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이 안보이시면 낮 시간에 다시한번 보셔요
빈센트 반 고흐 (Vincent Van Gogh 1853-1890)
아를르의 고호의 집 1888년 9월작품
강렬한 푸름과 노랑으로 화면을 2등분하여 밝은 태양을 만끽하는 평화스러운 시골 마을의 인상을 설득력 있게 나타내고 있는 이작품은 그의 조형적인 의도가 뚜렷이 느껴진다. 고호는 1888년 5월에 아를르의 역 가까운 라마르티느 광장에 있는 노란 집을 빌려 조금씩 손을 대고 가구를 넣어서 9월부터 옮겨 살았다. 고갱을 맞이하여 그의 그 불행한 비극을 일으킨 것도 이 집이었다.
고호의 방 1888년 작품
아를르 시대에서 노란 조그만 집으로 옮겨간 후, 그 집을 예술가의 집으로, 또는 예술가들의 공동 생활 터전으로 고호는 꿈꾸고 있었다. 실내에는 그의 취향에 알맞는 몇 가지의 가구를 볼 수 있다. 이것들은 그가 의도적으로 성격이 있는 분위기로 꾸미고 싶었던 생각을 읽게하여 준다. 침대도 쇠침대가 아닌 농부들이 쓰던 건장하고 커다란 것으로 고르고, 의자 역시 무뚝뚝한 농부용의 것으로, 벽면에는 자화상을 비롯하여 수점의 그 자신의 작품이 걸려 있고,그외 가구다운 가구가 없는 소박한 침실은 고호의 성격과 가난한 아를르 시대의 생활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몽마르뜨
폭풍에 휘말린 하늘과 밭
최후의 3점의 대작의 하나로, 이것도 어두운 폭풍 속에 있는 보리밭이다
몽마르트르 언덕의 眺望
고호가 파리에 와서 클리치가(街)의 아파트에서 살면서 그리기 시작한 풍경화 속에는 마르트의 길, 언덕, 풍차 등 밝은 광선을 몸 흠뻑 받은, 몽마르트의 시리즈가 등장한다. 어두운 회색조의 풍경이 1886년부터 점차 밝은 화면으로 바뀌고, 그 다음 해에는 신인상파풍의 눈부신 밝음으로 변모하여, 이미 네덜란드의 침침한 하늘의 어두움은 모습을 찾을 수 없게 된다
생 레미의 精神病院 뜰
고흐가 입원하고 있는 생 레미의 요양소의 조망이다
아를르 요양원의 내부
밤의 카페 테라스 1888년 9월작품
두번째의 작품은 푸른 밤공기 속에 가스등 불빛에 비쳐진 카페의 바깥을 그린 것으로 파아란 별하늘이 내다 보이고 있습니다. 밤의 광장의 정경과 그 효과를 그리는 일, 혹은 밤 그 자체를 그리는 일에, 흠뻑 나는 열중하고 있습니다. ' 태양을 쫓아서 북쪽에서 남으로 남으로 내려왔고 또, 우연히도 자기를 닮은 해바라기에 열중했던 고호가 가을에 접어들면서 갑자기 밤의 광경에 열중하게 되는 것은, 인상파적인 흥미에서 로트렉 이나 드가가 밤의 광선에 열을 올리던 것과는 다른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 타는 듯이 마음의 낮을 향했던 그의 눈은 마침내 마음 속의 보다 어두운 부분 , 정신의 그늘진 부분을 향하게 되었다고 보 아야 할 것이다
아를르의 跳開橋
고호가 아를르에서 발견한 것 중에서 가장 그의 집념을 불러일으킨 모티브 중의 하나가 이 도개교이다. 아를르에서 부크에 이르는 운하에 놓여 있는 이 다리는 네덜란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런 다리에 대한 향수를 그의 마음속에 불러일으킨 것이다
별이 빛나는 밤에
생 레미에 옮겨 온 고호의 화면은 아를르 시대에 비하여 한층 침잠된 색채를 쓰고, 필치는 보다 다이내믹하게 되고 동적인 곡선의 자유로운 발전에 의한 일종의 묵시록적인 팬터치를 만들고 있다. 고호가 몽상적이거나 환상적이란 것은 아를르 시대까지의 작품에서는 그 표면적인 흔적을 찾아볼 수없었다. 그는 항상 현실에 밀착한 듯했다. 그러나, 생 레미에서의 그의 작업은 본질적인 서정을 보인다. 그는 자연이나 물체와 마음으로 통하는 일종의 주술사이기도 하며, 그 기술적인 제어력의 완성과 마음의 성취가 마침내 생 레미 시대에 있어 몽상가로서의 고호를 낳게 한다
프로방스의 늙은 농부
고호는 누에넹 시대에 많은 농부를 주제로 하는 작품을 남겼으나, 유감스럽게도 아를르 시대에는 이 농부 한 사람만을 그렸었다. 그가 농부들의 생활에 대한 흥미를 잃은 것은 아니었으나, 농부와 개별적으로 가까이 지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기때문이었으리라. 이 작품의 노농부는 파시앙스 에스카리에라는 이름의 카마르그 출신의 농부로서, 고호는 두 번에 걸쳐 그의 초상을 그렸다.
