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梅月堂 金時習(1435~1493)
'꿈꾸다 죽은 늙은이'
세조의 왕위 찬탈에 분노하여 평생 떠돌던 매월당이 무량사로 온 것은 그의 나이 58세 때였다.
김시습이 생을 마감하기 위한 장소로 무량사를 선택한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험하고 외진 곳이기 때문에 백 년이 지나도 나를 귀찮게 할 관리 하나 없을 것이다."
그로부터 1년 후 김시습은 무량사 청한당(淸閒堂)에서 59세로 입적(入寂)하였다.
만수산 무량사 일주문
강원도 양양 설악에서 지은 '나의 삶(我生)'이란 시에서는 자신의 묘비에
"꿈꾸다 죽은 늙은이'라 써달라고 한다.
백세표여광 百歲標余壙 : 나 죽은 뒤 내 무덤에 표할 적에
당서몽사노 當書夢死老 : 꿈꾸다 죽은 늙은이라 써준다면
서가득아심 庶幾得我心 : 나의 마음을 잘 이해했다 할 것이니
천재지회포 千載知懷抱 : 품은 뜻을 천년 뒤에 알아주리
우리나라 최초의 전기체 소설(傳寄體小說), 그러니까 비현실적이고 비인간적인 내용을 다룬 한문소설 <금오신화>를 지은 매월당 김시습을, 율곡 이이는 그가 쓴 전기 <김시습전>에서 이렇게 말한다. 매월당은 생후 8개월 만에 글을 깨치고 3살 때 한시를 지은 천재였으며, 5살 때에는 세종대왕 앞에서 시를 지어 올려 "오세동자"라는 애칭을 얻기도 했다. 하지만 왕위가 단종에서 세조로 넘어가자 자신의 글을 모두 불사르고 "심유적불(心儒跡佛)"이라고 했다. 김시습은 유교와 불교의 실체를 이미 파악하고, 그 진리의 세계를 거침없이 넘나들 수 있었던 그런 사람이었다.
무량사 극락전과 오층석탑
태어나 사람 꼴 취하였거늘 / 어찌해서 사람 도리 못 다 하였나
젊어서는 명리를 일삼았고 / 장년이 되어서는 자빠지고 넘어졌네.
고요히 생각하면 부끄러운 걸 / 진즉에 깨닫지 못하였나니
후회해도 지난 일 돌이킬 수 없기에 / 깨닫고 보니 가슴이 방아 찧듯하네.
- 김시습의 '나의 삶(我生) 중에서 -
"태어나 사람 꼴 취하였거늘 어찌해서 사람 도리 못 다 하였나"처럼 그가 남긴 2200여 편의 시 속에는
자학적이라고 할 만큼 그 자신을 철저하게 옭아매는 시들이 많다.
김시습의 '나의 삶(我生)'
我生旣爲人 (아생기위인) : 나는 이미 사람으로 태어났네
胡不盡人道 (호불진인도) : 어찌 사람의 도리를 다하지 않으리오.
少歲事名利 (소세사명리) : 젊어서는 명리를 일삼았고
壯年行顚倒 (장년행전도) : 장년이 되어서는 세상에 좌절하였네.
靜思縱大뉵 (정사종대뉵) : 가만히 생각하면 너무 부끄러우니
不能悟於早 (불능오어조) : 어려서 깨닫지 못한 탓이네
後悔難可追 (후회난가추) : 후회해도 돌이키기 어려워
寤벽甚如도 (오벽심여도) : 깨닫고 보니 가슴이 방아 찧듯 하네.
況未盡忠孝 (황미진충효) : 하물며 충효도 다하지 못했으니
此外何求討 (차외하구토) : 이외에 무엇을 구하고 찾겠는가.
生爲一罪人 (생위일죄인) : 살아서는 한 죄인이요
死作窮鬼了 (사작궁귀료) : 죽어서는 궁색한 귀신이 되리
更復騰虛名 (갱부등허명) : 다시 헛된 명예심 또 일어나니
反顧增憂悶 (반고증우민) : 돌아보면 근심과 번민이 더해지네.
百歲標余壙 (백세표여광) : 백년 후에 내 무덤에 표할 때는
當書夢死老 (당서몽사로) : 꿈꾸다 죽은 늙은이라 써주시게나
庶幾得我心 (서기득아심) : 행여나 내 마음 아는 이 있다면
千載知懷抱 (천재지회포) : 천년 뒤에 속마음 알 수 있으리.
