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내 머리에 똥 쌌어? >
독일의 아동문학가 베르너 홀츠 바르트의 동화이다. 어느 날, 작은 두더지가 해가 떴나 안 떴나 보려고 땅 위로 머리를 내미는 순간, 아주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소시지처럼 길쭉한 것이 철퍼덕 두더지 머리 위로 떨어졌다. 정체불명의 신선하고 뜨끈한 응가가 그의 머리 위에 투척되었다.
마지막 마무리 잘한 소프트아이스크림처럼 생긴 똥을 머리에 얹고 범인을 찾으러 바쁘게 돌아다닌다. 철퍼덕! 철썩! 우당탕탕! 타타타타! 오도당 동당! 쫘르륵! 뿌지직! 책장을 넘기는 순간마다 나타나는 찰진 의성어와 의태어들의 리듬 잔치는 어른이 읽어도 명쾌하고 재미있다. 아이들로 하여금 범인이 누구일까? 상상하며 읽게 만든다.
의지력도 강한 우리 두더지 친구는 어린 시절 할머니가 물동이 이고 우물 갈 때나 또는 선지나 생선 파는 아줌마가 머리 위에 쓰는 똬리처럼 똥을 얹고 여기저기 돌아다닌다. 어디서 저런 용기가 났는지? 존경스럽다. 손해 배상을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똥독이 올라 탈모가 올 수도 있는데 궁금한 건 도저히 못 참는 우리의 주인공은 범인을 찾아 종횡무진한다.
두더지는 비둘기에게 "네가 내 머리에 똥 쌌지?"라고 묻자 비둘기는 하얀 물똥을 "철썩" 싸며 자신이 한 짓이 아니라고 한다. 이어서 말은 까만 사과 같은 똥을 싸서 자신의 무죄를 입증한다. 토끼, 염소, 소, 돼지도 하나같이 똑같은 대답만 할 뿐이었다. 결국 파리라는 사설탐정을 이용했다. 파리 두 마리가 냄새를 맡아보더니 "아, 이건 바로 개가 한 짓이야!" 답을 내렸다.
두더지는 그 근방에 사는 뚱뚱이 한스라는 개가 범인이라는 것을 알아차린다. 그는 한스의 집 위로 올라가 까만 곶감 씨 같은 자신의 똥을 한스의 널따란 이마 위로 슝 하고 떨어뜨렸다. 아주 통쾌한 보복으로 마무리하고 기분 좋게 웃으며 땅굴 속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끝난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함무라비 법전의 동해 보복 원칙을 결말로 해피엔딩으로 이야기가 끝난다.
<누가 대지의 여신 머리 위에 똥을 쌌을까? >
히말라야의 어원은 고대 인도의 산스크리트어로 눈(雪)을 뜻하는 히마(Hima)와 ‘보금자리’ 또는 ‘집’을 뜻하는 라야(laya)의 합성어이다. ‘눈의 집’, 즉 ‘만년설의 집’이라는 뜻이다. 지구상에 있는 8,000m 이상의 고봉 14개 모두가 히말라야에 있고, 그중 에베레스트(Mount Everest)는 높이가 해발 8,848.86m로 지구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티베트에서는 초모랑마(Chomo Lungma: 세계의 어머니 또는 성스러운 어머니)라는 이름으로 불리어 왔고, 네팔에서는 ‘하늘의 여신’이란 뜻을 가진 사가르마타(Sagarmatha)라고 부른다. 세계는 에버리스트 경(영어: Colonel Sir George Everest, 1790년 7월 4일~1866년 12월 1일)의 이름을 따서 에베레스트라 부른다. 그는 영국의 수리지리학자이자 측량사, 군인, 탐험가이다. 슬픈 제국주의가 준 이름이다.
하늘에서 가장 가까운 땅, 그곳에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지구 온난화로 눈이 녹자 곳곳에서 쓰레기, 시체, 텐트, 대소변으로 넘쳐난다. 누가 세상의 어머니 머리 위에 똥을 싼 것일까? 산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꿈의 산"이 쓰레기와 폐기물로 뒤덮여있다. 1953년 5월 29일 뉴질랜드 등반가 에드먼드 힐러리, 셰르파 텐징 노르가이가 에베레스트 정상을 처음 정상에 발을 올렸다. 이후 전 세계 수많은 원정대가 에베레스트로 향했다.
지구는 인간의 발길만 닿으면 망가진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쓰레기 산이 되어 버렸다. 기온이 낮아서 박테리아가 살지 못해 대소변이 분해가 안되어 그대로 얼어붙어있다. 등반대가 정상 등정 후 짐을 줄이기 위해 장비를 버리고 가서 산은 온통 쓰레기장이다. 지구에서 제일 높은 곳(에베레스트)도 제일 깊은 곳(마리아나해구)도 쓰레기 천지이다.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산을 가장 많이 망치고 있다. 에베레스트도 이제 배변 통 가지고 가지 않는 자는 받아주지 말아야 한다.
