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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 오늘은 병원에 한번 가보지 그래..?"
남편이 달력을 흘끔 올려보고 콩나물 국에 숟갈을 담궜다.
방금 생각났다는 재스츄어로 그 나름대로 나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 최선을 다 한 것이겠지만, 나는 그런 그의 배려에 감사하면서도 왠지 밥맛이 떨어져 계란말이 접시와 김을 놓은 접시 사이에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아직 아무 연락 없었잖아요."
최대한 누르고 누른 목소리가 여전히 한옥타브 높았다.
이에 남편도 뒤따라 수저를 내려놓으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는 자신의 의사를 밝히기 전에 먼저 내 표정부터 살피는 세심한 면이 있었는데, 그의 그런점이 나로 하여금 표정마저 편히 일그러뜨리지 못하는 불편을 준다는걸 나는 한번도 그에게 얘기할수 없었다.
"그래도 한번...가봐."
아침부터 나에게 부담을 주는것이 미안했던지, 그는 의자에 걸쳐두었던 상의를 집어들고 서둘러 일어섰다.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눈에 그의 컵이 들어온다.
식후엔 물한잔을 모두 비우고 일어나는 그가 컵에 물을 한가득 남겨둔채 집을 나섰다.
바보같은 사람-.
바보같은 남편과 결혼한지 4년이 지나도록, 축복된 결혼의 결정체라 불리우는 아이는 좀처럼 우리에게 허락되지 않았다. 부부관계엔 아무런 문제가 없었고, 우리 둘중 누구도 피임약이나 기구따윈 사용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아이가 생기지 않자, 아빠가 되는게 소원이라던 그는 점점 불안해했고,
우린 병원을 찾았다.
-자궁후굴증-
말 그대로 자궁이 뒤로 젖혀져 있는 상태로 임신이 불가능 하다는것이 의사의 진단이었다.
의사의 유감스런 표정을 보았을때, 나는 문득 7년전, 봉촌동의 어느 점쟁이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몸도 마음도 뒤 틀려 있구만.
갖고 싶은 것도, 주고 싶은것도 마음대로 못할 팔자야...."
늙은이에게 복채를 좀 더 두둑히 줄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어 피식 웃음이 샜다.
다시한번 찾아가면 그 늙은이는 또 어떤 끔찍한 말을 할까.
남편은 아직 아이를 포기하지 못한듯, 가능성을 찾고 있다.
모래사장에서 다이아몬드를 주웠다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나 보다.
그러나 오늘은, 요행을 기대하는 그에게도 남은 희망이 점점 소멸하는지,
나오지도 않은 검사결과를 알아보라는 그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나는 외동딸이다.
나의 어머니는 태어날때부터 온갖 잔병치례는 다 치뤄야 하는 체질을 타고 나셨다 했는데,
서른의 나이에 힘에 겨운 임신을 하셨고, 결국은 나를 낳다 돌아가셨다.
당신의 딸에게 똑같은 멍에를 지워주시고.
나는 그 사실을 남편에게 말하지 않았다.
어머니의 전철을 밟는다 해도 나는 아무 미련 없을테고, 태어날 내 아이도 나처럼 자라고 늙는 날이 와서 자신을 버리고 먼저 죽어버린 어미를 이해하고 동정하게 되는 날이 올테니.
혼자 있는 시간엔 유난히 시계가 늑장을 부린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세상의 몇퍼센트 일까.
나는 혼자 있는것이 시간을 버는 일처럼 느껴져 뿌듯할때가 많다.
아침이 머뭇머뭇 정오를 만나러 가는 시간-. 강아지도 키울수 없는 아파트와, 다섯살부터 학원에 보내야 하는 요즘 엄마들의 교육열과, 살인이 난다해도 TV를 끄지 않을 도시의 무관심이 나는 맘에 들었다.
환기를 위해 베란다 문을 열고, 리모콘으로 오디오를 튼후 미뤄뒀던 설겆이를 하기위해 고무장갑을 꼈다.
"띵동. 띵동."
설겆이를 마쳐갈 무렵, 벨소리가 들렸다.
시계를 올려다 보니 세탁소에서 배달올 시간이라기엔 조금 일렀고, 만약 있다면 친구 은숙이밖에 없을텐데, 그녀는 창원 시댁에 가있는 상태였다.
"누구세요...?"
구멍이 났는지 물이 새어들어가 잘 벗겨지지 않는 한쪽 고무장갑을 그대로 한팔에 낀채 현관문을 열었다.
"네, 앞집 702호에 새로 이사온 사...."
