음이고 정자 이름이 환아(換鵝)니, 아마도 이 고을에 회계산(會稽山)의 산수를 연모하는 사람이 있었나 보다. 우리들이 어찌 이곳에서 동진(東晉)의 풍류를 영원히 이을 수 있겠는가.
○ 김회석 지리산유상록
아침을 먹은 뒤에 관아에 들어가 잠시 인사를 드리고 안부를 물은 다음, 나와서 환아정(換鵝亭)에 올랐다. 정자는 호수가에 위치하고 있는데, 건물이 매우 웅장하고 아름다웠으며, 거울 같은 호수는 바람이 일지 않아 노니는 사람의 흥취를 도왔다. 둥글게 둘러 앉아 술을 마시며 덕계(德溪) 오건(吳健)의 판상시에 차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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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송시열은 기문을 통해 “나는 아직 중국 회계의 산음은 가보지 못했는데,
그 산수의 빼어남이 어디가 나을지는 아직 모르겠다.
그러나 그 이름을 가지고 사실을 구한다면 아마 서로 백중세를 이룰 것 같다.”며 환아정(換鵝亭)과 경호강의 풍경을 예찬했다고 합니다.
1395년 환아정이 지어질 당시 화산 권반이 중국 산음(山陰)과 이곳 산청의 옛 이름이 같다는 점에 착안, 서예가 왕희지가 중국 산음 땅에 사는 어느 도사의 청으로 ‘도덕경’을 써 주고 거위를 받은 * 환아(換鵝)의 고사를 취해 ‘환아정(換鵝亭)’이라 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환아(換鵝)의 고사>
소동파는 거위가 도둑을 잘 지킨다고
칭찬한 일이 있었다. 왕희지는 특히 거위를 좋아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산음(山陰) 땅에 사는 한 도사가 거위를 길렀는데, 왕희지가 한번 가서 보고는 몹시 좋아서 사례로 그 도사를 위해 『도덕경』 한 벌을 써주고 거위를 데리고 돌아왔다는 고사가 있다.
그래서 후세에는 거위 하면 왕희지, 왕희지 하면 거위를 떠올린다. 이른바 ‘우군환아(右軍換鵝)’의 고사다. 장승업이 그린 「우군환아도(右軍換鵝圖)」를 보면, 그림 왼쪽 아래에 거위가 묶여 있고, 동자들의 시중을 받으면서 왕희지가 열심히 『도덕경』을 쓰고 있다.
장승업은 이 소재를 즐겨 그려 거위를 안고 흐뭇한 표정을 지은 왕희지의 모습도 그림으로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