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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당 조정육의 그림과 인생 스크랩 모두 취해 있어도 나 홀로 깨어 있네-굴원
무진당 추천 0 조회 1,415 11.01.02 10:04 댓글 6
게시글 본문내용

조정육의 옛 그림 읽기♣-그림, 이야기에 빠지다⑤

 

<모두 취해 있어도 나 홀로 깨어 있네>

                                         -굴원-

 

“위대한 스승님을 몰라 보고 쫓아내는 학교에서는 더 이상 근무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 교직원 36명은 오늘부로 사직서를 제출합니다.” 1898년, 동경미술학교에서의 일이었다. 교장 오카쿠라 텐신(岡倉天心:1863-1913)을 따르던 교직원들이 학교에 일괄 사직서를 제출했다. 그들의 정신적인 지도자였던 교장이 억울한 누명을 쓰고 교장직을 물러난 것에 대해 항의하는 의미에서였다. 학교를 떠난 그들은 오카쿠라 텐신을 중심으로 일본미술원을 창립하고 해마다 전람회를 개최했다. 전시회 참여 작가 중에는 히시다 ?소, 시모무라 칸잔, 요코야마 다이칸 등 일본 근대미술을 대표하는 기라성 같은 작가들이 상당수 포진해 있었고, 일본미술원전은 일본 근대미술사의 한 획을 긋는 중요한 사건이 되었다.

그런데 제1회 일본미술원전에 요코야마 다이칸(橫山大觀:1868-1958)이 <굴원>이란 작품을 출품했다. 거대한 화면 왼쪽에는 손에 풀을 든 인물이 서 있고, 오른쪽에는 강한 바람에 금새라도 뿌리 뽑힐 것 같은 나무들이 그려져 있다. 요코야마 다이칸은 대학교에서 억울하게 쫓겨난 스승을 침통한 표정으로 서 있는 굴원이라는 인물에 빗대어 그렸다. 스승을 쫓겨나게 한 사람은 맹독을 가진 검은 짐새(몸 전체가 독으로 되어 있음)의 모습으로 오른쪽 구석에 그려 넣는 것도 잊지 않았다. <굴원>은 근대를 대표하는 기념비적인 대작이라는 의미와 더불어 역사화의 부활, 몽롱체(朦朧體:동양화의 전통적인 표현 방법인 선묘를 없애고 먹과 색채의 농담만을 구사하여 공간감을 표현하는 기법)를 시도한 선구적인 작품으로 평가받았다. 그렇다면 도대체 그림 속에 등장한 ‘굴원’은 어떤 인물일까. 어떤 생애를 살았기에 저렇게 비장한 모습으로 그려진 걸까.

 

1)요코야마 다이칸, <굴원>, 1898년, 비단에 색, 132.7×289.7cm, 광도, 암도신사.

 

#근심을 만나 부른 노래-「이소(離騷)」

“고양 임금의 후예, 내 아버님은 백용. 호랑이 해, 호랑이 달, 호랑이 날, 나 태어났네. 아버님 나 낳은 때 헤아려, 나에게 고운 이름 주시어 정칙이라 하시고 자는 영균이라 하셨네.”

굴원(屈原:서기전 약 340~약278)이 지은 「이소(離騷)」는 이렇게 자신의 가계와 출생을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고양(高陽) 임금은 중국 전설에 나오는 고대의 삼황(三皇) 오제(五帝) 중 전욱(?頊)의 별호이다. 굴원이 왕족 출신임을 알 수 있다. 굴원은 전국시대(戰國時代)의 초(楚)나라 사람이다. 이름은 평(平)이고 원(原)은 별명이다. 회왕(懷王)과 그의 아들 경양왕(頃襄王)때 활동했던 인물로 좌도(左徒)와 삼려대부(三閭大夫)라는 직책을 맡았다. 좌도는 재상 밑에 있는 직책이고 삼려대부는 종족의 업무를 총괄하는 벼슬이다. 주변국의 제후들을 상대하는 외교적인 업무도 그의 중요한 일이었다.『구장(九章)』에는 그의 모습을 추정해 볼 수 있는 이런 문장이 적혀 있다.

