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음말씀의 향기♣ No2269
1월9일 [주님 공현 대축일 후 목요일]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성령께서 함께 하실 때>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히 하느님 아버지께서 베푸시는 한없는 사랑과 그 아들 예수님께서 주시는 풍성한 은총 속에 행복에 찬 신앙생활을 영위해야 마땅한데, 현실은 전혀 그러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 가운데 살아계신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고 그로 인한 벅찬 감동이 우리 삶에 메아리치고, 우리가 체험한 하느님을 사람들 앞에서 당당히 증언해야 당연한데, 현실은 정 반대일 경우도 많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고민해보면 오래 가지 않아 즉시 답이 나옵니다. 우리 안에서 힘차게 움직이셔야할 성령의 활동이 너무 미미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현존을 거의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령과 너무나 동떨어진 삶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신앙이 살아있는 신앙인가 아닌가 여부는 우리 안에 머무시는 성령의 활동과 비례합니다. 우리가 성령의 인도를 받지 않는다면 우리 신앙생활은 쉽게 형식화됩니다. 자발성이나 기쁨, 변화나 쇄신도 기대하기 힘듭니다. 당연히 사랑의 열매도 맺지 못하며 냉랭한 신앙생활로 접어들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 각자에게 주어지는 큰 과제가 한 가지 있습니다. 성령께서 이 세상 안에, 우리 교회 안에, 우리 가정 안에 그리고 내 안에 확실히 살아 숨 쉬고 계심을 인정하고, 진심으로 성령의 현존을 감사하고 환영하며 그분께 의지하며 그분의 인도를 받겠다고 다짐하는 태도를 지니는 것입니다. 또한 무슨 일을 하든지 성령 안에서, 그분의 뜻에 따라서 행하겠다고 약속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묵상하다보면 성령께서 그분의 전 생애에 걸쳐 동반하셨음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잉태 과정에서부터 시작해서 십자가 죽음, 부활과 승천에 이르기까지 그 어떤 순간에도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인도를 받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류 구원 사업을 수행해나가는 과정에서 언제나 성령과 함께 하셨던 것입니다. 오늘 본격적인 인류구원사업의 첫발을 내딛으시는 예수님께서도 세상의 권위나 강력한 힘이 아니라 성령으로 무장하시어 등장하셨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성령의 힘을 지니고 갈릴래아로 돌아가시니, 그분의 소문이 그 주변 모든 지방에 퍼졌다. 예수님께서는 그곳의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모든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셨다.”
예수님께서 당신 사업의 첫 깃발을 꽂은 곳이 예루살렘이나 다른 잘 나가는 도시가 아니라
갈릴래아였다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갈릴래아는 당시 변방 중의 변방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 가서 ‘갈릴래아’에서 왔다고 하면 손가락질 받을 정도로 멸시와 냉대를 받던 지역이었습니다. 더구나 이 지역은 믿음이 약하기로 유명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바로 가장 보잘 것 없는 지역인 갈릴래아에서 출발하신 것입니다. 바꿔 말하면 예수님은 가장 낮은 바닥에서, 결국 무(無)에서 시작하셨습니다. 불신앙과 죄와 철저한 배척뿐인 척박한 지역에서 당신 사업의 첫 삽을 뜨신 것입니다.
본격적인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의 변화된 모습에 동네 사람들은 “저 사람은 우리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사람,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하면서 도무지 예수님의 메시아성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어떤 사람들은 노골적인 불신과 적대감으로 예수님을 바라봤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당신 사업의 첫 출발점을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으로 선택하셨습니다.
참으로 어려운 시작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주 당당하셨습니다. 누가 뭐래든 꿋꿋하게 당신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일말의 망설임이나 두려움도 없이 직진하셨습니다. 왜냐? 바로 성령께서 예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성령께서 그분 가시는 곳마다 현존하시며 든든하게 뒷받침하고 계셨습니다.
우리도 나약하지만 성령께서 함께 하실 때 강건해집니다. 우리는 너나할 것 없이 죄인이지만 성령의 빛으로 변화되고 성화의 길을 걸어갑니다. 겁 많은 우리지만 성령께서 뒷받침해주시니 든든합니다.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 내 안의 성령의 작용을 보지 못하는 것이 교만이다>
하는 일마다 잘되고 사람들에게 칭찬을 많이 받으면 우리 마음은 마치 돼지비계처럼 교만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젊은 나이게 자수성가한 어느 청년도 자신도 모르게 그런 마음에 도취되었습니다. 가난한 어머니에게 집도 사 주고 차도 사주고 이젠 비싼 옷을 사드리기 위해 백화점으로 가던 중이었습니다. 아들이 기세등등하게 어머니에게 물었습니다.
“어머니, 우리나라에서 지금 제 나이에 저만큼 성공한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요?”
가난하게만 살아왔던 어머니는 잠시 생각한 뒤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얘야, 어미가 못 배워서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도 네가 생각하는 숫자보다는 한 명이 적을 거다.”
‘라이언 홀리데이’의 「에고라는 적」은 과거의 성취에 우쭐해 있다가 그 교만으로 망하고 나서야 교만이라는 적을 조심해야 한다는 글을 써서 베스트셀러가 된 책입니다. 이 책에서 미국의 기업가이자 자선사업가인 존 D. 록펠러(John D. Rockefeller)의 젊은 시절 이야기가 흥미롭습니다.
이른 성공은 그의 에고와 자만심을 자극했지만 그는 에고를 극복하기 위한 독특한 노력을 이어갔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자기 자신과 밤을 새워가면서 대화하는 것이었습니다.
“너는 지금 막 일을 시작했을 뿐이다. 그러니 네가 지금 굉장한 인물이나 된 것처럼 생각하지 말고 정신 차려라. 그렇지 않으면 흥분해서 냉정함을 잃어버리고 만다. 그냥 지금처럼 꾸준하게 나아가라.”
자기 자신 안에서 일어나는 교만과 끊임없이 싸우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그 에고에 잡아먹혀 더 이상 숨 쉴 수도 없게 될 수도 있습니다.
아이가 자신의 노력으로만 두 발로 걷게 되었다고 말한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일까요? 사람은 자신의 힘만으로는 두 발로 걸을 수 없습니다. 늑대에게 키워졌으면 두 발로 걸을 수 없을뿐더러 말도 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그렇게 말한다면 부모에 대한 공경의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부모가 준 사랑을 보지 못하는 것이 바로 불효이고 교만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사랑이 내 안에서 어떠한 작용을 하는지 보지 못한다면 그 사람 또한 하느님 자녀로서 교만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마치 자신의 힘으로 신앙을 지니게 되었고 자신의 힘으로 사제가 되었고 자신의 힘으로 멋진 성전을 건축하였다고 믿는다면 그것 자체가 교만입니다. 자신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느님 사랑인 성령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성령의 힘을 지니고 갈릴래아로 돌아가시니, 그분의 소문이 그 주변 모든 지방에 퍼졌다.”는 말로 시작됩니다. 그리스도조차도 성령의 도움 없이는 아무 것도 하실 수 없습니다. 그분의 말씀에 은총이 넘쳤는데 그 이유는 그분 안에 성령의 은총이 넘쳤기 때문입니다. 이에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라고 하시며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라고 하십니다.
