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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청신도시 예천 800 : 노주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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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은 평생동안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으니, 새벽닭이 울면 일어나 홀로 誦讀하였다. 관직에 있을 때 베껴쓴 書冊만 해도 수십 질에 달했다고 한다. 또한 일찍이 {周易}을 한 부를 베껴 그 속에 담겨있는 消長의 幾微와 進退의 도리를 훌륭하게 수행하였다. 만년에는 특히 {朱書節要}에 沈潛하였고, 海東先賢들의 문집도 두루 섭렵하였다. 또한 {朱子綱目}을 숙독함으로써 古今의 治亂 및 人物의 賢邪에 대해서도 훤히 꿰뚫었다. 詞章에 대해서는 그렇게 공력을 쏟지 않았지만 자연히 精鍊되어 典範에 부합하였으니, 즉 인근의 몇몇 선비들과 시편 및 편지를 주고받았다.
[蘆洲集 내용 개요] : 卷1 / 賦 : 次牧隱觀魚臺賦, 歷代史略賦/ 詩 : 偶吟, 京邸夜雨詠滯雨長安夜之句因以一字成五言一首, 與舍兄遊北溪聯句, 次贈申德夫(厚載), 晩景, 以厚陵寒食祭官往開城作, 京邸寄泮中舍弟宗伯(海一), 送權啓卿(迪)之京, 旅夜, 踰鳥嶺, 遊米면寺, 江邨卽事, 春晴(二首), 別宗伯之京, 次權石洲題嚴光畵帖韻, 京邸曉起書懷, 客中夜詠, 留別權啓卿, 送別宗伯免新之行, 幽齋會敬呈, 秋日晩望書懷十韻, 從叔輓, 鄭友載甫輓, 奉和雲堂處士朴公述懷詩三十六韻, 過吉先生?門次魚潛夫韻, 與韓博士翼之同醉于正錄房, 京邸次李同年爾能(在容)韻, 在京次聘君韻, 重陽日戱吟, 星山呈主守, 奉別沈巡相(梓)二十韻, 花川道中, 贈別宗伯之京, 答寄申修撰德夫(二首), 瓢隱金公(是?)輓, 次西厓先生韻題秀瓊上人詩軸(二首), 雲堂處士朴公輓, 寄申德夫直廬, 楊花渡, 雨夜書懷寄申德夫, 次朱子韻, 聽乞人彈琵琶次東坡韻, 客榻秋日(二首), 夜坐書懷寄李監察紀伯, 夏日次放翁韻(二首), 奉別金丈( )之任咸平, 以文兼赴京宿忠州店曉起書懷, 竹山道中遇風雨, 朝望聖居山吟一絶, 登滌愁樓, 維鳩驛滯雨, 敬天驛, 卽事, 次贈李持平耳老(聃命), 次寄柳寧海文?(經立), 贈別東萊伯李勉餘, 辛慶山孟衍(蕃)輓, 金掌令(厦연)輓, 次李相國韻題大谷寺僧詩軸, 送申天休之任羅州, 送李學士夏卿(夏鎭)赴燕, 王大妃殿延祥詩(二首), 王大妃殿春帖子, 孤竹館詠懷, 江陰縣, 舟行, 金川郡送別舊使丁令公(昌燾)(二首), 瑞興客館次板上韻, 鳳山道中, 信川道中, 信川客舍曉起, 安岳客舍次板上韻, 雨後吟, 安岳蓮池聞?鳴戱爲問答二絶, 長連客舍次韻, 殷栗觀稼樓次韻, 又次客舍韻, 豊川客舍次韻, 自豊川向長淵夾路紅綠?