“나는 어려서부터 기이한 복장을 좋아하고, 나이 들어서도 변치 않았네. 눈부시게 반짝이는 장검 띠 두르고, 우뚝 솟은 절운관(切雲冠:구름에라도 닿을 듯 높이 솟은 관)을 썼으며 등에 야광주 드리우고 허리에 보옥 찼네.(「장강을 건너」중에서)”

장조화(蔣兆和:1904-1986)가 그린 <굴원>의 초상은 『구장(九章)』에 나온 문장을 읽고 형체를 빚은 듯 절운관과 장검이 매우 특징적이다. 그런데 주인공의 얼굴 표정이 왜 저렇게 어둡단 말인가.

2)장조화, <굴원>, 1953년, 종이에 색, 160×127cm, 중국 개인 소장

 

굴원은 나라와 백성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아주 강했다. 안목이 넓고 지혜로웠으며 글재주와 말재주가 뛰어나 회왕이 그를 매우 신임했다. 회왕은 나라의 크고 작은 일을 그와 함께 의논했고 법령을 만들도록 했다. 그런데 회왕은 귀가 얇고 어리석었다. 굴원과 비슷한 지위에 있던 상관대부 근상(?尙)이 눈엣가시 같았던 굴원을 헐뜯고 모함하자 그 말만 듣고 화가 났다. 회왕은 사실을 확인해 보지도 않고 굴원을 한수(漢水) 북쪽으로 쫓아낸다. 굴원은 ‘왕이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듣는데 밝지 못하여, 참소와 아첨하는 말이 군주의 밝음을 가로막으며, 흉악하고 비뚤어진 말이 공정함을 해치고, 단아하고 올곧은 사람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마음 아파했다.’(사마천의 『사기열전』) 굴원은 ‘앞날을 생각하면 밥을 먹어도 맛을 느끼지 못했고, 잠자리에 들어도 제대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온종일 우울하고 즐겁지가 않았으며, 몸은 말린 국화꽃보다 더 비쩍 말랐다.’(우가오페이,『굴원』,134쪽). 그는 비통한 심정으로 나라를 근심하는 마음을 담아 「이소」를 지었다.

 

3)왕효강, <이소도>, 156×650cm,

 

 

 

왕효강, <이소도(세부)>

 

 

‘이소(離騷)’는 그 해석이 다양하다. ‘불평’이라는 뜻으로 해석하는가 하면, ‘걱정스런 일을 만나다’라는 뜻으로도 해석한다. 370여 구문에 3천 5백자에 달하는 장문의 시로

초사(楚辭)》문학의 대표작이다. 굴원 이전에는 이렇게 긴 시를 쓴 사람이 없었다. 「이소」는 굴원의 애국심과 충성심, 간신들로부터 이간질을 당해 왕의 부름을 받지 못한 자의 비애와 우수가 담긴 시로 고대 중국 북방의 대표작인 《시경(詩經)》과 함께 남방문학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자신의 출생과 집안 내력으로부터 시작된「이소」는 소인배들 때문에 폄적당한 채 등용되지 못한 자의 억울한 심정이 구구절절 담겨 있다. ‘몸이 찢겨도 나는 변함 없으리/어찌 내 마음 두려움이 있으랴.’ 문체는 강하고 비장미가 넘친다. ‘긴 한숨에 눈물 닦으며, 사람의 삶 다난함이 슬퍼라.’ 시의 기저에 흐르는 정서는 장중하면서도 음울하다. ‘하나라 걸왕은 언제나 도리에 어긋나/드디어 재앙을 만났고/신임금은 인육(人肉)을 소금에 절였기에/은 왕조는 오래 가지 못했어라.’ 평소에는 전혀 인연이 없던 단어들이 굴원 때문에 처음 만나 선 굵은 남자의 회한을 전해주느라 진저리를 친다. ‘어이하여 지난날 향기롭던 풀이, 지금은 한갓 이런 쑥덤불 되었나.’ 명사는 탐욕에 빠진 관료들에 대한 울분을 감당하지 못하고 냉소적이다. ‘님은 내 마음 아니 살피시고/도리어 모함만 믿고 진노하시누나.’ 형용사는 분별없는 임(회왕)에 대한 원망과, 쫓겨날 것을 예측하지 못한 자신의 불찰에 대한 자책감으로 냉랭하다. ‘나라에 사람 없어 날 알아주는 이 없는데, 어이 고향을 그리워하랴.’ 거만하면서도 무례하고 간절하면서도 절망적인 품사 사이에서 힘없는 부사만 혼자 절망한다. ‘함께 좋은 정치 할 만한 이 없는 바엔, 나는 팽함 계신 곳 찾아 가리’. 그 모습을 마지막까지 남아 지켜봐야하는 동사는 참혹하게 외롭다.

