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실에는 ‘2007 대구마라톤대회’ 풀 코스를 완주한 사진이 걸려 있다. 오른손을 선서하듯 들고 왼손엔 선글라스를 쥐고 활짝 웃으며 결승선을 향해 달리는 내 옆에서 아내가 손뼉을 치며 따라 들어오는 사진이다. 사진의 왼쪽 가슴에는 유니폼과 유두의 마찰로 인해 흘린 피가 검붉게 보인다. 대회 공식 사진사가 찍은 것으로 힘들거나 무기력해질 때 보면 힘이 솟는 사진이다.
마라톤은 2004년 ‘제1회 성주참외 전국하프마라톤대회’ 10km 종목부터 시작했다. 어린이날 가족 나들이를 겸해 마라톤 대회에 참가했다. 성주중학교에서 열린 마라톤 행사에는 바르셀로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황영조가 대회 축사와 함께 마라톤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성주의 푸른 들을 가르며 마시는 해맑은 공기에는 참외의 달콤함이 실려 있었다. 생애 첫 마라톤이라 긴장해서인지 힘들지 않게 아내와 아이들이 기다리는 결승선을 통과할 수 있었다.
“아버지! 황영조 같아요”
“당신! 살아있네!” 마라톤으로 졸지에 괜찮은 아버지와 가장이 되어버렸다.
가을에는 동생들과 함께 경산 마라톤대회에 참가했다. 마라톤을 제일 먼저 시작한 울산 동생은 풀 코스, 경주 동생과 나는 하프 코스에 도전했다. 무리하지 않기 위해 경주 동생과 보조를 맞춰 뛰었다. 10km 종목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코스 운영이 어려워 포기하고 싶었지만 같이 뛰는 동생과 결승선에 기다리고 있을 가족을 생각하며 이를 악물고 뛰었다.
“아버지 힘!, 큰아버지 힘내요!”
결승선에서 소리치는 아이들 덕분에 손을 흔들며 여유롭게 들어올 수 있었다. 마라톤을 마치고 둘러앉아 점심을 먹으며 마라톤 무용담과 건강한 삶에 대해 논했다.
그 뒤에도 동아일보 경주 오픈마라톤대회와 경주 벚꽃마라톤대회, 울산 마라톤대회에 참가하면서 풀 코스 도전에 필요한 경험을 쌓아나갔다. 아내도 2005 울산마라톤대회 10km 종목을 시작으로 2007 동아일보 경주국제마라톤대회 하프 코스를 완주했다. 아내는 “당신이 하는데 나는 왜 못해!”라는 오기로 완주했다고 한다.
버킷리스트 일호인 마라톤 풀 코스 완주에 도전하기로 했다. ‘2007 대구마라톤대회’ 풀 코스 종목에 참가를 결정하고 필요한 사항을 준비했다.
마라톤에 맞게 체중을 조절하고 연습 시간을 늘렸다. 평일은 이틀에 하루씩 경기공 운동장 25바퀴를 천천히 돌면서 근육과 호흡을 조절한다. 토요일에는 신천둔치의 산책길을 이용해 달린다. 수성중학교 진입 다리인 용두교 밑에 차를 세우고 신천 물길을 따라 금호강 합류 지점으로 달린다. 신천에 놓인 다리 밑을 달리며 이름을 확인하고 연결 지역을 생각하다 보면 숨이 차오르는 줄도 모른다. 두산교를 지나 상동교, 중동교, 희망교, 대봉교, 수성교, 동신교, 신천교, 신성교, 칠성교, 경대교, 도청교, 성북교, 침산교를 지나면 신천은 금호강과 합류한다. 금호강을 끼고 잠시 달리면 서변대교가 나온다. 서변대교 밑에서 한숨을 돌리며 마시는 한 모금의 물은 꿀맛이다. 봄바람에 실려 오는 금호강의 청량한 바람에 땀을 식히고 다시 출발점을 향해 달린다. 출발점에 돌아오면 약 20km를 달린 샘이 된다. 신천둔치는 대구 시민의 휴식처이고 여가를 즐기는 공간이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 걷는 사람, 달리는 사람, 멍때리는 사람 등 각양각색의 시민들이 휴일을 즐긴다.
4월 15일 일요일 오전 8시에 일만 명이 넘는 참가자가 월드컵경기장을 출발했다. 아내는 10km, 나는 42.195km에 도전했다. 풀 코스는 월드컵경기장을 시작으로 관계 삼거리, 황금아파트 네거리, 황금네거리, 신천동로를 따라 달리다가 산격대교를 지나 서변동에서 반환점을 돌아 다시 신천동로, 황금네거리, 두리봉 터널, 연호네거리를 거쳐 월드컵경기장으로 돌아오는 코스이다.
미리 연습한 덕분에 반환점을 지나 신천동로까지는 체력적으로 여유가 있었으나 두리봉 터널을 지나 연호네거리에 들어섰을 때는 정신이 몽롱했다. 달리는지 걷는지 느낌이 또렷하지 않았다.
“30분 이상 달리기를 하면 더 이상 달려도 지치지 않을 것 같고 계속 달리고 싶은 상태인 러너스 하이”와는 거리가 멀었다. 월드컵삼거리를 지나니 경기장이 보였다. “결승선에는 아내와 이웃 절친들이 기다리고 있겠지, 멋있게 결승선을 통과해야 하는데”라는 생각이 들면서부터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달리기를 멈추고 주저앉아 종아리와 허벅지를 주무르며 결승선을 통과하기 위한 힘을 축적했다. 완주가 목표이기에 같이 달리던 주자들이 쑥쑥 지나가도 신경 쓰지 않았다. 삼분 정도 쉬다가 경기장 네거리를 돌아 가벼운 걸음으로 월드컵경기장에 들어섰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표정으로 멋있게 결승선을 통과 했다. 아내와 이웃 절친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반겼다.
“그래 이 맛이야!”
마라톤을 좋아하는 동생들을 따라 달리다 보니 풀 코스를 완주하게 되었고 아내도 하프 코스까지 완주했다. 좋은 취미는 가족 간에도 전염되나 보다.
나이가 들면서 테니스와 마라톤에서 기타와 골프로 취미활동을 바꿨다. 아내는 색소폰과 라인댄스를 배우고 있으며 색소폰은 집에서 연습할 수 없기에 연습실을 정해 취미생활을 즐기고 있다. 좋아하는 노래를 공유하고 기타와 색소폰 악보를 보며 같이 노래하는 재미도 있다.
마라톤 풀 코스를 기준으로 우리 부부의 삶은 어디까지 왔을까? 우리에게도 러너스 하이와 같은 시절이 있지 않았을까?
2025.2.15.(45)
첫댓글 대단합니다. 마라톤 풀코스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닌데, 수필도 누구나 쓰지만 아무나 쓰는 글이 아닙니다. 열심히 사시는 모습에 응원과 격려를 보냅니다. 훌륭한 작가가 되시기를 기대합니다.
주희쌤 마라톤 완주 대단합니다. 가족이 같은 취미를 가지고 함께 함은 서로에게 힘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