金時習의 浮屠塔과 사리
왼쪽 가장 큰 것이 김시습의 부도탑(충남 유형문화재 제25호)이다
부도탑 앞의 비석에는 '五歲金時習之墓'라 새겨져 있다
八角圓堂形의 부도 중대석에 如意珠를 희롱하는 龍이 새겨졌다
1493년(성종 24년) 2월, 무량사에서 "애애애(哀哀哀)"를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선방(禪房)에서 59세로 입적한 김시습의
장례를 마치고 승려들이 거애불사(擧哀佛事)를 행하는 중이었다. 김시습은 열반에 들면서, 자기가 죽거든 다비(茶毘)를
하지 말고 절 옆에 3년 동안 묻어두었다가, 그 후에 정식으로 다비해 줄 것을 당부했다고 한다. 승려들이 시신을 절 옆에
가매장했다가 3년 뒤 무덤을 열었더니, 시신이 살아있는 사람과 똑같았다. 이에 다비를 거행하고 사리를 수습하여 부도탑을
세웠다. 일제 강점기 때, 폭풍우로 나무가 넘어지면서 부도탑도 무너졌는데, 그 때 사리 1점이 발견되어 국립 부여박물관이 보관해 오고 있다.
김시습의 사리와 사리함
매월당 김시습의 사리는 2014년 7월1일부터 8월 24일까지 불교중앙박물관이 개최하는 "열반, 궁극의 행복" 특별전을 통해 처음 임대 전시되었다. 김시습의 사리가 공개되는 가운데, 이 사리를 원래 있던 제자리에 돌려놓으라는 청원 운동이 시민단체로부터 제기되었다.
문화재제자리찾기 대표 혜문스님은 블로그 혜문 닷컴을 통해 "김시습(설잠대사)은 생육신의 한사람이자 불도에 정진한 스님으로 조선 전기를 대표하는 문인이자 사상가이다. 이런 역사적 인물의 유골(사리)이 일제강점기 부여박물관으로 이전된 뒤, 수장고에서 예우절차 없이 보관되어 있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원래의 봉안처인 무량사로 이전되어 봉안되는 것이 타당하다"고 지적했다.
金時習이 入寂한 淸閒堂
극락전 옆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 둔덕을 넘으면 저만치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는
한적한 산밑에 삼성각과 이웃하여 맞배지붕의 삼 칸집이 보인다.
바로 김시습이 생의 마지막을 보낸 청한당이다.
삼성각(좌측) 청한당(우측)
청한당 현판
김시습은 매월당(梅月堂)말고도 설잠(雪岑), 동봉(東峰), 청한자(淸寒子)라는 호를 갖고 있었다.
무량사 스님들은 평생 떠돌며 길에서 살았던 그의 집에 찰 한(寒)자를 붙여주기가 송구해서
한가할 한(閒)자로 바꿔 당호를 달았다고 한다. 그런데 편액을 쓰는 분이 풍류스럽게도
한가할 '閒'자를 거꾸로 써 놓아 보는 이에게 해학과 찬탄을 자아내게 한다.
'閒자는 방안에 드러누워 문을 열어 젖히고 한가로이 달을 쳐다보는 형상을 그린 멋스런 글자다.
편액을 거꾸로 써 놓았으니 더더욱 한가할 듯한 느낌을 주는 美學이랄까!
無量寺 梅月堂 詩碑
1983년 11월, 매월당의 시비가 무량사 들어가는 왼쪽 숲길 옆에 세워졌다.
시비의 전면
반륜신월상림초 半輪新月上林梢 : 새로 돋은 반달이 나무가지 위에 뜨니
산사혼종제일고 山寺昏鍾第一鼓 : 산사의 저녁종이 울리기 시작하네
청영점이풍로하 淸影漸移風露下 : 달그림자 아른아른 찬이슬에 젖는데
일정량기투창요 一庭凉氣透窓凹 : 뜰에찬 서늘한 기운 창틈으로 스미네
시비의 후면
梅月堂 金時習은 江陵人으로서 世宗 17년(1435) 서울에서 태어나 成宗 24년(1493) 여기 夫餘의 無量寺에서 一生을 마친
문인이다. 어려서 신동의 이름을 떨쳐 앞날이 크게 촉망되었으나 端宗 폐위라는 불의의 변고를 당하여 일신의 명리의 길을 버리고 천하를 방랑하는 시인으로 수도자로서 철저한 국외자의 길을 택하여 많은 기행으로 자신의 철학을 행동으로 보여
주었다. 책을 써서 석실에 숨기기도 하고, 가는 곳마다 시를 써서 바람에 흩날리고 물위에 띄워 버릴 수밖에 없었으나
金鰲新話. 梅月堂詩集 등 저술이 오늘에 전하고 있는 것은 오로지 하늘이 그의 거룩한 뜻과 재능을 아끼고 많은 사람들이
그의 의로운 뜻을 흠모한 까닭이었으니 오늘 우리도 날로 빛나는 그의 업적을 기려 여기 작은 시비를 세운다.