세상을 향해 포효하던 굴원은 포획된 사자처럼 지쳐 쓰러진다. 가슴에 맺힌 애끓는 심정을 호소하기 위해 상상 속에서 고대의 성군(聖君)인 순임금을 만나고 신을 찾아 헤맨다. 백룡을 말을 삼고, 봉황을 수레 삼아 하늘과 땅을 오르내린다. 그러나 하늘의 문은 열리지 않고 지상의 신들도 그를 거부한다. 회의에 빠진 굴원이 주술사에게 자신의 진로를 묻는다. 주술사는 굴원에게 멀리 타국으로 떠날 것을 권한다. 결국 그는 초나라를 떠나 나그네 길에 오른다. 그 과정에서 잠시 동안 ‘구가(九歌)’를 연주하고 ‘구소(九韶)’라는 음악에 맞춰 춤을 추며 즐긴다. 그러나 자신이 사랑하는 초나라를 떠나서는 살 수가 없어 결국 죽음을 선택한다. 「이소」는 대강 이런 줄거리로 구성되어 있다.

왕효강(王孝鋼:1945- ?)이 그린 6폭 대작 <이소도(離騷圖)>에는 굴원의 시에 담긴 신비스러움과 환영이 잘 담겨 있다. 절운관과 장검이 트레이드마크인 굴원이 백룡이 끄는 수레를 타고 있고, 주변에는 굴원이 상상 속에서 만난 신(神)과 왕과 비천(飛天)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다. 2천년의 세월을 뛰어 넘어 여전히 중국인의 삶 속에 큰 목소리를 들려주고 있는 굴원의 영향력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신에게 바친 노래 - 구가(九歌)# 

왕한, <구가도>중 ‘동황태일’, 두루마리, 비단에 색, 21.2×319.2cm, 중국 절강성 박물관

 

「이소」의 내용 중에 굴원이 초나라를 떠날 때 ‘구가를 연주’한다는 구절이 나온다. 청대의 화가 왕한(汪漢)이 그린 <구가도(九歌圖)>는 굴원이 쓴「구가(九歌)」중에서 천신(天神) 동황태일(東皇太一)을 묘사한 장면이다. 화면 오른쪽 구름 속에는 천신이 그려져 있고, 왼쪽 하단에는 천신께 제사 지내는 무녀들의 모습을 그렸다. 신과 무녀 사이에는 제단이 놓여져 있고 무녀들은 접신(接神)을 위해 춤추고 노래하고 악기를 연주한다. 신비스럽고 초자연적인 분위기가 느껴지도록 인물 주변은 구름으로 뒤덮여 있다. 

 

(왼쪽)작가미상, <구가도(九歌圖)>중 ‘국상’, 두루마리, 남송, 비단에 색, 124.7×608.5cm, 미국 보스턴미술관

(오른쪽)서비홍, <구가도>중 ‘국상’, 1943년, 종이에 색, 107×62cm,

:국상(國?)은 나라를 위해 죽은 군사들을 의미하는데 보통 20살 미만에 전쟁터에서 죽은 주인 없는 젊은 영혼을 뜻한다. 이들을 위해 국가에서 제주(祭主)가 되기 때문에 ‘국상’이라 부른다. 같은 내용을 그린 그림인데 남송대의 작품이 신화적이라면 서비홍의 작품은 현장감이 느껴진다.

