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님께!
-심훈 (1901-1936)
어머님!
오늘 아침에 고의적삼 차입해 주신 것을 받고서야 제가 이곳에 와 있는 것을 집에서도 아신 줄 알았습니다. 잠시도 엄마의 곁을 떠나지 않던 막내둥이의 생사를 한 달 동안이나 아득히 아실 길 없으셨으니 그동안에 오죽이나 애를 태우셨겠습니까?
그러하오나 저는 이곳까지 굴러오는 동안에 꿈에도 생각지 못하던 고생을 겪었건만 그래도 몸 성히 배포 유하게 큰 집에 와서 지냅니다.
고랑을 차고 용수는 썼을망정 난생처음으로 자동차에다가 보호 순사를 앉히고
거들먹거리며 남산 밑에서 무학재 밑까지 내려 긁는 맛이란 바로 개선문으로 들어가는 듯하였습니다.
어머님!
제가 들어 있는 방은 28호실인데 성명 삼 자도 떼어버리고 2007호로만 행세합니다. 두 간도 못 되는 방 속에 열아홉 명이나 비웃두름 엮이듯 했는데 그 중에는 목사님도 있고 시골서 온 상투장이도 있구요,
우리 할아버지처럼 수염 잘난 천도교 도사도 계십니다. 밖에는 그 날 함께 날뛰던 저의 동무들인데 제 나이가 제일 어려서 귀염을 받는답니다.
어머님!
날이 몹시도 더워서 풀 한 포기 없는 감옥 마당에 뙤약볕이 내려쪼이고 주황빛의 벽돌담은 화로 속처럼 달고 방 속에서는 똥통이 끓습니다.
밤이면 가뜩이나 다리도 뻗어보지 못하는데 빈대 벼룩이 다투어 가며 진물을 살살 뜯습니다. 그래서 한 달 동안이나 쪼그리고 앉은 채 날밤을 새웠습니다.
그렇건만 대단히 이상한 일이 있지 않습니까? 생지옥 속에 있으면서 하나도 괴로와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누구의 눈초리에나 뉘우침과 슬픈 빛이 보이지 않고 도리어 그 눈들은 샛별과 같이 빛나고 있습니다. 더구나 노인네의 얼굴은 앞날을 점치는 선지자처럼, 고행하는 도승처럼 그 표정조차 엄숙합니다.
날마다 이른 아침 전등불 꺼지는 것을 신호 삼아 몇천 명이 같은 시간에 마음을 모아서 정성껏 같은 발원으로 기도를 올릴 때면 극성맞은 간수도 칼자루 소리를 내지 못하며 감히 들여다보지도 못하고 발꿈치를 돌립니다.
어머님!
우리가 천 번 만 번 기도를 올리기로서니 굳게 닫힌 옥문이 저절로 열려질 리는 없겠지요. 우리가 아무리 목을 놓고 울며 부르짖어도 크나큰 소원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리도 없겠지요. 그러나 마음을 합하는 것처럼 큰 힘은 없습니다. 한테 뭉쳐 행동을 같이하는 것처럼 무서운 것은 없습니다. 우리들은 언제나 큰 힘을 믿고 있습니다. 생사를 같이할 것을 누구나 맹세하고 있으니까요....그러길래 나어린 저까지도 이러한 고초를 그다지 괴로워하여 하소연해 본 적이 없습니다.
어머님!
어머님께서는 조금도 저를 위하여 근심ㅎ지 마십시오. 지금 조선에는 우리 어머님 같으신 어머니가 몇천 분이요 또 몇만 분이나 계시지 않습니까?
그리고 어머님께서도 이 땅에 이슬을 받고 자라나신 공로 많고 소중한 따님의 한 분이시고, 저는 어머님보다도 더 크신 어머님을 위하여 한 몸을 바치려는 영광스러운 이 땅의 사나이외다.
콩밥을 먹는다고 끼니때마다 눈물겨워하지도 마십시오. 어머님이 마당에서 절구에 메주를 찧으실 때면 그 곁에서 한 주먹씩 주워 먹고 배탈이 나던, 그렇게도 삶은 콩을 좋아하던 제가 아닙니까? 한 알만 마루 위에 떨어지면 흘금흘금 치어다보고 다른 사람이 먹을세라 주워 먹기 한 버릇이 되었습니다.
어머님!
오늘 아침에는 목사님한테 사식이 들어왔는데 첫술을 뜨다가 목이 메어 넘기지를 못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외다. 아내는 태중에 놀라서 병들어 눕고 열두 살 먹은 어린 딸이 아침마다 옥문 밖으로 쌀을 날라다가 지어 드리는 밥이라 합니다. 저도 돌아앉으며 남모르게 소매를 적셨습니다.
어머님!
며칠 전에는 생후 처음으로 감방 속에서 죽는 사람의 그 임종을 같이하였습니다. 돌아간 사람은 먼 시골의 무슨 교를 믿는 노인이었는데 경찰서에서 다리 하나를 못 쓰게 되어 나와서 이곳에 온 뒤에도 밤이면 몹시 앓았습니다.
