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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전받는 교회 전통-주일 성수 (1)
▲김하연 목사 / 대구삼승교회
우리나라에 복음이 전래된 초기에 있었던 에피소드 중 하나이다. 주일 아침에 교인들이 목사님 얼굴을 보고서 박장대소 했다. 왜냐하면 목사님의 콧수염이 절반은 깎여 있고, 절반은 그대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연인즉, 목사님이 토요일 저녁에 열심히 설교 준비에 몰두하시다가 시계를 보니까, 자정을 2~3분만 남겨놓고 있었다. 곧 주일이 시작될 시간이었다. 그래서 주일성수를 하기 위해서(주일에 수염 깎는 일을 하지 않으려고) 급하게 수염을 자르는데, 그만 괘종시계가 자정을 알리면서 주일이 시작되니까 수염을 깎던 목사님이… 한쪽만 자르시고, 그만 중단해 버린 것이었다.
한때 우리 고신교단은 어느 다른 교단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주일(안식일) 규범에 엄격했다. 박윤선 목사가 선교사를 배웅하기 위해 택시를 탔다가 결국 교단으로부터 교수직을 박탈당한 사건도 있었다.
이 두 가지 이야기는 한 때 ‘심한 율법주의자들의 행동’이라고 비판 받았던 이야기들이다. 그러나 한국교회의 성도들은 더 이상 이 일들에 대해 손가락질 할 수 없을 것 같다. 왜냐하면 오늘날 너무 자유주의로 나가서 하나님의 계명마저도 두려워하지 않는 모습은 훨씬 더 악하기 때문이다.
현대에 하나님을 섬기는 여러 가지 규범 중 가장 쉽게 여기고 있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주일성수 문제이다. 성경은 분명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출 20:8)고 명하고 있는데, 오늘날 많은 성도들은 더 이상 주일을 구별해 지키지 않는다. 제멋대로 온갖 유흥이나, 집안의 볼일이나, 손님이 많이 올 것이라는 이유로 심지어 결혼식을 주일에 행하기도 한다.
일 년에 주일 예배만 52번이니까 몇 번쯤 빼 먹어도 괜찮다고 스스로 관용한다. 교회마다 주일이면 기관마다, 부서마다 피자와 치킨을 먹은 빈 상자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기도 한다. 주일에 교회에 가서 일단 예배하면, 그 이후 시간은 놀러가든지, 쇼핑을 하든지, 식당에 가서 가족끼리 멋있게 외식하든지, 별 의식 없이 행동하는 것을 볼 때에 가슴이 아프다.
성도는 주일을 다른 날과 같이 그렇게 사용할 수 없다. 왜냐하면 주일은 주님의 날이기 때문이다. 성경에 분명히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마 12:8, 눅 6:5)고 말씀하고 있다. 주일은 내가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내 것이 아니라, 주님 앞에 모이고, 주님을 높이고, 주님을 예배하도록 준비된 특별한 날인데 이것을 내 것인 양 내 편하자고 내 마음대로 사용한다면 이것은 주일을 ‘도둑질’ 하는 것이다. 주님은 우리의 일상적인 일들을 위해서 6일을 주셨다. 그런데 꼭 주님의 날을 도둑질해서 내 욕심을 채워야만 하겠는가? 그러면서도 주님을 높이고 그분을 예배한다고 할 수 있는가?
먼저 오해되기 쉬운 것부터 지적하고 근본적인 문제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그것은 ‘안식일’과 ‘주일’에 관한 용어의 문제이다. 더러는 안식일은 구약의 것이고, 주일은 신약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극단주의자들은 이단 ‘안식교’처럼, 토요일이 ‘안식일’이라고 규정하고 오로지 토요일을 구별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주일’은 대개 일요일로 지켜지고 있는데 안식교, 안상홍 증인회 같은 이단들은 심지어 일요일은 로마의 태양신에 대한 숭배가 기독교로 들어온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생각들은 한마디로 당찮은 일이다. 제 칠일이 토요일이 되려면 하나님이 천지 창조를 일요일에 시작했다는 증거가 나와야 한다. 그러나 창세기 1장을 보면 천지를 창조하시는 중 지금의 날과 시간 개념의 기준이 된 태양은 넷째 날에 만들어지지 않았는가? 그 넷째 날, 아니 창조의 6일이 오늘날의 24시간 하루 개념일 수도 없지만, 요일의 개념은 더구나 아니다. 창세기 1장은 첫째 날, 둘째 날 등으로 표현 할 뿐이다. 하나님이 중요시 여긴 것은 칠분의 일의 구분이다.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출 20:9~10)이라고 하고 있지 않은가? 중요한 것은 칠일 중의 하루를 구별하는 것이지, 요일의 구분이 아니다. 모세가 이 계명을 처음 받을 때에는 요일의 개념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오늘날도 히브리어로 한 주일 요일 명칭은 ‘욤 리숀, 욤 쉐니, 욤 쉴리쉬, 욤 레비이, 욤 하미쉬, 욤 쉬쉬, 샤밧’이다. 이것은 ‘첫째 날, 둘째 날, 셋째 날… 여섯째 날, 안식일’인 것이다. 정확하게 칠분의 일이라는 구별 개념이다.