1983년 11월 예술원 회원 鄭漢模는 이 글을 짓고, 학술원 회원 金東旭은 글씨를 쓰다.
淸平寺 細香院에서 시름을 덜어낸 金時習
"시끄럽게 지난 행적 묻지 마시게"
김시습(金時習)은 생육신 (이맹전(李孟專), 조여(趙旅), 원호(元昊), 김시습(金時習), 성담수(成聃壽), 남효온(南孝溫))의
한 사람으로 강릉이 본관이다. 호는 매월당(梅月堂), 설잠(雪岑), 청한자(淸寒子) 동봉(東峰) 등 여러 가지로 불린다.
세종 17년(1435), 유생들의 글읽는 소리가 밤낮으로 들리는 서울의 성균관 부근에서 태어나 8개월만에 글자를 깨쳤고,
3세 때 보리를 맷돌에 가는 것을 보고 시를 읊었다.
무우뇌성하처동 無雨雷聲何處動 비는 아니 오는데 천둥소리 어디서 나는가,
황운편편사방분 黃雲片片四方分 누런 구름 조각조각 사방으로 흩어지네
김시습이 3세 때 지었다고 전해지는 시가 또 있다.
도홍유록삼월모 桃紅柳綠三月暮 : 저무는 3월인데 붉은 복사꽃 푸른 버드나무
주관청침송엽로 珠貫靑針松葉露 : 소나무는 구슬을 꿰었나 잎마다 이슬이 달렸다.
춘천 오봉산 청평사
김시습은 삼각산 중흥사(重興寺)에서 공부하다가 수양대군이 단종을 내몰고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통분하여, 책을 태워버리고 중이 되어 이름을 설잠(雪岑)이라 하고 전국으로 방랑의 길을 떠났다. 전국을 떠돌아 다니던 김시습이 청평사를 찾아온 시기에 대해서는 이야기가 분분하다. 그의 문집 여러 곳에 청평사와 관련된 시가 분산되어 등장하는 것을 보면, 몇 차례에 걸쳐 방문한 것으로 추정되며, 청평사에 머물던 시기에는 주로 세향원(細香院)에서 생활을 하였다. 그는 청평사로 들어오면서 시를 읊조린다.
有客 (나그네) -김시습-
유객청평사 有客淸平寺 : 청평사 찾아온 나그네 있어
춘산임의유 春山任意有 : 봄산을 한가히 노니노라
조제고탑정 鳥啼孤塔靜 : 새 울음에 외로운 탑은 고요하고
화락소계류 花落小溪流 : 꽃 떨어져 실개울에 흘러가네
가채지시수 佳菜知時秀 : 맛있는 나물은 때를 알아 돋아나고
향균과우유 香菌過雨柔 : 향기로운 버섯은 비 맞아 부드럽네
음행입선동 吟行入仙洞 : 시 흥얼대며 신선 사는 마을에 들어서니
소아백년수 消我百年愁 : 백년 묵은 근심이 사라지네.
뒤에서 본 회전문과 회랑
청평산 세향원 남쪽 창에 쓰다 -김시습-
아침 해 뜰 무렵 새벽빛 밝아오니
숲 안개 개는 곳에 새들이 짝 부르네.
먼 산의 푸른빛은 창문을 열면 보이고
이웃 절 성근 종소리 산 너머로 들리네.
파랑새는 소식 전하러 약 달이는 부엌 엿보고
벽도화(碧桃花) 꽃 떨어져 이끼와 어울리네.
신선이 하늘에 조회하고 왔는가
소나무 아래 한가로이 소전(小篆) 글씨 펼치니.
석양으로 산 빛은 점점 붉어지는데
지친 새들 돌아갈 줄 알아 저녘 종소리 따르네.
바둑판 그대로 둔 채 오는 손님 맞아들이고
선방 잠가두고 구름 짙길 기다리네.
네모진 연못엔 천 길 산봉우리 비치고
절벽에선 만 길 물 내달리며 떨어지네.
이것이 바로 청평산 선경(仙境)의 운치
어이하여 시끄럽게 지난 행적 묻는가.
淸平寺 影池
"천 길 산봉우리 비치고, 만 길 물 내달리며 떨어지네" 부분은 영지(影池)와 구성폭포(九聲瀑布)를
형상화한 것이다. 影池는 고려시대 이자현이 조성한 직사각형의 연못으로,
부용봉에 있던 견성암이 연못에 비친다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구성폭포
九聲瀑布는 환경의 변화에 따라 아홉 가지 폭포 소리가 들린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폭포 주변에 소나무 아홉 그루가 있어 구송폭포(九松瀑布)라고도 불린다.
김시습이 청평사에서 한동안 거주한 것은 조선시대에 널리 알려진 일이었고, 그로 인하여 청평사는 유명세를 누렸다.