오벨르의 집
고호의 椅子
네덜란드 시데에 그린 <신발>과 함께 의자를 모티브로 한 이 그림도 고호 특유의 것이다. 서민적인 냄새가 물씬 나는 이 한 개의 의자를 통하여 항시 거기에 걸터앉는 주인의 성품과 생활을 느끼게 하는 훌륭한 작품이다
오렌지와 푸른 장갑이 있는 靜物
병원에서 나온 후 고호는 외출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자화상이나 정물화들을 그의 방에서 그렸다. 이 작품은 병중에 그렸다고 볼 수 없을 정도로 밝은 색조에 의한 안정감을 추구한 정물화이다.
르오노강의 별 달밤
두 사람의 연인을 전경에 두고 국화꽃이 활짝피듯, 푸른 하늘에는 반짝거리는 별들이 가득하며, 강물에 비친 불빛의 그림자가 길게 리듬을 그리는 이 한폭의 아름다운 야상곡은, 섬세한 가락으로 놀랄 만큼 정서에 넘쳐 있다. 고호의 리리시즘, 거의 항상 그 강도와 밝기 때문에 리리시즘으로서의 외관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러나 자연과의 공감을 바탕으로 그리려고 하는 그는 바로 본질적인 시인(詩人)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클리치의 거리
이 작품은 가장 신인상파적인 영향이 두드러진다. <클리치의 거리>는 고호의 파리 생활의 거점이었고 당시 인상파 화가들과 교류를 밀접하게 하면서, 이 거리를 신인상파 동료들의 거점으로 하고 싶어 했다. 그의 동생 테오와 함께 살던 아파트도 이 거리의 브랑슈 광장 바로 곁에 있었고, 로트렉의 본거지 물랑루즈도 이 거리에 있다. 그런 의미에서도 이 작품은 파리에서 고호가 파리의 공기에 동화되어 신인상파의 일원이 된 한 시대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레스토랑의 內部
점묘주의적 수법을 통한 당시의 많은 작품 중에서 이 <레스토랑의 내부>는 고호가 그린 작품 중에 가장 대표적인 점묘법적 작품이다. 번쩍거리는 색채와 이 기법의 완벽함은 파리 시대의 걸작이라 할 수 있겠고, 노랑과 연초록, 그리고 장미빛을 통한 색조의 배합은 조용하고도 환한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당시 인상파에 대항하는 신인상파적 보편적 교양을 알려주는 그의 역량을 보게 하는 작품
사마리아 인
생트 마리의 漁船
남불(南佛)에서 제작 생활을 하면서 고호는 새롭게 눈에 뜨이는 온갖 이국적 풍경에 대하여 호기심을 가지고 열중하였다. 1886년 6월 중순경 그는 지중해안을 멀리 돌았다. 로오느 하구에 위치한 생트마리 해안, 더구나 처음 대하는 지중해의 색채가 그에게 제작 의욕을 북돋아 주었다
노란 보리밭과 측백나무
타오르듯 요동하며 무성하게 깔린 들의 풀들, 역시 불 꽃 모양을 하고 하늘을 치솟는 올리브색의 측백나무, 휘몰아치는 대기의 하늘. 그러나 화사하게 서로 어울 리는 해조(諧調)의 색채가 억제된 색조에 의하여 지극히 조용한 통일성을 이루고 있다. 아를르에서 생 레미로 옮겨간 고호는 그곳에서 아를르 시대와는 다른 조화와 성숙을 달성하고 있다. 해를 쫓아 다니는 해바라기에 공감의식을 가졌던 그가 생 레미에서는 힘찬 생장력을 가지고 하늘 속을 뚫고 오르는 측백나무를 주제로 하는 풍경에 열중하고 있다.
고호 자신도 이 작품을 '내가 그린 가장 명석한 작품'이라고 부르고 있다.
