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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리풀 공원에서 서달산까지
지난 1. 10. 서울과 하남시의 경계 능선인 일자산을 찾았다가 강동구에서 만들어놓은 일자산에서 고덕산으로의 강동그린웨이라는 녹색축을 따라 걸었다. 강동그린웨이를 다녀온 후 내가 살고 있는 서초구는 어떤가 하여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강남 개발하면서 마구잡이로 녹색지대를 없앴지만 그래도 서리풀공원이 겨우 녹색축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고, 사람들이 그 녹색축을 답사하고 올린 사진과 글들이 인터넷에 올라와 있었다. 이를 보는 순간 내가 살고 있는 서초구의 이런 녹색축을 제대로 밟아보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곧 이를 밟아보리라 생각하고 오늘(2009. 1. 27.) 실행에 옮긴다.
아침 10시 반을 조금 넘긴 시각에 집을 나서 센트럴 시티의 지하도시로 들어갔다가 메리어트 호텔로 나와 강남 성모병원 앞 육교를 건넌다. 육교의 또 다른 길은 인도로 내려가지 않고 바로 서리풀공원 입구로 나를 안내한다. 등산이나 답사를 가면서 교통수단을 이용하지 않고 집에서부터 걷기로 시작하기는 처음인 것 같다. 그만큼 내가 먼 데로만 눈을 돌리고 집 앞에 있는 소중한 녹색공간인 서리풀공원을 홀대하였다는 것. 반성한다.
10:50경 서리풀공원의 숲속 계단을 밟고 오르는데 며칠 전에 흩뿌린 눈이 하얀 분말가루처럼 뿌려져있다. 언제였던가? 내가 이 길을 걸었던 것이? 사법연수원 후기교육 때이니까 1983년 여름이었겠지. 그 때 사법연수원은 서초동 법원청사로 막 이사 온 때라 주변도 지금처럼 건물이 많지 않았었는데, 어느 날 나는 교육을 마치고 이 숲속을 따라 집으로 가고 있었다. 그때는 이곳은 그냥 나무와 풀이 우거진 숲속이었는데, 희미한 길을 헤치며 나아가는데 갑자기 내 옆에서 뭔가 후다닥! 바로 꿩이 날아오른 것. 꿩도 평소엔 다니지 않던 웬 인간 한 놈이 갑자기 나타나 놀랐던 것이고, 나 또한 갑자기 아무 것도 없을 것 같은 수풀 속에서 뭐가 갑자기 날아오르니 놀랐던 것. 그러던 이곳이 지금은 공원으로 예쁘게 단장이 되어 있다. 지나가는 길옆에는 간간이 '세계 명품도시, 일류 행복도시 서초'라는 구호 아래 시인의 시들이 바삐 지나가지만 말고 자기를 한번 읽고 가라한다.
산안개 -하순명-
산이 옷을 벗는다
산안개 한 무더기
모통이를 돌아가면
마알갛게 드러나는 산빛
젖가슴같이 굼실대는
능선들 사이로
한 가닥 바람이
서늘하게 휘감고 지나간다
부드러운 침묵이 나를 맞이한다
넉넉하게 풀어헤쳤다가
은밀하게 거둬들이는 시간
산의 향기에
푸르게 푸르게 취하여
나도 그대를 감싸고 싶다.
정상에 오르니 지난 가을 잎들을 모두 벗어버린 나뭇가지들 사이로 법원청사의 동관, 서관이 우뚝 솟아있는데, 20층 연결통로가 마치 두 건물이 입을 맞추고 있는 것 같다. 저 건물에서 근무할 때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벌써 세월은 이만큼 흘러가고 있구나. 이제 마뉘꿀 고개로 내려가 길을 건너 국립도서관 옆길로 올라간다. 마뉘꿀은 고갯마루를 뜻하는 속칭이라고 한다는데, 옛날 이 고개 주변에는 숲이 우거지고 골이 깊어 호랑이가 출몰한 적도 있고, 산적들의 소굴이 되어 함부로 넘나들지 못했다고 한다. 허!허! 여기가? 여기에 호랑이가 출몰했다는데, 도대체 이 얘기를 듣기 전에는 상상이 안 가는 이야기. 그런 곳이 고개 좌우로 검찰청, 서초경찰서, 국립도서관, 조달청 등의 관청이 들어서고 8차선 넓은 길로 차들이 분주하게 오가고 있는 곳으로 변했으니 상전벽해(桑田碧海)도 이만저만 상전벽해가 아니다. 그나저나 이 정도의 고개였으면 이렇게 고개를 무참하게 까부수고 도로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터널로 하거나 최소한 생태다리라도 연결을 시켜놓아야 하는 것 아닌가?