더군다나 그는 이곳에서 학매(學梅)를 가르쳤다. 학매는 부용영관이 용문사에서 자문을 구하기 위해서 찾아올 정도로
불교계에 알려진 고승이 되었다. 다음 시는 김시습의 <학매에게 주다(示學梅)>라는 시 두 수 중 하나이다.
학매에게 주다(示學梅)> -김시습-
학매곤자학시서 學梅곤者學詩書 : 학매 스님은 시와 글을 배우는데
가재소양강상려 家在昭陽江上廬 : 집은 소양강 가의 초가였네
단직유친신근도 斷織有親新覲到 : 짜던 베 자른 어미가 처음 찾아와서
논문무지기참여 論文無地己參余 : 글 논할 자리 없어 내게 참여시켰네
송여취개운여서 松如翠蓋雲如絮 : 소나무는 푸른 일산 구름은 솜뭉치 같고
상사경마월사소 霜似瓊마月似梳 : 서리는 옥가루 같고 달은 얼레빗 같네
점이여오증유숙 點爾與吾曾有夙 : 너와 내가 점찍은 것은 묵은 인연이니
청산온처필종거 靑山穩處必從渠 : 푸른 산 조용한 곳에서 스승을 따르라
百潭寺에도 金時習의 詩碑가...
백담사 경내에 세워져 있는 김시습의 시비
저물 무렵(晩意)
만학천봉외 萬壑千峰外 : 만 골짜기 천 봉우리 밖에서
고운독조환 孤雲獨鳥還 : 외로운 구름과 새가 날아든다
차년거시사 此年居是寺 : 올해는 이 절에서 지내겠지만
내세향하산 來歲向何産 : 내년에는 어디에서 지낼 것인가
풍식송창정 風息松窓靜 : 바람자는 소나무 창가엔 고요함이 머물고
향소선실한 香銷禪室閑 : 향이 스러진 방은 조용하기만하다
차생오이단 此生吾已斷 : 이번 생은 이미 단념하였기에
서적수운간 棲迹水雲間 : 물과 구름 사이 자취를 남기리라
金鰲神話의 産室 茸長寺터
김시습은 가슴 가득 쌓인 울분을 풀어내기 위해 글로 나타내고 드러낸 세상 만물 중에서도 특별히
'매화(梅花)와 '달(月)'을 좋아했다. "용장사에 달이 뜨니 작은 창에 가득히 어리는 매화 그림자"를 사랑해
자신의 호(號)를 매월당(梅月堂)으로 삼았다.
용장사 옛터에 남아 있는 석축
매월당 김시습은 1455년 삼각산 중흥사(重興寺:현재 태고사 지역)에 머물던 중 세조가 왕위를 찬탈한 사실을 알고는
모든 책을 불태운 다음 승려가 되었다. 법명을 설잠(雪岑)이라고 하고 천하를 주유하였다. 관서와 관동, 호남을 거쳐
1465년(세조11) 경상도 금오산에 들어와 용장사에 산실(山室)을 짓고 수도와 집필에 몰두하였다. 그리고 34세 때인
1468년 그의 대표적인 한문소설 <금오신화(金鰲神話)>를 완성했다. 매월당은 31세 들어와 37세까지, 7년동안 용장사
산실에 머물던 감회를 <매월당시집>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용장사 산실에 머물던 감회 (居茸長寺山室有懷)
용장산동유 茸長山洞幽 : 용장산 골짜기 깊고 깊어서
부견유인래 不見有人來 : 사람이 오는 것이 보이지 않네.
세우이계죽 細雨移溪竹 : 가는 비는 시냇가 대나무를 일깨우고
사풍호야매 斜風護野梅 : 스쳐가는 바람이 들판의 매화를 감싸는구나.
소창면공록 小窓眠共鹿 : 작은 창가엔 사슴 함께 잠들었어라
방의좌동회 枋椅坐同灰 : 낡은 의자엔 먼지만 재처럼 쌓였는데
부각모첨반 不覺茅簷畔 : 깰줄 모르는구나 억세처마 밑에서
정화낙우개 庭花落又開 : 뜨락의 꽃들이 지고 또 피는데
금오신화(金鰲神話)
<만복사저포기 萬福寺樗蒲記>·<이생규장전 李生窺牆傳>·<취유부벽정기 醉遊浮碧亭記>·
<남염부주지 南炎浮洲志>·<용궁부연록 龍宮赴宴錄> 등 5편의 소설이 들어 있다.
김시습은 이 소설 속에서 허구적인 인물을 동원하여 신비한 내용을 표현하고 있지만
그가 진정으로 보여주려고 한 주제는 현실적인 제도, 인습 그리고 운명에 대한 비판이었다.
세속적 삶의 초월을 그림.
