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년간의 미군범죄사건을 정리한것을 퍼왔습니다.(지난10년간만)
한미행정협정(SOFA)에 대한 개정의 목소리는 비단 이번 여중생 사망사건만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미군사건들의 해결과 예방을 위한 첫걸음이라는 목소리가 큽니다.
1. 윤금이씨 살해 사건
사건일시 : 1992년 10월 28일 새벽
사건발생장소 : 경기도 동두천시 보산동 431-50
사건 전날인 1992년 10월 27일 저녁, 윤씨는 술에 취해 클럽을 전전하다 미군 케네스 마클 이병과 하룻밤을 지내기로 하고 동두천 자신의 집으로 가던 중이었다. 그러다 집 앞에서 미군 제이슨 램버트 상병과 마주친 두사람은 그와 오랜동안 실랑이를 벌였다. 그 일로 화가 난 마클은 윤씨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그녀의 방안으로 들어가 마구 폭행하기 시작했다. 마클은 콜라병으로 윤씨의 이마를 여러차례 가격했다. 증거를 없애려고 입에 성냥개비를 부러뜨려 물리고 온몸에는 하얀 세제가루를 뿌려놓았다. 부검 결과 사인은 콜라병으로 맞은 앞 얼굴의 함몰 및 과다출혈로 나타났다.
대법원에서 징역 15년형을 확정 94년 5월 17일 천안 소년교도소에 수감
교도소 내에서 난동을 부려 징역 8개월을 추가로 선고받고 복역중
2. 김미순씨 성폭행 사건
사건일시 : 1993년 5월 29일 밤 12시
사건발생장소 : 서울 서초동 뢰벤호프
1993년 5월 29일 서울 서초동에서 호프집을 경영하고 있던 김미순씨는 안경 코받이를 잃어버렸다며 찾아온 미 2사단 소속 존 로져 살로이스 병장이 갑자기 구타와 성폭행을 가해 중상을 입었다. 사건 당시 로져 병장은 파리약 깡통과 주먹과 발로 피해자가 정신을 잃을 때까지 계속해서 머리를 구타했으며 범행 후 도주하였다. 사건 발생 후 12시간만에 발견된 김미순씨는 영동 세브란스병원으로 옮겨져 뇌수술을 받았으며 뇌를 크게 다쳐 후유증으로 평생을 장애를 안고 살게 되었다.
단순 폭행혐의로 기소되었다가 의식이 일정 회복된 피해자가 성폭행을 주장함에 따라 강간죄가 추가
93년 10월 22일 1심에서 징역 10년이 선고
항소심에서 담당재판부는 1심 판결의 강간죄에 대해서는 증거불충분을 이유로 파기, 폭행죄만 받아들여 원심의 징역 10년을 파기하고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
95년 1월 천안교도소에 수감되었으나, 95년 8월 15일 특사로 석방
3. 세모녀 감금 폭행 사건
사건발생일시 : 1994년 10월 25일 오후 9시 40분경
사건발생장소 :서울시 용산구 한남동 외인주택
1994년 10월 25일 김영자씨는 미군과 국제 결혼한 딸 이순영씨가 살고있는 외인주택을 막내딸과 함께 방문하고 나오던 길에 딸이 병환중인 아버님께 드리라며 건네준 찹쌀과, 쇠고기 등의 선물로 미군물품 판매상 이라는 누명을 쓰고 미 헌병들에게 연행됐다. 딸들이 항의하자 미군헌병들은 이들마저 강제로 수갑을 채운 뒤 미8군 헌병대로 폭력 연행하였다. 조사 도중 김씨가 극도의 공포와 분노로 기절하여 옷을 입은 채 오줌을 쌌다. 그러자 헌병들은 응급조처는 커녕 빙 둘러싸고 오줌을 싼다고 농담하고, 거짓으로 쇼를 한다고 조롱하기까지 했다. 이순영씨가 계속 앰브런스를 불러줄 것을 요청했음에도 30분간이나 수수방관하였다. 그러다 새벽 1시가 넘도록 조사를 해도 혐의가 없자 연행 5시간만에 한국경찰에 인도했다.