길을 오르니 위에는 넓은 풀밭이 나타난다. 몽마르뜨 공원이다. 원래 이곳은 아까시 나무들이 우거진 야산이었으나 이곳에 배수지 공사를 하고 난 후 2003년 그 위를 공원으로 조성한 것. '몽마르뜨'라면 프랑스 파리의 몽마르뜨 언덕이 아닌가? 그런데, 왜 이곳 이름도 몽마르뜨인가? 바로 이 너머 서래마을에 프랑스 사람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어 마을 진입로를 몽마르뜨길로 부르게 됨에 따라 이곳 공원도 몽마르뜨 공원으로 이름 지었다고 한다. 이곳에서는 서래마을이 잘 내려다보인다. 한 안내표지판에 '까샤렐(cacharel)'이라고 써있다. 까샤렐은 프랑스 의류상표라는데 이 회사에서 판매금액의 일부를 이곳 공원의 나무 가꾸기에 기부하고 있다고 한다. 그렇겠군. 몽마르뜨 공원이니 까샤렐에서 공원 가꾸는데 한 도움 한다면 '누이 좋고, 매부 좋고'.
11:13경 몽마르뜨 공원을 내려오니 대법원 뒤로 하여 서래마을로 넘어가는 고갯길. 바로 길을 건너 맞은편 동산길로 오른다. 동산을 넘어 내리막길로 접어드니 고층아파트 몇 채가 보인다. 아파트를 따라 숲속길을 걷는데 어디서 많이 보던 아파트. 아하! 내 친구 현태가 전에 살던 아파트이자 지금은 고교 선배 용환형이 살고 있는 황실아파트이구나. 현태집이나 용환형 집에 놀러갈 때 황실아파트 바로 뒤에 있던 동산을 지금 내가 걷고 있는 것이네. 왼편으론 정보사다. 서초구에서는 제발 정보사가 빨리 어디로 가주었으면 하고 있는데 정보사는 아직도 미적미적. 서초구에서는 테헤란로가 달려와 대법원 앞을 지나면 바로 정보사에 가로막혀 도시 발전이 저해되고 있다는데, 한편으론 정보사가 떠나지 않고 버티고 있었기에 그나마 녹지공간이 이만큼 확보된 것은 아닐까? 예전 한창 개발시대 논리가 기승을 부릴 때 이 정보사가 없었으면 이곳도 큰 길을 낸다고 잘렸을지도 모르는 일. 이제는 정보사가 떠난다고 하더라도 과거처럼 무지막지하게 밀어붙이는 개발은 하지 않겠지.
숲속길의 끝부분에는 효령대군의 능과 대군의 사당 청권사(淸權祠)가 자리잡고 있다. 청권사 돌담을 끼고 도는 등산로를 막아버려 옆으로 돌아내려가 11:51경 청권사 앞에 섰다. 청권사 - 사당의 이름으로는 좀 특이하다. 중국 주나라 태왕이 맏아들 태백과 둘째 우중을 제치고 셋째 계력에게 왕위를 물려 주려하자 태백과 우중이 부왕의 뜻을 알고 형만에서 은거하며 왕위를 사양한 일이 있는데, 후일 공자가 태백을 지덕(至德), 우중을 청권(淸權)이라고 칭찬하였다는 고사가 있다고 한다.
정조가 바로 이러한 고사에서 따와 양녕대군의 사당을 지덕사, 효령대군의 사당을 청권사라고 사액(賜額)한 것. 나는 당연히 안으로 들어가 대군의 능에 참배하고 청권사 경내를 돌아볼 생각이었으나 종원이 아닌 외부인의 출입을 금지한단다. 이런! 전주 이씨 지들 왕족의 후손들이 아니면 일반인들은 들어올 생각을 말란 것인가? 청권사는 전국민이 참배하는 문화재이지 어찌 지들 종원들만 참배하는 곳인가? 나는 속으로 툴툴대지만 어쩌겠는가? 문이 열리지 않는데 도리가 있나. 문틈으로 안을 훔쳐다볼 밖에.
