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늘 (외 2편)
하여진
내 안에 나무를 심을 만한 터가 있다고 믿으시나요
낮-은 호수--- 옆으로 이팝나무가- 자라고 그곳에는--- 새소리가 끊이지- 않은 곳이 있습니다 -- 레이지데이지스티치 쌀꽃이 하나씩 피어날 때마다 도안에도 없는 바람이 불어오고 꽃의 문이-- 열릴-때---까지 건너오지 못한 강둑의 시간들이 --- 모여 우는 강기슭으로 --- 바-늘구멍-난 -- 자국마다 자글자글 -- 봄이 솟아오르고 산을 품으며 시간을 품으며 --새틴스티치 춤을 추는 나비 한 마리 두 마리 -- 선을 따라 돋아나는 --
램프웨이를 따라 돌아오는 밤의 시간들, 저쪽에서 이쪽으로 바늘에 실이 꿰인 듯 경적들이 검은 린넨 위에 LED 불빛으로 반짝거리는 불야성, 그 도시 뒷골목에 수만 개의 불빛의 매듭들이 얽히고설킨 저녁입니다
토리에 감긴 달빛이 풀리는 동안
사방을 둘러보아도 핏기 없는 바람의 그림자뿐
페놀레페의 몸을 스쳐 간 계절의 자국들
수틀 밑에 아득한 정절의 정신이 팽팽하게 시들어갑니다
꽃이 피는 방향과 연두의 방향에 대한 비밀을
이젠 아무도 알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만
바늘꽂이에 선 채로 죽어가고 있는 나에게
당신은 아직도 내 안에 나무를 심을 만한 터가 있다고 믿으시나요
베스트셀러 읽어보세요
손을 대지 않아도 바람이 넘겨주는 책장
시속 60에서 머들령 터널 지나고 나면 시속 80으로 넘겨주는데요
덜커덩 넘어가는 깊은 하늘 속으로 기러기 한 마리 날아가는
삽화 한 장 펄럭이네요
가로, 세로, 글자들, 무덤 같은 괄호는 빨간 밑줄 그으며
산을 읽을 때는 세로로 읽어야 해요
돌로 눌러두지 못한 산의 기억들이 골짜기를 열고
눈포단 밑으로 흐르는 도정(搗精)의 물소리
투명한 맨발로 온 산을 졸졸졸졸 날아다녀요
태양이 산 그림자 지우고 내려오는 아침
청국장 냄새 굴뚝마다 진동하는 산내마을 이야기 속에
'끼니는 잘 챙겨 뭉냐' 어머님 음성에 울컥 빠지다 보면
어느새 목적지에 닿습니다.
노면 고르지 못함 고인 물 튐 과속방지턱
읽어가다 다시 떠오르는 문장,
우좌로 이중 굽은 도로표지는 굽은 길 오를 때
급하게 먹은 마음일랑 한 번쯤 쉬었다 가는 바람의 길
가끔 반사경에서 튀어나온 트럭이 책장을 휙 넘길 때
눈으로 꼭 밟고 있어야 해요 잠깐 한눈을 파는 사이
계절을 꿀꺽 삼켜버리거든요.
걱정하지 마세요. 인생은 짜여진 목차처럼
안개가 가라앉으면 길섶으로 봄은 되돌아와요
지금 읽고 있는 농공단지에 눈이 내리네요
숫눈 쌓인 캄캄한 이면을 침 발라 얼른 넘기면
까만 유리창에 비친 남자와 여자가 주고받은 대화 속에
나도 하마터면 길을 잃을 뻔했거든요
산다는 게 좀 슬프지도 않으면 재미있겠어요?
그만 졸다, 잘못 내려온 길을 되짚어 갑니다
헤드라이트에 살아나는 17번국도,
먼 우주에서 내려온
황금오리알, 별자리가 뜨는 밤
책갈피로 그믐달 끼워놓고
읽다 만 책을 덮습니다, 밤새도록
달이 책 속에서 자라네요.
Itaewon과 곰팡이꽃 풀 옵션
케밥 가게, 되네르에 꽂힌 양고기만큼 작아진 저녁 아홉 시가
이태원의 네온 불빛에 겉에서부터 익어가고 있다
거대한 빌딩 숲 뒤의 오르막길
쓰레기더미가 꽃처럼 피어 있는 빈민가
우사단길 노린내가 이삿짐 트럭 안으로 몰려온다
골목 끝에서 이삿짐을 풀었다
낡은 불빛, 꿉꿉한 냄새 진동하고 벽지에는 사진에 없는
곰팡이가 울긋불긋 피어 있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만 보이는 반지하
왼발은 지상에 오른발은 지하에 인생은 양다리인가
벽에서 떼어놓아야 하는 가구처럼
삶에서 꿈은 조금 떼어놓아야 할까
꿈을 위해 아직 늙지 못한 육십 대와
튕길수록 청춘이 흔들리는 피크에 사로잡힌 삼십 대에게는
한 점의 빛도 허락지 않는 어둠 속이
포자도 없는 꿈을 퍼뜨리기에 안성맞춤이다
누르면 튕겨날 듯한 희망과
눅눅한 장판 밑에서 서식하는
얼룩진 삶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햇빛의 중얼거림이 들린다
당분간은 내버려 둘 것이다
매일 먹지에 눌러 쓴 타투의 눈물방울처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되짚어 오는
불안의 결로로 시간이 미끌거릴 테니까
곰팡이를 먹고 곰팡이를 바르며
곰팡이를 싸야 하는 서울살이
방세를떼먹고도망간이방인이벽지에갈겨쓴낙서위에
Fuck you
누운 자세로 손가락으로 글씨를 따라 쓴다
검은 천으로 히잡을 둘러쓴 이태원의 밤하늘
눈만 반짝이는
—시집 『Itaewon 곰팡이꽃 풀 옵션』 202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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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진 / 2009년 《시인세계》로 등단. 조선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과 졸업. 동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