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중산책, 빗속에서 화려함을 만나다. 동성로(東城路) 대구광역시 중구 성내동 일대
대구에서 가장 큰 번화가입니다. 골목문화의 시작이자, 각종 골목문화를 만들어 낸 명물거리로 워킹투어를 하기에 마춤입니다. 비오는 날, 동성로를 짧게 만났습니다.
우중산책, 보통의 경우는 비를 맞으며 걷는 길은 산책로, 즉 초록이 머무는 산사나 숲길이 좋다. 그러나 비 내리는 오밤중에 걸어보는 시내 중심 한복판의 길, 화려함과 화사함, 무엇보다 낮 보다 더 아름다운 거리, 평상시 보다 유난히 더 밝은 빛을 내는 동성로의 길을 걸어 본다. 반짝이는 대로의 길이 좋고, 움츠려 들것 같았지만, 더 활기찬 듯한 모습, 쩌렁 쩌렁 울리는 젊음의 웃음소리들, 그리고 조명 가득한 길, 시내 중심가의 복잡한 길에 대한 길손의 인식을 바꾸어 놓은 대구의 명동길, 동성로다.
동성로를 이야기 하자면 한참을 거슬러 올라야 한다. 선조34년(1601년) 대구감영이 설치되면서 영조 12년(1732년) 관찰사 민응수의 건의로 대구읍성이 축조되었다. 읍성의 둘레는 2,650m로 높이 5.6m, 두께 8.7m에 이르렀으며 4개의 문을 두었다. 남문은 '영남문'으로 북문은 '공북문', 동문을 '진동문', 서문을 '달서문'으로 불렸다. 이는 대구를 감싸며 요새화 시킨 산성의 역할을 하였다. 훗날, 고종7년(1870년)에 이르러서는 서구 열강과 병인양요등의 충돌이 잦아들자 경상도 관찰사 김세호는 성벽을 더 높게 쌓으며 4대문을 누각의 형태로 고쳐지었다. 문의 이름도 '정해루', '주승루', '선은루', '망경루'로 명명하기에 이른다. 경상감영 소재지였던 대구는 영남의 중심지로 관찰사가 머무는 성내에 군대가 설치 되었으며, 감영내 중군이 경찰과 군사업무의 핵심이 되었던 때다. 방위군 성격을 가진 군대는 동문과 남문에 400명정도 주둔하면서 지역 방위와 함께 형벌의 집행역할도 하였다. 서슬퍼런 일제 시대에 들어 동쪽 진영의 형 집행은 비공개로 이루어졌으며, 민가와 상업지역이 밀집 되어 있던 남쪽 진영은 형 집행을 공개한 곳으로 일제는 국민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되고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던 1907년, 대구읍성은 한 밤중에 사라지는 비운을 맞게 된다. , 당시 대구 판관이었던 박중양은 '읍성의 진입이 용이하지 않아 상업활동이 어렵다'는 일본의 뜻을 받아 대구읍성의 성곽을 허물게 된다. 같은 대구인으로, 당시 일본에 빛진 돈을 갚아 나라를 지켜 내고자 국채보상 운동을 벌였던 대구 광문사 부사장 서상돈이 있었는가 하면 나라를 팔아 넘기던 박중양이 같은 대구땅에서 공존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구읍성을 허물어 달라는 일본의 요구는 대한민국 정부에 수락을 받지 않은 것으로 박중양은 시민들의 반발을 우려해 한밤중에 성벽을 하물었으며 엽전 한냥에 성벽돌 하나씩을 일본인들에게 팔아 넘겼다. 또한 일부는 당시 들어 와있던 선교사들의 손으로 넘어가면서 성돌을 옮겨다 선교사 주택등에 사용 되었으며, 일부는 동산의료원과 약전골목, 신명, 계성학교등으로 흩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남은 성돌들은 대구 북구 칠성동에 있는 늪을 메우는데 사용 되었다.
4대문이 사라지고 생겨난 것이 동성로, 북성로, 남성로, 서성로의 4성로이다. 이는 일본의 대구지역과 주위 도시에 대한 수탈을 가속화 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사성로의 중심인 십자대로 주변으로 일본인들만이 누리는 초호화 상권과 통치기구들이 설치 되는 계기가 된다. 특히, 읍성의 골목이 사라지고 신작로가 ?리면서 그 중 동성로는 100년의 대구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역사를 그대로 간직한 곳이 된다. 1914년에 들어서면서 일제는 수탈을 가속화 하기 위한 계략으로 도시의 규모를 축소시키기에 이르게 된다. 대구부청이 담당하던 27개 면을 관할하기 위하여 달성군청을 만들어 위임하였으며, 대구부 외곽지와 현풍등을 통합하여 달성군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면서도 동성로에 자리한 대구백화점에 도청을 두어 실제적인 도시화를 만들어 놓은 것이다. 도시화로 인한 행정구역으로의 변모는 인구 유입에 탁월한 효과를 발휘하게 된다. 당시 일본인들과 소위 '친일파'들은 모두 대구로 모여 살았으며 이로 인한 세수의 증가는 일본인들에게 이익을 만들어 주기에 충분하게 된것이다. 그렇게 변화를 거듭해온 대구의 중심 상업지 동성로는 대구의 대표적 번화가로 거듭나면서 지금의 현재에 이른것이다.
행정구역상 대구광역시 중구 동성로1가에서 3가에 해당하는 길이다. 동성로 1가와 2가는 성내1동, 동성로 3가는 성내2동의 행정구역으로 나뉘어 진다. 명품거리로, 특화거리로 거듭나면 지금의 동성로는 '테마가 있는 걷고 싶은길'로 거듭 나고 있다. 젊음이 있으며, 화려함이 있는 거리로 바뀌었다. 길의 박면은 점토블럭을 깔았고, 벤치와 조명등을 달았다. 노점상과 전주가 사라지면서 거리는 더 넓어졌다. 한국전력의 배전반이 있던 자리에는 블록을 깔고 야외무대와 광장, 바닥분수 등을 설치하여 각종 예술, 문화행사를 열 수 있을 정도로 만들어 지면서 대구 시민들은 물론이고 관광객들까지도 흡수 할 수 있는 거리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그 어느 도시보다도 골목문화가 발달한 대구, 동성로는 그 모든 골목문화의 시작점이라 할 수 있다. 통신(휴대폰)골목, 신발골목, 패션, 주얼리, 약령골목등과 야시골목, 로데오 거리, 공구골목등 대구역에서 중앙파출소까지 이어진다. 거기에 더하여 대형서점과 영화관등의 문화공간도 갖춘 명물거리로 탄생 되었다.
세차게 내리는 비오는 한밤중의 산책길, 동성로를 걷다. 앞을 분간 할 수 없을 정조의 강한 바람과 함게 한 워킹투어, 야경의 빛은 빗물을 받아 반짝임이 더해진다. 화려함은 물론이고 맑은 모습으로 비추어 지기까지한 동성로 워킹투어, 맑은 날이었다면 길손의 손에는 무엇인가 봉다리 하나쯤은 들여 있지 않았을까 하는 염려(?)가 들기도 한 공간이다. 날씨로 인한 짧은 시간의 산책이었지만 가슴 깊숙히 강한 인상을 심어 준 동성로, 역사속의 존재가치, 그리고 지금 현실의 시장가치를 실현 해 나가는 골목길 워킹투어의 명소로 거듭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by 박수동 |
출처: 길손의 旅行自由 원문보기 글쓴이: 길손旅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