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명이 ‘키아라 오르페두초’인 성녀 클라라는 이탈리아 아시시의 사소로소 백작 파보리노 스키피와 그의 아내 오르톨라나 사이의 장녀로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어머니는 기도 중에 세상을 밝게 비출 빛을 낳으리라는 계시를 받고 아기 이름을 ‘빛’이라는 뜻을 지닌 ‘클라라’로 지었습니다. 클라라는 어린 시절부터 기도와 신앙생활에 진심이었는데, 귀족 집안의 장녀이자 용모가 뛰어났던 그녀는 일찍부터 좋은 혼처를 찾아 결혼시키려는 부모의 큰 기대를 받으며 자라다가 12세가 되던 해에 젊고 부유한 집안의 남성과 혼인시키려 하자 그녀는 18세가 될 때까지 결혼을 유보해 달라고 부모에게 부탁하게 됩니다.
하지만 18세가 되던 해에 아시시의 ‘프란치스코’의 설교를 들은 뒤 그녀의 삶에 일대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데, 이는 프란치스코가 그녀에게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받은 여인’이라는 말을 해준 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주님 수난 성지 주일에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구하러 가자 집에 남아있던 그녀는 야음을 틈타 집을 나와 프란치스코를 따라나서게 됩니다. 당시 여성을 위한 수도원을 세우지 않았던 프란치스코는 그녀의 긴 머리카락을 자르고, 검은색 튜닉과 베일로 이루어진 수도복을 입혀주며 바스티아 인근에 있는 베네딕도회 수녀원에 거주하도록 했습니다.
뒤늦게 이런 사실을 알게 된 그녀의 부모는 강제로라도 집으로 데려가려고 친척과 친구들을 동원해 수녀원을 찾았지만, 성별의 표시로 삭발한 머리를 보여주며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고 저항하는 그녀를 더 이상 어찌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 후 그녀는 다시 산탄젤로 디 판초의 베네딕토 수녀원으로 거처를 옮겼는데, 얼마 후에는 그녀의 여동생인 아녜스마저 언니에게 와서 함께 수도 생활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녀의 부모와 친척들은 아녜스만이라도 데려가려고 12명의 무장한 장정들을 보냈으나, 그녀의 간절한 기도와 두 자매의 완강한 거부로 끝내 아무도 데려갈 수가 없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어렵게 모인 그녀와 몇 명의 자매들을 중심으로 공동체를 형성하고, 산 다미아노 성당을 모원(母院)으로 정해주게 됩니다. 아울러 그들을 위한 생활양식과 규칙을 작성해 줌으로써 복음적 가난과 기도의 삶으로써 교회의 복음 선포를 지원할 ‘가난한 자매들의 수도회’가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이 수도회는 영국에서 ‘작은 수녀회’로 불리기도 했지만, 현재는 ‘클라라 수도회’로 불리고 있습니다. 그녀는 1216년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로부터 ‘가난의 특전’을 얻었는데, 이것은 어떠한 소유권이나 재산도 가지지 않고 전적으로 하느님과 애긍(哀矜)에 의존해 살아도 좋다는 허락이었습니다.
이후 클라라는 이 특전을 유지하고자 늘 고심했는데, 오히려 교황이나 다른 성직자들이 수녀들의 규칙이 너무 엄격하다고 반대하는 바람에 많은 곤경을 겪기도 했습니다. 그런 이유로 성 프란치스코의 뜻이 담긴 클라라 수도회의 회칙은 그녀가 세상을 떠나기 이틀 전에야 겨우 승인받을 정도로 그 엄격성 때문에 논란이 많았습니다. 그렇듯 수도회의 수녀들이 당시 그 어느 수도회보다도 엄격하고 가난한 생활을 실천하면서 산 다미아노 성당은 그녀를 따르는 수녀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장소가 되었으며, 그녀는 반론의 여지 없이 만장일치로 수도 공동체의 지도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1263년 클라라가 선종한 지 10년 후에 이 공동체는 ‘성 클라라 수도회’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클라라회 수녀들은 당시만 하더라도 여성의 몸으로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생활은 불가했기에 대부분 봉쇄 생활을 했는데, 주로 손으로 하는 노동과 기도로 일과를 보냈습니다. 당시 그녀를 비롯한 동료들은 높은 수준의 관상가들로 ‘복음적 완덕의 가장 완전한 표현’이 되고자 끊임없이 노력했습니다. 특히 그녀는 40여 년 동안 공동체를 지도하면서 다정한 자매이자 어진 어머니로서 늘 자매들의 뜻을 경청하며 겸손하게 봉사했습니다. 그렇게 가난을 실천하며 살았던 그녀의 삶에 감동한 많은 이들이 기도와 자문을 얻으려고 그녀를 찾아왔는데, 그중에는 성 프란치스코와 작은형제회 회원들뿐만 아니라 교황과 추기경 그리고 왕과 귀족들도 많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녀는 평생 프란치스코를 자신의 영적 아버지로 여기며 그를 힘껏 격려하고 보조했으며, 말년에 병으로 누운 후에는 1226년 선종할 때까지 병상에서 그를 간호했습니다. 프란치스코가 선종한 후, 그녀는 수도회의 규모를 지속적으로 성장시켜 나갔으며, 프란치스코가 세운 수도 규칙을 기초로 수도회의 규율을 정하여 1228년 인준을 요청했으나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규율이 너무나 엄격하다는 이유로 이를 거절하고 말았습니다. 그녀는 1243년에 또다시 자신이 작성한 회칙을 인준해줄 것을 교황 ‘인노첸시오 4세’에게 요청했으나 같은 이유로 거절당하게 됩니다. 이렇게 허약한 몸 상태에도 불구하고 장기간 수도회의 정착과 발전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던 것입니다.