한국검찰은 이 사건을 미군의 공무수행을 벗어난 범죄로 규정, 가해 미군들에 대한 소환장을 발부하였으나 미군당국은 정당한 공무집행 이라고 주장하며 끝내 소환에 응하지 않았고, 결국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다. 이순희씨는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승소, 1천 8백만원의 배상금
4. 서울 충무로 지하철역 난동 사건
사건발생일시 : 1995년 5월 19일 밤 11시
사건발생장소 : 서울 충무로 지하철역
1995년 5월 19일 밤 11시께 심하게 술에 취한 미군과 그들의 가족 13명은 3호선 전동차 안에서 큰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욕지거리를 지껄이는 등 난동을 피웠다. 더구나 전동차에 오르는 40대 아주머니의 엉덩이를 만지는 등 성추행까지 서슴치 않았다.
이에 분노한 조씨는 미군들에게 강력히 항의했다. 그러자 미군들은 충무로역에서 내리는 조씨를 따라 내리더니 그를 넘어뜨리고 옆구리와 얼굴을 5분여동안 발길질해댔다.
지켜보던 시민 50여명은 새벽 3시까지 미군들의 이동경로를 따라다니며 농성과 항의를 계속했다. 피해자 조씨는 미군의 공식사과 등을 요구하며 6월 8일부터 사흘간 용산미군사령부 1번문 앞에서 단식농성을 벌였다.
프랭크 골리나 병장은 폭력행위등 처벌에 관한 법률위반죄를 적용, 징역 6월
나머지는 벌금형 선고
피해자 조씨의 국가배상 신청에 따라 한국측 배상심의액의 절반에 해당하는 933,839원을 통보했다가 조씨가 이의 수령을 거부하며 강경하게 나오자 결국 사과문과 함께 200만원의 배상금을 전달
5. 이기순씨 살해사건
사건일시 : 1996년 9월 7일 새벽
사건장소 : 경기도 동두천시 보산동 429-57 서문경씨 집 셋방
1996년 9월 7일 오전 10시께 경기도 동두천시 보산동 서문경씨의 집에 세들어 사는 이기순씨가 예리한 흉기로 목이 반쯤 잘린 상태로 숨진 채 발견되었다. 범인은 동두천 케이시부대에 소속된 뮤니크 에릭 스티븐 이병으로 9월 11일 검거되었다. 조사과정에서 뮤니크 이병은 7일 새벽 4시 30분경 술에 취한 상태에서 이기순씨의 셋방에 찾아갔다가 돈이 없다는 이유로 이씨한테 면박을 당하자 이에 격분하여 이씨의 얼굴을 주먹으로 한 대 때려 실신시킨 후 방안에 있던 연필 깎는 칼로 살해한 것으로 드러났다.
1심 선고 공판에서 징역 15년의 실형 선고.
항소심 선고공판에서 징역 10년으로 감형
이기순씨 유족들은 1억7천만원의 국가배상신청을 냈고, 97년 3월 28일 미군측은 이기순씨 유족에게 7천8백만원의 배상금을 지급하겠다고 최종 확정 통보.
6. 조중필씨 살해사건
사건발생일시 : 1997년 4월 3일 밤 11시경
사건발생장소 : 서울시 용산구 이태원동 127-12 버거킹 햄버거 가게 화장실
피해자 : 조중필(남, 22세, 홍익대 전파공학과 4년)
1997년 4월 3일 밤 11시경 미군속 아들 페터슨과 재미교포 에디 리는 이태원 버거킹 햄버거가게 화장실에서 조중필씨의 가슴과 목 등 9군데를 잭 나이프로 찔러 숨지게 했다. 당시 CID(미육군범죄수사대)는 페터슨을 범인이라고 지목했으나 한국 검찰은 미군측의 주장을 뒤집고 에디 리를 범인으로 지목했다. 검찰 수사 결과는 다음과 같다. 4월 3일 에디 리는 이태원 버거킹에서 친구들과 있다가 가지고 놀던 잭나이프를 접어 오른쪽 주머니에 넣었다. 그러더니 페터슨에게 내가 뭔가를 보여주겠다 고 말하며 마침 화장실에 가던 조씨를 따라 들어가 소지하고 있던 칼로 아무 이유없이 조씨를 마구 찔러 현장에서 과다출혈로 숨지게 했다.
에디 리는 살인죄로, 페터슨은 단지 폭력죄로 기소되어 각각 무기징역, 단기 1년과 장기 1년 6월의 형
이후 페터슨은 항소를 포기하고 복역중 98년 8.15 특사로 사면
에디 리는 항소 끝에 대법원에서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최종 무죄 판결
유족들은 98년 11월 패터슨을 살인죄로 고소
패터슨 1999년 말 미국으로 출국.
