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물 위로 귀 몇 개가 떠다닌다 검은 비닐봉지 속에 느린 허공이 담겨 있다 나는 내 빈 얼굴을 바라본다 눈을 감거나 뜨거나, 닫아놓은 창이다 녹슨 현악기의 뼈를 꺾어 왔다 우물이 입을 벌리고 벽에는 수염이 거뭇하다 사춘기라면 젖은 눈으로 기타의 냄새 나는 구멍을 더듬는, 장마철이다 손가락 몇 개로 높아지는 빗소리를 누른다 저 먼 곳에서 핏줄이 서는 그의 목젖, 거친 수염을 민다 드러나는 싹이여, 자라지 마라 벌레들이 털 많은 다리로 밤에서 새벽까지 더듬어 오른다 나는 잠든 그의 뒷주머니에 시린 손을 숨긴다 부드럽고 가장 어두운 비닐봉지 안에 차가운 달걀 몇 개를 담아 바람에 밀려가는 주소를 찾는다 귀들이 다 가라앉은 물에도 소름이 돋는 중이다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분석 김민구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작인 <이끼의 시간>은 시인이 자신의 사춘기 시절을 생각하며 불안한 미래와 세상과 타자에 대한 막연한 호기심 그리고 수염이 자라면서 어른이 되어가는 성장에 대한 부담감을 시적 언어로 구축해내고 있다. 당선작은 어떤 인식이나 표현보다도 불완전한 이미지를 툭툭 던져놓음으로써 시를 전개시킨다. ‘녹슨 현악기의 뼈’거나 ‘기타의 냄새나는 구멍’, ‘바람에 밀려가는 주소’ 등이 그렇다. 확실한 인식보다 여기에는 불안의 이미지가 날 것으로 놓여 있다. 여기서 의문 하나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 전체적으로 나타내려는 시적 상상력이 사춘기 시절 겪은 불안에서 근거하는 것이라면, 이 날것 그대로의 언어를 어떠한 시어의 조탁 과정 없이 사용하는 것 그 자체가 불안의 파토스이므로 충분히 시어로서 존재할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한 문제다. 시가 갖고 있는 모호성 덕택인지 모르지만 당선작에서 불안의 이미지들은 알 듯 모를 듯 놓여있지만 전체적인 이해를 방해할만큼 신뢰성이 떨어지는 밀도는 아니었다. 시에서도 이야기가 있어야만 한다는 말이 있다. 사춘기를 보내던 화자가 자신의 방에서 입 주위에 거뭇하게 자라나는 수염 등을 살펴보며 불확실한 미래를 걱정하는 이미지로 가득하며 이것은 확실한 서사성을 갖춘 소설만큼은 아니더라도 당시 화자가 어느 정도의 불안감을 지니고 있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든다. 자신이 점점 성장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던 시절, 차라리 자라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점점 거뭇하게 자라나는 수염이며 다리의 털, 우물처럼 축축한 방, 벽에 세워진 기타의 구멍과 현을 튕기며 어떤 오래된 낭만을 상상해보던 시절이 바로 사춘기이며 또한 미성년기의 불안지수가 가장 높을 시기다. 그리하여 나의 익숙했던 몸이 마치 타인의 것처럼 느껴지고, 온전히 나의 것이라고 믿어왔던 영혼만을 간직한 채 어디론가 부유하고 싶어진다. 화자는 ‘잠든 그의 뒷주머니’에 시린 손을 숨긴다고 말하지만 사실 그는 타인으로 여겨지는 자기 자신이다. 마치 고갱의 그림처럼 나는 누구인가, 그리고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갈 것인가에 대한 물음을 계속 던졌지만 깊은 우물 속에 가라앉은 돌처럼 아무런 대답도 찾을 수 없었던 공황상태, 누군가를 지독하게 사랑하고 싶었으나 그러기엔 너무도 어렸던 열넷, 열다섯 살. 화자의 내면은 당선작의 후반부의 한 대목에서 찾아볼 수 있다. ‘부드럽고 가장 어두운/비닐봉지 안에 차가운 달걀 몇 개를 담아/바람에 밀려가는 주소를 찾는다’에서 그렇다. 부드럽고도 어두운 곳, 어머니의 양수 같기도 하고 자신을 담고 있는 방 같기도 하고, 기타의 냄새나는 구멍 같기도 한 캄캄한 비닐봉지, 그 속에 차갑게 식어빠진 달걀 몇 개, 정확하게 끝맺을 수 없고 그래서 행선지조차 불명의 ‘바람에 밀려가는 주소’에서, 독자들은 늘 모든 대상이 주는 감정을 불안으로 해석했고 늘 모든 대상에 대하여 적개심 혹은 이유 없는 반항심리와 환멸만 가득했던 사춘기를 시인과 공유하며 서로를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귀들이 다 세월의 수면 아래로 가라앉고 세상의 모든 소리들을 듣지 않게 된 후에도 사춘기를 보내는 10대들은 자신의 몸이 정말 온전한 자신의 것인지를 확단할 수 없다.