사람들은 모두 “그분을 좋게 말하며,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은총의 말씀에 놀라워하였습니다.” 그러나 정작 예수 그리스도는 그 공로를 성령을 내려주신 아버지께로 돌리고 계신 것입니다. 내 안의 성령의 작용을 보기만 한다면 그것 자체로 성령을 주신 분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성령의 활동을 느끼는 겸손한 사람들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자동차에서 연료의 작용을 아는 사람과 같습니다. 연료게이지에 민감하여 항상 때가 되면 주유소로 향합니다. 마찬가지로 성령의 작용에 민감한 겸손한 사람은 기도에 목숨을 겁니다. 기도할 줄 아는 사람이 교만해 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 자체로 자신의 모든 능력은 성령을 통하여 나오고 있음을 고백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그러면 겸손한 것입니다.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4,14-22 : 성경 말씀이 오늘 이루어졌다
사탄을 힘차게 물리치신 뒤에 주님께서는 성령의 힘을 지니고 능력과 권위를 떨치며 갈릴래아로 가셨다. 그분은 많은 기적을 일으키셨고 백성들은 놀라며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그분은 성령의 힘을 당신 힘과 권능처럼 사용하심으로써 찬미를 받으신다. 예수님께서는 회당에 들어가시어 두루마리를 펼쳐 당신에 관한 예언 이사 61,1-2을 읽으셨다. 이것은 하느님의 섭리였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18절). 여기서 가난한 이들은 다른 민족들을 가리킨다. 그들에게는 하느님도, 율법도, 예언자도, 정의도, 나머지 다른 덕들도 아무 것도 없었다. 그들은 잡혀간 포로들이었다. 오랫동안 사탄에게 묶인 채 사로잡힌 신세가 되어 그에게 복종했다. 바로 예수님께서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18절) 하려고 오셨다.
말씀과 그분의 가르침으로 눈먼 이들이 앞을 본다. 그분이 가르치시는 것은 ‘잡혀간 이들’만 아니라 ‘눈먼 이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는 의미이다.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18절) 예수님께서 치유하여 떠나보내신, 짓밟히고 부서진 사람들이 바로 이 억압받는 사람들이었다.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19절) 그 때는 우리가 눈을 더 보게 되고, 사슬에서 풀려나고, 모든 상처가 치유되는 때이다. 즉 주님의 때, 주님의 은혜의 때가 되게 하는 가르침이다.
주님께서 이 말씀을 회중 앞에서 읽으시자, 그들은 배우지도 않은 사람이 어떻게 글을 읽나 이상하게 생각하며 그분을 보고 있다. 그 때, 예수님은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21절)고 하시며 예언자 이사야가 말하는 이가 바로 당신임을 드러내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성경 말씀을 구체적으로 사심으로써 그 말씀을 현실화 시키셨기 때문이다.
그분은 가난하고 하느님도, 율법도, 예언자들도 없는 영적으로 가난한 이방인들에게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셨다. 잡혀있는 자들을 풀어 주시고, 사탄의 통치를 무너뜨려 어둠에 사로잡힌 이들을 영적인 빛으로 비추셨다. 그분은 죄 때문에 가슴이 부서진 사람들에게서 죄의 사슬을 끊어주셨다. 또한 장차 생명을 주실 것이며 죄인들이라고 하는 그들이 의로운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하신다.
이것이 주님의 은혜의 해이다. 예수님께서 성경 말씀을 구체적으로 이루심으로써 이사야서를 완성하셨다면, 그리고 이사야와 만나셨다면 우리도 그분의 말씀을 구체적으로 살아냄으로써, 2000년 전의 예수님과 참으로 만나야 한다. 그분을 만나고 체험하는 방법은 그분의 말씀을 오늘 지금 이 자리에서 이루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은 그러므로 우리에게 살아있는 생명의 말씀이고 구원을 체험케 하는 그리고 그분을 만나게 하는 방법이 될 것이다. 말씀의 실천을 통하여!
=====================
《매일미사》오늘의 묵상
[대구대교구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님(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오늘 복음은 루카 복음의 핵심적 가치를 요약해 놓은 것입니다. 이사야서의 말씀이 가리키는 메시아 시대가 예수님의 오심으로 활짝 열렸습니다. “주님의 은혜로운 해”가 예수님과 함께 머무는 이 자리, 이 시간에 온전히 이루어졌습니다.그럼에도 메시아가 어디 있는지, 은혜가 어디 있는지, 좀처럼 느낄 수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다시 한번 복음을 읽으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가 주어지는 이들을 되짚어 봅니다. 가난한 이들, 잡혀간 이들, 눈먼 이들, 억압받는 이들, 그리고 우리 자신에게 질문해 봅니다. ‘나는 가난한가? 나는 잡혀갔는가? 나는 눈이 멀었는가? 나는 억압받는가?’우리가 외면한 이들은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은총을 진하고 강하게 체험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세상으로부터 격리된 채,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방에 덩그러니 홀로 있게 되었을 때, 누군가 손을 내밀어 토닥여 준다면, 참 고맙겠지요. 예수님께서 주시고자 한 은총은, 삶이 무너진 이들이 받아 누리는 위로와 격려입니다. 잘살고자 노력하면 할수록 오히려 더욱 허전하고 외로워지지 않습니까? 외롭지 않다며 으스대는 가식의 옷을 벗어 던지고 서로의 손을 잡아 줄 줄 아는 따뜻함이 구원입니다.루카 복음은 계속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예수님의 모습을 그려 갑니다. 그 길에는 가난한 이, 다리저는 이, 눈먼 이들이 늘 함께합니다.
우리는 위로받고자 합니까, 위로받기를 부끄러워합니까? 우리는 예수님께 참된 은총을 받고자 합니까, 누군가에게서 저만을 위한 거짓 은총을 얻고자 늘 어딘가를 헤매고 있습니까?
=====================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참 기쁨’이신 예수님>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가 그분께 건네졌다. 그분께서는 두루마리를 펴시고 이러한 말씀이 기록된 부분을 찾으셨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예수님께서 두루마리를 말아 시중드는 이에게 돌려주시고 자리에 앉으시니,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의 눈이 예수님을 주시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17-21)
‘기쁜 소식’은 듣는 이들에게 ‘기쁨을 주는 소식’입니다. 그리고 ‘기쁜 소식’을 선포하는 일은, ‘참 기쁨’을 얻는 방법을 알려 주는 일이고, 동시에 ‘참 기쁨’을 주는 일이기도 합니다. ‘기쁜 소식’을 믿고 받아들이는 일은, ‘참 기쁨’을 얻는 방법을 믿고 그 기쁨을 향해서 나아가는 일이기도 하고, 그 기쁨을 얻어 누리는 일이기도 합니다. 막연하게 “언젠가는 ‘참 기쁨’을 얻을 수 있겠지.”라는 희망을 갖는 일이 아니라, ‘기쁜 소식’을 믿고 받아들이는 순간 ‘참 기쁨’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쁜 소식’을 듣는 일 자체가 ‘기쁜 일’이 됩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라는 말씀은 바로 그런 뜻입니다. ‘기쁜 소식’은 먼 훗날에 이루어질 기쁨을 알려 주는 소식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기쁨을 알려 주는 소식입니다. ‘기쁜 소식’을 선포하시는 예수님은, 단순히 소식을 전달하기만 하는 ‘소식 전달자’가 아니라, 우리에게 ‘참 기쁨’을 주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참 기쁨’이신 예수님”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바로 ‘참 기쁨’이십니다.