나는 벗어쥐었던 고무장갑 한짝을 요란하게 바닥에 떨어뜨렸고,
문앞에 서있던 여자는 은박접시에 담긴 시루떡을 고무장갑위로 이윽고 떨어뜨렸다.
그리고 아주 긴....잠시동안 침묵만이.
"안녕...잘..지냈어..?"
나만 홀로 정적속에 휩싸인듯한 착각에 빠져들고, 귓가에선 이문세가 나지막히 노래했다.
---어느 지나간 날에 오늘이 생각날까
그대 웃으며 큰 소리로 내게 물었지
그날은 지나가고 아무기억도 없이
그저 그대의 웃음소리뿐.....
그리고. 혼자인 날위해 속도를 늦춰주던 시계바늘이 5년전을 향해 거꾸로,
그러나 걷잡을수없이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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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쪽은 '이주현', 그리고 이쪽은 내 친애하는 후배 '정주희'.
서로 인사들 해."
만약에 그런 날이 온다면, 그녀를 처음 만난 날을 어떻게 묘사해야 할지 난 늘 고민했었다.
영화처럼 눈앞이 하얗게 변하며 그녀만이 시야에 머물렀던것도 아니었고, 아찔한 충격으로 운명의 습격을 받아 다리가 휘청거린것도 아니었던, 그저 그런 무미건조한 첫 만남을 난 어떤식으로든 미화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를 처음 본 날은 오랫동안 동방 활동을 하며 알아왔던 언니가 '여성전용 카페'를 개업한 날이었다.
그보다 조금더 자세히 접근해 본다면, 조금은 긴 단발머리 스물넷의 내가 작은 선인장 화분 두개를 들고, 햇살이 정면으로 비추는 자리에 눈을 찌뿌린채 잘 보이지 않는 상대를 바라보고 섰고, 그녀는 윤기있는 검정 생머리로 얼굴을 반쯤 가린채 '안녕' 이라며 한손에 들고있던 커피잔을 내려놓았을 것이다.
카폐안은 선배가 몸담고 있던 모든 모임이나 인터넷 싸이트 동호회 등지에서 축하하러 와준 손님들과 화환들로 북적댔고, 96년의 겨울에는 그다지 흔히 들리지않던 이문세가 '그녀의 웃음소리뿐'을 부르고 있었을 것이다.
빨간코트에 붙은 머리카락을 떼어주고 싶은 생각이 들게했던 긴머리의 '주희'를 처음본 그날,
나는 어정쩡히 손들어 햇살을 가리고, 그녀는 내게 세련된 미소 지으며 '안녕?'이라고 했을것이다.
"이문세 좋아해?"
그녀는 처음부터 내게 말을 놓았다.
선배에게 소개를 받을때 동갑이라고 들은 기억은 있지만, 초면에 말을 놓기가 불편해 머뭇거리던 나와는 달리 그녀는 마치 꼬마를 다루는듯한 말투였다.
"네..."
나는 내자신이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보다 뻘쭘하고 엉성하게,
삼겹살집에 잘못 찾아든 칵테일 처럼 눈치를 보고 있는것이 맘에 들지 않아, 더 나아가 화가나, 자리를 뜰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는 무엇이 그리 재밌는지, 'LOVE'라는 알파벳 네개가 돋을새김으로 새겨진 갈색 커피잔을 만지작 대며 내 표정을 유심히 관찰했다.
누구에게나 주파수가 맞지 않는 사람은 있다.
이를테면, 아무리 신경써서 박자를 맞추려고 해도 같이 걷다보면 꼭 서로 부딪히게 되는 사람들처럼 말이다.
나는 그녀 앞에서 왠지 제대로 숨을 쉬기도 어려웠고, 시선을 한곳에 고정시키기 조차 망설여졌다.
그녀는 나와는 다른 파장을 지닌 사람이란 생각이 들자, 나는 당장에라도 앉아있는 의자에서 가시라도 돋아날것 같은 불안감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언니 축하해. 나중에 다시 들를께."
작은 선인장 화분 두개를 선배언니의 두손에 건네주며 나는 서둘러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까페를 개업한 선배언니(인영)을 포함하여 여러 여성단체를 접하며 많은 레즈비언들을 만나왔고, 그들과 함께함에 있어 아무런 불편함이나 이질감을 느껴본적 없었지만, '주희'라는 여자의 훑는듯한 시선은 왠지 불쾌했다.
나는 동물원의 원숭이도 그렇게 쳐다본적이 없었다.
"나 왠지 쟤랑 연애하게 될것 같아, 선배."