<이생규장전 李生窺牆傳>: 이생이 담장을 엿보는[窺] 이야기로 여인의 정절과 생사를 초월한 영원한 사랑을 그림
<취유부벽정기 醉遊浮碧亭記>: 부벽정에서 술에 취해 노는 이야기로 도교적인 신선사상을 그림
392년에 세운 영명사의 부속건물이었음
<남염부주지 南炎浮洲志>: 패도의 비판과 왕도를 추구한 이야기
<용궁부연록 龍宮赴宴錄>: 용궁의 잔치에 간 이야기로 세상의 명리와 그것의 덧없음을 그림
- 금오신화를 지으며 남긴 시-
오두막집 푸른 담요에 따뜻함이 남아
창가에 가득 찬 매화 그림자
달 떠 밝아오자 비치기 시작하네
등불 돋우어 긴 밤 향불 피우고 앉아
고요히 인간 세상에서 보지 못하던 책을 짓노라
('금오신화 해제'에서 인용)
용장사터를 내려다 보고 있는 삼층석탑 (보물 제186호)
전망이 시원하다. 남산 전체를 하단 기단으로 사용하는 신라예술의 진가를 보여준다
용장사터 석조여래좌상 (보물 제187호)
자연석 기단 위에 3층탑 같은 특이한 원형 대좌, 바람에 나부끼는 듯한 치마주름...
하늘에서 살며시 내려와 앉아있는 불상 같다. 신라의 고승 대현스님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고 전해지는 佛頭는 어느 곳에 있는지, 안타깝다.
金時習, 天才에서 狂人으로 바뀐 삶
김시습은 천재였다. 조선의 선비들 중에는 수많은 천재가 있었지만 천재가 인정하는 유일한 천재였다. 무슨 말인가 하면
아홉 번이나 과거시험에서 장원을 차지했다해서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고 불렀던 천재 율곡 이이(栗谷 李珥)가 천재라는 기록을 남긴 유일한 인물이 김시습이라는 이야기다. 율곡은 '시습(時習)이라는 이름 역시 김시습의 타고난 천재성에서 비롯됐다고 적었다.
"김시습은 태어날 때부터 천품(天稟)이 다른 사람과 달랐다. 세상에 나온 지 불과 8개월만에 스스로 글을 알았다. 최치운(崔致雲)이 보고서 기이하게 여겨 이름을 '시습(時習)'이라고 지어 주었다. 시습은 말은 더디었으나 정신은 놀라워서 글을 보면 입으로 읽지는 못했지만 뜻은 모두 알았다." <율곡전서. '김시습전(金時習傳)'
여기서 최치운이라는 사람이 지어줬다는 '時習'은 유학의 최고 경전인 <논어(論語)>의 첫 구절인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
에서 취한 이름이다. 김시습의 타고난 자질을 보고 유학을 크게 빛낼 대학자가 될 것임을 예견하고 붙여준 이름이다.
김시습은 세 살 때 시를 짓고, 다섯 살 때 <대학(大學)>과 <중용(中庸)>을 통달하는 등 보통의 사람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든천재적 자질과 행적을 숱하게 보여주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신동(神童)이라고 극찬했다.
당시 이름 높은 명사(名士)들이 앞 다투어 이 어린 천재를 보기 위해 찾아왔고, 급기야 세종대왕(世宗大王)의 귀에까지 김시습의 명성이 전해졌다. 학문 잘 하는 사람을 누구보다 아끼고 귀하게 여겼던 세종대왕은 김시습을 승정원으로 불러 시(詩)로 시험해 보았다. 그런데 김시습의 시는 빨리 지으면서도 아름다웠다. 김시습의 재주에 탄복한 세종대왕은 크게 칭찬하면서 훗날 나라의 재목으로 크게 쓰겠다는 말까지 했다. 그리고 김시습에게 비단을 하사하고 집으로 돌려보냈다.
"내가 친히 보고 싶지만 세상의 풍속과 이목을 놀라게 할까 염려된다. 마땅히 그 집안에 권하여 재능을 감추어 드러내지 말고 잘 가르치고 기르게 하라. 그의 학업이 성취되기를 기다렸다가 장차 크게 쓸 것이다." <율곡전서> '김시습전'
이때 김시습의 나이 불과 다섯 살이었다. 일찍 핀 꽃이 일찍 지는 것처럼 너무 일찍 세상에 알려지면 자칫 학업을 소홀히 하거나 헛된 명성을 쫓다 신세를 망칠가 우려했던 세종대왕의 진심어린 충고에도 대궐을 다녀온 김시습의 명성(名聲)은 이미 온 나라에 퍼져 '오세(五歲)'라는 별명이 생겨날 정도였다. 어쨌던 임금의 칭찬과 훗날에 대한 약속까지 들은 김시습은 나라와 백성을 위해 자신의 재주를 펼칠 원대한 뜻을 품고 학업에 힘썼다고 한다.