효령대군이라면 태종의 둘째아들이 아닌가? 첫째아들 양녕대군이 셋째 충녕대군에게 왕위가 돌아가도록 망나니짓을 하고 돌아다닐 때, 효령대군은 형의 이런 행적을 보며 자기가 다음 세자가 될 야망이 불타올랐지. 그러나, 양녕대군이 효령대군을 만나 충녕대군이 왕위에 올라야한다고 하자 효령대군은 세자가 될 것을 단념하고 불교에 심취하여 한 때 스님이 되기도 했다. 세자의 자리를 깨끗이 단념했다는데서 효령대군도 큰 인물이라 하겠다. 충녕대군은 이러한 훌륭한 형들이 있었기에 세종대왕의 자리에 올라 조선시대 역사상 가장 훌륭한 임금이 된 것 아닌가? 세종대왕의 업적은 일일이 열거하지 못할 정도로 많지만 바로 지금 내가 내 생각을 표현하고 있는 이 한글을 만드셨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조선시대 아니 우리 역사를 통틀어 가장 훌륭한 임금이었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이제 서리풀 공원 탐방은 모두 마쳤으나, 내 발걸음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여기까지 온 김에 국사봉으로 하여 사육신 묘지를 돌아 국립묘지까지 가고자한다. 내 다리야! 오늘 발품 좀 팔아보자. 나는 청권사 앞을 떠나 효령로를 - 청권사 앞길이니 당연히 효령로라고 했겠지. - 따라 사당역 사거리로 향한다. 처음에는 효령로 좌우로 있는 방배공원과 새우촌공원도 들러보고 싶었으나 공원에 이야깃거리가 될 만한 시설이 없고, 오늘 목표로 한 동작동 국립묘지까지 가려면 갈 길이 멀기에 그냥 지나친다.
편의점에서 컵라면으로 간단하게 점심을 해결한 후 남부순환로를 따라 낙성대로 향하는 까치고개를 오르는데 눈에 들어오는 국제결혼정보업체의 간판. 요즈음 국제결혼이 흔한 세상이 되었지만 그래도 이곳이 나의 눈길을 끈 것은 캄보디아, 라오스 전문업체라는 것. 이제 결혼정보업체가 베트남에서 캄보디아, 라오스까지 진출하였구나. 결혼정보업체를 지나니 얼마 안 가 생태육교인 관악까치자연길. 관악산의 줄기가 까치산으로 이어지던 것을 남부순환로로 무참하게 짤라놓고는 이제 와서 생태육교로 연결하고 생색만 내고 있는 것이다. 생태육교를 횡단해보기 위하여 위로 오르니 생물이동통로라고 하고 있다. 글쎄~ 이곳을 통하여 이동할 포유류가 집에서 기르는 개나 고양이 외에 뭐가 있을까? 그런데, 밑에서 올려다볼 때는 그냥 육교이더니만 위로 올라와보니 육교상에는 흙을 깔고 나무를 심어 육교라는 생각이 전혀 안 들고 정말 관악산의 등산로가 그대로 이어져 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도 제법 신경은 썼구먼. 생태육교 위에선 관악산과 우면산 뿐만 아니라 남부순환로 넘어 아까 지나온 서리풀 공원도 잘 보이누나.
육교를 지나 까치산 능선을 오르기 전에 할아버지들이 게이트볼 시합을 하고 있는 것에 앉아 잠시 숨을 돌린다. 표지가 없어 어디가 까치산 정상인지도 모르게 능선을 넘는다. 그런데, 까치산이라면 뭔가 까치 울음이 들려야할 텐데 이곳의 까치들은 다 어디로 갔지? 이제 능선을 내려가니 낙성대와 남성역을 잇는 솔밭길이 나오는데 다행히 이곳도 육교로 이어져있다. 그런데, 능선의 녹색띠는 점점 더 좁아지더니, 아뿔사! 봉천3동과 사당5동의 경계에서 능선이 사라져버렸다! 봉천3동의 대림아파트와 사당5동의 LG아파트가 능선의 녹색띠를 완전히 먹어버린 것이다. 이런 개 같은 경우가 있나! 이렇게 아파트 허가를 내 준 놈은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놈이야? 욕이 안 나올래야 안 나올 수가 없다. 이 능선이 흑석동에서 왼편으론 중앙대로 오른편으론 국립묘지로 계속 이어지는데 여기서 능선을 먹어버리다니... LG 아파트 바로 밑으론 예전 봉천동 판자촌 집들 서너채가 코앞에 우뚝 선 고층 아파트 밑에서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겨우내 땠던 연탄재들을 비탈면으로 굴리면서...
