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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空 이세종님 생 돌아보기
이세종은 1880년 전남 화순군 등광리에서 삼형제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 이름은 영찬이다. 어렸을 때부터 착실하고 정직했다. 무슨 일에든지 부지런하고 충직했기 때문에 사람들의 칭찬이 자자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일찍 부모를 여의었기 때문에 글을 배우지 못하였다. 형님 댁에 같이 살던 그는 28세 때 등광리에서 20여리 되는 청풍면 차동으로 갔다. 그곳에서 10여 년 동안 머슴을 살았다. 남의 집 머슴을 살면서 혼자 노력하여 한글을 배웠고. 부모 대신 형과 형수에게 효도하였다. 짚신을 삼아도 제일 좋은 것은 형과 형수에게 주었다. 그리고 가장 나쁜 것은 자신이 신었다. 성격은 솔직하고 급했다. 한 번 자기 비위에 맞지 않으면 천만금이 생긴다 해도 하지 않았고, 한 번 결심하면 무엇이든 최선을 다해서 해내고야 말았다. 산에 나무하라 갈 때에도 ‘그 날 몇 짐을 하리라’고 작정했으면 뼈가 부러지는 한이 있어도 그대로 하였다. 그는 나이 30세에 자신보다 16살이 어린 소녀를 결혼식조차 못 올리고 데려와 살았다. 그녀의 이름은 문순희였는데 나이도 너무 어렸지만 아주 무식한 처녀였다.
이세종은 후에 자신을 낮추어 부르기 위해 이름대신 空(빌공)자를 넣어 이공(李空)이라 불렀다. 결혼을 한 이공은 10년 작정을 하고 돈을 모으기로 결심했다. 그는 지게 발이 닳도록 열심히 일을 했다. 겨울에는 콩 잎사귀 죽으로 끼니를 때우면서 돈을 모았다. 그래서 10년 후에는 등광리 부락에서 제일가는 부자가 되었다. 그는 열심히 일하여 많은 돈을 벌었으나 아내가 임신하지 못하였으므로 큰 고민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자식을 얻고자 무당의 권유로 천태산 중턱에 산당을 짓기로 하였다. 산당을 짓는 동안 상갓집의 연장은 빌리지도 않았으며, 재료는 제일 좋은 것을 사용했고 샘물은 삼중으로 파서 정한 물을 구별시켰으며, 마당에는 연못을 파고 정원도 꾸몄다. 이렇게 산당을 3층으로 준공한 후에 무당과 함께 살면서 제사상을 차리고 정성을 바쳤다. 그런데 얼마 후에 무당이 병들어 죽게 되었다. 하늘같이 받들던 무당의 장례를 치르고 나서 그는 모든 정성이 허사였다는 사실을 깨닫고 회의를 느끼기 시작하였다.
그는 다른 사람의 지도나 가르침 없이 혼자서 성경을 읽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에 ‘레위기’를 읽어보니 거기 나오는 제사법이 자기가 산당에서 차려놓고 지냈던 제사법과 비슷해 신기하게 생각했다. 성경을 계속 읽는 동안, 산당에 열두 제사상을 차려놓고 촛불을 켜고 매일 공을 드렸던 것이 헛수고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또한 하나님만이 참된 신이며 그등안 자신이 잡신에게 공을 들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특히 신약성경을 읽는 중에 기독교의 위대함을 깊이 깨닫게 되었다. 그 후 그동안 해 온 미신 행위를 모두 버리고 산당에 꾸며 놓았던 것들을 모조리 불사르고 예수님을 믿기 시작했다. 잡신을 섬기기에 열심이었던 만큼 하나님을 섬기는 데도 정성이 지극했다.
나이 40세 때 노나복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예수님을 믿고 너무나도 기뻐서 천태산 기슭 바람재 위에 높이 올라서서 아랫도리가 벗어진 줄도 모르고 두 손을 치겨들고 춤을 추며 이렇게 외쳤다. “억조창생 만민들아! 다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으라!”