 

「구가」는 초나라의 종교무가(宗敎舞歌)로 당시 백성들이 신에게 제시 지낼 때 부르던 노래와 춤이다. 「구가」의 원형은 기원전 5세기 때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굴원이 활동하던 시기에 정착 되었다고 전해진다. 초나라 사람들은 귀신을 믿고 제사 지내기를 좋아하였는데 제사 때마다 노래와 춤을 곁들였다. 굴원은 당시에 민간에서 전해오던 옛 노래를 손질하여 「구가」라는 작품으로 완성하였다. 특이한 것은 굴원의 작품을 대표하는「이소」가 문학 쪽에서 매우 높이 평가받고 있는 것에 반해 그림 쪽에서는 그다지 환영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반면「구가」는 송나라 때부터 현대까지 줄기차게 그림의 소재로 그려질 만큼 사랑받았다.「구가」에 등장하는 신(神)들이 시대를 초월하여 마음에서 마음으로 이어져 민간신앙의 대상으로 튼튼히 뿌리 내려졌음을 의미한다.「이소」가 비록 굴원의 높은 애국심과 충성심을 보여주는 위대한 문학작품이라 하더라도 수많은 사람들의 하소연을 해결해주고 기원을 들어줄 수 있는 삶 속의 신(神)을 대체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작가미상, <구가도(九歌圖)>중 ‘상군과 상부인’, 두루마리, 남송,124.7×608.5cm, 미국 보스턴미술관

 

 

(왼쪽) 장악, <臨이용면구가도>중 ‘상부인’, 원, 종이에 먹, 29×523.5cm, 중국 길림성박물관

(오른쪽) 서비홍, <상부인>, 1943년, 종이에 색, 26.5×19.5cm,

 

「구가(九歌)」는 그 제목 속의 숫자와 달리 9편의 노래가 아니라 11편의 노래로 구성되어 있다. 각 장은 ①동황태일(東皇太一:하늘의 신), ②운중군(雲中君:구름의 신), ③상군(湘君:상수의 신), ④상부인(湘夫人:상수의 여신), ⑤대사명(大司命:수명의 신), ⑥소사명(少司命:아이들 운명의 신), ⑦동군(東君:태양의 신), ⑧하백(河伯:황하의 신), ⑨산귀(山鬼:산의 정령), ⑩국상(國?:나라의 영령), ⑪예혼(禮魂:진혼가) 등의 신에게 바친 시다. 동황태일에서 산귀까지가 각각 한 명씩의 신을 의미한다면, ‘국상’과 ‘예혼’은 익명의 영혼들을 위로하는 진혼곡이라 할 수 있다.

여러 명의 신 중에서 화가들이 가장 좋아했던 신은 ‘상군과 상부인’, 그리고 ‘산귀’였다. 상군(湘君)과 상부인(湘夫人)은 상수(湘水)의 신으로 요임금의 딸들이었다. 그녀들은 모두 순임금의 비(妃)가 되었는데 장녀 아황(娥皇)은 정비(正妃)였으므로 ‘상군’으로 부르고 차녀 여영(女英)은 차비(次妃)였으므로 ‘상부인’으로 부른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상군이 남자로 그려진 그림도 있어서 그 전설이 절대적인 것은 아닌 듯하다. 아무튼 상수의 여신들이 얼마나 인기가 많았던지 송대부터 현대까지 끝없이 변신하며 그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작가미상, <구가도(九歌圖)>중 ‘산귀’, 두루마리, 남송, 비단에 색, 124.7×608.5cm, 미국 보스턴미술관

 

 

작가미상, <구가도>중 ‘산귀’, 두루마리, 원, 종이에 먹, 30.5×620cm, 중국 흑룡강성박물관. 

 서비홍, <산귀>, 1943년, 종이에 색, 111×63cm

 

 왕도, <산귀도>,1987년, 종이에 색, 68×68cm

   

상부인 못지않게 인기 있는 신은 산의 정령(精靈)인 산귀(山鬼)다. ‘귀(鬼)자가 붙어서 으스스한 느낌이 들지도 모르지만, 서양에서는 님프(nymph)라고 불리는 요정이다. 산이나 강, 숲이나 골짜기 등에 살면서 나무와 꽃을 수호하고 보호한다. 그녀는 항상 ‘붉은 표범을 타고 얼룩너구리를 데리고/백목련 수레에 계수나무가지 깃발/ 나비난초 옷에 족두리풀 띠’를 한 채 숲 속을 걸어 다닌다. 그녀의 모습은 시대별로 줄기차게 그려졌는데 송, 원대 작품 속의 산귀가 시 속의 구절을 형상화하기에 급급했다면, 현대화가 서비홍(徐悲鴻:1895-1953)과 왕도(王濤:1943-?)의 산귀는 작가의 재해석이라는 과정을 거쳐 매우 독특하고 개성적으로 변신한 모습이다. 서비홍의 산귀가 서양의 님프에 가깝다면 왕도의 산귀는 팜므파탈의 매력을 지닌 요귀에 가깝다. 요코야마 다이칸이 그린 굴원의 모습도 산귀를 모델로 한 것이다. 그래서 절운관과 장검 대신 산야초를 손에 들고 있다.

