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인 이해가 치사한 후인 72세 때에 인사를 전해온 친지에게 보낸 답장 편지이다.
伏奉/惠問 且受十扇/ 盛意何可當 感拜僕僕 生一縷未/絶 喪患憂患 苦惱遣日 無在世/樂 自憐奈何 惟冀/政履益勝 伏惟/尊照 謹謝狀
壬寅六月二十五日 聾人 澥 頓
문안 편지에 또 부채 열 자루를 받았으니 그 큰 뜻을 어찌 감당하겠습니까? 감사하기 그지 없습니다. 저는 한 가닥 목숨이 아직 끊어지지 않았는데 상환과 우환으로 괴로워하며 날을 보내고 있으니 이 세상에 사는 재미가 없습니다. 안타깝지만 어찌하겠습니까? 오직 정사를 보시는 것이 더욱 좋으시기를 바랍니다. 살펴주십시오. 삼가 답장 편지를 올립니다.
임인년(1662, 현종3) 6월 25일 농인 해 돈
李澥(1591~1670)의 본관은 함평(咸平). 자는 자연(子淵), 호는 농옹(聾翁)이다. 아버지는 대사간 효원(效元)이다. 광해군 때 대북파의 정인홍(鄭仁弘)·이이첨(李爾瞻) 등에 의하여 아버지가 절도(絶島)에 유배되고 형인 한림 정(瀞)이 울분을 참지 못하여 죽자, 그는 벼슬을 단념하였다가 1623년 인조반정에 가담하여 정사공신(靖社功臣) 2등에 책록되고 함릉군(咸陵君)에 봉하여졌다. 여러 관직을 역임하다가 1649년(인조 27) 인조가 죽자 장릉(長陵 : 인조릉)의 수릉관(守陵官)이 되고, 이어서 형조판서를 지내다가 1652년(효종 3)에 동지 겸 성절사(冬至兼聖節使)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인 1653년에 함릉부원군(咸陵府院君)에 진봉(進封)되고 공조판서가 되었다가 1660년에 70세가 되어 상소하여 치사하였다. 이 편지는 치사한 이후의 편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