무거운 가방을 어깨에 둘러메고 나무 바닥을 소리내며 걸어가 출입구에 다다렀을즈음, 등뒤의 그녀는 그렇게 말했었다.
" 나 왠지 저 애 사랑하게 될것 같아."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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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지냈니...?"
믿기 어려운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한가로운 오전 10시, 오디오에선 이문세의 노래가 나오고, 느즈막히 깨어난 윗집 아기가 자지러지게 울어대는, 아무것도 일상에서 벗어나지 않은 평범한 수요일.
그런데 그녀가 내집 쇼파에 앉아 '잘 지냈니'라고 나에게 묻고 있다니.
나는 그녀를 처음보던 날처럼 그렇게 바보같이 앉아 한쪽볼을 꼬집는 멍청한 짓을 해보이긴 싫었다.
"그러는 너는...?"
우습게도 지금 그녀는 예전의 나와같은 단발머리를 하고 있고,
나는 그녀의 긴 검은 머리를 하고 있었다.
"머리가...많이 자랐네..?"
그녀는 커피잔을 달그락 내려놓으며 웃었다.
나는 그녀가 내려놓는 커피잔을 바라보다 가느다란 왼손 약지에서 알이 굵은 다이아몬드 반지를 찾아냈다. 내가 찾은것이 무엇인지 알아챈듯, 그녀는 왼손을 쿠션 밑으로 슬쩍 숨기고는 고갤 돌리며 집안을 휭..둘러보다 TV위 벽에 걸린 액자에서 시선을 멈추었다.
"신랑이니...?"
그녀에게서 잠시 흘러나온 미소가 '비창'이라고 착각하는 것은 5년전의 실수를 반복하는 짓이라고 생각하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유없이 그녀를 다시 바라보기가 겁이나 고개를 숙이자, 나의 못난 손이 눈에 들어왔고, 나는 그제서야 퍼뜩 지금 내 모습이 어떨지 몹시 불안해졌다.
무작정 길러버린 머리가 거성하게 자라 길이가 맞지않는 소매처럼 우스꽝스럽고,
잘 다듬지 않은 눈썹이 송충이처럼 징그럽게 눈위를 기어다니고 있을것같았다.
어제 꺼내입은 스웨터에는 조금전 설겆이을 하다 묻은 세제얼룩이 고스란히 배꼽 부분에 남아있고, 언제나 불만이었던 못생긴 손톱에 메니큐어를 칠하지 않은것이 무척 후회스러웠다.
얼굴 군데군데에 피어났을 기미를 그녀가 발견할까봐 나도 모르는 사이 얼굴이 붉어지는데,
그녀가 내맘을 읽기라도 한듯.
"여전히...이쁘네..."
나는 더더욱 붉어진 다섯장 매화꽃잎이 되어 그녀 발앞에 낱낱이 떨어졌다.
이미 다 늙어버린줄 알았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망치로 때려도 균열하나 없을것처럼 딱딱이 굳었던 심장에, 따스한 봄 햇살이 얼음을 녹이고 시냇물을 흐르게 하듯, 맑고 뜨거운 피가 다시 고여들어 큰 소리로 고동치게 하고 있었다.
그 모든게 그녀만이 할수 있는 마술이었다.
"왜...."
---"엄마~~~~~~!!!!!!"
문 밖에서 낭랑한 여자아이 목소리가 울렸다싶더니 어느새 주희가 쇼파에서 벌떡 일어나있다.
"우리 애야. 가봐야겠다. 커피 잘 마셨어...."
---"엄마~~~~~"
그녀가 현관문을 열고 나가자 아이의 울먹임소리가 멎었다.
그리고 뜀박질 하던 나의 심장도 그자리에 털썩 주저 앉았다.
"왜...하필이면 이리로 왔니. 왜 하필이면 702호니..."
나는 하려던 말을 그녀가 열고 나간 현관에게 대신 맡기며,
그자리에 나의 심장과 함께 주저 앉아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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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은 다녀왔어?"
왼발 구두를 채 벗기도 전에 남편은 오른팔로 신발장을 의지하고 선채 묻는다. 결과가 궁금해서 버스정류장부터 뛰어온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것은, 그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숨 돌리듯 빛났기 때문이다.
"못갔어요. 뜻밖의 일이 좀 생겨서..."
그녀의 등장은 단지 '뜻 밖의 일' 수준에 머물지 않고, 잔잔했던 일상의 기류를 휩쓸어 폭풍처럼 내안을 헤집고 파괴해버릴 '대 재앙'에 가까웠다.
시루떡을 들고 미소짓는 그녀를 본 순간, 그녀가 나간후 내집문이 닫히고 702호의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은 순간, 나는 그 재앙을 예측했다.