 

#모두 취해 있어도 나 홀로 깨어있네#

굴원은 모두 두 차례 유배를 간다. 첫 번째는 회왕의 어리석음 때문이었고 두 번째는 회왕의 아들인 경양왕 때문이었다. 당시 시대 상황을 간단히 살펴보자. 초나라 곁에는 진(秦)나라가 있었다. 진나라는 초나라처럼 국토가 넓지 않았으나 상앙(商?, ?~기원전 338년)의 변법을 바탕으로 무섭게 세력을 팽창시키고 있었다. 위기의식을 느낀 여섯 나라는 합종(合從)으로 진나라에 대항하였고, 패왕을 꿈꾸던 진나라는 연횡(連橫)으로 각 나라를 위협하였다. 우리가 지금도 흔히 쓰는 ‘합종연횡(合從連橫)’이란 단어의 진원지가 바로 전국시대이다. 그 중에서도 대국인 초나라와 제(齊)나라의 연맹은 진나라의 천하통일 계획에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어떻게든 두 나라의 연맹을 깨뜨려야했던 진나라는 장의(張儀)가 이끄는 사절단을 보내 초 회왕을 회유하였다. 만약 제나라와 단교를 선언한다면 6백리의 땅을 초나라에 주겠다고 제안했다. 욕심에 눈이 먼 회왕은 장의의 제안을 흔쾌히 수락하고 제나라와의 연맹관계를 끊었다. 그 후 진나라에 사절단을 보내 약속했던 땅을 요구하자 장의는 이렇게 대답했다.

“제가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진나라 왕께서 초나라에 줄 땅을 6리라고 말씀하신 것을 제가 잘못 알아듣고 6백리라고 했습니다.”

속은 것을 안 회왕은 크게 분노하여 진나라를 공격했다. 그러나 전쟁에서 참패하고 말았다. 그제서야 회왕은 굴원을 떠올렸다. 근상을 비롯한 조정 대신들이 모두 진나라와 손잡는 것을 찬성할 때, 오직 굴원 한 사람만이 진나라를 ‘호랑이나 이리’같다며 경계했다. 회왕은 굴원을 다시 불러 제나라 사신으로 보냈다. 굴원의 외교력으로 초나라와 제나라는 다시 연맹관계를 회복했다. 이 사실을 안 진나라는 새로운 계책을 들고 나왔다. 두 나라의 화친을 위해 회왕을 진나라에 초대한 것이다. 어리석은 회왕은 굴원의 결사적인 반대에도 불구하고 친진파(親秦派)들의 꼬임에 넘어가 진나라로 떠났다. 결국 그는 귀국하지 못하고 진나라에서 죽었다. 죽기 전에 회왕의 귀를 쟁쟁하게 울린 것은 굴원의 피맺힌 경고였다.

 “진나라는 이리나 호랑이와 같은 나라로 믿을 수 없으니 절대로 가시면 안 됩니다.”

회왕의 뒤를 이어 새로 왕이 된 경양왕은 아버지 회왕보다 더 어리석었다. 향락을 추구하고 주색을 밝히던 경양왕은 진나라 왕이 사위가 되어달라고 제의하자 흔쾌히 받아들였다. 진나라의 야심을 꿰뚫고 있었던 굴원은 이번에도 경양왕에게 충심으로 간언했다. 원래 충성스런 말은 귀에 거슬리는 법이다. 경양왕은 굴원의 충언을 받아들이는 대신 그를 멱라강으로 유배 보내 버린다.