신발
고호는 농촌의 풍경과 농민들의 생활을 애정을 가지고 그린 작품들이 많다. 이 작품처럼 낡은 신발을 정물의 소재로 다루었던 화가는 고호 이전에는 밀레가 있을 뿐이다. 밀레의 서민 감정에 퍽 공감을 느꼈던지 그런 영향을 받은 흔적은 고호의 많은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작품도 밀레의 신발을 그린 데상에 자극을 받아서 그린 것이 틀림없으리라. 이 한 켤레의 신발은 농부의 생활과 그 힘겨운 수고의 전부를 이야기해 주고도 남음이 있다
夕陽의 버드나무
마침내 잎을 떨어뜨리고 발가벗은 버드나무 저쪽에 석양이 장대한 최후의 빛을 쏘이며 저물어 간다. 거기에는 1888년 10월 비극의 직전에 있는 예술가의 마음의 낙일(落日)의 상태가 그대로 표현되어 있는 듯하다. 네덜란드의 시대에도 간혹 그는 나무들 사이 저쪽에 해가 떨어지는 광경을 그렸다. 고호 자신 훗일의 편지에서 아를르의 수양버들 뒤쪽의 낙일은 네덜 란드를 회상시킨다고 말하고 있다.
아를르 공원의 입구
감자를 먹는 사람들 1885년 4~5월작품
감자를 먹는 사람들(Les Mangeurs de pommes de terre).
반고호의 초기의 대표작으로 평가받는 작품이다.
오베르 성당 1890년 6월
부두[Lr quai] 1888년 작품
직조공 1884년 5월의 작품
고흐 1889년 작
귀를 자른 자화상
고갱과의 빈번한 성격적 충돌에 의하여 결정적인 우정의 파탄을 가져오고, 그 격분에 못이겨 자기 자신의 귀를 면도칼로 잘라 버린 귀의 비극이 1888년 크리스머스 때 일어났고, 바로 병원에 입원하였다. 1889년 1월 7일 퇴원을 한 고호는 그 무렵 2점의 자화상을 그렸는 데, 모두 귀에 붕대를 감은 모습이다
의사 가체트의 肖像 1890년 6월작품
생 레미에서 북쪽에의 향수를 느끼기 시작한 고호는 1890년 5월에 그의 동생 테오의 주선으로 파리 북쪽에 있는 오베르 슈르 오와즈에 사는 의사 가체트의 곁으로 갔다. 오와즈강을 중심으로 이 지방의 풍경은 많은 인상파 화가들의 근거지가 되어 있었다. 가체트는 고호를 만났 을 때 이미 62세로, 그 이전부터 도미에, 쿠르베, 마 네, 피사로, 귀오멩, 세잔 등과 가까운 교분을 가진 친구였다. 이 작품은 고호가 그린 3점의 가체트 초상 중의 하나로, 초상 작품의 걸작 중의 하나이다.
우편 배달부 루랭
고호는 아를르에서 약간은 사람들의 몰이해와 조롱 속에서 둘러싸이기도 했지만, 제작의 틈바구니에서 한가롭게 밤의 카페에서 차츰 가까이 할 수 있는 친구들을 만들어 갔다. '금빛을 장식한 푸른 제복을 입고, 수염을 길러 마치 소크라테스처럼 보이는 우편 배달부'의 루랭은 그 중에서도 가장 가깝게 영속적(永續的)인 우정을 갖게 되었다
해바라기가 있는 정물
해바라기라고 하면 바로 고호를 연상하게 되는 꽃이 되어 버렸다. 그만큼 고호는 해바라기꽃의 강한 모티브를 발견하고 그것을 그리는 데 열중하였다. 특히 아를르에서 살고 있던 시대에 있어 해바라기는 그의 중심적 주제였다
해바라기
고호는 네덜란드에서 파리로, 또 파리에서 아를르로 조금이라도 더 태양에 접근하려고 따라간 셈이다. 그의 이러한 태양에 향하는 집념은 어쩌면 해바라기를 꼭 닮아 있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는 아를르 지방에서도 여러 점의 해바라기를 그린 작품을 남기고 있고, 그 결과 해바라기는 곧 고호의 대명사처럼 되었다. 해바라기의 형상이나 색채, 그리고 해를 향하는 성질은 고호의 내면적 원형이라고 할 수 있고, 또한 해바라기는 고호의 상징이라고 할수 있게 되어 버린 것이다. 미묘한 톤의 파랑색을 배경으로, 강렬한 변화의 노랑으로 모습을 드러낸 그것은 바로 고호 자신이 그의 동생에게 설명했듯, 오래 바라보고 있으면 풍부한 변화상을 나타내는 태양에의, 또 생명에의 찬가를 부르고 있는 듯하다. 그 자신의 강렬한 생명력을 그는 해바라기를 통하여 본 것이다
첫댓글 언제봐도 강렬하게 마음에 와 닿는 그림입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