7. 허주연씨 살해, 방화사건
사건일시 : 1998년 1월 16일 새벽 3시 30분경
사건장소 : 경기도 의정부시 고잔동 116번지
1998년 1월 15일 오후 10시경 허주연씨는 자신이 일하고 있는 JS 클럽에서 미군 가해자를 만나 함께 술을 마셨다. 그리고 16일 0시 20분경 클럽에서 150m 거리에 떨어져 있는 자취방으로 가 함께 잠을 잤다. 가해자는 3시 30분경 부대로 돌아가려는데 허주연씨가 함께 있자며 자신을 붙잡자 오른쪽 팔꿈치로 허주연씨의 명치를 때려 숨지게 하였고 이어 자신의 범죄를 은닉하기 위해 허주연씨가 누워있는 침대에 가스라이터로 불을 붙여 허주연씨와 침대 등 방안의 살림을 태웠다. 가해자는 검거 직후 평택 미군 피의자 보호소에 수감되었으며, 자신은 담배를 피우는 것을 싫어하는데 허주연씨가 줄담배를 피우고 귀찮게 하여 홧김에 범행을 저질렀다고 자백했다. 그러다 현장검증때는 협박에 의한 것이었다며 앞의 말을 번복했다.
1심에서 징역 10년을 선고
8. 이태원 클럽 여종업원 살해사건
사건발생일시 : 2000년 2월 19일
사건발생장소 : 이태원 소방서 뒷편 뉴아마존 클럽 내실
1999년 2월 19일 오후 11시 40분경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에 위치한 외국인 전용 클럽 '뉴아마존'에서 종업원 김 모씨가 얼굴과 목 등에 심한 타박상을 입고 클럽 내실 침대위에 알몸으로 쓰러져 있는 것을 클럽 주인 배씨가 발견하여 병원으로 옮겼으나 숨졌다. 부검 결과 김씨는 목뼈가 부러질 정도로 심하게 목이 졸려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다.2월 21일 미군범죄수사대는 이 사건의 용의자로 캠프 게리오웬 내 미군 매카시 상병을 검거했다. 매카시 상병은 경찰 조사과정에서 사건 당일 술집 내실에서 얼굴을 주먹으로 마구 때리고 목을 졸라 숨지게 했다고 말했다.
3월 28일 불구속 기소되었고, 4월 28일 첫 재판이 있을 예정이었으나 용산미군기지에서 대기중 탈주.
2001년 3월 9일 징역 6년을 확정 선고받고 복역 중.
9. 전동록씨 미군 고압선 감전 사망사고
사건발생일시 : 2001년 7월 16일
사건발생장소 : 경기도 파주시 미군부대 캠프 하우즈 후문 인근 공사 현장
2001년 7월 16일 카메라 공장 증축현장에서 인부로 일하던 전동록씨는 철제 지붕 마무리 공사를 하면서 철판조각을 반으로 접어 지붕 아래로 내리려다 철판조각이 지붕 위 약 2-3m 상공의 고압선에 닿으면서 감전됐다. 이 사고로 전씨는 양쪽 팔다리에 4도의 중화상을 입고 상태가 악화돼 2002년 6월 6일 사망했다.
문제의 고압선은 인근 미군부대 캠프 하우즈 외부의 양수기에 전기를 공급하기 위해 미군측에서 설치, 관리하는 것으로 22,900V의 고압에도 불구하고 피복조차 씌워져 있지 않았다. 이에 공사 관계자들이 공사 시작 전부터 수차례 미군측에 고압선 철거 또는 이전을 요구하였지만 번번이 묵살당했다. 미군측은 주한미군지위협정(SOFA)에 따라 배상 신청을 하라는 원칙적인 입장만을 보이고 있다.
유족들은 현재 국가를 상대로 민사소송을 진행중
2002년 1월 10일 치료비 가처분 소송에서 2천만원을 선지급
캠프 하우즈 부대장과 미2사단 공병대장을 업무상과실치사 혐의로 형사고소
10. 미군 장갑차 여중생 고 신효순, 심미선 살인사건
사건 발생 일시 : 2002년 6월 13일 오전 10시 45분경
사건 발생 장소 : 경기도 양주군 광적면 56번 지방도로
피해자 : 신효순 (15, 조양중 2), 심미선 (상동)
가해자 : 워커 마크 병장 (36, 운전병, 캠프 하우즈 미2사단 44공병대 소속) 등
사건 개요
2002년 6월 13일, 오전 10시 45분경 경기도 양주군 광적면 56번 지방도에서 미2사단 44공병대(캠프 하우즈) 소속 미군 장갑차가 앞서가던 여중생 신효순, 심미선 (15, 조양중 2) 두명을 치어 그 자리에서 숨지게 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사고차량의 소속 부대인 캠프 하우즈는 지난 6월 6일 미군 고압선 감전사고로 사망한 고 전동록씨 사건이 발생한 같은 부대다.