병감은 만원이라고 옮겨 주지도 않고, 쇠잔한 몸에 그 독은 나날이 뼈에 사무쳐 어제는 아침부터 신음하는 소리가 더 높았습니다.
밤은 깊어 악박골 약물 터에서 단소 부는 소리도 끊쳤을 때 그는 가슴에 손을 얹고 가쁜 숨을 몰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일어나 그의 머리맡을 에워싸고 앉아서 죽음의 그림자가 시시각각으로 덮여 오는 그의 얼굴을 묵묵히 지키고 있습니다.
그는 희미한 눈초리로 오 촉 밖에 안되는 전등을 멀거니 치어다보면서 무슨 깊은 생각에 잠긴 듯 추억의 날개를 펴서 기구한 일생을 더듬는 듯합니다.
그의 호흡이 점점 가빠지는 것을 본 저는 무릎을 베개 삼아 그의 머리를 괴었더니 그는 떨리는 손을 더듬더듬하여 제 손을 찾아 쥐더이다. 금새 운명을 할 노인의 손아귀 힘이 어쩌면 그다지도 굳셀까요, 전기나 통한 듯이 뜨거울까요?
어머님!
그는 마지막 힘을 다하여 몸을 벌떡 솟치더니 “여러분”하고 큰 소리로 무거이 입을 열었습니다. 찢어질 듯이 긴장된 얼굴의 힘줄과 표정이 그날 수천 명
교도 앞에서 연설을 할때에 그 목소리가 이와 같이 우렁찼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마침내 그의 연설을 듣지 못했습니다. “여러분!”하고는 뒤미처 목에 가래가 끓어오르기 때문에.......
그러면서도 그는 우리에게 무엇을 바라는 것 같아서 어느 한 분이 유언할 것이 없느냐 물으매 그는 조용히 머리를 흔들어 보이나 그래도 흐려 가는 눈은 꼭 무엇을 애원하는 듯합니다. 마는 그의 마지막 소청을 들어줄 그 무엇이나 우리가 가졌겠습니까.
우리는 약속이나 한 듯이 나직나직한 목소리로 그날에 여럿이 떼 지어 부르던 노래를 일제히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떨리는 목소리로 첫 절도 다 부르기 전에 설움이 북받쳐서 그와 같은 신도인 상투 달린 사람은 목을 놓고 울더이다.
어머님!
그가 애원하던 것은 그 노래인 것이 틀림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최후의 일각의 원혼을 위로하기에는 가슴 한복판을 울리는 그 노래밖에 없었습니다.
후렴이 끝나자 그는 한 덩이 시뻘건 선지피를 제 옷자락에 토하고는 영영 숨이 끓어지고 말더이다.
그러나 야릇한 미소를 띤 그의 영혼은 우리가 부른 노래에 고이고이 싸이고 받들려 쇠창살을 새어서 새벽하늘로 올라갔을 것입니다. 저는 감지 못한 그의 두 눈을 쓰다듬어 내리고 날이 밝도록 그의 머리를 제 무릎에서 내려놓지 않았습니다.
어머님!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사록사록이 아프고 쓰라렸던 지난날의 모든 일을 큰 모험 삼아 몰래몰래 적어두는 이 글월에 어찌 다 시원스러이 사뢰올 수가 있사오리까? 이제야 겨우 가시밭을 밟기 시작한 저로서 어느 새부터 이만 고생을 호소할 것이오리까?
오늘은 아침부터 장대같이 쏟아지는 비에 더위가 씻껴 내리고 높은 담 안에 시원한 바람이 휘돕니다. 병든 누에같이 늘어졌던 감방 속의 여러 사람도 하나 둘 생기가 나서 목침돌림 이야기에 꽃이 핍니다.
어머님!
며칠 동안이나 비밀히 적은 이 글월을 들키지 않고 내어보낼 궁리를 하는 동안에 비는 어느듯 멈추고 날은 오늘도 저물어 갑니다.
구름 걷힌 하늘을 우러러 어머님의 건강을 비올 때 비 뒤의 신록은 담 밖에 더욱 아름답사은 듯 먼 촌의 개구리 소리만 철창에 들리나이다.
1919.8.29
첫댓글 어머니는 영원한 마음의 고향!
심훈이 감방에서 고초를 당할 때, 정동의 고대광실에서 이완용도 심적으로 갈등을 가졌다. 결국 그의 판단은 스스로 강해지지 않으면 어쩔 수가 없다는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소위 상황논리란 것이었다.
이광수나 최남선이나 기타 숱한 지식인들이 친일로 변신한 동기가 바로 이 자강론이다.
그런데, 지금 이나라에 이완용과 춘원과 최남선을 욕할 사람은 진정 몇이나 될까.
이완용 평전을 읽으며 생각한다. 이완용은 누구이며 그럼 안중근은 누구인가?
어릴 때 상록수를 매우 감명깊게 읽었던 기억이 난다. 박동혁 운옥이?
일찍 죽어서 친일 시비가 없는 점, 이찌보면 행운아인지도 모르겠네...
30년대 그 시절도 한번 살아봤으면 싶네그려.
심훈 아- 35살에 그렇게...
소생 마음이 뜨거워 오네.
여일, 귀한 글 올리조서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