가난한 삶을 살았던 그녀는 많은 기적을 행한 것으로도 유명한데, 1240년과 1241년에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프리드리히 2세와 동맹을 맺은 사라센의 대군이 아시시에 쳐들어왔을 때, 그녀는 혼자서는 일어서지 못할 정도로 심한 병중에 있었지만, 성체 안에 현존하시는 주님께 의지하며 부축을 받아 성광 (가톨릭교회에서 사용하는 의식용 그릇)을 들고 봉쇄구역까지 밀어닥친 적군들을 향해 나아가 기도를 드리자 성광에서 강한 빛이 나가며 눈이 부신 사라센군들이 겁을 먹고 물러나 수녀원과 도시를 구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녀는 또한 작은 빵 하나로 50여 명의 수녀가 먹기 충분할 만큼 불어나게 했고, 기도와 축복으로 많은 중환자를 치유하기도 했습니다.
한편, 1252년 주님 성탄 대축일 전야에는 중병으로 누워있던 그녀가 미사에 참례하지 못하자 병실의 벽에 2km나 떨어진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의 밤 미사 장면이 떠올라 보고 들을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는데, 이 기적은 1958년 교황 ‘비오 12세’가 성녀 클라라를 텔레비전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렇듯 그녀는 42년의 수도 생활 중 대부분을 병상에서 보낼 만큼 건강이 좋지 않았지만, 제한된 구역 안에서 오로지 기도에 의지하며 이 모든 일을 이루어냈던 것입니다. 1253년 8월 9일 교황 ‘인노첸시오 4세’는 《Solet annuere》라는 교황 칙서를 통해 클라라가 작성한 수도회칙을 인가하게 되는데, 그토록 원하던 수도회칙을 받아든 클라라는 기뻐할 겨를도 없이 이틀 후인 8월 11일에 5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그녀는 임종 직전에 여러 동정녀 순교자들을 보았다고 하는데, 그녀가 본 성녀들은 용을 짓밟고 있는 ‘성녀 마르가리타’와 물동이를 든 ‘성녀 마르타’ 탑을 든 ‘성녀 바르바라’ 바퀴를 든 ‘성녀 가타리나’ 꽃을 든 ‘성녀 도로테아’였다고 전해집니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저를 지어내시어 이 삶으로 부르셨으니 주님, 찬미 받으옵소서!”라는 찬가를 부르며 숨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곧이어 그녀의 시신을 매장하기 위한 성당 신축 공사가 착수되었는데, 그동안 그녀의 시신은 산 조르지오 경당에 임시로 안장되었다가 1260년 드디어 클라라의 이름을 딴 ‘산타 키아라’ 대성당이 완공되면서 그해 10월 3일에 그녀의 시신이 새로 완공된 대성당으로 옮겨져서 중앙 제대 아래에 안장되었습니다. 그로부터 약 600년이 지난 1872년, 성녀 클라라의 유해는 산타 키아라 대성당의 지하에 새로 지어진 봉안실로 이장되어 오늘날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클라라 수도회는 그 엄격성에도 불구하고 이후 급속도로 이탈리아 전역과 프랑스, 독일 등지로 퍼져나갔는데, 그녀는 선종 2년 만인 1255년 교황 ‘알렉산데르 4세’에 의해 곧바로 성인품에 올랐습니다. 당시 교황은 “클라라는 숨어 살았지만, 그 생애는 모든 이에게 알려졌고, 침묵하였으나 그 명성은 세상 끝까지 자자했다. 봉쇄 담장 안에 자신을 숨겼으나 곳곳에서 사람들을 가르치게 됐다.”라고 그녀를 칭송했습니다. 이후 교황 우르바노 4세는 클라라의 공로를 높이 사, 1263년 ‘가난한 자매회’의 명칭을 ‘성 클라라 수도회’로 공식적으로 변경했습니다.
원래 로마 보편 전례력에서 성녀 클라라의 축일은 8월 12일로 지정되었었는데, 성인의 축일은 전통적인 관례에 따라 사망한 날인 8월 11일로 지정되어야 마땅했지만, 이미 해당 날짜가 3세기 로마인 순교자들인 ‘성 티부르시오’와 ‘성녀 수산나’의 공동 축일로 지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8월 11일 다음 날짜인 8월 12일로 지정되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년 10월 11일 ~ 1965년 12월) 이후 전례력이 개정되어 성 티부르시오와 성녀 수산나의 기념이 빠지게 되면서 비로소 성녀 클라라의 축일이 그녀의 선종일인 8월 11일로 지정되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