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6차 정기산행안내(2024.2.22.목)-창원 봉화산(시산제)
[정의]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회원구 회원동 봉화산에 있는 고려 말·조선 시대의 봉수대.
[개설] 창원 봉화산 봉수대는 회원동과 석전동의 경계에 위치한 봉화산 성내에 있다. 고려 말 왜구의 침입 등 위급 상황을 수도에 알리는 통신 수단으로 쌓았다고 전한다. 조선 시대 지도에서는 ‘성황당 봉수대’로 표기되고 있는데, 이는 당시 창원 지역의 서낭신을 모신 성황당이 봉화산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봉화산 봉수대는 부산 지역에서 출발하는 직봉(直烽) 2로의 간봉(間烽) 6로로서 동래의 다대포 봉수대에서 시작하여, 진해 고산 봉수대를 거쳐 이곳 봉화산 봉수대에서 함안 칠서 안곡산 봉수대를 지나 창녕 현풍 소산 봉수대를 거쳐 최종적으로 서울 지역 목멱산[南山] 봉수대로 연결되는 노선이다. 봉수는 빠르면 2시간, 늦어도 12시간 안에 도착하게 되어 있어 당시로서는 위급 상황을 알리는 가장 빠른 통신 수단이었다. 우리나라의 봉수 제도는 1149년(의종 3) 서북 병마사 조진약(曹晉若)의 주청에 의하여 처음 시작되었고, 1419년(세종 1)에는 봉수령을 제정하여 군사 제도로 정착되기에 이르렀다. 봉화 방법은 밤에는 불로, 낮에는 연기로 나타내었으며 신호 체계는 평온할 때는 1거(炬), 적이 바다에 출몰하면 2거, 적이 우리 해안에 가까이 접근하면 3거, 우리 병선과 접전하면 4거, 적이 육지에 상륙하면 5거로 정하였다. 이러한 신호는 즉각 오장이 각 지방 수령에게 보고하였고, 수령은 병조에 보고하고 병조에서는 승정원(承政院)에 보고, 최종적으로 임금에게 상주(上奏)하여 위급 상황에 대처하였다.
[건립 경위] 창원 봉화산 봉수대는 언제 쌓은 것인지 정확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봉수의 역사는 삼국 시대부터 시작되었으며, 고려 의종 때에 전국적으로 봉수 체계가 확립된 것으로 보이는데, 봉화산 봉수대는 늦어도 고려 말에는 세워졌을 것으로 보인다. 창원 지역을 자주 침범하여 노략질하였던 왜구에 대비하고자 봉화산 봉수대를 세웠고, 조선 시대까지도 계속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위치] 창원 봉화산 봉수대는 높이 265m의 봉화산 정상에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봉화산 봉수대의 위치를 “성황산 봉수는 부 서쪽 15리에 있다. 동쪽으로는 웅천현 고산에 응하고, 북쪽으로는 칠원현 안곡산에 응한다.”고 서술하고 있다. 봉화산 봉수대에서는 마산만이 한눈에 들어오고 산 아래로 이산성지가 보이며, 서쪽 방향으로는 회원현성까지 눈에 들어온다. 또한 동북 방향으로는 조선 시대의 경상우도 병영성이 보인다. 함안·진주 방면으로 나아가는 관문이자 요새지로서 관방 시설이 갖추어야 되는 필수 요소였던 조망권이 탁월한 곳이라 할 수 있다.
[형태] 산 정상부 주위에 약 150m에 걸친 토석 혼축성(土石混築城)에 둘러싸여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이 성은 대부분 멸실되어 남아 있지 않다. 봉수대는 높이 2.5m, 둘레 15m로 쌓아 놓은 석축인데 허물어진 것을 주민들이 다시 쌓아 놓았다고 한다. [현황] 현재 봉화산 봉수대는 복원된 것이며, 상태는 썩 좋지 못하다. 봉수대에는 원래 위급 상황에 따라 연기나 불로써 신호를 보낼 수 있는 시설인 5개의 화두(火竇)가 있어야 되지만 봉화산 봉수대는 가장 기본적인 화두 시설조차 복원하지 않고 봉수대 근처에 흩어졌던 돌들을 주워 모아 둥글게 벽처럼 쌓아 올린 것에 불과하다. 1997년 1월 30일 경상남도 기념물 제157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경상남도 기념물로 재지정되었다.
[의의와 평가] 창원 봉화산 봉수대는 창원 지역의 관방 시설 중 하나인 봉수 유적으로서 그 의미가 크다. 창원 지역은 일본과 가깝기 때문에 일찍부터 왜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군사 시설의 설치가 중요시되어 왔다. 창원은 마산만을 끼고 있기 때문에 예부터 항구로서의 기능과 역할이 강조되어 왔다. 특히 고려 시대에는 조창인 석두창이 들어서 인근 지역의 조세를 싣고 운반하는 조운선이 항시 정박하였다. 따라서 왜구의 침입으로부터 창원을 방비하는 데 중점을 두고 관방 시설이 정비되었다. 고려 시대에는 치소인 회원현성이 설치되었으며 1374년(공민왕 23) 왜구의 침입으로 회원현성이 함락되어 불타자 합성동에 합포성을 쌓아 군대를 주둔시켜 왜구에 대비하였다. 창원 봉화산 봉수대는 왜구의 침입을 알리는 통신 수단으로 기능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 시대에는 봉수 제도가 완전히 정착, 발전되는 시기로서 전국에 직봉 5로가 개설된다. 창원 지역은 부산 다대포에서 출발하는 직봉 2로 중의 보조 구역이었던 간봉 6로가 통과하는 지역으로 창원 봉화산 봉수대는 그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였다. 앞으로 관방 유적지의 대한 복원 사업과 병행하여 봉수대가 원형으로 복원된다면 지역사뿐 아니라 우리나라의 방어 체계 연구에서 중요한 사료적 가치를 지닐 것으로 생각된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