유열생, <굴자천문(屈子天問)> 

 

유열생(劉悅笙)이 그린 <굴자천문(屈子天問)>은 멱라강으로 유배된 굴원이 방랑하면서 우수에 젖어 비탄의 시를 읊조리는 모습을 그렸다. 그의 얼굴에는 자조적인 미소가 어려 있다. 멱라강 주변의 갈대숲일까? 초췌한 몰골을 한 굴원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며 묻는다. ‘아득한 태초에 우주 천지가 혼돈이었다고 말하는데 누가 어떻게 알고 그런 말을 전하고 말했는가? 하늘과 땅이 미처 형성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알고 무엇을 근거로 그렇게 생각하는가?’ 천지 우주의 개벽과 해, 달, 별 등 천문에서부터 시작된 그의 질문은 지리와 지형, 괴상한 자연 만물과 국가 정치와 역사변천에 엉킨 불합리한 현상‘에 이르기까지 끝없이 계속된다. 불합리하고 도리에 어긋난 것이 있으면 묻고 또 묻는다. 어쩌면 그 물음은, 옳게 살려고 했지만 그 뜻을 펼치지 못하고 추방되어야만 했던 자신의 삶에 대한 의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유배 간 굴원이 강가에서 머리를 풀어헤치고 걷고 있을 때 그를 본 어부가 물었다.

“그대는 초나라의 왕족을 관장하는 삼려대부가 아니시오? 어쩌다가 이렇게 몰락하고 이곳에 와서 방랑하고 계시오?”

굴원이 대답했다.

“온 세상이 흐린 속에서 나만 홀로 맑고, 모든 사람들이 다 취해 있어도 나만 홀로 깨어 있어 추방당했지요.”

어부가 다시 말했다.

“성인이라면 자기 주장이나 고집만 내세우지 말고 때에 따라 세속에 순응할 수 있어야지요. 온 세상이 혼탁하면 왜 당신도 함께 더러워지지 않으신가요? 세상 사람들이 술에 취해 있으면 왜 당신도 함께 취하지 않으신가요? 무엇 때문에 당신 혼자 지나치게 깊이 생각하고 고결하게 절개를 지키다 스스로 추방되셨나요?”

굴원이 대답했다.

“내가 듣기로는, ‘머리를 감은 사람은 관의 먼지를 털어서 쓰고, 몸을 씻은 사람은 옷의 먼지를 털고 입는다’고 했지요. 그러니 어찌 청결한 나의 몸에, 더럽고 구질구질한 것을 받을 수 있겠소? 차라리 상강의 물에 몸을 던져 물고기밥이 될지언정 세속의 더러운 먼지를 뒤집어쓰지는 않을 것이요.”

그리고 절필시「회사(懷沙)」를 지은 후 멱라강에 몸을 던졌다. 그 소식을 들은 초나라 사람들이 굴원을 구하기 위해 강으로 달려갔다. 사람들은 행여 물고기가 굴원의 시신을 뜯어먹을까 염려되었다. 그래서 찹쌀을 댓잎과 갈잎에 싸서 찐 쫑즈(?子)를 강물에 던져 넣었다. 이것이 중국 단오절의 유래이다. 우리의 단오절이 풍년을 기원하는 축제날이라면, 중국의 단오절은 굴원을 기념하는 날이다. 그가 우려했던 것처럼 초나라는 몇 년 후에 진나라에 망해 영원히 이 지구상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굴원, 그는 누구인가#

자신의 신념대로 살다 굽히지 못하고 죽은 굴원은 누구인가. 그는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사마천은『사기열전』에서 굴원을 이렇게 평가했다. “그의 글은 간결하고, 그 문장은 미묘하며, 그 뜻은 고결하고, 그 행동은 청렴하다. 그 문장의 분량은 작지만 뜻하는 것은 매우 크며, 눈앞에 흔히 보이는 사물을 인용했지만 그 의미는 높고 깊다. 그 뜻이 고결하므로 비유로 든 사물들마다 향기를 뿜어내고, 그 행동이 청렴하므로 죽을 때까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진흙 속에서 뒹굴다 더렵혀지자 매미가 허물을 벗듯이 씻어냈고, 먼지 쌓인 속세 밖으로 헤쳐 나와서 세상의 더러움에 물들지 않았다. 그는 연꽃처럼 깨끗하여 진흙 속에 있으면서도 더렵혀지지 않은 사람이었다. 이러한 그의 지조를 살펴보면, 해와 달과 빛을 다툴 수 있다.”