나는 분노와 슬픔으로 어깨를 늘어뜨리면서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 예전 산동네 시절의 좁고 구불구불한 봉천시장길을 지나 봉천동 고개로 나온다. 하늘을 받들 만큼 예전에는 숲이 빽빽하던, 그래서 동네 이름도 봉천동(奉天洞)이라고 하던 이곳이 이렇게 변해버렸다. 이제 길을 건너 국사봉을 향한다. 처음 내 눈에 들어오는 것은 나무은행 간판. 나무은행? 재개발, 재건축이나 각종 건설공사시 벌채가 부득이한 나무들을 구청에 신고해주면 구청에서 이곳으로 옮겨와 심어두었다가 나중에 건물 준공시나 공공사업에 사용하기 위해 설립한 나무은행. 그래, 그나마 재개발로 사라져버릴 나무들을 그래도 이곳에 옮겨놓을 생각은 했네.
나무은행을 지나니 나타나는 것은 절. 대문 오른쪽에는 대한불교종단연합회라는 간판이, 왼쪽에는 세계법왕청 간판이 붙어 있는데 정작 절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세계법왕청이라면 일붕선교종을 창시한 서경보 스님이 1992년에 설립하고 자신이 초대법왕으로 오른 바로 그 단체가 아닌가? 그런데, 대한불교종단연합회는 또 뭐야? 그리고, 절 건물들의 뼈대와 문짝 등은 모두 빨간색으로 칠했다. 이 종파와 빨간색이 무슨 연관이 있는 걸까? 좀 수상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들어가 보는데, 마당에 있는 포대화상의 눈도 인자한 느낌과는 전혀 먼 뭔가 요기(妖氣)스러운 기운이 감돈다. 결국 내 카메라 셔터 소리를 듣고 문을 연 스님의 호통소리에 나는 쫓겨 나왔다.
2:26경 높이 184.2m의 국사봉 정상에 섰다. 국사봉이라는 이름은 양녕대군이 이 산에 올라 멀리 경복궁을 바라보며 나라와 세종의 일을 걱정하였다고 하여 국사봉(國思峰)이라고 하였다고 하기도 하고, 이곳의 사자암을 창건한 무학대사를 국사로 보고 국사봉(國師峰)이라고 하였다기도 하는데, 국사봉 요 밑에 양녕대군 묘와 사당이 있으니까 나는 양녕대군설에 마음이 더 간다. 국사봉 앞으로는 강북의 남산과 그 뒤의 북한산이 중간에 아무런 장애 없이 내 눈까지 곧장 날아오고, 뒤로는 관악산과 삼성산이 그 앞에 호랑이(호암산)를 앞세우고 금방이라도 달려들 듯하다. 예전에는 산사면을 따라 녹색의 물결이 쫘~악 흘러내려갔을 것이나 지금은 국사봉 턱밑까지 치고 들어온 인간들의 건물에 국사봉도 숨이 찬 듯. 그나마 요정도만이라도 남겨놓은 것을 다행이라고 여겨야 할까?
이제 나를 국사봉으로 이끈 사자암으로 내려가자. 2:42경 사자암 앞에 도착하여 사자암의 연혁과 유래에 대해 읽어본다. 사자암은 1396년 무악대사에 의해 창건되었다는데 대사가 한양의 지세를 살펴본 즉 지금의 중구 만리동이 밖으로 달아나는 백호(白虎)형이므로 한양의 안정을 위해 맞은편 관악산에 호압사를 짓고, 사자 형상인 이곳에 사자암을 창건하여 그 위엄으로 백호의 움직임을 막고자 하였다고 한다. 어? 내가 아는 것과 반대네. 내가 알기로는 불의 산인 관악산의 지봉(支峰)인 호암산이 한양으로 달려드는 형세라 이를 억누르기 위하여 호암산에 호압사(虎押寺)를 짓고, 이곳 국사봉에는 사자암을 지었다고 하던데... 하여튼 퇴락해가던 사자암을 1977. 10. 주지로 부임한 원명스님이 지금 보는 것처럼 번듯한 절로 중창하였다는구나. 나도 '사자암'이라고 하여 조그만 암자를 상상하고 왔는데, 여느 절 못지않은 게 중창 하나는 확실하게 한 셈. 그런데, 일주문으로 들어가는데 일주문 위의 현판은 '국사봉 사자암'이 아니라 '삼성산 사자암'이라고 되어 있네. 어? 여기도 삼성산의 맥이 건너온 것이라 삼성산이라고도 하나보지?