당시 이들은 사고 당일 생일을 맞은 건너마을 친구와 사고 다음날 생일이었던 미선양이 함께 생일파티를 열기로 하고 생일집에 가다가 변을 당한 것으로 밝혀졌다.
피해 학생들은 사고차량의 오른쪽 궤도부분에 치어 그 자리에서 즉사했고, 장갑차가 몸을 그대로 밟고 지나갔다 다시 후진하면서 시신이 많이 훼손됐다.
진행 경과
사고 직후 미군측은 일반인들의 현장 접근을 막고 자체 조사를 벌였다. 뒤늦게 사고 소식을 듣고 한국 경찰이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미군측에 의해 현장이 대충 정리되어진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한국 경찰은 현장 사진을 찍고, 대강의 사고 정황을 추정할 뿐 정작 중요한 차량 운전사나 조수석의 관제장교에 의한 직접 수사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공무중 사고에 대해서는 SOFA에 따라 미군측에 1차적 재판권이 있어 사실상 우리나라에서 수사에서부터 재판에 이르기까지 아무런 권한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안 자체가 매우 심각하다고 판단했는지 미군측에서는 사고 당일 보도자료를 통해 미8군 사령관의 유감의 뜻을 전하고, 빈소에 조화를 보내고 직접 문상을 오는 등 매우 이례적으로 나왔다. 국방부도 한미 합동조사반을 꾸려 진상조사를 철저히 할 것임을 밝혔다. 그러나 이는 유족들을 달래 어떻게든 사건을 빨리 마무리 지으려는 제스쳐에 불과하다는 것이 금새 드러났다.
14일 오후 3시에 예정되었던 한미간 현장조사는 미국측의 일방적 불참으로 무산되었다. 유족들의 항의가 빗발치자 미군측은 오후 8시에 현장 브리핑을 하겠다고 통보했다. 유족들이 마지못해 현장에 가보았지만 결과는 예상대로였다. 미군측은 당시 사고 차량 너비가 도로 폭보다 넓었음에도 불구하고, 브리핑 자료에는 사고차량을 도로 폭보다 작게 그려놓았다. 유족들의 지적에 "잘 몰랐다. 차트를 그린 사람이 잘못 그린 것 같다"는 황당한 대답이었다.
결국 한시간여의 브리핑은 성난 유족들의 욕지거리와 고함속에 끝나고 말았다.
장례고 뭐고 이대로 관을 매고 미 2사단 앞에 가서 농성이라도 할 태세였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미군측은 장례식만 치루면 언론사가 입회한 가운데 미2사단장과 유족, 시민사회단체 대표들과의 면담을 주선하겠다고 나왔다. 그러나 15일, 막상 장례를 치루고 나니 태도가 돌변했다. 미군측은 약속시간보다 일찍 양쪽 아버님만 미2사단으로 들여보낸 뒤 시민사회단체와 언론사의 참여를 불허했다. 오노 미 2사단 민사참모는 '통역이 잘못 됐을 것'이라며 약속 자체를 부정했다. 이 소식을 듣고 안에 있던 유가족들이 나왔고, 면담은 사실상 결렬됐다.
이런 일 때문이었는지 6월 19일 한미 합동조사 결과 발표 때에는 이전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작전지도와 작전 차량 사진, 정확한 수치까지 기재한 사고 현장 약도 등을 준비해오는 등 나름대로 노력한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구색은 갖추었을지 몰라도 내용은 이전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그동안 유족들은 이번 사고는 사고 차량이 중앙선을 침범한 채 진행하다 맞은편에서 장갑차가 오니까 사람 목숨 귀한 줄은 모르고 장갑차 망가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 갑자기 오른편 갓길쪽으로 방향을 틀면서 발생한 것이라며 고의적 살인행위임을 주장해 왔다. 차체가 도로폭보다 넓은 궤도차량이 무리하게 교행을 시도한 것 역시 마찬가지다. 따라서 이번 합동조사 결과 내용은 이번 사고가 '고의적 살인'이 아닌 '우발적인, 비극적 사고'임을 강조하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사고 차량의 너비는 3.65m로 갓길 포함, 전체 도로폭 3.7m보다 좁아 중앙선을 넘지 않고 직진 운행중이었다. @당시 사고차량은 커브길을 돌고 있던데다 차량 구조상 우측 시야가 제한돼 있어 오른편 갓길로 걷고있던 학생들을 볼 수 없었다. @맞은편에서 장갑차가 오고 있던 것은 사실이나 사고차량이 장갑차를 피하기 위해 갑자기 우회한 사실은 없으며, 사고 직후 사고 차량과 교행하지는 않은 채 사고 차량과 약 1m 떨어진 곳에 정차했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이에 유가족들은 미군측의 발표 내용을 납득할 수 없으며, 오히려 의혹만 더 커졌다는 주장이다.