그런데 ‘기쁜 소식’을 듣고, 믿고, 받아들이는 일은, 듣는 사람 쪽에서의 능동적인 응답과 노력을 뜻한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만일에 듣기만 하고 아무것도 안 하면, 그것은 듣는 것이 아닙니다. 또 믿기만 하고 아무것도 안 하면, 그것은 믿는 것이 아닙니다. (잘 차려진 밥상을 받았다면 그것을 구경만 하지 말고 먹어야 합니다. 밥상에 잘 차려진 음식을 먹는 일은 각자 스스로 해야 하는 일입니다.)
신앙인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희망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계명들과 가르침들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실천해야 할 구체적인 지침들입니다. 그 지침들을 제대로 실천해야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믿는다면 실천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기쁜 소식’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으실 것입니다. 꾸준히 선행을 하면서 영광과 명예와 불멸을 추구하는 이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로마 2,6-7)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당연히 예수님의 계명을 지킬 것입니다. 만일에 예수님을 믿고 사랑한다고 고백하면서도 예수님의 계명을 안 지킨다면, 그 고백은 거짓 고백입니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요한 14,21)
예수님께서 ‘기쁜 소식’을 선포하신 일은, 죄와 죽음의 억압과 지배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지만 길을 모르고 있는 이들에게 그 길을 알려 주신 일입니다. 예수님의 ‘기쁜 소식’은 해방과 자유를 얻는 열쇠입니다. 그 열쇠는 죄와 죽음이라는 감옥 문을 열 수 있는 열쇠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그 열쇠를 주신 일은 참된 해방과 자유를 주신 일이고, ‘큰 기쁨’을 주신 일입니다. 이제 사람들이 할 일은, 그 열쇠를 받아서 감옥 문을 열고 감옥에서 나가는 일입니다. 충실한 신앙생활은, 예수님께서 주신 참된 해방과 자유를 얻어 누리기 위해서 노력하는 생활입니다. 이것은 누가 대신 해 줄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각자 자기 스스로, 능동적으로 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사람들 가운데에는 ‘욕심’이라는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더 많이 가지려고 하고,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려고 하고, 가지고 있는 것들을 놓치지 않으려고 하고, 남들과 나누지 않고 혼자서 독점하려고 하고...... “여러분은 욕심을 부려도 얻지 못합니다. 살인까지 하며 시기를 해 보지만 얻어 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또 다투고 싸웁니다."(야고 4,2) 욕심을 버리지 않으면 ‘참 기쁨’을 얻지 못합니다. (세속의 어떤 것을 갖기를 원하다가 그것을 마음껏 차지할 때 얻는 기쁨은, 기쁨이 아니라 허무한 즐거움이고, 속된 쾌감일 뿐입니다. ‘참 기쁨’은 속되고 허무한 것들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비울 때 비로소 얻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눈먼 이들’은 진리를 찾지만 무엇이 진리인지 모르거나, 누구에게서 얻을 수 있는지를 모르거나,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몰라서 헤매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모르고, 무엇을 위해서, 또 어디를 향해서 가야 하는지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인생의 목적과 의미를 가르쳐 주신 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구원과 생명의 진리이신 분입니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1-32)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실천하면, ‘깨달음’에 도달하게 되고, 이 깨달음은 큰 기쁨이 됩니다. (실제로 그런 체험을 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지금 말하는 깨달음은 불교의 깨달음과는 다른 것입니다. 이것은 충실한 신앙생활을 할 때 얻게 되는 참된 기쁨, 평화, 행복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성경은 안 읽고 다른 책들만 읽고, 또 예수님의 가르침은 실천하지 않고 다른 종교의 수행 방법만 따라 하고, 그러면서 점점 더 진리에서 멀어지고, 결국 기쁨을 잃어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직자들과 수도자들 가운데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
[부산교구 박정용 크리스토 폴 신부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고향인 나자렛으로 가시어 회당에서 선포하신 말씀을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자렛 회당에서 선포하신 말씀은 이사야서의 말씀으로서, 이스라엘이 믿는 구원자, 곧 메시아가 할 일을 가리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나자렛 회당에서 선포하신 이 말씀들을 3년 정도 되는 공생활 동안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복음서는 예수님께서 가진 것 없어 어떤 것도 할 수 없었던 병자와 허약한 이들, 곧 가난한 이들을 고쳐주심으로써 기쁜 소식을 전하셨고, 죄에 사로잡혀 있는 이들을 용서해주심으로써 죄에서의 해방을 선포하셨으며, 하느님의 사랑을 보지 못하는 눈먼 이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전함으로써 그들을 다시 보게 하셨고, 율법의 조항 때문에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셨음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선포하신 이사야서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어 하신 모든 활동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하느님의 은혜로움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께서 그 일을 하셨다는 것을 믿고,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의 은혜로움을 따르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통해 선포된 하느님의 은혜로움을 몸소 체험하고, 하느님의 은혜로움을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생활은 단순하게 말하면, 예수님을 통한 하느님의 은혜로움을 스스로 체험하고 다른 이들에게 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실천하여 오늘 들은 이 성경 말씀이 우리 가운데에서 이루어지도록 합시다. 그렇게 할 때 하느님의 나라는 올 것입니다. 아멘.
=====================
[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루카 4,14-22ㄱ (갈릴래아 전도를 시작하시다. 나자렛에서 희년을 선포하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성령의 힘을 지니고 갈릴래아로 돌아가시니, 그분의 소문이 그 주변 모든 지방에 퍼졌다. 예수님께서는 그곳의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모든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셨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자라신 나자렛으로 가시어,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셨다. 그리고 성경을 봉독하려고 일어서시자,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가 그분께 건네졌다. 그분께서는 두루마리를 펴시고 이러한 말씀이 기록된 부분을 찾으셨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예수님께서 두루마리를 말아 시중드는 이에게 돌려주시고 자리에 앉으시니,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의 눈이 예수님을 주시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그러자 모두 그분을 좋게 말하며,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은총의 말씀에 놀라워하였다.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가난한 이들에게 기쁨이 될 수 있습니다.
살며시 옷 적시는 가랑비 같은 나눔만으로도
가진 것 없는 이들의 생명 같은 희망을 샘솟게 하고
불의와 착취를 꾸짖는 작은 외침만으로도
자기 탓 없이 헐벗은 이들의 벗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잡혀간 이들을 자유롭게 할 수 있습니다.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세상을 거스르는
낮춤과 내어줌과 보듬음의 소박한 몸짓만으로도
세상에 짓눌리면서도 벗어나지 못하는 이들을
푸르른 생기 넘치는 삶에로 초대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눈먼 이들이 보게 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홀로 때로는 세상과 더불어
하느님께 우리를 온전히 맡기고
우리 안에 하느님을 곱게 모시는 것만으로도
보이는 것에 둘러싸여
보아야 하는 것을 보지 못하는 이들에게
믿음 희망 사랑의 새 세상 열어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킬 수 있습니다.