"뜻밖의...일이라니..? 무슨 일이라도 생긴거야?"
아직. 아직은 아무일도 없어요. 나는 속삭였다.
태풍이 다가오고 있다고 알린들, 내가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은들, 우리가 자연과 같은 위대한 힘에 대응해 할수 있는일이 무엇일까.
"친구가...앞집으로 이사를 왔어요."
나는 친구란 단어를 사용함에 앞서, 조금 더 망설이고 숙고했어야 할지 모른다.
"친구가????? 아니 그게 정말이야? 허허, 누군데..?"
그는 침실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을 생각도 않고 상의를 벗어 왼팔에 걸친채 벌써 10분째 쌀을 씻고있는 내게서 대답을 기다렸다.
"주희라고...있어요."
아. 저 이름을 입에 담기 전에, 나는 단단히 마음의 준비를 했어야 했다.
"주희라....아!!! 당신 옛날 지갑속에 있던 그 친구 말이지?? 멀리 떠났다고 하지 않았었나???"
나는 그녀의 존재가 다른이의 입을 통해 형상화 되는것을 견딜 자신이 있는지, 몇번이고 스스로 물을 필요가 있었다.
그녀가 멀리 떠났던것은 사실이다.
어느날 더이상 내손에 닿지않는 곳으로 머리카락 보일라 숨어버렸던 것도 사실이고, 그 후로 내 맘에서 필사적으로 밀어내려 노력했던것도 사실이니.
그러나 5년전의 사실을 남편으로부터 재확인 한후, 결국 나는 10분 동안이나 씻어온 쌀바가지를 엎어버리고 말았다.
"당신 괜찮아???!!!"
남편은 웃옷을 거실바닥에 아무렇게나 던져버리고, 쭈그린채 쏟아진 쌀을 손으로 바가지에 도로 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한손으로 이마를 짚은채 그를 멍하니 내려다 보며, 또 한번 기억의 시침이 몇천바퀴를 역회전해 과거로 뒷걸음 치는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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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세요"
그녀로부터 예상밖의 전화를 받은 날은, 겨울비가 눈치없이 연인들의 낭만을 무너뜨리던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애인없고 의리투철한 친구 하나 없으면 나랑 영화나 보는게 어때?"
그녀가 내 전화번호를 알아낸 경로는 의심할 여지도 없이 인영선배였을테고, 크리스마스날 나같은 안면부지한 사람과 영화를 보자는 이유따윈 무시하더라도, 나는 그녀와의 만남이 껄끄러웠다.
퀴어 (선배는 까폐를 '퀴어'라 이름지었다.)에서의 첫대면때 그다지 좋은 인상 (거부감에 가깝다 하겠다.)을 남기지 않았던 그녀를 만나 일년에 하루 있는 날을 악몽으로 만들기는 싫었다.
"미안하지만, 선약이 있어요."
그리고 다음에 그녀가 한 말은, 그녀가 어떤 종류의 사람이고, 내가 그 제멋대로인 스텝을 맞춰주기 위해 얼마나 많은 '발바꾸기'를 해야했을지를 포괄했다.
"그럼 취소해. 날 만나는게 훨씬 재밌을테니까."
마치 훈련이 잘 된 명견처럼 "네.."라고 대답해버리고 머릴 쥐어뜯으며 종로로 가는 지하철을 탄것은, 내가 얼마나 한심하리만치 쉬이 휘둘리는 인간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 라고 할수 있을 것이다.
그녀를 두번째 만난날은, 요란하던 캐롤마저 잠재운 겨울비가 거리를 얼룩지우던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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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약속을 잡아놓고 20분이나 늦게 나타나서는 전혀 미안하지 않은 표정으로 긴머리 한웅큼을 귀에 넘겨 꽂으며 하는 말이란.
그녀에게 있어 모든 표현의 시작은 '안녕'이 아닐까 의심하게 될 만큼 그녀는 그말을 자주썼고, 살짝 허리를 굽히고 상대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인사하는 모습은 왠지 그녀와 잘 어울렸다.
특별히 신경을 기울이지 않으면 보통사람들은 놓치고 말 일이지만, 나는 그녀가 '안녕'이라고 말할때마다 손을 허리위로 살짝 올려 어설프게 두어번 허공을 간지르는 듯한 모션을 취하는것을 캐치할수 있었다. 처음으로 그녀가 귀엽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었다.
겨울비 치고는 빗방울이 꽤 굵었던걸로 기억한다.
