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산리
세월따라 지명이 바뀌어도, 옛 습관을 따라 부르는 것이 익숙하고, 입에 착 달라붙는다.
서울의 '수유동, 미아동'보다는 '수유리, 미아리'가 익숙하고,
물건 이름도 옛 습관에 따라 '티비'라고 하기보다 '테레비'라고 부르는게 정겹다.
20세기 후반기의 한 때,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동네 가운데 하나였던 동두천 '보산리'도 '보산동'이라고 이름이 바뀐지 오래지만 그래도 보산리가 더 익숙하다.
80년대까지의 전성기를 뒤로한 채, 90년대부터 쇠락기를 걷기 시작한 미군 기지촌의 대표였던,
'미 2사단(캠프 캐이시)' 맞은 편에 위치한 보산리 기지촌을 떠올려보면 몇가지 이미지가 떠오른다.
온갖 미국 하류 문화, 퇴폐와 범죄, 양공주...
김명인의 시집 [동두천](1979,문학과 지성)을 보면 동두천 기지촌 - 보산리에서 저자가 교사 생활을 하며 겪은 당시의 모습이 잘 드러나있다.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학생을 때려서 이가 빠졌는데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거나, 미군 아버지가 떠난 뒤 버려진 혼혈아의 이야기, 수학여행을 갔는데, '어디서 왔느냐?'는 물음에 동두천에서 왔다고 하기가 창피하여 '천두동'에서 왔다고 대답하는 장면 등이 시집에 실려있다.
오늘 명절을 쇠러 동두천에 왔다.
어머니가 보산리로 이삿하셔서 자연스럽게 보산리를 둘러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텅 빈 거리에 드물게 미군 서너명이 지나갔고, 한 쪽 골목에서 젊은 미군이 아기 띠로 아이를 둘러메고서 필리핀 아내? 여자친구?와 길을 건넌다.
산천도 의구하지 않고 낡고 피폐해졌고
당연히 인걸도 간 데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