알아주는 이, 보아주는 이 없다 해도
기쁨과 열정으로 당당하게 작은 삶 가꾸는 것만으로도
스스로에게, 다른 이에게, 세상에게 버림받고
어둠 속 깊이 숨어버린 보잘것없는 이들이
다시금 빛 속에서 자신을 꽃피우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보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곳으로 갑시다.
그곳에서 하느님의 뜻을 이룹시다.
=====================
[광주대교구 조창현 클레멘스 신부님]
+ 조 두레박 신부의 영적일기
<주님의 말씀은 힘이 있어….>
이런 우스갯말 이야기가 있습니다.
목욕탕에서 4분의 자매님들이 수다를 떨다 자기 자식 자랑으로 이어졌습니다.
첫 번째 자매님은 "우리 아들은 성당 신부님이라오. 남들이 우리 아들 신부님보고 ‘오 존귀한 분’이라고 한다오." 그러자 이 말을 들은 두 번째 자매님은 "우리 아들은 추기경이라오. 남들이 우리 아들 추기경보고는 ‘오 거룩한 분’이라고 한다오." 그러자 세 번째 자매님은 이에 질 수 없애라 "우리 아들은 교황이라오. 남들이 우리 아들 교황 보고는 ‘오 고결한 분’이라고 한다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들은 4번째 자매님은 질 수 없다며 "우리 아들은 키도 작고 뚱보며 대머리라오. 그런데 남들이 우리 아들 보면 한결같이 자기들의 하느님이라고 그런다오. 'Oh my GOD(오 마이 갓).'”
사도행전 9장을 보면, 사울이 사도 바오로가 되기 전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죽이려 옥에 가두려 다마스쿠스에 있는 회당으로 가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눈이 멉니다. 그때 다마스쿠스에 ‘하나니아스’라는 예언자가 사울이란 청년을 위해 안수를 하고 나서 주님께서 나를 당신에게 보내셨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9장 18절을 보면,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지면서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세례를 받은 다음 음식을 먹고 기운을 차렸습니다.” 그리고 여러 회당에서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선포하였습니다. 즉 영 안이 열리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따라서 이제 우리는 하느님 말씀을 읽고, 잘 들어야 합니다. 그럴 때 영 안을 열리게 하고 귀도 열려 하늘로부터 오는 축복받는 영적인 하느님의 사람으로 면류관의 주인공들이 되실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당신이 자라신 나자렛으로 가시어,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셔서 이사야 예언서의 말씀을 찾으셨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기 시작하셨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말씀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가난한 자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는 능력,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는 능력, 눈먼 이들을 보게 하는 능력, 억압받은 이들을 해방시켜 내 보내는 능력이 있습니다.이런 말씀을 통해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시면서, 오늘 너희가 듣는 가운데 이루어졌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그 말씀의 능력을 고운님들 안에 치유와 회복의 은총으로 이루어주시겠다는 희망의 말씀인 것입니다. 이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하느님 말씀에 놀라우신 은혜와 능력이 이미 고운님들 안에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고운님들!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2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는 죄의 문제고, 또 하나는 죽음의 문제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 이 땅에는 슬픔과 고통, 눈물과 탄식이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또한, 아무리 행복한 그 무엇을 이루어도 죄 문제,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오직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하느님의 외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그 문제의 유일한 해결하신 분이 되십니다. 왜냐하면, 죄 없는 분이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죄 문제를 해결해 주셨고, 하느님의 능력으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복음이란? 바로 예수 그리스도요, 그분께서 이루신 기쁜 일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래서 고운님들 자신은 부족하고 나약하지만, 함께 하시고 능력을 주시는 예수님 안에서 고운님들이 할 수 있고 반드시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능력이 있으시기를 기도합니다. 특히, 저 두레박 사제도 부족하지만 예수님 말씀의 능력을 믿고 몸과 마음이 아픈 분들과 간호하는 분들, 그리고 고운님들의 자녀들에게 치유와 회복의 은총이 있으시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영적 일기를 마무리하면서….
오늘 성령의 불을 밝혀 주님의 말씀 속에 감사함으로 하루를 시작하면서 하늘의 축복을 보는 눈과 하늘의 음성을 듣는 귀가 열린 신앙인들 되시어 천상 상급을 받는 고운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강복합니다.
###############
+ 나를 단단해지게 하는 시편(371)
♧♧ 시편 69편 24절….
"그들의 눈은 어두워져 보지 못하고 그들의 허리는 늘 휘청거리게 하소서."
* 눈은 어두워져 보지 못하고...
맹수가 날카로운 눈으로 먹잇감을 노리듯 악인들은 항상 눈을 두리번거리면서 삼킬 자를 찾고, 그를 해칠 기회를 엿봅니다. 따라서 저들의 눈이 어두워 보지 못하게 해달라는 말은 저들로 하여금 더 이상 의인을 해치지 못하게 해달라는 말입니다.
* 허리는 늘 휘청거리게 하소서.
히브리인들은 허릴 힘의 원천이라고 생각했습니다.(욥기 40장 16절. 참조) 그러므로 ‘허리를 휘청거리게 하소서.’ 라는 말은 기세당당한 그들이 힘을 잃고 나약한 자게 되게 해달라는 비유적 표현입니다.
♧♧ 시편 69편 25절….
"그들 위에 당신의 분노를 쏟아 부으소서. 당신의 진노의 불길이 그들에게 미치게 하소서."
‘그들 위에 당신의 분노를 쏟아 부으소서.’와 ‘당신의 진노의 불길이 그들에게 미치게 하소서.’ 라는 동일한 의미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분노’와 ‘진노’는 하느님의 정의의 심판, 진노의 심판을 의미합니다. 다음으로 ‘미치게 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사그’라는 말은 ‘공격하다’ ‘덮치다’라는 뜻으로 대 홍수가 밀려오는 것과 같이 재난이 갑작스럽게 밀어닥치는 것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이 구절에서...다윗은 자신의 대적들에게 하느님께서 철저한 심판을 내려 주시기를 간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다윗이 대적들에 대한 개인적 원한이나 미움 때문에 저들의 멸망을 간구한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악인의 마지막은 하느님의 정의와 진노의 심판을 당하는 것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는 하느님의 정의로우심이 밝히 드러나게 되기를 간구한 것이라는 사실을 바로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예전에 맛있게 식사를 했던 식당이 생각나서 친한 신부들과 함께 갔던 적이 있습니다. 식사하면서 신부들에게 “맛있지 않아?”라고 물으니, 어떤 신부가 이렇게 말합니다. “네 입맛을 알겠다. MSG 입맛이구나.” 이 가게의 음식에 조미료가 많이 들어가서 맛있는 것이지, 특별히 맛집은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MSG라는 조미료가 몸에 좋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식품 의약품 안전처에서는 이렇게 공식 견해를 내놓았습니다. ‘MSG를 평생 먹어도 안전하다. 식품의 첨가량에 상한선이 없을 정도다.’ 그런데도 몸에 좋지 않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어느 연구자의 논문에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어린 쥐에게 MSG를 먹이니 이 물질이 뇌로 가서 흥분성 신경전달물질로 작용해서 뇌 신경 세포막을 파괴하고 뇌하수체에 이상을 일으키며 물질대사 및 성장에 장애를 불러일으키는 부작용이 나오더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실험은 학계에서 아주 몰상식한 실험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으로 치면 60kg의 사람에게 무려 500g에 가까운 양의 MSG를 매일 지속해서 먹이는 실험이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MSG는 소금보다 치사율이 낮고 비타민 B12, 비타민 C보다도 독성이 덜하며, 헬리코박터 파일로리균에 의한 위 손상으로부터 점막을 보호해주기도 한다는 실험내용이 있습니다.