이스라엘에 있는 기독교회들은 현재 국가의 공휴일이 토요일(샤밧)로 되어 있으므로 그날에 모여 예배한다. 그리고 나머지 육일동안 열심히 자기의 일상의 일을 감당한다. 그리고 이집트 같은 아랍국들에서는 금요일을 공휴일로 함으로 그곳의 그리스도인들은 금요일을 구별하고 그날에 모여서 예배한다. 성경적으로 아무 문제는 없다. 문제는 요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칠일 중 하루를 안식일/주일로 정해 구별하지 않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그러므로 안식일의 요일 문제로 더 이상 논란을 해서는 안 된다. 기독교가 안식일을 유대인의 안식일 다음날인 주의 첫날에 모인 것은 참으로 의미 있는 일이다. 그 첫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날을 안식일로 구별해 지키는 것이 더욱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성도들에게 진정한 영육간의 안식을 주신 것을 구별해서 안식일로 지키는 것, 그날을 특히 우리가 ‘주일’(Lord’s Day)로 지키는 것은 성경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을뿐더러, 하나님이 처음부터 제정하신 안식일을 오히려 더 의미 있게 구별해 지키는 것이다.
주일을 안식일로 구별해 지키는 다른 이유는 이것은 초대교회 때부터 세워진 전통이었기 때문이다.
“그 주간의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행 20:7).
“매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수입에 따라 모아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고전 16:2).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되어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계 1:10).
요약하면, 안식일이 곧 주일이요, 진정한 안식일의 의미는 주일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므로 독자들은 이하의 글에서 이 두 용어가 혼용돼 나오더라도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기를 바란다.
주일을 왜 지켜야 하는가? 그러면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보자. 왜 신약시대에 살고 있는 성도들은 여전히 주일(안식일)을 엄격하게 구별해 지켜야 하는가?
첫째, 주일 성수는 하나님의 창조주 되심에 대한 위대한 선포이다.
출애굽기에 따르면 제4계명을 지키는 이유는 하나님이 천지를 만드시고 이레째 쉬셨으므로 우리도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출 20:8~11)고 말한다. 따라서 이 명령은 주일을 지킴으로 창조주와 나와의 관계를 분명히 정립하라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안식일에 쉬셨으니 너희도 쉬라고 한다. 물론 이 말은 하나님이 피곤해서 쉬셨다는 말은 아니다. 전지전능하신 그분에게는 사실 안식일이 필요하지가 않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베데스다 연못의 38년 된 병자를 고치시고 나서 유대인들이 반박하고 나서자, “내 아버지께서 지금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하시지 않았는가?(요 5:17).
하나님이 엿새 만에 천지를 만드시고 안식일에 쉬심으로 안식일을 제정하신 것은, 하나님이 피곤하셔서 쉴 필요가 있어서가 아니라 바로 인간들에게 보여주시기 위한 것이다. 즉 그날을 구별해 인간과의 관계를 분명하게 하고 싶으신 것이다. 창조의 엿새는 우리를 위한 분명한 가르침이었던 것이다. 인간은 엿새 동안 열심히 일하고 이레째 되는 날은 창조자를 기억하라는 것이다. 누가 창조자인지, 누가 피조물인지를 안식일마다 새롭게 기억하고 인간의 삶의 목적을 생각해야 하고, 그를 높여야 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다른 엿새 동안은 내 마음대로 엉망으로 살고,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살라는 것이 아니다. 매일 하나님을 기억하고 살지만, 그러나 주일(안식일)은 철저히 구별해서 성회가운데 이것을 선포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나의 창조자가 되시고 나의 하나님이 되신 것을 기억하고 선포하는 것은 인간의 마땅한 도리요,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바로 나의 인생의 목적을 나의 창조주이신 그분에게 맞춰야 하는 명백한 삶의 자세를 드러내는 것이다.
둘째, 주일 성수는 하나님이 나의 구원자 되심에 대한 신앙고백이다.