사마천의 평가 위에 어떤 말을 더 보탤 수 있겠는가. 감히 해와 달과 빛을 다툴 만큼 돌올한 그의 삶을 아둔한 나로서는 도저히 제대로 전해줄 능력이 없다. 다만 그의 삶을 닮으려고 노력할 뿐이다. 나는 내가 속한 무리 속에서 어떤 사람인가 반성해 볼 뿐이다. 혹시 내 안에 회왕과 경양왕의 어리석음은 없는 지, 근상의 이기심과 미혹함은 없는 지, 자주 반성해볼 일이다. 우리 모두 반성해볼 일이다.

 

-사족-

#-초사(楚辭)#

:《초사》는 초(楚)나라의 문학을 지칭한다.《시경(詩經)》이 북방문학을 대표한다면 《초사》는 남방문학을 대표한다. 《시경》이 북쪽에 위치한 황하 유역을 중심으로 한 여러 나라의 작품인데 반해, 《초사》는 남쪽 양자강 유역을 근거지로 한 초나라 사람들의 작품이다. 《시경》은 4언 위주의 단시임에 반해《초사》는 6언 위주의 장시이다. 《시경》의 내용이 ‘인간의 공통된 생활감정이나 사회의 각종 양상을 다룬, 현실의 주변에서 멀리 벗어나지 못한 사실적인 문학’이라면 《초사》는 ‘상징적인 수법과 개성의 발로가 강렬한 낭만적인 문학이며 환상과 신비에 가득 차 있다.’ 《시경》이 작자명이 밝혀지지 않은 한족 평민들의 작품이 많다면《초사》는 굴원, 송옥과 같은 귀족시인의 작자명이 밝혀진 작품이 많다

《초사》의 대표적인 작가는 굴원이다. 중국 문학사상 최초의 대시인 굴원은 <이소><천문>과 <구장>의 <석송><섭강><추사><귤송><비회풍><애여><회사><사미인><석왕일> 등을 지었다. 뿐만 아니라 당시까지 내려오던 종교무가(宗敎舞歌)인 <구가(九歌)>를 개작하였는데 이는 초사 작품의 효시가 되었다. 굴원의 작품은 중국의 후세 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을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도 삼국시대부터 수입되었다. 굴원과 송옥의 작품이 수록된 《문선》은 신라 시대 때 여러 학자들이 읽었고 통일신라 때는 고시과목의 하나였다. 고려 시대에는 정몽주, 이색 등의 지식인들이 무너져가는 나라를 걱정하며 굴원의 작품에 심취했다. 조선시대에도 굴원의 인기는 식지 않았는데 정철의 <사미인곡>은 ‘조선의 한글 <이소>’라고 평가받을 정도로 굴원에게 크게 감화를 받았다.(장기근, 하정옥, 『굴원』,명문당, 17-41쪽 참조)

 

#합종연횡(合從連橫)#

춘추시대(春秋時代:B.C 770년-B.C 403년) 말기에 백 여개의 작은 나라로 분열되어 있던 중국은 진(秦)·초(楚)·연(燕)·제(齊)·한(韓)·위(魏)·조(趙)의 7나라로 정리되었다. 이렇게 ‘전국7웅’이 세력을 키우고 견제하던 시기를 전국시대(戰國時代:B.C 475~221)라고 부른다. 전국7웅은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 자웅을 겨뤘는데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상가들이 출현하여 나라를 부강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였다. 공자(孔子), 맹자(孟子), 순자(荀子) 등의 사상가와 철학자들이 모두 전국시대 때 활동했다.

BC 4세기말에 접어들면서 진(秦)나라는 상앙(商?)의 변법을 시행하여 국운이 날로 번창하였다. 이에 위협을 느낀 나머지 6국은 종적(縱的)으로 연합하여 진나라에 대항하는 동맹을 맺었다. 이를 ‘합종(合從)이라 부른다. 반면 어떻게 해서든 6국의 ‘합종’을 깨뜨려야 했던 진나라는 장의(張儀)로 하여금 6국을 설득하여 진과 6국이 개별적으로 횡적(橫的)인 평화조약을 맺도록 했다. 이것을 연횡(連橫)이라고 한다. 결국 진나라는 6국 사이의 동맹을 와해시키는 데 성공하고 이들을 차례로 멸망시켰다. BC. 223년 진시황은 마침내 초나라와의 전투에서 승리하고, 2년 후에 전국을 통일해 중국 최초의 통일제국을 수립했다.