예수님을 믿은 후 철저히 회개하는 삶을 살았다. 그는 예수님을 믿기 전에 지었던 죄를 일일이 떠올리고 모두 배상해 주었다. 세상 사람들이 흔히 하는 대로 남의 밭머리를 지나다가 콩잎을 뜯어먹은 것이 생각나면 그 콩밭 주인을 찾아가 죄를 자복하고 그 값을 변상해 주었다. 또한 자기 돈과 곡식을 퍼서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였다. 특히 늙은이와 어린애의 많은 집을 찾아다니며 나누어 주었다. 거지나 나그네가 찾아오면 함께 식사를 하였다.
이공은 예수님을 믿고 열심히 성경을 읽으며 연구하였다. 밤에 혼자 앉아 성경을 읽을 때면 “오! 그러십니까.”라고 하면서 혼자서 자문자답(自問自答)을 하였다. 그는 성경을 한 구절 읽고 그대로 실천하려고 최선을 다했다. “예수님을 믿으려면 철저히 믿어야 한다. 죽도 아니도 밥도 아니게 믿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성경에 가르친 대로 실행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그는 ‘땅 끝까지 이르러 나의 증인이 되라’(행1:8)고 하신 말씀을 보고 전도하기 시작했는데, 자신이 살던 등광리 뿐만 아니라 이웃 마을까지 찾아다니며 하루도 쉬지 않고 전도했다. 십자가를 만들어 들고 다니면서, 만나는 사람들 모두에게 하나님을 공경해야 한다고 했다. 때로는 식사도 잊고 전도하였다. 한 번 전도하러 갔던 집을 계속 찾아갔기 때문에 한 집을 다니는 데에만 짚신 세 켤레가 닳을 정도였다.
그는 누가복음 19장에 나온 삭개오를 보고 큰 깨달음을 얻었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4배나 갚겠나이다.’ 그는 이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여 자기에게 빚진 모든 사람들의 빚을 다 탕감해주었다. “여기 있소! 당신의 문서 도로 받으시오. 모조리 탕감해 드리는 것이니 안심하시오.” 그는 빚진 사람을 불러다 그들이 보는 앞에서 빚 문서를 불질러 버렸다. 물건이든 돈이든 모두 탕감해 주었다. 이렇게 해서 이공이 예수님을 믿은 후에 마을 안에는 그에게 빚진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게 되었다. 이러한 덕행을 보고 면(面)에서 그의 송덕비를 마을길에다 세워주었다. 이를 알게 된 그는 사색이 되어 면사무소를 찾아가 통사정을 하면서 “사람의 유언이나 송덕비는 그가 죽은 다음에라야 하는 것이지 산 사람에게 무슨 송덕비를 세웁니까?” 하면서 자기가 한 일은 그런 비를 세울 일이 못되고 자기의 이름은 세상에 나타낼 만한 것도 못되니 제발 그 비석을 없애달라고 하였다. 여러 번 눈물로 사정하는 그의 진심을 알고는 할 수 없이 면에서 그 비석을 땅에 파묻어 버렸다.
그가 외출할 때는 반드시 몸에 구제할 돈 얼마와 자기가 사사로이 쓸 돈 얼마를 따로 가지고 다녔다. 구제를 받아야 할 사람을 만나면 누구라도 주저하지 않고 주었다. 물질을 사용하는 방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첫째는 복음 전도비, 둘째는 세금, 셋째는 남에게 갚을 것, 넷째는 구제비, 다섯째로 접대비로 책정하였다. 그리고 나서 남은 돈이 있으면 그것으로 생활하고, 없으면 굶어 죽는 경우가 있어도 그렇게 쓰라고 했다. 남을 구제하는 정신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구제는 자기가 쓸 몫에서 떼어내어서 구제해야 참 구제이다. 자기가 먹을 것 안 먹고 해야지, 먹고 입고 쓸 것을 다 쓰고 남은 것을 구제하는 것은 가치 없는 일이다. 헐벗은 사람에게 옷 한 벌 준다 해도 자기가 입은 옷이 다 해어져 누더기가 되기까지 입으면서 주어야 참 구제가 된다. 어느 날 거지처럼 다 떨어진 옷을 입고 길을 가고 있었다. 가는 길에 마침 마을에서 가장 심술궂고 못된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어디가? 이리와 봐!” 