우선 차량 너비가 도로 폭보다 좁아 중앙선을 넘지 않고 직진 운행할 수 있었다는 주장은 궤변에 불과하다. 갓길은 애초에 차량 주행을 위해 만들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긴급 상황 발생시 차량 주행흐름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차량을 잠시 정차하는 등의 용도로 만들어진 것이다. 특히, 해당 도로는 평상시 초등학생들의 통학로로 따로 인도가 없어 갓길이 사실상 인도로 사용돼 왔다. 그런데, 갓길까지 포함해 차도가 차량 폭보다 넓어 중앙선을 침범하지 않고도 직직 운행할 수 있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평시에 갓길을 인도처럼 사용하는 주민들의 안전은 전혀 고려치 않는 미군들의 시각을 단적으로 보여준 것으로, 이번 사고가 결코 우발적인 것이 아닌 고의적인 사고임을 다시 한번 확인해 주고 있다.
두 번째, 사고 차량이 갑자기 갓길쪽으로 우회한 적이 없다는 주장도 얼른 납득이 가지 않는 부분이다. 분명 사고 현장에는 사고 지점 인근에 사고 차량이 갑자기 우회하면서 아스콘이 깨져있고, 갓길을 넘어 풀숲까지 눌린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이 부분에 대해서도 미군측은 납득할만한 설명을 해주지 못하고 있다.
그 밖에도 많은 의혹과 질문들이 있었지만 미군측은 제한된 시간이 지났다며 일방적으로 브리핑을 끝내고 말았다. 이것으로 이번 사건에 대한 수사는 종결됐다는 말과 함께. 그나마 진전된 것이 있다면 그동안 미군측에서 이번 사건을 미군 운전사 개인의 과실로만 치부해오다 작전상 실수와 지휘체계상의 책임을 인정했다는 것. 그러나 책임자의 구체적인 처벌 문제나 미군 최고책임자의 공개사과 요구에 대해서는 구체적 답변을 피하고, 응하지 않고 있다.
또한, 사과 요구에 대해서도 미군측에서는 나름대로 형식을 갖춰서 사과를 했다지만 그 역시 유족들의 바램에는 크게 못미치고 있다. 합동조사 결과 발표 때 아너레이 미 2사단장은 'apologize'라는 표현을 써가며 유족들 앞에 사과를 했다. 그러나 사과를 이야기 하는 그의 모습은 옆에 통역을 맡은 한국군 장교의 어깨에 팔을 올려 어깨동무를 한, 매우 거만하고도 장난섞인 모습이었다. 그러한 모습에 유족들이 위로받기는 커녕 더 큰 마음의 상처를 받았음은 물론이다. 2000년 7월 오키나와에서 주일미군의 여중생 성추행 사건에 이어 뺑소니 사건이 잇달아 일어나며 반미여론이 높아지자 주오키나와 미군사령관과 주일미국총영사가 오키나와 지사를 방문, 일본식 예법으로 정중히 허리를 굽혀 사죄하던 것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당시 사과 장면은 방송을 타고 일본 전역에 방송됐다.
이에 유가족들은 이번 한미 합동조사 결과를 받아들일 수 없다며 미군 최고 책임자의 공개사과 진상규명 및 관련자의 형사처벌 재발 방지대책 마련 추모비 건립 등을 요구하고 있다. 한편, 여러 시민사회단체 및 진보정당 등은 6월 26일 '미군 장갑차 여중생 고 신효순, 심미선 살인사건 범국민대책위원회'를 결성하고 사건의 명확한 진상조사 미 대통령과 주한미군 사령관의 공개사과 관련자에 대한 형사 처벌 재발 방지 대책 마련 신속한 배상 등을 요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