잘못된 상식이 진실로 호도되는 경우가 바로 이 경우입니다. 주님에 대한 우리의 잘못된 상식이 무죄한 분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점을 떠올려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을 알아보지 못했던 것은 자기 생각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바른 판단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기를 바라십니다. 잘못된 판단이 아닌 올바른 판단, 자기의 뜻이 아닌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맞게 살아가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당신의 신원을 먼저 밝혀주십니다. 그분은 부유한 사람의 편이 아니었습니다.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셨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하셨습니다. 이로써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셨습니다.
많은 이들을 이 주님의 뜻을 보지 못지 못합니다. 그래서 여전히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려 하지 않고, 억압받는 이들의 억압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제 주님의 뜻에 함께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약속하신 하느님 나라를 차지할 수 있습니다.
###############
<다른 이에 대한 판단>
‘이 학생은 장차 어떤 일을 해도 성공할 수 없을 것으로 판단됨.’ 성적표에 담임선생님께서 이런 짤막한 의견을 써서 학부모에게 보냈습니다. 이 학생의 어머니는 앞이 캄캄했습니다. 그러나 아이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는 남과 다른 특별한 능력을 갖추고 있단다. 남과 같아서야 어떻게 성공하겠니?”
많은 아이를 지켜본 선생님은 성공할 수 없다고 말했고, 그에 반해 어머니는 성공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과연 누구의 말이 맞았을까요?
성적이 엉망이고 뭐 하나 제대로 할 것 같지 않아 선생님의 끔찍한 평가까지 받았던 이 아이는 훗날 일반 상대성 이론으로 과학 역사 안에 획기적인 공헌을 하는 물리학자가 됩니다. 바로 아인슈타인입니다.
누군가를 평가한다는 것에 다시금 생각해 볼 수 있는 일화입니다. 인간의 평가는 절대로 정확할 수 없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부분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훗날을 믿어주며 용기를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
[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1)
꽃동네 후원의 밤 행사에 다녀왔습니다. 아이티에서 사목하시는 신부님과 수녀님이 오셨습니다. 수녀님께서는 ‘사랑하면’이라는 말로 영상을 보여 주었습니다. 사랑하면 부자가 된다고 하였습니다. 후원의 물품이 상자로 왔다고 합니다. 상자를 보관하기 위해서 창고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사랑하면 변한다고 합니다. 미숙아로 태어난 아이가 정상으로 자라는 사진을 보여 주었습니다. 사랑하면 외국말도 알아듣는다고 합니다. 수녀님이 한국말을 하는데도 아이티의 아이들은 다 알아들었다고 합니다. 사랑하면 기적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아이티의 꽃동네는 하느님 나라의 모습을 보여 준다고 합니다. 가난하고 헐벗은 아이들이 배불리 먹고 배울 수 있다고 합니다. 아프고 병든 아이들이 약을 먹고 치유된다고 합니다. 사랑이 있으니 희망의 꽃이 피어난다고 합니다. 꽃동네는 꽃이 있는 동네가 아닙니다. 꽃동네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동네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간결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요한 사도도 아주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그분에게서 받은 계명은 이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안도현 시인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시인은 ‘연탄 한 장’이란 시에서 이렇게 말을 합니다. “삶이란 나 아닌 그 누구에게 기꺼이 연탄 한 장 되는 것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 듯이 연탄은, 일단 제 몸에 불이 옮아 붙었다 하면 하염없이 뜨거워지는 것 매일 따스한 밥과 국물 퍼먹으면서도 몰랐네. 온몸으로 사랑하고 한 덩이 재로 쓸쓸하게 남는 게 두려워 여태껏 나는 그 누구에게 연탄 한 장도 되지 못하였네. 생각하면 삶이란 나를 산산이 으깨는 일.”
어릴 때, 연탄을 갈면서 힘들다고 생각했는데, 시인은 연탄 하나를 가지고도 아름다운 시를 만들어 냅니다. 연탄구멍을 잘 맞추어야 하고, 적당한 때에 새 연탄을 올려놓아야 한다는 생각만 했었습니다. 온몸을 뜨겁게 달구어 새 연탄에 불을 붙여 주고, 자신은 다 타서 재가 되어 버려지는 것이 연탄입니다. 하지만 연탄은 방안을 따뜻하게 해 주었고, 예전에는 연탄불에 음식도 해서 먹었습니다.
미아리에 있는 ‘성가병원’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무료로 진료를 하고 있습니다. 처음에 사람들은 병원이 곧 문을 닫을 거라고 말을 했습니다. 하지만 30년이 훨씬 넘은 지금도 그 병원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진료하고 있습니다. 많은 의사가 자원봉사를 하고 있으며, 독지가들이 약을 지원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등포에 있는 요셉의원도 30년이 넘었지만 지금도 많은 사람을 위해서 무료로 진료를 하고 있습니다. 역시 나눔이 있기 때문입니다.
정부에서 일자리를 많이 만들어서 경제를 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국회에서 좋은 법을 만들어서 사람들을 편안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법부가 공정한 판결을 내려서 세상을 정의롭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공존의 그늘을 밝게 비추는 것은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나눔으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
(2)
저는 사목은 서비스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나는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기 위해서 왔다. 여러분 중에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 째가 되도록 하시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
겨울이면 생각나는 일이 하나 있습니다. 저는 1999년 10월 1일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구읍리 적성 성당 본당 신부로 갔었습니다. 겨울에 복사를 서는 아이들이 제의실에서 이렇게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6학년 아이가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야! 너도 춥냐!"
4학년 아이가 이렇게 말을 합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그러자 6학년 아이가 말을 하더군요. "젊음이 좋기는 좋다."
저는 그 말을 듣고 잠시 웃었습니다. 하느님 앞에 우리는 모두 어린이와 같은 것은 아닌가?
또 하나 생각나는 추억이 있습니다. 미사 참례 인원이 5명이었습니다. 하도 많아서 물어보았습니다. 한 분은 해설, 한 분은 독서, 2명은 복사, 한 분은 저의 어머니였습니다. 생각하면 아름다운 추억입니다.
오늘 .. 성소후원회에도 하느님의 사랑이 가득하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시간이 햇빛을 만나면 역사가 되고, 달빛을 만나면 신화가 된다고 합니다. 우리의 말과 행동이 하느님의 구원사업에 작은 디딤돌이 되면 좋겠습니다.
파도가 밀려오는 바다를 볼 때가 있습니다. 그 속에서 사는 물고기들은 파도가 밀려온다고, 사나운 파도가 친다고 두려워하거나, 겁내지 않습니다. 파도에 몸을 맡기고, 어쩌면 그 파도를 즐기는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의 삶에도 많은 파도가 밀려 올 것입니다. 누군가의 죽음을 보게 되고, 때로 건강에 이상이 생기기도 하고, 사랑하는 이웃과 헤어지기도 하고, 사업이 어려움을 겪기도 할 것입니다.