그 사람은 다짜고짜 그를 끌고 가더니 길가에 있는 나무에다 새끼줄로 꽁꽁 묶어 놓았다. “꼼짝 말고 이렇게 있어!” 이런 말 한마디 하고는 자기 갈 길로 가버렸다. 나무에 묶어 놓고 간 사나이는 다른 곳에서 자기 일을 보면서 아침에 한 일을 깜박 잊었다가 오후에 그리로 지나가게 되었는데, 그때까지 나무에 묶인 채 잠자코 있었다. “저런, 왜 풀고 가지 않고 여태까지 이렇게 있었소?” 사나이가 미안해 묻는 말에 “매는 것도 법이니, 푸는 법이 또한 있어야 가지요”라고 말하면서 아무런 원망도 하지 않았다. 기독교를 핍박하던 박 씨 문중의 어떤 사람이 마을 네거리에서 그를 들어 비석 위에 올려놓고 농으로 “여기서 꼼짝 마!”라고 했더니 온종일 그대로 있었다. “이 자식, 저 자식” 하여도 그저 “예! 예!” 할 뿐이었다. 저녁 무렵이 되어 “이젠 내려가도 괜찮을까요?”하며 묻고서 내려왔습니다. 박 씨는 그때 자신의 소행을 몹시 부끄러워하며 훗날 예수님을 영접하고 신앙을 갖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한 마을을 지나가는데 마을 개구쟁이들이 길을 막고 서서 지나가지 못하게 하고 팔을 비틀고 괴롭게 하였습니다. 아이들은 그에게 ‘문둥이, 비렁뱅이, 너는 내 아들이다’라며 놀려댔습니다. 그래도 그는 묵묵히 지나갔습니다. 이 공은 스스로 반성하기를 “사자의 입도 막으신 하나님께서 어린 아이들의 입 하나 못 막아내서 내게 이런 애매한 말을 듣게 하시는 것인가? 아이들이 나를 문둥이라고 욕하는 것은 몸은 비록 문둥이가 아닐지라도 내 속에 문둥병이 있는 것을 하나님께서 알려 주심이 아니겠는가? 아이들의 입을 통해서 비렁뱅이라고 하는 것은 비록 내가 세상 사람에게는 비렁뱅이가 아니라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야 빌어먹으니 옳은 말이다”하면서 자신을 철저히 낮추었습니다.
자기 마음에 행여 교만이 일어날까봐 길을 다닐 때에는 거의 고개를 숙이고 다녔습니다. 항상 겸손을 실천했고 자기를 높이는 것을 몹시 싫어했습니다. 옷이나 태도, 심지어는 꿈에서까지도 교만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습니다. 옷도 남보다 좋은 것을 입으면 그 옷이 마음에 교만을 일으켜 어느 새 남을 낮게 보고 멸시하게 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음식을 먹을 때에도 상을 차려 먹지 않고 맨 땅에 그냥 놓고 먹었습니다. 혹시 누가 밥상을 차려와도 마음이 높아진다고 싫어하고, 자기는 죄인이라면서 맨 땅에 그냥 놓고 먹었습니다.
어디를 가려면 먼저 스스로 자기 마음을 살펴보아 어떤 동기에서 가고 싶어 하는가 반성해보고 자기 생각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성령님의 뜻이라고 느껴져야만 비로소 일어섰습니다. 같은 마을의 어느 집을 찾아 갈 때에도 그랬고, 어디서 유속하게 되는 경우에도 꼭 성령님의 뜻을 물었습니다. 어느 집에 들어가기 전에는 우선 대문에서 발을 멈추고 자기 마음을 일단 반성해 보았으며, 마음에 지금 찾아가는 사람에 대한 사랑이 없으면 드러내지 않고 그 길로 발길을 돌려 되돌아갔습니다. 사랑이 없이 누구를 찾아간다면 상대편에게도 자기에게도 아무런 유익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성령님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성령님의 감동이 오는 것인데 이는 누구나 쉽게 받는다. 성령님의 감동은 항상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냥 지나가기 쉽다. 그 다음에는 성령을 받는 것인데 이는 회개하여야 한다. 사람이 햇빛을 받으려면 방에서 뛰쳐나오는 것과 같이 자기에게 달렸다. 회개하고 안하고에 따라 성령님은 들어갔다 나왔다 하신다. 그 다음에는 성령 충만을 받는 일인데 이것은 성령님을 완전하게 받는 것이다. 완전하게 받으면 그때는 다시 떠나지 않는다. 이것은 그릇에 물이 가득 담기면 넘쳐흐르는 것 같은 것이다. 