亂客思寓吟自嘲, 長淵客舍詠懷, 雨後吟, 金沙寺道中, 金沙寺次板上韻(二首), 次寄柳掌令(晉三), 高亭酬柳掌令, 自結城泛舟而下上水心亭吟一絶, 孤竹館卽事, 望首陽山, 延安南大池賞蓮, 瑞興客館次芝峯韻, 觀小學書有感, 謝權九萬丈來訪, 送宗伯之堤川僑居, 次宗伯寓居韻, 奉呈聘君, 鼎院次李?西韻, 遊春吟, 宿鼎院次板上韻, 次?湖亭韻贈主人鄭景瞻(車弘), 嘲耳神, 耳神答, 鼎院次板上韻, 次鄭蔚珍丈(必達)金谷雜詠, 次寄李君則(東標)(二首), 次宗伯韻寄檀谷(二首), 過柳溪吟, 雨後有懷李日卿(昌興), 龜城吳上舍善餘丈赴比安試歷宿前邨乘昏往見敍阻而歸枕上有懷吟寄一律, 大谷棧道, 奉呈聘君兼酬吳善餘丈, 九日與洞中諸友登集勝亭用杜牧之韻, 過雲巖, 宿丹山新邨, 初到檀谷贈宗伯, 瓮巖, 浣紗巖次韻, 留別宗伯, 淸風江上, 伐峴道中, 鼎院次旅軒先生古梧韻, 日卿蒙赦歸京贈五言近體一首, 金丈언輓, 神堂洞白戰呈座中索和李君則, 鼎院次李舜卿韻, 又贈君則絶句, 重九孤山散人有約不來吟寄一絶(孤山君則自號), 又用文字韻酬李君則(二首), 又用前韻酬君則, 題孤山草堂, 遊大谷寺憶孤山散人, 大谷寺, 西菴, 次檀谷四物吟, 老多邨, 伽川道中, 班城縣, 晉陽回路宿咸安地曉發至江頭作, 登草溪郡南嶺, 草溪李龜城胤緖?門, 望金烏山, 到開寧奴家書壁上, 次裴美叔(正?)田園雜興韻(五首), 甲子除日宿大谷寺, 人日次高達夫韻寄李君則, 次示宗伯, 次靜齋韻, 次都會卿(處亨)見贈韻, 別再從弟(學一)歸鄕, 智異山雙溪寺次一公軸五峯韻, 次贈義薰上人, 題靑鶴洞瀑布, 題雙溪寺, 題玩瀑臺, 題佛日庵, 凝石寺夜坐書懷, 自晉陽歸望家山作,
次朴文翁元日韻, 宋掌令(光井)輓, 渚谷草堂贈主人權子韜(鈗), 次寄李日卿, 次君則癡字韻, 夏夜君則來訪又用玄字韻謝之, 詠懷次前韻, 雨夜遣悶寄君則, 詠人江亭, 次澹巖韻, 南大諫(天漢)輓, 柳內從兄(世禎)輓, 贈澹巖, 贈嶺東亞使李瞻叔(?), 柳順天爾粹(英立)輓, 臘日次杜工部韻寄澹巖, 丁卯立春, 丙寅除夜忽憶古人病眼不眠非守歲之句因以眠字爲韻, 丁卯早春之朝命奚奴栽松屋後, 鼎院滯雨寄權子韜, 疊前韻奉呈孤山李丈(惟樟)(三首), 過表參判(沿沫)墓有感, 睡起, 登集勝亭觀漲仍望澹巖有懷吟寄, 秋夜次李太白紫極宮感秋詩, 謝尹地主(梅)臨訪, 八月十五夜偶吟, 疊前韻酬孤山丈, 次地主韻題金光州令公別墅, 水閒邨滯雨疊期字韻, 題大乘寺, 次君則韻寄蔚山守張君玉(?), 次睦尙書(來善)韻奉賀李尙書(觀徵)入耆府, 南靈山(鵬翼)輓, 夜坐讀朱書有懷牆東散人, 次下枝李上舍贈李察訪君則韻奉寄, 踰竹嶺, 過龜潭, 宿慶安驛夢覺有感, 登利夫峴, 望月堂夜飮贈金進士天與(昌錫), 又次天與, 次寄朴君(天柱)草堂, 金都事用休(命基)輓, 往興海與主守及淸河守夜話次主守韻, 奉酬金參奉戚丈(泰基), 李參奉(允諧)輓, 次寄李著作待而(文興), 次十二詠韻寄權上舍得初(得輿), 酬權得初, 別舍兄, 次前韻寄權得初, 次人字韻, 次丑山島遊賞韻, 李察訪奉彦輓, 又酬金參奉戚丈, 次韻酬從弟應如(台一), 邊參奉(之斗)輓, 月城滯雨吟成近體呈吳大尹(始復), 鳳凰臺懷古, 題遠源寺, 宿慶州太平邨夜雨吟, 過慈仁縣寄主守都會卿, 永川朝陽閣次板上韻, 次寄吳春卿(始震), 贈淸河守鄭汝擧, 又酬權得初, 驟雨後吟一絶, 次寄權得初(三首), 酬白海南可遠(世興), 次寄權得初(二首), 卽事, 望月堂, 次權得初喜雨韻, 往海岸酌酒口號, 金丈(宇基)輓, 次寄吳春卿, 中秋出川邊槐亭獵魚設膾子姪輩從吳尹兩客亦來因詠古槐疎冷夕陽多之句以一字爲一絶, 次吳春卿觀魚臺韻, 又次燈夕韻, 淸河守鄭汝擧輓, 沙邨金丈(尙瑜)輓, 次李上舍(張英)三稀堂韻./