그러나 '운명의 장난'이었을까? 김시습이 스물한 살 때 발생한 '사건'이 천재의 운명을 '광인(狂人)의 삶'으로 바꾸어버렸다. 이 사건이란 다름 아닌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옥좌에 오른 '왕위 찬탈' 사건이었다.
당시 삼각산(三角山:북한산)에서 글을 읽다가 이 소식을 들은 김시습은 즉시 방문을 닫아 걸고 사흘 동안 바깥으로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크게 울부짖고 통곡한 다음 읽고 쓰던 서책들을 모조리 불살라 버리고 광기(狂氣)를 일으켜 뒷간에 빠졌다가 도망 나와 곧바로 방랑길에 올랐다.
권력을 빼았기 위해 자신의 조카까지 죽인 것도 모자라 나라의 동량과 인재들이 모인 집현전의 학자들까지 몰살한 수양대군(世祖)과 그 수하들의 패악(悖惡)에 분개하고 불의한 권력에 침묵하는 세상에 분노한 김시습은 스스로 사람들과 어울려 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마침내 육신(肉身)에 구애받지 않고 평생 세속 밖을 떠돌며 다녔는데 우리나라 산천(山川)치고 그의 발자취가 닿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였다. 명승지를 만나면 곧 그곳에 자리를 잡아 살고 옛 성읍을 찾아가면 반드시 며칠 동안 발을 구르며 슬픈 노래를 불러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또한 헛된 명성이 너무 일찍 높아졌다고 생각해 일부러 광태를 부리고 이성을 잃은 모양을 보여 자신의 본모습을 가렸다. 율곡은 김시습의 기이하고 괴벽한 행동을 이렇게 적어놓았다.
"산에 가면 나무를 벗겨낸 하얀 껍질에 시를 쓰는 것을 좋아했다. 그런데 한참 외우고 읊조리다가 별안간 통곡하고는 깎아버렸다. 더러는 종이에 썼지만 다른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물이나 불에 던져 버렸다. 그 행동거지가 전혀 예측할 수 없었으므로 세상 사람들의 큰 웃음거리가 되었다."
김시습은 마치 썩어빠진 세상과 더러운 권력의 유혹에서 달아나려고 작정이나 한 사람처럼 자신의 타고난 천재성을 감추고 스스로 미치광이 행세를 하며 살았다. 말년에 출세를 권하는 이에게 보낸 그의 편지글을 보면 천재의 운명을 버리고 광인의 삶을 살아야 했던 그의 속마음을 읽을 수 있다.
"뜻을 얻지 못하여 세상에 사는 것보다는 逍遙하며 한평생을 보내는 편이 나으니 천 년 후에 나의 속뜻을 알아주기 바란다."
그러나 김시습이 아무리 미치광이 행세를 한다고 하더라도 타고난 자질을 모두 버릴 수는 없었다. 그는 한번 읽거나 보고 기억하면 평생 동안 잊지 않았기 때문에 평소 글을 읽거나 책을 가지고 다니지 않았는데도 고금의 문헌과 서적들을 꿰뚫지 않은 것이 없어 다른 사람의 질문을 받으면 대답하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일찍이 유학은 물론 불교에도 해박했던 율곡은 김시습이 "유가의 본뜻을 크게 잃지않으면서도 선가(禪家:불가)와 도가의 대의를 깨우쳐 그 병통의 근원을 탐구하였다. 선어(禪語:禪文의 말)짓는 것을 좋아하여 그 현묘하고 은미한 뜻을 밝혀 드러내는데 막히거나 걸리는 곳이 없었다. 비록 학문에 깊은 노스님과 명망 높은 승려들도 감히 그의 말에는 항거할 수 없었다."고 밝히고 있다.
특히 김시습은 가슴에 가득 쌓인 비분강개한 마음을 풀어낼 길을 찾지 못하자 풍월(風月), 운우(雲雨), 산림(山林), 천석(泉石), 궁실(宮室), 의식(衣食), 화과(花果), 조수(鳥獸) 등 세상 만물은 물론이고 인간사의 시비(是非), 득실(得失), 부귀(富貴), 빈천(貧賤), 사병(死病), 희로(喜怒), 애락(哀樂)이며 성명(性名), 이기(理氣), 음양(陰陽), 유현(幽현)에 이르기까지 유형(有形)이든 무형(無形)이든 가리지 않고 말로 옮길 수 있는 것이면 모두 글로 나타냈다.
율곡은 이 때문에 김시습의 글을 "물이 용솟음 치고 바람이 일어나는 것과 같고 산이 감추는 듯 바다가 잠기는 듯하다가 신(神)이 선창하고 귀신이 화답하는 듯해 보는 사람이 그 실마리를 종잡을 수 없게 하였다."고 하였다.