사람의 마음은 방과 같다. 마음이 거룩한 성전이 되면 성령님이 들어와 계신다. 그러므로 자기를 항상 깨끗이 준비해야 한다. 사실 성령님이 내 안에 계시면 어두운 행실을 하려고 해도 못하는 법이다. 성령님이 더러움에서 나를 지켜주시는 것이다. 우리가 정과 욕심을 순간순간 십자가에 못 박아야 성령님을 받기 때문에 성령님을 받기 위하여 자기도 애를 써야한다. 그러면서 신자가 건전한 믿음 생활을 하려면 신비, 경험, 지혜, 지식의 네 가지를 겸비해야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사람을 차별 대우하지 않았습니다. 거지가 구걸하건, 반가운 귀빈이 오건 집 식구들이 먹는 것과 똑같이 대접하였습니다. 어떤 때 부인이 화를 내면서 거지를 박대하는 눈치면 아내를 타이르면서 거지도 우리에게 찾아오는 손님이니 똑같이 대해야 한다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주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신 성경 말씀 그대로 실천하려고 했습니다. 거지가 구걸하러 와서는 평소에 먹는 대로 주니까 너무 형편없는 음식이라며 안 먹고 가는 이도 있었습니다. 때로 거지에게 “당신은 혹시 마을 잔칫집에 가서 한 끼라도 잘 먹을 때가 있었을 것입니다만 이놈은 우리 주님의 은혜를 알고 난 후부터는 지금까지 좋은 음식이라곤 입에 넣어본 일이 없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어느 날 병중에 있을 때, 미국인 노나복 선교사가 지나가다가 소식을 듣고 귤 몇 개를 드리고 간 일이 있었습니다. 회복된 후 몇 개의 계란을 가지고 선교사를 찾아가서 문병 왔을 때에 잘 대접하지 못한 일을 사과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종을 존대할 줄 알았고, 목사를 험담하는 사람이 있으면 책망했습니다. 한번은 사람들이 어느 목사를 험담하는 소리를 듣다가 “무슨 소리를 그렇게 하시오. 그래도 목사님이라면 교인들을 앞에 놓고 가르치는 분이신데 그럴 수 있겠소. 그만 두시오”라고 했습니다. 그래도 듣지 않고 계속 험담하자 “여보시오! 그만 두라면 그만 두지 왜 그러시오. 그런 말은 남의 험담이란 말이오. 남의 허물을 덮어 주어야지.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고 하지 않았소.”하고 말렸습니다.
남들의 칭찬이나 악평에도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비평에 따라 태도를 달리한 적도 없었고, 언제나 여전히 한 길을 갔습니다. 자기의 명예나 호평 따위는 꿈에도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자기의 생활 태도를 성경에 비춰보아 ‘맞느냐 안 맞느냐’를 반성할 뿐이었습니다. 남이 자기를 칭찬하는 일이나 존대하는 일은 절대로 싫어하고, 그런 것은 마귀 대접이라 여겼습니다. 칭찬이라는 것은 약자가 받으면 교만이 생기는 법이요, 덕이 장성한 사람이 받을 때는 도리어 괴로울 뿐이라고 하면서, 그러기에 칭찬은 무익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명예 따위는 털끝만큼도 구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진리만을 추구하고 진리대로 살려고만 애를 썼습니다. 눈 한번 뜨는 것, 발 하나 옮겨 놓는 것까지도 진리가 아니면 하지 않았습니다. 늘 지혜롭게, 솔직하게, 양심대로 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는 솔직했고, 남도 솔직한 것을 좋아했습니다. 솔직하지 않을 땐 책망했습니다. 무엇이나 사실대로 해야지 사람이 일부러 꾸며 만든 것은 오래 가지 못하는 법이라고 절대로 금했습니다. 그는 오로지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는 세상적인 학문은 많이 접하지 못했으나 그토록 유명하고 많은 이들에게 영적인 감동을 줄 수 있었던 것은 어느 누구보다도 성경을 많이 읽었으며, 그 말씀대로 실천하며 살아가는데 있었습니다. “파라! 