卷2 / 詩 : 次權得初蓮桂會韻, 酬宗伯, 次贈別宗伯, 次朴茂仲韻, 次洪木齋朴將軍壙石歌, 次鄭金堤輓歌, 次金敎官(泰基)絶句, 李參判(元祿)輓, 次僧軸韻, 次鄭東萊泰齊觀魚臺四十韻寄權得初, 贈別吳通津(始謙)契兄兼呈季難察訪兄, 拙齋柳公(元之)輓, 次權得初韻贈吳上舍泰而, 寄別舍弟宗伯赴燕, 族從孫(斐然)輓四絶, 前方伯李夏瑞令公曾宰花山戊辰除夜以故鄕今夜思千里霜?明朝又一年之句爲韻作十四絶洪校理成仲以治疾寓居龍城亦次其韻余追見兩詩己巳歲除輒復效?語雖拙訥而亦各言其志云爾, 李耆卿(喬年)輓, 正月卄五得見亨兒書知使行去臘旬始到玉河之奇欣慰難勝翌朝吟成近體以寓企待之懷, 襄陽歌送李君則赴任, 送咸鏡監司李潤甫(瑞雨)令公赴任, 發鄕行宿陰洞酒店達夜大雨, 南東萊載元(厚)輓, 次潘孟陽元和布德澤詩六韻, 次裴夷直春色滿皇州詩六韻, 次杜工部暮春, 次杜工部春日歸溪上, 次杜工部春水, 成歡滌愁樓次板上韻, 對月樓次板上韻, 與南平守吳春卿夜飮, 梨津倉, 與兒輩再遊德津, 題龍巖寺, 月出山, 廣寒樓次湖伯韻, 自靈巖還家途中作, 荒山大捷碑, 次李君則蓬萊山月歌, 立春日書懷, 送甘文守張仲溫(?), 冬至, 臘日, 守歲, 送安東伯金至和(元燮), 奉和李僉知(光鎭)重牢宴八韻, 喜雨, 直春坊爲李參知正源(湜)所邀共飮贈三絶, 李尙書(宇鼎)輓, 大殿端午帖, 送永春守權春卿(斗寅), 鼎山院別權上舍明仲(晟), 次李參判文若(沃)江亭韻(二首), 送別江界府使裴美叔, 與沈正直夫洪持平天敍閔持平啓商約會于東湖流霞亭卽景口吟, 謝李獻納君則來訪, 與君則同往靈泉庵暮歸用前韻, 訪君則不遇留題一絶, 次蔡內翰仲耆(彭胤)韻奉呈李君則, 送李中丞君則之京(二首), 朴參判(廷薛)輓, 次寄金員外天與兵曹直廬, 京邸次李君則韻, 賀奉朝賀李相公(觀徵)致政八韻, 沈判府事(梓)輓, 癸酉歲除日次前韻十四絶示同道諸益, 大殿春帖子(二首), 世子宮, 送金都事天與赴湖西幕, 金潭陽(時鉉)輓(代作), 次主守姜渭擧(碩臣)韻, 朴君(潭)輓, 豊城掘劒, 次李君則家臘梅韻, 次地主姜渭擧韻, 姜城主歸路行過家前卽出見班荊而坐略設杯酌姜守先賦五言律次而答之, 金參判輓(二首), 李上舍(述意)輓, 金大諫(邦杰)輓(二首), 柳驪州(挺輝)輓, 權上舍明仲柳上舍日祥各送冬瓜于李君則而瓜背皆有一絶又同韻君則鑿瓜釀酒次韻謝兩上舍竝元韻示余遂次韻寄君則, 丙子元日(二絶), 和寄李君則中臺之作兼呈李孤山丈(二首), 李君(斗兼)輓, 次寄李參奉(榮世)詠懷詩, 次雙白堂韻, 渚谷權丈(銓)輓, 金修撰(汝鍵)輓, 次四十韻長句寄竹西樓主人李君則, 權參判皆玉(?)輓, 立春與從兄及山長朴汝安諸人會幽棲洞, 丁丑春與安東權君性(擴)金逸少榮川李善哉諸人會于水落臺吟一絶, 次權都事(是經)韻, 次臨淸閣韻贈李參判文若, 大谷寺題英輝軸, 柳翊贊(宜河)輓, 次邵子閒吟, 次邵子觀物, 次邵子天意, 竹林權丈(克中)輓, 李宜寧(嵩逸)輓, 權佐郞(希說)輓, 洪參奉眞卿(相文)輓, 奉次許丈重牢宴韻, 寄題琴遠伯稼隱堂, 秋夜曉起書懷, 次呈尹敬差遠仲(悠期), 次野逸臺雜詠寄權君(夏老), 次寄追悔齋主人李晦甫, 次金谷八詠韻寄朴正言(希閔), 權上舍(克正)輓, 次韻賀金君(爾甲)登蓮榜, 琴表兄(簡)輓, 朴永柔臣哉(世臣)輓, 呂錦山子遇(聖擧)輓, 剡溪十二詠, 李進士(爾蕃)輓,/
