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경우가 아니지요/
배병군(裵秉君)
제가 어릴 적에 살던 시골 동네에서는 집안에 일손이 부족할 때에는 동네의 덜 바쁜 젊은 분들에게 도움을 부탁했습니다. 그러면 아무리 바빠도 젊은 분들은 연세 드신 분들의 부탁을 들어주었습니다. 몸이 약하신 저의 아버지께서도 가끔 동네 젊은 분들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어이, 이봐, 길동이! 내일 우리 집 일 좀 해줘.”
“그류.”
무슨 일이냐고 묻거나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부탁하는 사람이나 부탁받는 사람이나 서로 묻고 대답하지 않아도 다 통하는 시골 동네였으니까요. 서로의 사정과 형편을 모두 아는 작은 동네여서 어느 집이든 이름을 대기만하면 그 집 숟가락 숫자까지 훤히 아는 시골에서는 그렇게 거래(?)가 성사되곤 했습니다.
요즈음은 시골에서도 일을 하면 점심은 배달하여 먹고 저녁 대접은 안하지만 제가 어릴 적에는 일하러 오시는 분들에게 주인집에서 점심과 저녁을 모두 대접했습니다. 물론 중간에 새참 대접도 했구요. 저녁 식사는 그 주인집에서 할 수 있는 최고의 정성으로 대접했습니다. 그게 동네의 인심이고 예의이며 도리였으니까요.
텔레비전도 없었던 그리 바쁘지 않던 시절이라 저녁을 먹고 나서도 일하러 오신 분은 주인집에서 삼십분 이상은 이야기하며 놀다가곤 했습니다. 그리고 얼마간 시간이 지나면 어른들에게는 암묵적으로 품값을 주고받는 타이밍이라는 것이 있었는지 주인은 안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어 건네곤 했습니다. 저의 아버지도 그러셨습니다.
“이봐, 길동이, 오늘 일하느라 수고했네. 이거(품값) 받어. 얼마 안 되여.”
일하러 오신 분의 반응은 어린 저를 긴장시켰습니다. “아이, 괜찮유.” 하고 거절했기 때문입니다. 그 때만해도 저는 어려서 어른들의 거래방식을 몰랐었습니다. 그러니 실컷 일하고 품값을 안 받는다고 하니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크면서 알게 되었지만 저의 동네 사람들은 사양하는 것을 미덕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누가 선물이나 용돈 또는 먹을 것을 주면 낼름(날름) 받는 것이 아니라 일단 처음에는 싫다고, 됐다고, 괜찮다고 거절하는 것이 일상화되었었습니다. 심지어 남의 집 일을 해주고 품값을 받는 것은 당연한 것인데도 한두 번 거절하고 받는 것이 저희 동네의 문화이자 미덕이었습니다. 만약에 누가 거절을 안 하고 즉시 덥석 받았다면 혹시 동네의 화젯거리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여튼 그리하여 2차전으로 들어갔습니다.
“이봐, 길동이! 그러지 말고 빨리 받아, 이 사람아.”
“아이~, 됐슈.”
또 다시 거절하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어린 저는 고도로 긴장도 되고 호기심도 생겨 끝까지 자리를 떠나지 않고 어떤 결말이 날지를 기대하며 양측을 번갈아보곤 했습니다. 그리고 ‘혹시 저분이 그냥 공짜로 일해 주시러온 걸까?’ 하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숨죽이며 3차전을 지켜봤습니다. 그러나 3차전은 너무나 싱겁게 아버지의 KO승으로 끝났습니다.
“야이 이 사람아, 하루 종일 일하고 품값을 안 받으면 ‘경우’가 아니지.”
“알았슈. 그럼 받을께유. 고마워유.” 하고 그 아저씨는 품값을 받으셨습니다.
‘도대체 ‘경우’ 라는 것은 무얼까? 도대체 ‘경우’라는 말이 무엇이기에 동네 아저씨께서 우리 아버지에게 꼼짝을 못하시는 걸까? 호랑이보다도 무서운 걸까?’ 하고 생각을 해봤지만 어린 저에게는 ‘경우’라는 단어는 말도 어렵고 무슨 뜻인지 감도 오지 않았습니다.