경내로 들어갔다. 범종각(梵鐘閣)의 이름이 나를 미소짓게 한다. 사자후(獅子吼). 하하! 사자암(獅子庵)에 있는 범종이 울리면 그게 바로 獅子吼가 아니겠는가? 이름 제대로 지었구나. 사자암 맞은편에도 가정집 같이 보이는 주택인데 간판은 '한국불교 청룡사'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절이라 종단 표시가 없나? 가만있자... 그러고보니 사자암도 종단 표시가 없었지!
이제 나는 국사봉 북쪽 기슭에 자리한 양녕대군묘로 향하여 이곳 산동네 길을 걷는다. 그런데, 이곳에 뉴타운을 건설하려는지 가뜩이나 허름한 주택들이 더욱 허름해져 가고 일부는 이미 이사 가고 쓰레기들만 쌓여있는 집들도 있다. 그런데, 이런 재개발 지역이면 어디서나 어김없이 등장하는 현수막이 여기도 걸려있다. '선거철만 구민이더냐? 구민의 기본권을 보장하라!', '세아용역 각오하라! 집은 철거할 수 있어도 사람은 철거할 수 없다.', '우리는 목숨 걸고 끝까지 투쟁한다. 정당한 주거권을 되찾는 그날까지'
얼마 전에 용산에서 강제철거에 대항하는 철거민들을 몰아내려다가 6명이 죽었던가? 묘안이 없나? 재개발의 근본 목적이 무엇인가? 주거환경을 재개발하여 그곳 주민들의 삶의 질을 향상하자는 것 아닌가? 그런데, 재개발로 원래 살던 돈 없는 주민들은 쫓겨나고, 그 자리를 투기를 노리는 투기꾼이나 외지인들이 차지한다면 과연 그 재개발은 올바른 재개발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인가? 이곳에서 이웃 간에 오순도순 살갑게 살던 주민들은 이곳이 재개발되어도 아파트 관리비도 제대로 낼 형편이 안 되는 사람들이 많을 텐데 이들은 여기서 밀려나면 또 어디로 가야하나?
대책 없는 재개발을 반대하는 플래카드와 스프레이 벽보를 뒤로 하고 양녕대군이 잠들어 있는 지덕사(至德祠)로 향한다. 양녕대군 - 1404년 세자로 책봉되어 14년간 세자의 지위에 있다가 동생 충녕대군에게 세자의 자리를 물려준 대군. 혹자는 양녕이 여색을 밝히는 도가 지나쳐 상왕 정종이 아끼던 기생 초궁장을 탐하고 중추부지사 곽선의 애첩까지 빼앗는 등 망나니였기에 세자의 자질이 없었다고 하지만, 월탄 박종화 선생은 소설 '세종대왕'에서 양녕대군을 조선 창업기에 왕으로의 적임자는 동생 충녕임을 깨닫고 일부러 태종의 눈 밖에 나는 행동을 하여 결국 충녕을 세종대왕으로 왕위에 오르게 했던 대군으로 묘사하고 있다. 나도 양녕은 세종대왕이 왕위에 오르자 세종대왕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전국을 유랑하며 풍류를 즐기며 인생을 보낸 풍운아로 보고 싶다.
세종이 즉위 후 주위 신하들 중에는 혹시라도 양녕이 딴마음을 품을까봐 또는 양녕은 가만히 있더라도 세종에 반대하는 불순세력들에 의해 양녕이 이용당할까봐 양녕을 제거해야 한다는 신하들도 있었지만 세종은 형의 뜻을 알기에 이러한 신하의 말은 들은 척도 안 했지. 숭례문의 현판도 양녕대군이 썼다던가? 3:08경 지덕사 앞에 도착하였다. 원래 이곳에는 양녕대군의 무덤만 있고, 지덕사라는 사당은 숭례문 밖 도동에 있었는데 1912년에 이리로 옮겨왔다고 한다. 아까 청권사를 들렀을 때 예감한 것처럼 이곳도 청권사처럼 문은 굳게 잠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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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양녕대군 18대손이라 늘 얘기하던 이병욱 님이 풍류를 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양녕대군님 땡큐!
아하! 이병욱 교수님이 양녕대군 18대손이셨군요. 역시 피는 못속이는군요.
전설이 역사로 굳어지는군요. 워낙 변방이라 ...가까이 있으믄 따라 붙어 공부 제대로 하것는디 숨이 멎습니다.
사람이 책을 만들고 책이 사람을 만든다지요! 그래서 역사와 친해지면 안목이 넓고 깊어진다 합니다. 체험에다 의미까지 더하니 이젠 전설님의 출판이 그려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