그런데 가슴 가득 쌓인 울분을 풀어내기 위해 글로 나타내고 드러낸 세상 만물 중에서도 김시습이 특별히 좋아했던 것은 '매화'와 '달'이었다. 김시습은 이 두 가지 사물을 취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매월당(梅月堂)'을 자신의 호로 삼았다.
매화와 달은 김시습의 삶과 사상 편력에서 남다른 의미를 갖고 있다. 초봄 찬바람과 추위 속에서 맑은 향기를 풍기며 홀로 꽃을 피우는 '매화'는 선비의 절개를 상징하는 유가의 (儒家)기호이고, '달'은 깨달음 또는 해탈(解脫)을 상징하는 불가(佛家 :禪家) 의 기호이자 궁극적인 진리에 도달하는 도가(道家)의 대도(大道)를 표상하는 기호이기도 하다.
앞서 율곡이 말했듯이 김시습은 유가와 불가와 도가에 모두 통달한 사람이었다. 또한 율곡은 김시습이 "마음은 유교에 있고 행적은 불교를 따라" 세상 사람들이 해괴하게 생각했다고 적고 있다. 따라서 매월당(梅月堂)이라는 호에서 우리는 유가와 불가와 도가를 통섭(統攝)했을 뿐만 아니라 내면과 행동에서 유가와 불가와 도가를 하나로 융합했던 김시습의 고고한 경지를 들여다보게 된다.
그는 죽을 때까지 자신의 뜻을 단 한 차례도 어기지 않았으며, 간혹 세속의 권력이나 이욕(利慾)에 몸담기를 권유하는 사람이라도 만날까봐 더욱 미치광이 행세를 자처했다. 그의 기이하고 괴벽한 행동은 마치 세상이 미쳤는데도 멀쩡한 정신으로 사는 세상 사람들을 조롱하는 듯 했다. - 글쓴이 : 한정주 (역사평론가) -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
용장사터의 三層石塔과 石造如來座像을 본 다음 꼭 찾아가는 곳이 있다.
七佛庵 뒤 수직 절벽에 있는 神仙庵磨崖普薩半跏像이다.
매월당도 금오산실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이 마애불을 자주 찾아오지 않았을까!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 (보물 제199호)
높이 1.4m 되는 보살상은 머리에 삼면보관을 쓰고 오른손에 꽃가지를 들었다.
오른발은 의자 아래로 내려 연화대를 밟고 반가좌를 하고
두 눈을 지그시 감은 채 구름 위에 앉아 있다
金時習의 초상화에 대하여
'梅月堂詩四遊錄'에 수록된 김시습의 초상 판화 모각본과 '自寫眞讚'
17세기 초에 간행된 <매월당시사유록(梅月堂詩四遊錄)>에 수록된 김시습의 초상화는 공수(拱手) 자세에 수염을 기르고
머리를 위로 쓸어 올리고 있어 얼핏 보면 조선시대 유학자의 초상화 같다. 하지만 이 그림의 원본은 승려의 모습이었다.
아랫 글은 초상화 윗머리 '자사진찬(自寫眞讚)'에 적혀있는 찬시(讚詩)이다. (자사진은 자화상(自畵像)의 뜻임)
부시이하우어해동 俯視李賀優於海東 : 이하를 내리깔아 볼 만큼 해동에서 최고라고들 말하지
등명만예어이숙봉 騰名瞞譽於爾孰逢 : 격에 벗어난 이름과 부질없는 명예 네게 어이 해당하랴
이형지묘이언대동 爾形至渺爾言大侗 : 네 형용은 아주 작고 네 말은 너무도 지각없구나
의이치지구학지중 宜爾置之丘壑之中 : 마땅히 너를 두어야 하리, 골짜기 속에
매월당 김시습(1435~1493)은 단종 폐위 이후 승려가 되어 방랑하면서 시문을 짓고 '금오신화'를 남긴 당대의 천재였다.
말년에 충남 부여군 무량사에서 은거하다 세상을 떴다. 사람들은 김시습의 재능을 당(唐)나라 시인 이하(李賀·790∼816)에 견주었다. 이하는 27살의 생애 동안 주로 염세적(厭世的)인 시를 썼는데, 옥황상제(玉皇上帝)가 백옥루(白玉樓) 낙성 때
기문(記文)을 쓰게 하려고 불러갔다는 천재적인 시인이었다. 김시습은 자신을 이하(李賀)보다 뛰어난 시인이라 말함은
격에 맞지 않는다고 했다.