하여튼 그 후로도 지켜봤는데 동네에 무슨 일이 있거나 결정해야 할 때마다 신기한 것은 어떤 분이 “아, 그건 경우가 아니쥬.” 하면 모든 것이 그것으로 끝났습니다. 더 이상 따지거나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에 저희 동네에서는 젊은 사람들이 연세 드신 분들에게 웬만한 일로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이치에 맞지 않아도 꾹 참았습니다. 적어도 저희 동네의 인심이나 분위기는 그랬습니다. 하지만 논리적으로나 상황적으로 워낙 이치에 맞지 않으면 젊은 사람이 용기를 내어 어른들에게 말했습니다.
“어르신들, 죄송한데유 그렇게 하는 것이 법적으로는 맞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그건 경우가 아니쥬.”
그러면 그것으로 끝났습니다. 아무리 어른들이라도 ‘경우’ 라는 말 앞에서는 꼼짝을 못했습니다. 왜 그게 경우가 아니냐고 화를 내거나 야단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건방지게 젊은 사람이 무엇을 아느냐고 면박을 주는 일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경우라는 말이 법보다도 더 무서운 말인 줄 알았습니다.
중학교에 가서 영어시간에 영어선생님께서 가정법을 가르치시면서 “만약 ~할 경우에는, ~~ .” 이라는 설명을 하셨을 때 저는 속으로 ‘경우는 저럴 때 사용하는 것이 아닌데.’ 하고 엉뚱한 생각을 해본적도 있습니다. 그리고 수학시간에 경우의 수를 배우면서 ‘저것도 이럴 때 쓰는 말이 아닌데…….’ 하고 생각을 했습니다.
크면서 그 어렵고 궁금했던 ‘경우’라는 말을 생활 속에서 몸으로 체득했습니다. 제가 체득한 ‘경우’ 라는 말은 논리보다 더 설득력이 있는 것이었고 법보다도 더 높고 위력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어딘가 여유와 정감이 묻어나는 말이었습니다. 서산지역 말고 다른 지역에서도 ‘경우가 아니다’ 라는 말을 사용하는지는 모릅니다. 제가 서울에서 교직생활을 했지만 서울에서는 ‘경우가 아니다’ 라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요즈음엔 많이 배우다보니 잘난 사람도 많고 똑똑한 사람도 많습니다. 그러다보니 곳곳에서 분쟁도 많고 논란도 많습니다, 남녀갈등, 세대갈등, 노사갈등, 빈부갈등, 이념갈등 등 해결해야할 것들이 많이 산적해있어서 대화도 필요하고 중재도 필요하고 협상도 필요한데, 많은 곳에서 상대방의 이야기에 귀기울여주지 않고 자기주장만 많이 내세워 하루도 잠잠할 날이 없는 것 같습니다.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바득바득 싸우는 모습을 볼 때마다 너무나 안타까워 경우가 바른 누군가가 나타나서 “그것은 경우가 아니지요.” 라고 말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얼마 전에 사업을 하는 한 지인이 청첩장을 들고 화를 내며 저에게 조언을 구했습니다.
“이봐, 배선생, 이분이 내 고등학교 선배인데 나는 이 집에 일이 있을 때마다 부조를 했는데 이 선배는 우리 큰애가 결혼할 때에도 부조를 안 하고, 둘째 때도 안했으면서 자기 막내가 결혼한다고 또 청첩장을 보냈네. 이거 말이 안 되지?”
“예, 제가보기에도 그건 경우가 아니네요.”
“뭐라구~?”
처음 들어본 듯이 놀라며 되묻는 지인의 말에 저는 웃으며 답변했습니다.
“있어요. 그런 거. 스산 말. 호랑이보다도 무섭고 법보다도 위에 있는 말.”
*스산은 서산의 방언. 50대 후반 이상의 사람들은 지금도 장난삼아 가끔씩 서산을 스산이라고 부릅니다. 끝.
첫댓글 참 설득력 있는 수필입니다.
경우라....
이를테면 상식이 통하는 사회겠지요?
귀한 수필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