파라! 깊이 파라! 얕게 파면 너 죽는다. 뿌리도 깊이 팔수록 좁다. 좁은 길이다. 깊이 파고 깊이 깨닫고 깊이 믿어라. 어설프게 파면 의심밖에 나는 것이 없다.” 제자들을 앞에 놓고 성경을 연구할 때마다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참 기독교 진리의 세계는 좁은 길이다.” 그는 농부가 밭에서 무 뿌리를 파는 비유를 들면서 신자는 성경을 깊이 파고 들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 자신이 성경을 연구하는 모습을 보면 성경을 거의 통달할 정도였습니다. 낮이면 종일 성경을 읽고, 밤에는 암송을 했습니다. 성경 요절을 밤을 세워가며 암송하고 요지를 표해 놓았습니다. 제자들 앞에서 자기의 손가락을 펴들고 “성경에 통달한 사람이야 비로소 손가락 사이로 세상을 내다보게 된다.”고 하면서 “남을 가르칠 때는 성경을 눈에 대고 내가 배우고 자기가 자기를 가르칠 때는 성경을 마음에 대고 읽어야 한다. 성경은 마음의 거울이다.”라고 역설하였습니다. “성경은 그 사람의 믿음의 분량밖에 안 보이는 법입니다. 사람들이 성경이 이렇고 저렇고 말을 하지만 성경을 들고 앉아 말하는 것만 가지고는 다 모릅니다. ”신자는 신구약 성경과 찬송가를 늘 읽고 부르되, 그것을 생선으로 비유한다면 구약은 머리 토막과 같고, 신약은 가운데 토막과 같은데 찬송가는 꼬리와 같습니다.”라고도 했습니다. 또 음식으로 비유한다면 성경은 밥이요, 찬송가는 국과 같다고 했습니다. 누군가 무슨 질문을 한다든지 무슨 이야기를 들으면 곧 “성경을 찾아봅시다. 성경 본문 그대로가 참 진리입니다. 성경은 성경으로만 해석하는 것이 바른 신앙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제자들과 같이 성경을 공부할 때에는 그의 안에는 신(神)이 말하고 있는 것 같아서 누구나 그 앞에 있으면 유리관 속을 들여다보듯 자기 마음에 품은 것을 숨길 수가 없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를 아는 사람들은 그를 더욱 두려워했고, 그의 앞에서는 괜히 떠는 이도 있었습니다. 그럴 때면 “사람들은 조심할 데 가서는 조심하지 않으면서도 조심하지 않아도 좋을 데서는 조심하니 그래선 못 쓴다 병원을 가면 병을 고치고자 다 털어놓듯이 우리도 서로 털어놓고 고치자는 것이 아닌가?”고 하였습니다.
남에게 바로 말해 주는 것이 사랑이라면서 남이 말씀대로 살지 않거나 잘못된 것은 바로 가르쳐 고쳐주는 것이 참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아무나 성경을 읽는다고 다 유익한 것이 아니다” 하였습니다. 성경을 읽는 태도에 대하여 “여호와의 도가 정직한 자에게는 산성이요. 행악자에게는 멸망이니라.” 말씀을 인용하면서 정직한 자는 성경을 바로 이해하고 소화시켜 유익을 얻으나, 악인은 도리어 성경에 걸려 넘어진다고 했습니다. “성경을 읽는 사람은 우선 자기를 깨끗이 해야 한다. 음란을 멀리하고 양심이 맑아야 성경을 읽어도 모든 것을 바로 깨닫는다.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는 아무 것도 바로 이해할 수 없다. 그러므로 성경은 아무나 아무렇게 읽어도 되는 것이 아니다. 성경을 바로 읽으려면 먼저 자기를 깨끗케 하는 일에 힘써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는 성경을 읽으며 탐구할 때 남들이 엿들어 보면, 혼잣말로 자문자답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예! 그렇습니까?”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이공이 하나님과 이야기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단지 성경연구를 위한 공부가 아니라, 한번 읽고 그 말씀대로 실천하였습니다.