卷3 / 疏 : 辭司諫院獻納疏 / 司諫院獻納의 관직을 사양하는 상소이다. 무릇 나라에서 臺諫을 두는 것은 그들로 하여금 말을 하게 함인데, 자신은 지난날 논의해야 할 때 논의하지 않아 儒臣들에게 배척당하고, 말해야 할 때 말하지 않아 公議에 비난받아 憲職을 더렵혔으니 관직을 맡을 수 없다고 하였다. 본 상소는 1690년(숙종 16) 7월에 다시 承政院에 올렸으나 반려되었다./ 再疏 / 司諫院獻納의 관직을 재차 사양하는 상소이다. 司諫院獻納은 納言의 임무를 담당하며 司諫이 되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중요한 자리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함부로 제수받는 직책이 아니니, 자신과 같이 용렬한 사람은 감히 맡을 수 없다고 하였다. 본 상소는 1690년(숙종 16) 8월 1일에 내용을 고쳐 承政院에 올렸으나 반려되었다./ 辭掌令疏 / 司憲府掌令의 관직을 사양하는 상소이다. 작년 가을에 병이 들어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여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며 힘겹게 지내고 있는 즈음, 자신에게 憲職을 제수하니 聖恩의 隆重함이 粉骨難報이나 상소를 올려 사양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兩南 지역의 백성들이 飢荒으로 고생하니 조정에서 신속하게 많은 수의 御史를 파견하여 지방 수령의 직무를 꼼꼼하게 핵實하는 방향의 구휼정책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본 상소는 1691년(숙종 17) 정월에 올렸다./ 再辭獻納疏 / 司諫院獻納의 관직을 재차 사양하는 상소이다. 聖旨를 받자와 병든 몸으로 힘겹게 풍基郡에 도착하였는데, 갑자기 어지럼증이 생겨 가슴이 답답하고 호흡이 곤란하였다. 게다가 아우 府尹公 海一에 任地에서 객사한 때문에 고향으로 돌아가서 장례를 치르느라 관직을 맡기가 어렵다고 하였다. 본 상소는 1691년(숙종 17) 11월에 承政院에 올렸으나 반려되었다./
辭司憲府執義疏 / 司憲府執義의 관직을 사양하는 상소이다. 司憲府는 風敎의 憲章이 있는 곳으로 매우 중요한 부서이다. 그 중 執義의 직책은 특히 막중하니, 설령 본래부터 風力을 갖춘 자라 하더라도 그 자리에 있게 되면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기 힘든데, 아물며 자신과 같이 용렬한 사람이 어찌 榮華를 욕심내어 함부로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고 하였다. 본 상소는 1693년(숙종 19) 10월에 承政院에 올렸으나 반려되었다. / 英陽英山書院請額疏 / 英山書院의 賜額을 청하는 상소이다. 