신명기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강한 손과 편 팔로 인도하여 내셨으므로 안식일을 지키라’고 한다(신 5:12~15). 비참한 노예의 상태에서 구원할 자는 하나님 밖에 없었다. 모세가 출애굽을 인도했다고 해도 사실 그 자신의 능력으로는 자기 자신의 생명도 건져낼 수도 없었다. 그가 하나님의 명령으로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키려고 이집트로 내려갔지만, 바로의 서슬 퍼런 위엄과 두려운 힘 앞에 그는 그 자신의 생명도 부지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는 이집트 사람을 죽인 적이 있는 사람이 아니었던가?(출 2:11~12).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하시고 놀라우신 능력으로 모세와 함께 하심으로 그를 보호하시고 나아가서 바로의 노예가 됐던 이스라엘 사람들을 구해내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이집트의 모든 장자를 죽이실 때에 하나님은 구속을 위한 어린 양들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잡게 해서 그 피를 바른 집들은 죽음의 심판이 넘어가게 하셨다. 홍해를 건너고, 당시 세계 최강인 바로의 전차부대를 물에 수장시키고, 광야에서 아말렉을 이기고,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고, 반석에서 물을 내게 하셔서 수백만 명의 이스라엘을 먹이고, 사십년간 광야 여행길에 그들의 발이 부르트지도 않고 그들의 옷이 해어지지도 않게 하셨다.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하나님의 은혜였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베푸신 놀라우신 사랑과 구원의 은혜를 기억하고 평생 찬양하고 영광을 돌려야 하는 것이 지극히 합당하다. 하나님의 ‘펴신 팔, 능력의 팔’이 아니고는 누가 이스라엘을 그렇게 인도해 낼 수가 있을 것인가?
오늘날 성도들이 주일을 엄격하게 지켜야 하는 두 번째 분명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셨기 때문에 그 구원의 하나님을 감사하고 찬양해야 마땅하다. 만일 하나님께서 구원의 계획을 영원 전부터 갖고 계시지 않으셨다면, 이루 말할 수 없는 그의 크신 사랑으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 성자 하나님을 보내시지 않으셨다면, 예수님이 그 백성을 위해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의 고난을 감내하시지 않으셨다면, 그리고 부활하시지 않으셨다면, 성령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시고 믿음을 주시고 오늘까지 지키시고 인도하시지 않으셨다면 나의 구원이란 것은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그러므로 예수 믿는 모든 성도들은 매 주일 모여서 두려우리만큼 크신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감사하고 찬양해야 한다. 이것을 잊고 산다면 어찌 성도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 은혜가 없으면 그냥 한낮 지옥 심판이 예비 돼 벗어날 수 없는 비참한 죄인일 뿐인 것을.
셋째, 주일 성수는 완성될 천국을 향한 소망을 드러내는 것이다.
더러는 우리가 예수 안에서 죄를 용서받음으로 이미 영적인 안식을 누리고 있으므로 굳이 외형적으로 주일 성수를 강조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그리고 매일 매일이 주일이라는 것이다. 원리적으로는 일부 맞다. 그러나 그것은 자칫 주일성수 개념을 흐릴 뿐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혼동시킬 수가 있으므로 조심해야 한다. 성도가 예수를 믿으므로 이미 영적인 안식을 얻고 하나님의 나라에 살기 시작한 것은 맞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세상에 있는 성도들은 아직도 여전히 완전한 영적인 안식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이 세상은 여전히 악하고 성도는 그 안에서 살아가야 하며, 얼마든지 믿음이 죄악으로 오염될 수 있다. 또한 나아가서 그리스도 예수의 재림과 함께 완전히 완성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는 아직도 우리에게 남아 있다. 그러므로 성도는 영원하고 완전한 천국의 완성을 소망하며 여전히 주일을 구별하고 지켜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성도가 예수님을 믿고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나의 구세주’로 고백을 분명히 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됐음에도, 반복적으로 성찬을 행해 ‘주님의 살과 피를 기념하라’(고전 11:24)는 명령과 같다. 이미 확정된 구원이지만 성도는 구원의 완성을 향해 소망 가운데 반복적으로 주님의 은혜를 새기고 재확인하고 나아가야 한다. 주일 성수도 분명 이러한 의미가 있을 진데 이것이 주님의 재림의 때까지 성도가 믿음을 잘 유지하고 나아가는데 얼마나 중요한가? 주일 성수는 성도의 소망을 더욱 견고하게 하는 일이 아닌가?
나가면서
하나님은 모세가 하나님 앞에 십계명을 받기도 훨씬 전에, 천지창조가 되자마자 안식일/주일에 대한 선포를 하신다.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창 2:3)라고 기록한다. 이 말씀 가운데 두 가지 요소가 들어있다. 그날을 복 주셨다는 것이고, 또한 그날을 거룩하게 구별하셨다는(거룩이란 말은 히브리어로 구별하다는 뜻) 것이다. 하나님이 그날을 복되게 하시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위에서 살펴본바 창조주 하나님을 선포하고, 구원자 되신 하나님을 고백하고, 또한 나아가서 영원한 안식을 소망하며 그날을 계속 구별해 지키려고 할 때에 하나님이 어찌 그를 귀히 여기시고 복을 주시지 않겠는가? 또한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그날을 구별한다고 했으니, 하나님이 주일성수를 얼마나 중요시 여기시는지 충분히 알 수 있다. 한마디로 주일을 성수하는 것은 창세 때부터의 대명령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큰 명령으로 인해서만이 아니라 우리의 삶이 복되게 하기 위해서 성도는 마땅히 주일을 엄격하게 구별해 지켜야 한다.
<기독교보 2015. 4.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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