(참고)
<梅月堂詩四遊錄>은 운 기자헌이 김시습의 文集 <梅月堂集> 중에서, 그가 청년시절 楊州의 수락 (關西), 海上의 설악(關東), 수춘의 사탐(湖南), 月城의 금오(金鰲) 등 네 곳을 두루 방랑하면서 실의와 울분을 담아낸 시편만을 뽑아 엮은 책이다. 구성은 (1) 유관서록(遊關西錄), 1458년. (2) 유관동록(遊關東錄), 1460년. (3) 유호남록(遊湖南錄), 1463년.
(4) 유금오록(遊金鰲錄), 1465~1471년. (5) 별집(別集)으로 되어있다.
무량사에 있는 김시습의 영정(보물 1497호)
현재까지 전해지는 김시습 초상화들은 모두 승려라기보다는 유학자의 모습에 가깝다. 가장 유명한 충남 부여군 무량사 소유의 영정(보물 1497호)은 절에 남아 있는 것이지만 김시습이 유학자의 평상복을 입고 사대부 영정의 특징인 공수(拱手-두 손을 맞잡는) 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검은 갓과 귀 사이의 머리카락은 위로 쓸어 올려 있다. 또 기행시집 '매월당시사유록'에 실린 김시습 초상 판화 모각(模刻-조각을 본떠 새김)본, 그리고 송시열 가문의 후손이 최근 공개한 17세기 문인 김수증의
김시습 초상화 이모(移模-그림을 본떠 그림)본이 모두 유학자의 모습이다.
그러나 이 같은 김시습 초상화들의 원본은 원래 승려의 모습이었으며, 16세기 후반부터 유학자들의 정치적 의도 때문에 김시습 초상화들이 점차 승려에서 유학자의 모습으로 변한 것이라고 양승민 선문대 중한번역문헌연구소 연구교수가 주장했다. 양 교수는 최근 한 연구모임에서 논문 "매월당 김시습 초상의 개모(改模) 과정과 그 의미"를 발표했다. 그는 각종 고문헌 기록과 현전하는 김시습 초상화들을 추적한 결과 "16세기 후반부터 유학자들이 김시습을 절의의 화신으로 만들어, 충의를 숭상하는 유학자들의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했다. 이 과정에서 김시습의 초상화마저 승려에서 유학자의 모습으로 바뀌었다"고 주장했다.
매월당의 노소(老少) 초상화
'매월당집'에 "스스로 노소이상(老少二像)을 그렸다"는 문구가 있는데, 이 老少의 초상화가
매월당 스스로가 그린 자화상의 원본이 아니라는 분석이 설득력 있다
실제로 '매월당시사유록'에 전하는 김시습의 '자사진찬(自寫眞贊)'을 통해 김시습이 스스로 그린(自寫) 것은 진(眞-대개 승려 초상화를 일컬음), 즉 승려의 모습임을 추정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승려 초상의 핵심인 염주를 들고 있는 김시습의 초상화는 발견된 적이 없다. 양 교수는 또 17세기 소론의 영수였던 윤증의 문집 '명재유고'에서 윤증이 송시열 등에게 보낸 편지를 주목했다.
"김시습이 무량사에 남긴 화상이 있는데....그 화상이 흐릿해서 이름난 화사(畵師) 이징을 불러 그 초상을 다시 모사하고 새롭게 꾸몄다.....초상의 모습이 중의 형상이니..."
파평 윤씨 집안에서 당대 최고의 명성을 떨치던 궁중화원 이징을 시켜 김시습 초상화를 다시 그리게 한 것이다. 무량사의 김시습 자화상 원본과 이징의 이모본은 현재 전하지 않는다. 양 교수는 "현전하는 보물 무량사본은 김시습 자화상이 원형 그대로 이모(移模)된 것이 아니다. 유학자 모습으로 바뀐 초상화들이 승려 모습의 원본을 밀어낸 것이다"라고 분석했다.
매월당의 필적
첫댓글 '여혜당 일기' 들어 올 때마다 찬탄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이 글도 매월당의 진 면목을 알 수 있어 넘 좋았습니다.
'뜻을 얻지 못하여 세상에 사는 것 보다는 소요하며 한 평생을 보내는 편이 나으니 천년 후에 나의 속 뜻을 알아주기 바란다.'
라고 말한 매월당의 獨也靑靑한 드높은 기개가 5백여년이 지난 지금 그 '속 뜻'을 드러내는 것 같군요.
'꿈꾸다 죽은 늙은이' 나 죽어 묘비명으로 남기고 싶습니다.
穀雨 무렵 우연히 매월당의 시 '작설'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날부터 매월당의 茶詩를 찾아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떠돌아다니며 살던 천재요 생육신이라는 정도로만 알고있던 매월당이었습니다.
이제서야 그의 진면목을 대면하면서 부끄럽기 한이 없었습니다. 시골에 내려와 머무는동안
몇 가지를 조사해서 정리해보았는데, 읽어 주시고 말씀까지 남겨주시니 더없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