열심히 성당에 다니던 남편이 별 이유 없이 성당에 나가지 않을 때고 있고, 성당에는 가지 않으면서 결혼은 성당에서 하고 싶다는 아들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원하지 않는다고 해도, 삶의 파도는 끊임없이 우리를 흔들어 놓을 것입니다. 물 속에서 파도를 즐기는 물고기처럼 이왕 피할 수 없다면, 우리들 또한 삶의 파도를 받아들이고, 그 파도 속에 녹아있는 하느님의 뜻을 찾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새해를 시작하는 우리들에게 아주 좋은 이야기를 전해 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누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그분에게서 받은 계명은 이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형제의 범위를 넓히고 있습니다. 이제 단순히 혈연으로 맺어진 관계만이 형제가 아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이, 묶인 이, 감옥에 갇힌 이, 억울한 이, 절망 중에 있는 이’들이 바로 형제요 자매라고 말을 합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안도현 시인은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시인은 ‘연탄 한 장’이란 시에서 이렇게 말을 합니다.
“삶이란 나 아닌 그 누구에게 기꺼이 연탄 한 장 되는 것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 듯이 연탄은,
일단 제 몸에 불이 옮겨 붙었다 하면 하염없이 뜨거워지는 것
매일 따스한 밥과 국물 퍼먹으면서도 몰랐네.
온 몸으로 사랑하고 한 덩이 재로 쓸쓸하게 남는 게 두려워
여태껏 나는 그 누구에게 연탄 한 장도 되지 못하였네.
생각하면 삶이란 나를 산산이 으깨는 일.”
어릴 때, 연탄을 갈면서 별 생각이 없었는데, 시인은 연탄하나를 가지고도 아름다운 시를 만들어 냅니다. 연탄구멍을 잘 맞추어야 하고, 적당한 때에 새 연탄을 올려놓아야 한다는 생각만 했었습니다.
온 몸을 뜨겁게 달구어 새 연탄에 불을 붙여 주고, 자신은 다 타서 재가 되어 버려지는 것이 연탄입니다. 하지만 연탄은 방안을 따뜻하게 해 주었고, 예전에는 연탄불에 음식도 해서 먹었습니다.
오늘 나의 말과 행동이 이웃에게 따뜻한 위로와 기쁨이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신앙의 시작입니다.
=====================
[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우리는 누구인가?>
-주님의 전사戰士, 주님의 학인學人, 주님의 형제兄弟-
벌써 2020년 1월9일입니다. 제가 요셉 수도원에 1988년 부임했으니 이곳에 정주定住한지도 올해로 32년째가 됩니다. 32년을 살았다 지만 첫날같은 하루만 산 것 같습니다. 자작 좌우명 애송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의 마지막 연 그대로입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 하루를 평생처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받으소서”-
쏜살같이, 강물같이 흐르는 세월입니다. 이렇게 흐르다 보면 1월도 곧 지나갈 것입니다. 새삼 ‘어떻게 살아야 하나?’, 우리의 신원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20년전 어느 수녀원에서의 ‘수도자의 신원 확립’을 위한 강의 내용도 생각납니다.
우리는 모두 너나할 것 없이 교회 공동체내에 속해 있는 주님의 전사戰士, 주님의 학인學人, 주님의 형제兄弟입니다. 저는 중요한 말마디는 꼭 한자를 병기하면서 그 의미를 마음 깊이 확인합니다. 이런 신원의식에 대한 내용은 제 좌우명 자작 애송시 6째 연에 잘 드러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주님의 집인 수도원에서
주님의 전사로, 주님의 학인으로, 주님의 형제로 살았습니다
끊임없이 이기적인 나와 싸우는 주님의 전사로
끊임없이 말씀을 배우고 실천하는 주님의 학인으로
끊임없이 수도가정에서 주님의 형제로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받으소서”-
전우애戰友愛, 학우애學友愛, 형제애兄弟愛가 창조적 긴장중에 잘 조화되고 균형잡힌 역동적 공동체가 우리 수도승들이 꿈꾸는 참 아름다운 하늘나라 공동체입니다. 주님의 전사는 사랑의 전사요 믿음의 전사가 됩니다. 또 주님의 학인은 사랑의 학인, 믿음의 학인이 되고 주님의 형제는 사랑의 형제, 믿음의 형제가 됩니다.
참으로 평생 영적 전투에 필수적 자질이 사랑과 믿음의 자질이요, 평생 배워야 할 공부가 사랑과 믿음의 공부입니다. 주님의 전사, 주님의 학인의 롤모델이 우리 주 예수님이십니다. 흡사 오늘 복음의 예수님은 하느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세상 전장戰場에 출전出戰하는, 파견派遣되는 사랑의 전사, 믿음의 전사같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해방시켜 내 보내며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바로 오늘 복음에서와 똑같은 주님께서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날마다 새롭게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총입니다. 주님께 치유받고 구원받아 자유로운 존재가 되어 주님과 함께 주님의 전사로, 주님의 학인으로, 주님의 형제로 각자 삶의 자리로 파견되는 우리들입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이루어졌다.”
바로 오늘 지금 여기서 말씀이 그대로 실현되어 자유로운 주님의 전사, 주님의 학인, 주님의 형제로 살게 되었다는 주님의 확인 선언입니다. 그러니 이제부터 칠전팔기七顚八起, 언제나 초발심初發心의 자세로 사랑을, 믿음을 다시 새롭게 배워 실천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죽어야 제대인 영원한 현역의 평생 주님의 전사요, 죽어야 졸업인 영원한 학인의 평생 주님의 학인이요, 죽어야 끝나는 영원한 형제의 평생 주님의 형제입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에서 사도 요한의 사랑과 믿음에 대한 가르침이 너무 귀하고 고맙습니다.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며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를 사랑합니다. 참으로 주님의 전사인 우리는 사랑의 전사임을 깨닫습니다.
진정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도 사랑합니다. 아버지를 사랑하는 사람은 모두 그 자녀도 사랑합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수직과 수평의 십자가의 형상으로 하나로 결합되었음을 봅니다.
그러니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분의 계명을,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계명은 힘겹지 않습니다.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우리는 모두 세상을 이기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이긴 그 승리는 바로 우리 믿음의 승리입니다.
주님과 사랑의 일치가 깊어질수록 주님을 닮아 주님의 전사, 주님의 학인, 주님의 형제로 천하무적天下無敵, 백전백승百戰百勝 영적 승리의 삶을 삽니다. 사랑의 승리, 믿음의 승리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승리의 삶을, 사랑의 승리, 믿음의 승리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
[청주교구 청주성모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향기가 있으면 벌 나비가 모여드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향기가 아니라 냄새가 나면 다 떠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 주변에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습니다. 그것은 그만한 향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힘을 지니신 예수님께서 갈릴래아로 돌아가시자 그분의 소문이 그 주변 모든 지방에 퍼졌습니다. 사실 갈릴래아지역은 유다인들이 지독히 멸시하던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빛나는 자리가 되었습니다. 빛나는 존재, 한 사람이 중요합니다.