 

*참고문헌

-강태권 외,『동양의 고전을 읽는다』3 문학 上, 휴머니스트. 2006년

-곽말약,『굴원』, 범우사, 2005년

-리처드 반하트,『중국 회화사 삼천년』,학고재, 1999년

-빙심, 동내빈 외,『그림으로 읽는 중국문학 오천년』, 예담, 2008년

-사마천,『사기열전』상, 을유문화사, 2002년

-송철규,『송선생의 중국문학교실-첫째권』,소나무, 2008년

-우가오페이,『굴원』, 이끌리오, 2009년

-장기근,『굴원』, 명문당, 2003년

-정재서,『정재서교수의 이야기 동양 신화』1,2, 황금부엉이, 2005년

-최형주 해역,『산해경』,자유문고, 1996년 252쪽

-황견 엮음,『고문진보 전집』, 을유문화사, 2010년

-황위평,『시는 붉고 그림은 푸르네2』,학고재, 2004년

-『近代日本美術の軌跡』, 東京國立博物館, 1998년

-『劉悅笙 人物畵法』,台北 藝術圖書公司

-『王濤』, 北京美術撮影出版社 , 2004년

-『王孝鋼』, 四川美術出版社,1992년

-『?兆和作品全集』下, 天津人民美?出版社, 1993년

-『中國繪畵全集』1-28. 文物出版社 , 199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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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1.01.02 12:46

    첫댓글 그림의 해설을 통하여 역사의 현장으로 달려 가는것 같습니다... 그런데 전문성이 없어서 전체를 이해하기에는 좀 난해 하네요. 감사합니다...()...

  • 작성자 11.01.03 08:42

    다음부터는 조금 더 고민해서 쓰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11.01.03 07:22

    충렬지사의 삶을 보듯... 이 시대에도 저와같은 일들이 적지 않을터 모두가 이소 한편 읽으며 마음 달래야 하겠습니다 ㅎㅎ()()()

  • 작성자 11.01.03 08:43

    올 해는 개인의 소망에 앞서 나라를 먼저 생각해야 되는 한 해가 되었으면 해서 새 해 첫 번째 인물로 굴원을 올렸습니다.
    올 해는 부디 남북 관계도 안정되고 산 생명을 마구 죽이는 살처분 소식도 들리지 않기를 기원합니다.

  • 11.01.04 00:19

    굴원에 관한 그림과 글을 읽으며, 아무리 역사적으로 뛰어난 인물이라도 그림으로 남아 있어야만
    비로서 무진당님의 책 주인공이 될 수 있는 점이 조금 이해됩니다. *^^* 유열생의 <굴자천문>그림 속엔 이미 죽음도
    그의 고결한 충심엔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고, 여인네들이 절개를 지키듯... 나라와 백성을 향한 사랑엔 티끌 하나
    허용할 수 없는 대인의 풍모가 느껴집니다. 인간이 목숨 걸고 나라를, 백성을,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면,
    짧은 생이지만 밝은 불꽃으로 연소되기에, 그 분들의 삶이 오랜 세월 시와 그림...예술로 형상화되는
    특권이 주어지는 것 같습니다. 고맙습니다! 관세음보살()()()

  • 작성자 11.01.04 07:45

    네. 저도 유열생의 <굴자천문>을 보고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중국의 저력은 과거 역사속 인물을 현재에 끊임없이 기억시킨다는 것입니다.
    현재 살아있는 작가중에서 역사인물화를 그리는 작가들이 얼마나 많은 지 모릅니다.
    정말 부럽습니다.
    우리도 그런 작가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단군, 주몽, 최치원, 해모수, 석탈해, 정몽주, 황현....등등 훌륭한 인물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그분들을 글과 그림으로 되살려 후손에게 전해주는 것이 우리 세대의 역할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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