그는 성경과 실제생활의 일치에 전력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제자들을 데리고 산에서 로마서를 공부하는 중에 ‘만물이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기를 탄식하며 고대한다.’는 성경을 설명하다가 바로 앞에 앉아서 듣고 있는 박복만씨에게 말했습니다. “당신, 지금 앉았다가 누웠다 하고 있는 그 자리를 좀 보시오.” 박씨가 자기가 앉아 뭉개고 있는 풀밭을 보니 마치 멧돼지나 산짐승이 뒹군 자리같이 풀들이 어지럽게 깔려 쓰러져 있었습니다. 그 풀을 손짓하며 말했습니다. “그 풀들은 지금 탄식하오? 안 하오?” “네 탄식합니다.” 박씨는 그렇게 지적을 받으니 좀 미안했습니다. 그러자 “모르고 한 일은 괜찮아요. 알고 지은 죄가 벌이 중하오.”하고 나서는 “그렇소. 부끄러움을 모르면 인생의 가치가 없는 거지요.”했습니다. 그날 성경공부를 마치고 내려오다가 길가에서 쉬는 도중에 손에 쑥 한 포기를 뜯어 들고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이 쑥에서 무엇을 배울 것이 있소?” “예! 색깔이 변치 않는 것, 봄이 오면 다시 돋아나는 것 등 쑥 한 포기에도 배울 것이 많지요” “그렇지요. 그리고 그처럼 변함없이 믿는 마음을 가지려고 피차 애쓰면 좋겠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육신적으로 볼 때는 쑥 뿌리보다 더 쓴 것이 진리요. 그러나 영적으로는 꿀보다 더 단 것이 진리이니 이것을 잘 붙들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공은 비록 세상 학문은 배우지 못했지만 타고난 지혜가 누구보다 뛰어났습니다. 제자들의 말에 의하면 그처럼 영특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가 살던 도암면 등광리 근처 동두산 마을 박씨촌에 박참봉이라는 한학자가 있었는데 시골 마을에서는 내노라하는 분이었습니다. 한 번은 그가 이세종을 찾아와 자기의 한학을 자랑삼아 까다로운 질문 공세를 편 일이 있었습니다. 박참봉은 천자풀이와 주역으로 이공에게 질문하고 이공은 성경을 가지고 대답하는데 그만 박참봉이 감복하고 말았습니다. 그 후에 박참봉은 기독교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사재를 들여 그 마을에 교회 건물을 지었으며 다시는 주역을 보지 않고 성경을 읽으면서 꾸준한 신앙생활을 하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남의 일을 비평하지 않았고, 기성교회에 대해서도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교회들이 하는 일에 대해서는 좀 불만스러운 점이 있어도 하나님은 그것을 통하여서 구원의 자녀들을 나게 하신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에게 말하길 자기 강의만 듣지 말고 다른 교회 집회나 도시의 큰 교회에 가서 공부하라고 권했습니다. 누구나 한 편 소리만 들어선 바로 깨닫지 못하는 법이며, 껍데기가 있어야 알맹이도 깨닫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언제나 제자들에게 경고한 것은 ‘이세종파’를 절대로 만들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이 그에게서 배운 바를 어디에서 가르칠 대, “그 가르침을 어디에서 받았느냐?” 묻는 일이 있으면 이공에게 들었다고 말하지 말고 천태산 바위 밑에서 받았다고만 대답하라고 일러주었습니다.