당선작은 사춘기를 보내는 이들이 갖는 불안한 내면을 탐구하면서 가장 가깝고도 가장 멀다고 느꼈던 몸에 대하여 이질적인 담론을 펼치고 있다. 사춘기 이전까지 사람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든 것들을 친근하게 대하고 자신이 세상의 일부인 것을 스스로 증명하기라도 한 듯 어떤 것에도 의문을 던지지 않고 조용하게 살아간다. 그러다 사춘기가 시작되면서 순간 자신에 대한 물음이 시작되고 어쩌면 스스로가 무척 특별하거나 혹은 그 반대로 아주 하찮은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된다. 자신을 보살펴왔던 부모와 집, 몸, 친구, 그리고 다른 익숙한 모든 것에 대하여 막연한 적개심을 품게 된다. 시인이라면 분명 이러했을 것이다. 장맛비가 세차게 내리는 어느 날 혼자 방에 앉아 자신을 우물 속에 갇힌 어느 초라한 자아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익숙한 것이 순간 낯설어지는 시기를 보내면서 자기와 타자 사이가 아닌, 자기와 자기 속에서 타자를 발견하는 그런 시기를 보내왔을 것이다.
나의 시는 비약이 없다. 그렇다고 당선작이 모두 비약으로만 가득차 있는 것은 아니다. 당선작에 비해 나의 시는 너무 정직하거나 숨김이 없다. 고요한 화폭처럼 주제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독자 눈앞으로 액자를 가져가 들이미는 것 같다. 그리고 독자가 무슨 시인가 보기 위해 읽어 내려갈 때, 어느 정도 추상적이면서 독자와 공감대를 형성하여 기억을 공유하는 힘이 아니라, 마치 알 듯 모를 듯 하다가 결국 모르거나 혹은 시인 본인의 이야기가 너무 강하여 독자의 내면과 교통할 수 없이 무겁게 가라앉고 마는 느낌이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나의 시에는 어떤 진한 슬픔이 없다. 하다못해 슬픔의 분위기조차 없을지 모른다. 사실 나에겐 사춘기라는 단어가 주는 어떤 그리움이라는 것이 기억나지 않는다. 누군가를 지독하게 사랑하고 싶었던가, 아니면 세상에서 내가 제일 하찮은 존재인지도 모른다고 내게 속삭이는 어떤 목소리를 처참하게 난자하고 싶었던 적개심만이 내 과거의 이미지의 전부인 것 같다. 나에게 사춘기는 내일과 미래에 대해서 불안하지 않았다. 다만 현재에 불안정할 뿐이었다. 이외수의 <들개>에서 나왔던가. 모든 것을 무의미하다고 일축하는 남자에게 여자가 무의미한 것도 무의미한 것이 아니냐고 소리치자, 남자는 진지한 표정으로 무의미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라고 대답했던 대목이 갑자기 강렬하게 떠오른다. 그때는 무의미한 것처럼 보였는데 지금 보니 의미심장했던 장면들, 그것이 바로 불안의 근원일까.
앞으로 첫 행을 쓰듯 모든 행을 써야겠다고 생각한다. 처음에서 끝까지 어떤 순차적인 과정이 나의 시를 지루하고 답답하게 만드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처음의 파격을 끝까지 이끌어나가지 못하는 게 문제다. 깊은 철학을 드러내지 않아도 그저 시어로써만 기능해도 충분히 나의 주제가 드러날 수 있도록 마치 조각하듯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나 자신의 이야기가 다른 사람의 내면과도 어느 정도 상응하는 부분이 분명 있을 것이다. 상황에 대한 공감은 내가 설명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독자가 먼저 나의 시적 상황을 알아보고 먼저 다가와야만 한다. 적어도 당선작은 어디론가 머물러있기 싫어했던 나의 유년기와 많은 부분 상통하는 바가 있었다. 이미지 중심의 시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렇다고 표현과 인식과 상상력이 약해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알 듯 모를 듯 흐릿한 의미와 그저 날 것의 이미지만을 데려와 시로 쓰는 것이 과연 궁극적인 시인의 본령일까 의문이 들기도 하지만, 그것 또한 새로운 지평이라면 어쩌겠는가. 잘 된다면 나의 철학은 이미지 중심적인 시들이 갖고 있는 지나친 단순성을 보완해줄 것이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당선작은 지나치게 무겁지 않다. 과거를 담담하게 기록하면서 한쪽으로 기억을 공유할 수 있도록 문을 열어두고 있다. 구조가 단순하지만 여유가 있다. 시에 숨이 통하는 길이 있는 것 같다. 이는 전반적인 시의 느낌을 이루어내는 시적 소재를 약한 힘으로 붙들고 있되 충분한 에너지로 제어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당선작품집이 나와야 당선작 이외의 응모작들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대체로 시가 자연스럽다. 사춘기를 겪을 때 이전의 나와 이후의 내가 분리되는 모습을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다. 이번 당선작은 구조와 시어가 단순했지만 기억을 공유하는 힘이 있었고 그것이 바로 활달한 젊은이의 소통을 불러일으키는 시작이 되었을 것이다. 이제부터 시를 쓸 땐 독자가 어떻게 내 안으로 들어올까를 생각하기 이전에 내가 어느 쪽으로 독자를 향하여 언어의 문을 열고 좀 더 보편적인 소재를 어디에서 선택할 것인지를 깊이 숙고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