英陽의 영산서원은 1653년(효종 4) 文純公 李滉을 主享, 鶴峯 金誠一을 配享으로 하여 세운 서원이다. 海東의 朱熹로 추존되는 이황이 제향된 서원 중 지금까지 사액을 청하여 사액되지 않은 곳이 없었으니, 이를테면 禮安의 陶山書院 安東의 虎溪書院 榮川의 伊山書院 醴泉의 鼎山書院 眞寶의 鳳覽書院 丹陽의 丹山書院이 그러하다. 따라서 英陽에 서원은 있으되 사액되지 않음은 어찌 昭代의 欠典이 아니겠느냐고 사액의 당위성을 역설하였다./ 大笑軒趙公請諡疏 / 大笑軒 趙宗道의 諡號를 청하는 상소이다. 조종도(1537~1595)는 壬辰倭亂이 발발하자 격문을 내어 義兵을 모집하고 사재를 털어 굶주림에 시달리는 백성을 규휼하는데 힘을 쏟았으며, 丁酉再亂 때 安陰縣監 郭준과 함께 安義의 黃石山城에서 왜적에 맞서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한 인물이다. 그런데 근자에 곽준에 대해서는 증직과 시호를 내려주었으니 조종도에 대해서도 당연히 시호를 내려주어야 한다고 하였다. / 辨誣黃錦溪(俊良)疏 / 錦溪 黃俊良에 대한 誣言을 변명하는 상소이다. 황준량(1517~1563)은 조선 明宗 때의 문신이며 李滉의 문인이다. 李選이라는 자가 황준량이 文純公 李滉의 廟宇에 從享되는 것은 不可하다고 여기고 상소를 올려 黜享을 요구하자, 수령으로 있을 때 많은 치적을 올렸고 특히 학교와 교육 진흥에 전심하여 많은 인재를 배출한 황준량이 이황과 나란히 제향되는 것은 公論이 찬동하는 바요, 지금 그에 대한 誣告를 변호하는 일 또한 士林의 뜻이라고 역설하였다. /
書 : 擬上眉수許先生書(1675) / 眉수 許穆(1595~1682)에게 보낸 편지이다. 西厓 柳成龍의 손자인 柳元之가 지은 {尊堯錄}은 그가 만년에 부모상을 당하여 울적한 마음을 달래려는 요량으로 禮書에 근거하여 지었는데, 愛君憂國의 정성이 담겨있다. 비록 지금 바로 시행할 수 없다 하더라도 틀림없이 후세의 公論이 될 것이다. 그러니 겨늘이 있으면 한 번 펼쳐 보고 刪正해 주면 좋겠다는 내용을 적고 있다. / 與申退伯(弼成)書 / 退伯 申弼成에게 보낸 편지이다. 木齋 洪汝河(1621~1678) 선생을 尊享하는 일이 公議로 발의된 지 이미 오래되었다. 그런데 아직까지 미루고 실행되지 않으니, 이는 斯文의 欠典이요 嶺南 士林의 수치이다. 근자에 조정에서 비록 書院禁令을 내렸지만 그 당시 事目을 자세히 살펴보면 단지 書院의 新設과 疊設을 막는 데 있다. 따라서 홍 선생을 이미 설립된 尙州 近巖書院에 追享하는 일은 國禁에 조금도 위배되지 않으니 빨리 公議를 모아 실행에 옮기자는 내용을 적고 있다. / 序/ 族譜序 / 族譜에 붙힌 서문이다. 친족이 계통을 좇아 列記되는 이유는 세대를 밝히고 자손의 실마리를 잡으며 親疎의 차례를 매기는 데 있다. 나와 同宗의 사람들 중 이 族譜를 펼쳐 보는 이는 반드시 孝悌의 도리에 힘쓰고 親睦의 의리를 돈독히 하여 대대손손 멸하지 않아 서로 남남이 되는 지경에 이르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임을 당부하고 있다.