그는 내 것이라는 소유를 철저히 버린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제자들과 함께 모여 예배드리는 시간은 일정하지 않았습니다. 예배를 드릴 때 연보를 가지고 온 이들에게는 일일이 물어 보았습니다. “이 연보를 식구들이 알게 하져왔소? 모르게 가져왔소?” 만일 집안 식구들이 모르게 가져온 연보라면 하나님은 그런 연보를 절대로 안 받는다고 도로 가져가라고 명했습니다. “아니, 한 번 가져온 연보를 어떻게 도로 가져가요?”하는 이가 있으면 “이리 주시오 내가 갖다 드리지” 했습니다. 성탄절 연보도 그러했습니다. 쌀 얼마를 가족 몰래 가져온 이가 있었는데 자기가 친히 그 연보 쌀 주머니를 안고 그 교인의 주인댁에 내놓으며 사유를 설명하자 그 집 가족들이 도리어 황송해 하였습니다. “이처사, 그러지 마시오. 한 번 바친 것을 어떻게 도로 받습니까?” 이러한 가족들의 진심을 알고 나서야 “댁에서 허락하신다면 도로 가져 가겠습니다.”하면서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러니 마을 사람들은 누구나 그를 신용했습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 남의 집에서 머슴살이를 하였는데, 그때 아내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의 나이는 30세였고, 부인의 나이는 14세였습니다. 그녀는 그에게 시집와서 세상의 다른 부부들처럼 재미있게 정을 나누거나 자녀를 낳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한글을 쓰지도 읽지도 못하는 일자무식이었고, 조급하여 쉽게 화를 잘 내는 속 좁은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이런 부인에게 그는 “당신은 산골에서만 살아야 합니다. 당신은 샘이 많은 여자라서 도심지에 가서 살게 되면 성격이 더 나빠질 것입니다.”고 자주 말하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믿은 후 순결한 삶을 결단하고 “이제 우리는 남매처럼 살아야 한다.”고 침소를 같이 하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그 많던 재산마저 다 남에게 주어버리자 견디다 못해 “이렇게 사는 내가 아내냐?”면서 같은 마을에 사는 어떤 청년과 눈이 맞아 집을 나가버렸습니다. 부인이 딴 남자와 눈이 맞아 나가버린 것을 알고, 그 집을 찾아가서 아내에게 돌아오라고 권하였습니다. 부인과 함께 살고 있는 그 남자에게도 “이렇게 된 것은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 모두 내 죄 때문이요. 내가 잘못해서 이렇게 되었으니 제발 저 여자를 돌려보내 주시오.”하면서 무릎을 꿇고 부탁하였습니다. 그 남자는 그녀와 그럭저럭 몇 해 동안은 함께 살았으나 마을 사람들의 평판도 나쁘고 그녀의 성격과 행실도 좋지 않아 돌려보내고, 자기는 부끄러워 이사를 가 버렸습니다.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다시 돌아온 아내를 그는 스스럼없이 받아들였고, 옛날과 다름없는 태도로 대해주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시 집을 나가버렸습니다. 다시는 되돌아오지 않을 듯이 살림도 모조리 가지고 가버렸습니다. 이번에는 능주 고을에 산다는 어떤 홀아비였는데, 여러 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아내를 찾아 또다시 능주 고을로 갔습니다. 창녀와 같은 아내 고멜을 변함없이 사랑으로 품고 찾아갔던 사랑의 선지자 호세아처럼 매몰차게 문전박대를 하는 아내에게 “하나님 앞에서 죄 짓는 일은 두려운 일이니 마음을 돌이키시오.”하고 타일렀습니다. 이렇게 몇 번을 찾아가서 아내를 타일렀지만, 남편에게 어찌나 싸늘하게 대하는지 버럭버럭 소리를 질렀습니다. “흥! 무엇 때문에 치근대며 자꾸 와 나 망신시키러 왔어?”하며 구정물을 퍼서 끼얹고 온갖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하지만 비 맞은 생쥐 꼴을 하고서도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마시오. 꼭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마시오. 살다 살다 못 살겠으면 꼭 돌아오시오.”하며 간곡하게 권면했습니다. 그녀는 그 남자와 몇 해를 살았으나 결국 헤어지고 다시 돌아왔습니다. 이런 수치스러운 여자를 누가 받아줄 수 있을까요? 다시 돌아왔다는 소문이 나돌자 친척과 마을 사람들이 품행이 나쁜 이런 여자를 우리 동네에서 살게 해서는 절대 안 된다고 야단법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많은 사람들이 간음한 여인을 정죄했지만 그 여인을 용서해주었던 예수님을 떠올리면서 “제가 부족해서 그렇게 되었으니 용서하여 주시오.”