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장춘 기념관 앞마당을 차지하고 있는 자유천(慈乳泉) 유적지 전경
지난 2월 3일 대전 보문산 산행 때 눈길에 미끌어지면서 발목을 접질리며
왼쪽 발목 복숭뼈에 금이 가는 사고를 당해 한 달간을 깁스를 한 채 두문불출하였다
깁스를 풀고도 목발에 의지하여 병원을 오가다가 어제부터 목발없이 걸어도 좋다는 의사의 처방이 떨어졌다
해서 오늘은 걷는 연습도 할 겸 가까운 우장춘 기념관을 찾았다
우장춘(禹長春)기념관 : 부산광역시 동래구 우장춘로62번길 7 (온천동)
씨없는 수박의 기초원리를 규명한 세계적 육종학자 우장춘 박사의 탄생 1백주년(1898년~1959년)을 맞아
박사가 생전 연구 활동을 펼친 부산광역시 동래구 온천2동 850-47번지에 건립하고
1999년 10월 21일 개관한 기념관이다
원예시험장을 수원으로 이전한 뒤 1973년에 부산시에서 이곳을 유적지로 조성하였다는 설명이다
자유천(慈乳泉)과 천각
1953년 8월, 일본에 있는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전해받고도 우 박사가 일본에 가면 돌아오지 않을까 봐
정부에서 여권을 발급해 주지 않아 어머니의 임종을 보지도 못하고
한국에서 상복을 입고 장례식도 어머니 시신 없이 한국에서 빈소를 차려 치를 수밖에 없었다
이때 들어온 조의금으로 우물을 파고 여기에 어머니의 자애로운 젖이라는 뜻의 '자유천(慈乳泉)'이라 이름지었다
돌에 새겨진 慈乳泉 글씨는 박사의 친필이다
자유천(慈乳泉) 우물은 우물 정(井)자 형태의 원래의 화강암 우물 위에
새로 만든 돌판으로 두껑을 덮었으며 그 위에는 두꺼비가 조각된 수조가 얹혀 있다
우물은 언제부터인가 말라있었는데
박사의 서거 50주년을 맞아 동래구에서 지하수를 개발하여 자유천에 연결하고 주변을 새롭게 단장하여
2009년 4월 19일에 준공하였다고 자유천 안내석에 기록되어 있지만
그마저도 물길이 끊어졌는지 물 한 방울 보이지를 않는다
자유천을 동.서로 둘러싸고 서 있는 4개의 석상들
무덤 주변을 지키고 있어야 할 석상들이 여기에 있는 것이 의아스럽다
어디 다른 곳에 있던 유물들을 이곳으로 옮긴 것인지... 기념관과 자유천 기록 어디에서도 보이지를 않는다
우장춘 기념관은 우리나라 육종학의 변천과정을 알기 쉽게 패널과 모형으로 전시해 청소년학습장으로 손색이 없다
대지면적 약 1,000㎡(3백여 평), 연건평 241㎡(73평) 규모의 지상 2층 철근 콘크리트 구조로
1, 2층을 전시실로 구성했고
야외마당에는 자유천과 우장춘 박사의 흉상이 잘 다듬어진 조경시설을 짜임새 있게 배치하였다
우장춘 박사(1898년~1959년) 흉상
그당시 독립 후의 대한민국은 농업 생산력이 부족해 우량 종자의 개발과 보급이 필수적이었고
우장춘과 같은 농학 인재는 대단히 귀중한 존재였기 때문에 1950년 정부의 초청으로 우여곡절 끝에 귀국하여
사망하던 1959년까지 만 9년 5개월간 한국농업과학연구소장·중앙원예기술원장·원예시험장장을 역임하면서
그때까지만 해도 거의 일본에 의존하던 채소 종자를 국내에서 완전히 자급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한국의 육종학과 농업의 발전에 기틀을 다지면서
우리나라 육종학도와 종묘기술자를 양성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또, 6.25 전쟁 중에는 대한민국 해군 정훈장교로 임관해 소령으로 전역하기도 하였으며
대통령에 의해 농림부장관에 내정되기도했으나 거절한 바가 있다
1950년경 우장춘(禹長春) 박사가 귀국하자 정부에서 지금의 동래시장 인근에 있는 학소대(鶴巢臺) 동산에
후대의 원예 교육 학교 건립을 제안하였다
우장춘 박사는 그 터를 범어사에 기증하였고, 범어사는 그곳으로 동래포교당을 옮겼다
대신 범어사는 지금의 동래원예고등학교 터를 박사에게 기증하게 되었다
범어사 동래포교당을 시작으로 한 법륜사(法輪寺)는
100여 년의 역사를 통해 근대 영남 지역 대중 포교의 중심이 되어 온 사찰로 자리를 잡았었다
기념관 입구
기념관 내부
우장춘 박사의 아버지는 을미사변에 가담했다가 일본으로 망명한
조선 말기 조선군 훈련대의 무신 우범선(禹範善)이며 어머니는 일본인이다