그녀를 만난 이브 저녁 7시쯤엔 종로거리가 인파에 터져나갈듯 붐비어야 정상임에도, 그날은 스치며 빗방울을 떨어뜨리는 우산 몇개 만나지 못했다. 여러모로 예사롭지 못한 날이었다.
"우리 우산 한개 쓰지, 뭐."
그녀는 마침표도 미처 따라잡지 못할만큼 잽싸게 말하고 순식간에 내 우산 밑으로 파고들어왔다.
만나서 아직 한마디도 하지 않은 내 우산을 같이 쓰자하는 뻔뻔함과, 정말로 냉큼 남은 우산 반쪽을 차지해버리는 그녀가 나는 마냥 신기할 따름이었다.
"원래 이렇게 부침성이 좋아...?"
내가 처음으로 그녀의 동의없이 (그녀도 내게 그랬지만) 말을 놓으며 한 말이었다. 그때 당시엔 그점에 대해 스스로를 굉장히 대견해 했던것 같다.
그녀는 나를 쳐다보고 크게 웃었다. 의외였던 모양이다.
웃는 그녀의 모습을 자세히 보니, 눈이 큰 그녀는 입도 컸다.
손으로 입을 가리지 않고 웃는 그녀의 입술속으로, 검게 때운 자국 하나 없는 그녀의 치아가 보였다.
나는 왜 그녀의 웃음소리나 눈가에 잡히던 주름의 매력보다 그녀의 이빨에 더 관심을 두었는지 모르겠다. 그녀는 그저 모든게 신기한 존재였다. 그녀의 작은 하나도 결코 내게 평범함으로 머무는 일이 없었다.
"밥부터 먹자. 이리와"
마치 허물없는 친구사이처럼 내 오른팔을 잡아당겨 그녀가 이끈곳은 보기에도 십수년은 됐음직한 가락우동 집이었다.
"아줌마, 우동 둘이요~!"
두번째 만난 사람과, 한마디 상의도 없이 저녁메뉴를 결정하고 제멋대로 주문까지 마쳐버리는 무례함에 대해 불쾌함을 느끼기도 전에 그녀가 선수를 쳤다.
"오늘은 이걸 꼭 먹고 싶었고, 너에게도 꼭 먹여주고 싶었어.후후"
그리고 그녀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옥수수차를 홀짝이며 검고 윤기흐르는 긴 머리가 그녀의 얼굴 반쪽을 가리도록 내버려 둔채 나를 바라봤다. 문득, 큰 눈을 지닌 사람은 경계해야 한다는 어릴적 아버지가 해주셨던 말씀이 떠올랐다.
-'주현아. 눈이 큰 사람들은 그 큰 눈에 사람의 영혼을 홀려 가두는 재주가 있단다. 그러니 너무 깊게 들여다 보아선 안돼. 네 영혼을 훔쳐다 눈안에 넣어버리는 수가 있거든. 너희 엄마도 그런 사람들 중의 하나였어.'
나는 내 영혼의 강인함을 테스트 해보려는 심산으로, 그녀의 큰 눈을 직시하며 마음속으로 주문을 외웠다. '내 영혼은 네 눈따위엔 지지 않아...' ' 내 영혼은 그 속엔 갇히지 않아..'.
그러나 이미 그 녀석은 오래전부터 이 예측불허의 혼돈을 두려워해온것일까.
"여기, 우동 두그릇 나왔습니다"
시선을 옮기지 않고 두손으로 무거운 우동그릇을 받으려다 뜨거운 국물과 면을 다리에 뒤집어 쓰고 말았다.
"아...!"
뜨거움이나 창피함에 앞서, 나는 내가 결국 아버지 말씀처럼 그저 지름만 길 뿐인 그녀 눈에 넋을 잃었다는 것이 분해 얼굴이 달아오르고 있었다.
그때였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로 다가온것은.
그녀는 말없이 무릎을 꿇고 앉아, 내 코트 위를 냅킨으로 닦아주기 시작했다.
"아줌마 여기 우동 한그릇 더 주세요"
나는 의자에 마루인형처럼 고정된채 앉아 눈만 껌벅이며, 바지와 코트위에 형편없이 널부러진 면들이 그녀손에 닦여나가는것을 지켜볼 뿐이었다.
"돈 안들이고 세탁하려면 아무래도 우리 오늘 비맞아야 겠다. 그지?"
그녀의 큰 눈이 다시 한번 나를 향했다.
그리고 나는 아버지가 해주신 말씀이 사실이란걸 깨달았다.
첫댓글 주희가 떠난 이유가 있겠죠.....
이름에서 움찔, 제목이 맘에 들어요 ㅋㅋㅋ 재밌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