라면서 친척들과 마을 사람들을 설득하였습니다. 완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다시 부인을 받아들이자 그의 위신은 땅에 떨어졌고 세상에 둘도 없는 바보로 낙인찍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 자신은 아무렇지 않게 여겼습니다. 그는 참으로 한국의 호세아였습니다. 부인을 앉혀 놓고 무식한 그녀에게 한글을 가르쳐주었습니다. “글을 배우시오. 글을 배워 성경으로 벗을 삼으시오. 성경 못 보면 외로워 못 삽니다.” 이대부터 그녀는 한글을 배워 세상을 떠날 때까지 성경을 벗으로 삼고 살았고, 마음을 고치고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말년에 그녀는 남편이 세상을 떠나 깊은 산 속에서 살 때에도 끝까지 따라다녔고, 남편처럼 청빈하게 살았습니다. “딴 생각을 버리시오. 당신은 욕심이 많으니 도회지에서는 살 수 없고 이 산속에서만 살아야 합니다.”라고 했던 남편의 권고를 따라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남편의 무덤을 3년 동안 지키면서 혼자 살았습니다. 3년간이나 그 쓸쓸한 산중에 홀로 살면서 해마다 보릿고개가 되면 아랫마을로 내려와 보리 이삭을 주워 양식을 삼고 벼가 나면 또 벼이삭을 주워서 연명했습니다. 그리고는 산나물로 살았습니다. “언덕으로 벗 삼고, 천기로 집 삼고, 만물로 밥 삼으시오.”라는 남편의 유언을 따르며 자연 속에서 가난과 배고픔을 참아가며 묵묵히 살아갔습니다. 그녀의 말년은 아무도 돌보는 이 없어 고독했으나, 꾸준히 지난날을 참회하면서 남편의 가르침대로 살았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안 믿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나는 이 세상에 와서 예수님을 그토록 잘 믿는 남편을 만난 행복자입니다.” 누구 하나 만나주는 사람도 없고 도와주는 사람도 없는 고독과 고난 속에서 늘 감사하면서 살아갔습니다. 겨울에도 내복 한 벌 없이 무명 옷 한 벌로 지냈지만, 그녀는 스스로 자족하며 만족해하였습니다. 또한 남의 폐를 끼치지 않고 혼자서 손수 농사를 지으며 살았습니다. 믿는 사람들이 혹 나무를 한 짐씩 가져다주면, “이런 죄인이 황송해서 어떻게 그런 나무를 뗄 수 있겠습니까?”하면서 기어이 되돌려 보냈습니다. 밤에 잠 잘 때는 “나같은 죄인이 어찌 하늘을 마주 보고 눕겠습니까?”하면서 옆으로 누워 새우잠을 잤습니다. 병들어 임종이 가까울 때까지 생활 일체를 자기 힘으로 했고, 다른 신자들이 도우려면 절대로 사양했습니다. 그것은 자기의 과거를 속되하는 거룩한 생활이었습니다. 임종이 가까워오자 병상에서 돌봐주는 분에게 성경을 읽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특히 그녀가 사랑한 성경구절은 “잉태치 못하며 생산치 못한 너는 노래할지어다. 구로치 못한 너는 외쳐 노래할지어다. 홀로된 여인의 자식이 남편 있는 자의 자식보다 많음이니라.”(사54:1)는 말씀과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길 수태 못하는 이와 해산치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더라.”(눅23:29)는 말씀이었습니다. 슬하에 자녀 하나 없었으나, 말씀의 부유함 속에서 주님의 위대하심과 거룩하심을 찬양하며 살아갔습니다. 마지막 임종 시 그녀에게 보고 싶은 사람이 없느냐고 묻자 “사랑하는 예수님을 따라가는 길인데 누가 보고 싶겠어요?”하면서 “죄악 벗은 우리 영혼은 기뻐 뛰며 주를 보겠네”라는 찬송을 부르면서 조용히 눈을 감았습니다. 일자무식하고 성격이 급하며 쉽게 화를 잘 내고, 남편의 사상을 이해하지 못해 자신을 불행하다고 생각하여 두 번씩이나 집을 나가 딴 살림을 차렸던 여인, 그러나 다시금 남편의 사랑으로 집에 돌아와 남편을 통하여 성경을 읽기 시작하면서 남편의 사상을 이해하고 남편처럼 청빈과 순결과 순종을 추구하면서 산 속에서 예수님과 자연을 벗 삼아 평생을 참회하는 삶을 살았던 그녀의 삶을 통해 오늘날 우리가 주님 앞에 서는 날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보게 됩니다.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철저히 못 박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성화된 삶을 사신 이세종 성자와 그 뒤를 따른 문순희 여사의 삶을 이어, 또 다른 거룩한 순결의 싹이 이 땅에 피어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