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이 될 것이다.(공동번역 마 5:9)"
예수는 2000년 전 평화의 왕으로 오셨다. 그리고 '화평하게 하는 사람들'을 자신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언명하며 그의 가르침을 시작하셨다. 너무도 유명한 '산상수훈', 그리고 그 안에서 가장 유명한 '팔복'이 바로 이 내용이다.
문 목사님. 그분의 신학과 설교에 나는 모두 공감하진 못한다. 애초 누군가를 스승으로 잘 삼는 일도 없고, 목사의 팬이 되는 건 고등부 이후로 그만두었으니 어쩔 수 없다. 그렇지만 이런 나도 그분의 시와 평화를 위한 삶의 발자취에는 저절로 고개를 숙이게 된다. 하나님의 아들만이 줄 수 있는 감동에 북받치는 것도 어쩔 수 없는 당연한 일일 테니.
한반도에, 또 세계 곳곳에 전쟁과 불화가 끊이지 않고 있는 요즘이다. 그런 시대에 문익환 시집을 읽으며 성찰을 해 본다. 우리 모두 전쟁이 어떠니 저떠니, 경쟁의 필요악도 주장한다. 나름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평화를 그 이상으로 사랑하고 있는가? 정말 평화를 사랑하면서 전쟁의 현실을 이야기하는 것과 평화에 대한 소망도 믿음도 없이 대결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차이가 크다 생각한다.
성령의 역사는 화평의 역사다. 신과 인간을 화해시키며, 유대인과 헬라인 사이 막힌 담을 헐었다. 기존의 대립은 이 어마무시한 화해를 더 극적으로, 고상하게, 또 더 견고하게 만들 뿐이었다. 내면의 평화가 성령의 능력 전부가 아니었다. 실질적인 화해와 행동을 억누를 수 없는 사랑이었다. 성령 받았다 말하는 기독교인만큼 진짜 하나님의 자녀들이 대한민국에 존재한다면... 이런 모습일 수 없지 않을까?
한국교회. 교회라는 이름이 무색한 내력을 자랑한다. 한국교회의 100년 정도 되는 역사는 분열의 역사 그 자체였다. 이단, 그리스어로 '분파를 만드는 자'라는 뜻이다. 생각이 어긋난 사람이 아니었다. 한국교회는 서로 화해하지 못한다면 교회로서의 능력도, 역할도 상실한 채 이단일 뿐인 집단으로 종말할 것이다. 그러길 바라지 않지만 계속 이 모양이라면 멸종하는 게 맞다. 바벨론 몽둥이로 박살나더라도 철 좀 들어야 한다.
우리는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문익환 신학이 아니라 문익환 정신을, 문익환의 평화적 삶을 계승하는 사람이 터져 나와야 한다. 본회퍼의 시가 CCM이 되었듯, 문익환 목사의 한이 담긴 시 몇몇도 우리의 시편으로, 이사야 교독문으로 활용해 봐도 좋을 것 같다. 평화가 우리에게 너무나 당연한 것이 될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