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가 단 한 군데만 화장을 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어디를 할까. 화장에 관해 최초로 관념이 생긴 어린애가 엄마 화장품 중에 제일 먼저 손을 대는 물건은 무엇일까. 반대로 할머니가 화장을 한다고 할 때 제일 신경을 쓰는 부위는 어디인가.
답은 대체로 비슷하다. '입술'이다. 다급하게 얼굴을 정돈하는 지하철 출근길에서도, 어린애 화장 놀이에서도, 손주 결혼식에 나서는 할머니에게서도 화장 우선순위가 되는 부위는 일단 입술이다. 립스틱은 그런 점에서 화장의 알파요, 오메가라 할 만하다. 그것은 립스틱이 원초적인 무의식을 간직한 신체 부위와 연관된 사물이라는 뜻이다.
물론 반론이 있을 수 있다. '피부 건강'을 위해 기초화장이 더 중요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화장은 '하는' 사람도 중요하지만 '보는' 사람도 중요하다. 화장은 얼굴을 봐주는 타인이 전제돼 있는 행위다. 타인 시선에 즉각적으로 눈에 들어오는 것은 아무래도 피부 상태라기보다는 '붉은 입술'(루즈)이다.
이런 점에서 다양한 색조화장이 가능한 아이섀도는 립스틱과 비교 대상이 될 수 있다. 아이섀도와 립스틱은 둘 다 타인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신체 부위에 관련된 사물이다. 눈은 마음의 창이며, 입술은 목소리가 나오는 입구다. 하지만 눈짓과 눈동자는 암시적으로 말한다. 입술은 말이 직접 발성되는 문이다. '립스틱 짙게 바른 입술'은 스모키 화장을 강조한 아이라인보다 더 직접적으로 어떤 정념의 강도를 빛깔로 '말한다'.
그러나 '말하는 입'보다 더 원초적인 입의 기능이 있다. '먹는 입'이다. 이때 입술은 실용적인 입술, 생활인의 입술이다. 생활인의 입술에는 립스틱이 필요 없다. 밥을 먹을 때 립스틱이 묻은 입술은 불편하다. 그래서 여자는 밥을 '먹은 후에야' 립스틱을 바른다.
이건 립스틱을 바르는 순간 입술에 '존재 단절'이 일어난다는 뜻이다. 실용적 입술에서 비실용적 입술로 변신 같은 것을 한다. 이 변신에는 '아름다움'에 대한 욕구, 심미적 의식이 개입돼 있다. 본래 '아름다움'은 실용성과 모순을 일으키게 마련이다. 소설가 토마스 만은 '토니오크뢰거'에서 "건실한 은행가는 예술가가 될 수 없으며, 생활인은 창조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립스틱(lipㆍ입술, stickㆍ지팡이)은 이런 점에서 생활인을 예술가로 바꾸는 '미(美)의 지팡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