記 : 吏郞朴公別廟齋室營建記 / 吏曹正郞 朴公의 別廟 및 齋室에 대한 記文이다. 나의 外先祖 이조정량 朴公은 簪纓巨族으로 공의 형제 다섯 분 모두가 文科에 급제하니, 그 光榮이 當代에 빛났고 은택이 후세에까지 미쳤다. 공은 다섯 분 중 막내였다. 世代가 점차 멀어지니 공의 廟位도 장차 옮기려 한다. 이에 여러 자손들이 논의하여 別廟를 세워 移安하고 廟의 남쪽에 齋室 여섯 칸을 짓기로 결정하였다. 공의 6대손인 正言 朴聖稱이 나에게 記文을 부탁하기에 사양하지 못하고 짓게 되었노라고 적었다. / 二樂樓記 / 二樂樓에 대한 記文이다. 鼎山書院에는 예로부터 樓臺가 없었다. 1678년(숙종 4) 僉知 金 이 한 고을의 達尊으로 윗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면서, 서원의 堂齋가 비좁아 많은 선비들이 모이기도 힘들고 또 쉴 수도 없다고 생각하고는 서원의 東西齋 곁에 누대 하나를 세우자고 발의하자, 여러 父老들과 士林이 기꺼이 찬동하여 누대를 세우니 이것이 바로 二樂樓이다. 누대는 풍광이 빼어나 푸른 절벽을 마주하고 있으면서 맑은 냇물에 잇대어 있다. 창문을 열고 마음껏 보면 山勢가 우뚝 높이 솟고 냇물이 힘차게 흘러, 참으로 어진 이와 지혜로운 이가 즐기기에 알맞으니, '二樂'이라고 이름한 것도 바로 여기에서 취하였다고 하였다. / 重修琵琶記 / 琵琶를 고친 일에 대한 記文이다. 공의 외조부가 조상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던 琵琶가 세월이 오래되어 훼손된 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外職으로 나갈 기회가 잦은 자신에게 수리를 당부하였다. 마침 공이 1685년(숙종 11) 봄 任地인 晉陽으로 가게 되었는데,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匠人에게 명하여 비파를 고치게 하였다. 자신은 본래 음률을 잘 알지 못하지만 비파를 고치고 나서는 대략이나마 음률을 구별할 수 있게 되었다는 감회를 적고 있다. / 遊月出山記(1691) / 月出山 遊記文이다. 공이 靈巖郡 서남쪽 5리에 위치한 月出山을 유람하면서 지은 遊記文으로, 千峰萬壑의 山勢를 자세하고도 생동감 넘치게 그려내고 있다. 유람을 통해 일어나는 감흥을 시로 나타내기도 하였으니, 이를테면 龍巖寺에 이르러 "절은 명산의 가장 꼭대기에 있고"(寺在名山最上頭)라 하고, 九龍峯에 올라 "이 세상에 태어나, 九井峯에 올라 아래를 굽어보네."(世界抽身出, 登臨九井峯)라 하며, 道岬寺에 이르러 "30년 전에 이 곳을 지났거니, 禪房에서의 하루 밤에 維摩와 짝하네."(三十年前此地過, 禪房一夜伴維麻)라고 한 등이 그러하다. / 龍宮浮翠樓重修記 / 龍宮 浮翠樓에 대한 重修記이다. 1692년(숙종 18) 10월 공이 龍城縣을 지나다가 副官 韓相皐의 입을 통해 이 고을의 명승지인 浮翠樓의 소재를 알게 되었는데, 浮翠樓라 이름한 것은 虛白亭 洪貴達의 명에 의한 것이었다. 누대는 세월이 오래되어 피폐되고 그 규모 또한 나지막하고도 비좁아 놀러온 사람이나 부임해 온 지방관 모두 애석하게 여겼다. 공 역시 龍城에 부임한 이래로 늘 가슴 아프게 여기다가 수년에 걸쳐 새롭게 보수하였다. 외형이 지난날의 아름다움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확 트인 느낌이 들어 괜찮다고 적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