을미사변(乙未事変)은 1895년 10월 8일 조선 주재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의 지휘 아래
일본군과 낭인이 조선군 훈련대의 가담자와 함께 경복궁에 난입하여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시해한 사건이다
아버지가 1903년에 자객인 고영근에게 암살되어 가세가 기울자 6살 때는 고아원에서 지내기도 했다
후일 가정 형편이 조금 나아지자 어머니를 따라 히로시마로 이사하여 구제중학교까지 마친 후
박영효의 주선으로 조선총독부에서 학비를 지원받으며 1916년 동경제국대학 농과대학 실과에 진학하였다
실과는 학사학위를 받는 과정이 아니라 제국대학에 부설된 구제전문학교 수준의 과정이다
원래 우장춘은 교토제국대학 공과대학에 진학하고 싶었기 때문에 구제고등학교에 진학하려 했지만
농학실과에 가야만 학비를 지원해 주었기 때문에 농대에 진학했다고 한다
1919년 졸업과 동시에 일본 농림성 농업시험장에 취직하여 1937년 퇴직할 때까지 18년간 육종연구에 몰두하였다
1936년 동경제국대학에서 농학박사학위를 받았으나
한국인이라는 것과 정규 대학을 나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승진이 되지 않다가
퇴임 직전에 기사(技師)로 승진하면서 퇴임하였다
씨 없는 수박은 1947년 일본인 기하라 히토시(木原 仁)가 개발한 것인데
우장춘 박사는 이것을 대한민국에서 처음으로 만들어 시연하였기 때문에
우장춘 박사가 씨 없는 수박을 최초로 만든 것으로인식되기도 하였었다
그러나, 우장춘 박사는 그보다 더 중요한 씨 없는 수박을 만드는 기초 원리를 규명하였고
이것이 바로 박사가 실험적으로 증명한 '종의 합성' 이론이다
1층 전시실
1959년, 국립의료원에 입원하여 십이지궤양 수술 후 병세가 악화되어 8월 10일에 사망하였다
사망 몇 시간 전 대한민국 문화포장을 수여받았는데
병상의 우장춘 박사에게 문화포장 수여 사실과 함께 포장이 전달되자
"조국이 드디어 나를 인정했구나! 그런데 조금만 더 일찍 주지..."라면서
회한의 눈물을 흘렸다는 일화가 전해져 온다
장례는 사회장으로 치러졌으며 정부수립 이래 최초로 사회장이 거행된 한국인이었다
그의 묘소는 수원시 권선구 서둔동 (구)농촌진흥청 뒤편 여기산(麗妓山)에 있으며
2003년 4월 21일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매년 8월 10일이면 그가 양성한 제자들과 전국의 원예인들이 모여 그를 추모하는 행사를 올리고 있다고 한다
2층 전시실
2층에는 우리나라 육종학의 변천과정을 알기 쉽게 패널과 모형으로 전시해 두었다
첫댓글 그렇구나.
보문산 언저리에서 발을 접질렸구나.
큰일 날뻔 했다.
사고란 것이 꼭 어중간한 곳에서 나는 법이다.
하루속히 쾌차하여 無碍한 산행하기를 기원한다.
불우와 고난 속에 진리를 토파내어
종자 합성 새 학설을 세계에 외칠 적에
잠잠턴 학문의 바다 물결 한번 치니라.
온갖 채소종자 우리 힘으로 길러 내어
겨례를 위하시니 그 공로 얼마던고
빛나는 문화포장을 웃고 받고 가니라.
흙에서 살던 인생 흙으로 돌아가매
그 정신 뿌리되어 싹 트고 가지 뻗어
이 나라 과학의 동산에 백화만발하리라.
오랜만에 노산의 시조를 대하니 진정 감회가 새롭다.
우장춘의 전 생애가 형형히 새겨져
그의 위대한 업적을 기림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우장춘은 대한민국이 문화포장을 수여하였다는 말을 병상에서 듣고
'이제 조상의 허물을 씻었다'고 하며 눈을 감았다고 하였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래 최초의 사회장이 거행되고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어
찬란히 빛나는 대한민국의 별이 되었다.
정성이 담긴 사진들과 글 잘 보고 간다.
늘 건강하기를 빈다.
박사에 관한 자료를 찾다가 노산의 시조를 보고 같이 올리려다가 길어서 생략했었는데 고맙네... 오늘도 좋은 날 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