바빌론 유배생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민족은 느헤미야와 에즈라 예언자의 가르침대로 일대 종교 부흥을 일으키며 율법의 왕국을 건설하였고, 모든 종교 제사는 예루살렘 성전 안에서만 이루어지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고 유다인들은 적어도 일 년에 세 번 제사에 참여해야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활동의 중심은 경신례를 바치던 성전이었습니다. 그러나 일상생활에서의 중심은 작은 마을까지 퍼져있던 회당이었습니다. 회당은 사람들이 모여 기도하고 말씀의 전례를 위한 집회가 열리는 곳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인의 전통대로 안식일이 되자 회당에 가시어 성경을 읽으시고 설명을 하셨습니다. 오늘 성경말씀은 당신의 사명을 이사야예언자의 말씀을 빌어 묘사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이 말씀은 이사야서 61장 1-2절을 인용한 말씀입니다. 이사야예언자는 해방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며 메시아의 도래를 알리는 사명을 받은 예언자였습니다. 그가 전하는 구세주는 말씀과 행적으로 자신의 사명을 성취합니다. 그는 구원자이며 승리를 알리는 사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메시아가 오실 때 일어날 일들을 기록한 구절을 읽으신 후 명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4,21)
유다인들의 거룩한 관습과 약속을 담은 성경말씀이 당신 안에서 실현되었다는 선언입니다. 구원의 때가 시작되었고, 구세주가 나타나셨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비로소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구원의 메시지는 믿음을 요구하고 이 믿음은 들음에서 옵니다. 믿음은 말씀의 요구에 대한 응답입니다.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 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보다 날카롭습니다.”(히브4,12) 그러므로 “듣는 가운데에서”이루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언제나 “오늘 여기”에서 실현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영원합니다.
“모든 인간은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꽃과 같다.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지만 주님의 말씀은 영원히 머물러계시다.”(1베드1,24-25)
구원의 말씀은 듣는 가운데 이루어집니다. 듣는다는 것은 ‘그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현실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생각을 바꾸어 새롭게 시작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나에게 ‘주님, 주님!’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7,21)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1,22) 듣고 행하는 가운데 구원을 이루고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주님 공현 대축일 후 넷째 날인 오늘, 미사의 말씀은 '주님의 사명'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 사명은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입니다.
"한처음 시간이 생기기 전, 말씀은 하느님이셨네. 그 말씀이 세상의 구원자로 태어나셨네."(입당송)
이처럼 입당송은 예수님께서 태초부터 계시던 말씀이시며 이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분이심을 노래합니다. 이스라엘에서 '구원자(고엘)'는 가난한 형제의 빚을 대신 갚아 주거나, 형제의 넘어간 토지를 되사서 돌려 주는 이, 후손을 이어주고, 피의 복수를 대신 해주는 이를 가리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성령의 힘을 지니고"(루카 4,14)
복음은 예수님이 광야에서 악마의 유혹을 받으신 후 갈릴래아로 돌아가시는 장면입니다. 사십 일 전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루카 4,1)셨던 예수님께서 이제 같은 성령의 힘을 지니고 갈릴래아 전도를 시작하십니다.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루카 4,18)
예수님은 이사야 예언서의 한 대목(이사 61,1-2)을 인용해 당신 사명을 밝히십니다. 곧 가난한 이에게 기쁜 소식을,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눈먼 이들에게 빛을,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키는 일입니다.
이 사명의 완성이 곧 "주님의 은혜로운 해"인 희년의 도래입니다. 희년에는 제 소유지를 되찾고 거룩히 지냅니다(레위 25,8-13 참조). 모든 것은 잃고 무너지고 손상되기 이전 상태로 돌아갑니다. 하느님께서 모든 것의 주인이시기에 하느님께서 처음 주셨던 온전한 상태로 되돌려지는 것입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21)
사실 이 말씀에는 엄청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당신의 도래와 희년을 동일시하신 것이니까요. 주님의 영으로 기름부음받은 메시아로서 해방과 치유, 되살림과 되찾음, 기쁜 소식의 주체가 곧 당신이심을 밝히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구원 방식은 이스라엘이 지켜오던 구원자(고엘)의 의무들을 넘어섭니다. 이는 영성체송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하느님은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네."(영성체송)
예수님의 구원 방식은 화폐가 아니라 당신 생명을 지불해서 믿는 이들이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신 구원입니다.
제1독서는 사랑의 사도 요한의 편지답게 계속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1요한 4,21)
사랑은 하나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랑이십니다. 그 사랑으로 우리는 하느님을, 형제와 이웃을, 심지어 원수까지도 사랑합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의 골자로 짚으신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이렇듯 한 뿌리입니다.
오늘 복음에 드러난 예수님의 사명은 전부, 크고 작은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인간을 향해 있으며, 그들의 온전함을 회복시켜 주는 것이야말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위로해 드리는 일이라고 역설합니다. 가난하고 병들고 빼앗기고 억압 당하는 이들이 하느님의 모상성을 회복하도록 새 출발선을 마련해 주는 일, 새 도화지를 펼쳐 주는 일이 곧 예수님의 사명이자 희년이신 분의 아버지 사랑, 형제 사랑입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 이루어졌다."(루카 4,21)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당신의 사명이 지금 여기서 이루어졌다고 하십니다. 그분 존재가 곧 희년이시기 때문이고, 또 주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듣는 이들이 의식하건 의식하지 못하건 치유와 해방, 기쁨과 자유의 실타래는 내면 저 깊숙한 곳에서 이미 풀리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지방에"(루카 4,14)
"모든 사람에게 칭송을"(루카 4,15)
"모든 사람의 눈이"(루카 4,20)
"모두 그분을 좋게 말하며"(루카 4,22)
오늘 복음 대목에서는 "모두, 모든"이라는 전체를 가리키는 말씀이 네 차례나 등장합니다. 이는 어느 정도의 과장이 포함된 표현이기도 하지만 전체성을 염두에 둔 의도가 담겨있기도 합니다.
이 "모두, 모든" 안에는 당시 현장에 있던 이들뿐만 아니라 동시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물론 이방인들도 포함됩니다. 또 시대를 넘어 오늘을 사는 우리와 미래의 인류까지, 잠재적 하느님의 자녀들 전부가 그 안에 들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모두의 눈앞에서 구원자 예수님의 사랑이 드러났습니다.
이스라엘에서는 희년을 7년이 일곱 번 반복된 후 맞는 50년째 해를 가리킵니다만, 우리는 숫자보다 상징성을 염두에 두고 계산할 수 있을 듯합니다.
사랑하는 벗님! 여러분은 저마다 희년을 맞아, 주님의 은혜로운 해가 열리면 주님께서 나의 어떤 부분에 치유와 해방, 기쁨과 자유를 선사해 주시길 바라십니까? 아마 저마다 다르겠지요.
잠시 숙고해 보시고 주님 앞에 그 부분을 펼쳐 놓은 뒤, 오늘 복음의 주님 말씀 부분에 깊이 머물러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말씀이 내 귀를 뚫고 들어와 심장을 관통하고 영혼에 번져갈 때, "오늘 이 성경 말씀이 이루어졌다!" 하시는 단호한 선언이 여러분 안에서 완성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여러분 모두 해방을 얻고 자유로워져 마음껏 행복하시길 축원합니다.
=====================
[교부들의 말씀 묵상]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4,18-19)
<가난한 이들을 위한 기쁜 소식>
우리 구원자께서는 회당에서 유대인들 가운데 이 예언을 읽으신 다음, 두루마리를 덮고는 “오늘 이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그 순간 그분의 가르침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분은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셨고 그들을 가장
먼저 축복하셨습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마태
5,3). 그렇습니다, 그분은 오랜 세월 악령에 사로잡혀 마귀의 노예로 묶여 있던 이들에게 용서를 선포하셨습니다. 죄의 사슬에서 풀려나 자유를 얻으라고 만민을 부르시며 말씀하셨지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회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28)
육신의 눈이 망가진 이에게는 볼 수 있는 힘을 주심으로써 눈먼 이에게 빛을 주시고, 먼 옛날부터 마음으로 진리에 눈먼 자들에게는 참 종교의 빛으로 진리를 볼 수 있게 하셨지요. 우리가 들은 예언은, 그리스도께서 복음의 창시자요 인도자가 되실 분이라고 말합니다. 이 예언을 한 예언자는 그분 사후에 제자들이 그분의 일을 계속하게 되리라는 것도 알려 줍니다. “얼마나 아름다운가, 산 위에 서서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의 저 발! 펑화를 선포하고 기쁜 소식을 전하며 구원을 선포하는구나!”(이사 52,7; 로마 10,15)
이 예언은,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아름답다고 매우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토록 짧은 시간에 온 세상을 두루 다니며 가는 곳마다 세상을 구원하시는 주님에 관한 성스런 가르침으로 가득 채웠으니, 어떻게 그들이 아름답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에우세비우스-
=====================
[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이웃과 원수의 구별이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복음의 원리는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 안에도 하느님은 계시다”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 나라의 핵심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십자가의 복음이다. 이러한 원리는 결국 원수를 사랑하라는 계명과 일치하는 것으로서 복음의 대상은 이웃과 원수의 구별이 없는 것이다.( 의인에게 죄인에나 햇빛은 똑 같이 비춘다.) 즉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 안에도 “하느님은 계시다”라는 믿는 것이다.
♣십자가의 고통 중에서 예수님은 왜 십자가에서 안 내려 오셨는가?
만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려왔다면 예수님이 선포한 복음은 모드 헛되게 되는 것이다.
죽음과 고통의 십자가에서도 “하느님은 계시다”라는 것을 믿는 것이 복음의 정신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안 내리신 것이다. 복음 선포의 핵심이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라는 것으로 죽음의 십자가 고통 중에도 하느님은 계시다는 것인데 이것이 안 되면 복음 선포는 헛된 것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고통을 겪으신 것이다.
-<김홍언 신부 영성노트>에서
___________________
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우리는 여전히 주님 공현 후 주간 안에서, 주님의 현현을 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구원자이심을 드러내십니다. 지난 월요일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하늘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오늘 당신이 자라신 나자렛에서의 공생활의 시작은 그 “하늘나라”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를 드러내주는 이사야 예언의 성취가 선포됩니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 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루카 4,18-19)
예수님께서는 “오늘 이 성경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이루어졌다”(루카 4,21)고 하시면서 말씀을 이루시는 하느님이심을 현현하십니다. 마치, 창조 때 하느님께서 “~(라고 말씀)하시자, 그대로 되었다”(창세 1,9.11.15.24.30)라고 하시며 말씀을 이루셨던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당신의 말씀을 이루시면서 하느님이심을 선포하십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구원의 말씀을 이루시는 구원자로 당신을 선포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진리를 이루는 길은 명확합니다. 그것은 진리를 행하는 것입니다. 결코 진리를 행하지 않으면서는 진리에 나아갈 수 없는 까닭입니다. 곧 진리를 이루지 않고는 진리에로 나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랑의 길은 사랑을 실행하는 것입니다. 결코 사랑을 실행하지 않고는 사랑의 길을 갈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한 것은 이미 그 사랑을 입은 까닭입니다. 그래야만 그 사랑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사도 요한은 오늘 <제1독서>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도 사랑해야 합니다.”(1요한 4,19-21)
그래서 우리는 잠시 후에, <예물기도>를 이렇게 바치게 될 것입니다.
“주님, 놀라운 교환의 신비를 이루시어, 주님께 받은 것을 바치는 저희가 주님을 합당히 모시게 하소서”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님께 받은 것을 바침으로써, 저희가 주님을 합당하게 모시게 됩니다. 그러기에, 다른 것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님께 받은 것, 바로 그것을 실행해야 합니다. 이미 받은 말씀을 성취하는 일입니다. 이미 받은 사랑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바로 그 안에서 현현하실 것입니다. 아멘.
###############
- 오늘 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이루어졌다.”(루카 4,21)
주님!
말씀의 영으로 저를 도유하소서!
제 가슴이 뜨거워지고, 제 입에 당신 말씀을 담게 하소서!
제 발 인도하시고, 제 삶이 당신 말씀을 떠받들게 하소서!
들은 바를 살게 하시어, 듣는 가운데 당신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아멘.
=====================
[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칭찬>
"예수님을 모든 사람이 칭송하였다."
필요한 것을 채워주고 억울함을 풀어주고
병든곳을 낫게 해주며 주린배를 채워주면
누구나 좋아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욕구를 넘어
죄에서 영혼을 구하시는 분이니
모두의 칭송이 자자합니다.
쭈욱 칭찬 받기란 쉽지 않죠. ~
그러지 않아도 됩니다.
잘 보이기 위해 노력하기보다
진실하기 위해 마음 쓴다면 ~
때때로 예수님처럼 박해도 받겠지만
결국 빛은 제때에 빛나게 될 것입니다.
'환경과 상대를 수용하고 내 그릇을
넓히는 오늘을 주님께서 칭찬하십니다.'
=====================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 21)
은총의 말씀이
간절히 필요한
우리들 삶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오늘을
우리들에게
주셨습니다.
사람의 길은
말씀의 길입니다.
이끌고 밀어주는
주님의 말씀에서
오늘의 길을
찾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걸어가야
할 우리의 길을
만들어 줍니다.
오늘을 위한
구원의
말씀입니다.
오늘의 기쁨은
오늘의 말씀 안에
있습니다.
말씀은 주님과
우리를
연결시켜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가운데에서
말씀을 선포하시고
말씀을 이루십니다.
말씀을 듣고
말씀을 따르는
은총의 오늘
되십시오.
###############
<(2)말씀을 놓치지 마십시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하느님 말씀에 대한 중요성을 새롭게 깨닫게 됩니다. 오늘을 더욱 의미 있게 살게 하는 것은 하느님 말씀뿐입니다. 말씀 안에 우리의 오늘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존재방식이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오늘은 말씀과 함께 흘러가야 구원을 제대로 체험 할 수 있습니다. 말씀과 함께 걸어가는 발걸음이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은 듣는 가운데이루어지는 변화입니다. 들음의 기쁨이 나눔의 기쁨이며 사랑의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 가운데에서 선포되는 하느님 말씀을 먼저 듣는 소중한 우리의 오늘이 되기를 기도드립니다. 오늘과 말씀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환상과 거품을 걷어내시는 하느님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서 울려 퍼집니다. 욕심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느님 말씀이 우리에게 건네졌습니다.
말씀은 영원한 현재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오늘이라는 가장 큰 선물은 무엇보다도 말씀을 향하고 말씀을 듣는 가운데에서 완성됨을 믿습니다.
말씀 안에 우리의 오늘이 주어졌습니다. 말씀을 놓치지 마십시오.
=====================
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