등반가들이 눈을 식수원으로 사용해야 하는데 잘못하면 똥물을 먹을 수 있게 된다. 캠프 3과 4 해발 8000m는 등반가들이 버린 텐트로 넘쳐난다. 연간 10톤의 쓰레기가 방치되고 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산은 정복해야 하는 게 아니라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수많은 텐트, 빈 산소 탱크, 비닐 등등 세계에서 가장 더러운 캠프이다. 셰르파들이 투입되어 수거하고는 있지만 한계가 있다.
우유팩 가지고 가서 대소변 담아와야 진짜 산을 사랑하는 것이다. 화산 폭발로 자연이 얼마나 무서운 줄 알아야 하는 건지? 쓰레기를 남기는 유일한 동물은 인간뿐이다. 등반도 일종의 중독이다. 가치를 어디에 두고 사느냐가 물론 중요하다. 하늘 아래 가장 가까운 땅에 발을 디디고 싶은 욕망은 누군가에게는 꼭 이루고 싶은 꿈이지만 누군가에겐 쓸모없는 짓으로 보일 수도 있다.
집 사고 가정 꾸리고 차 사는 것에만 의미를 두고 살아온 것은 아닐까? 헷갈린다. 위대한 도전에 찬사를 보낸다. 그러나 죽으면 또 다른 도전을 할 수 없다.
나는 왜 사는지 잘 모르겠다. 어쩌면 산정 높이 올라가는 두려움과 경이로움을 가슴에 담고 죽어간 저들이 진짜 살아있는 펄펄 뛰는 심장을 가진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시체, 쓰레기, 대소변으로 몸살을 앓는 눈의 여신은 인간을 어떻게 볼까?
당산 가듯 편안하게 가는 그들을 존경한다. 남편이 가고 싶어 하는 곳 중 하나이다. "에베레스트에서 죽고 싶어? " 라고 물어보았다.
"아니, 난 구경 하고 싶어! 보고 싶은 곳이 얼마나 많은데?"
위대한 여정을 통해 자신이 그토록 하던 일을 하다가 죽는 것은 누군가에겐 그토록 원하던 복상사 같은 행복한 죽음인지?
산 위에서 허덕이다 무의식 속에 옷을 벗어가면서 죽어가는 자들, 산소가 급격히 줄고 추위가 몰려오면 뇌는 갑자기 추위를 속이기 위해 덥다는 생각으로 모드를 급변경한다. 사람들은 뇌에 속아 옷을 벗어가면서 얼어 죽는다. 200구가 넘는 시체에는 이름이 주어져있다. 이들은 죽어서 이정표 같은 역할을 한다. 그린 부츠라는 이름도 있다. 죽은 시체의 주변을 지나간다는 것은 산악인들에게 가장 큰 고통이라고 했다.
내 한계를 넘어 보고 싶어서 가고 싶을 때가 가끔은 있다. 죽어도 행복한 그들! 데드존에서 사진 찍고 싶어서 대기하다 저 체온으로 죽어가는 이들도 있다. 4천 미터를 넘어가면 빨대로 숨을 쉬는 것 같다고 해 한번 시도해 봤는데 상당히 힘들다. 양심은 있는지 텐트에 이름이나 글자는 자르고 버리고 갔다.
산보다 명예를 사랑하는 사람들 때문에 산이 썩어가고 있다. 산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척하는 것일지도, 산을 정복하고 싶은 자들인 것 같기도 하다. 현지인들은 장비 없이 잘 다니고 고산병도 안 겪는다. 수시로 쓰레기 관리 좀 하지! 네팔 정부는 뭔지, 도대체 돈만 벌려는 것인지? 아무래도 눈사람 "예티"를 선도 반장으로 뽑아야겠다.
즐기는 자 치우는 자 물론 따로 있다. 4남매가 같이 자라면서 언제나 설거지는 아무것도 안 먹은 내 몫이었다. 쓰레기를 이제는 치워야 할 순간이다.
인간의 발이 닿은 곳은 어디나 더럽다. 희소성과 난이도 때문에 덤빈다. 세상을 순열로 매기는 것도 우습다. 지금은 상황이 바뀌어서 의미 없다. 많은 사람들이 가고 안전성도 높아졌다. 이제 더 이상 최초라는 타이틀과 높이 올라야 한다는 명성과 정복욕이 아니라 정말 산을 사랑하는 자만이 가야 한다. 이젠 정복이 아니라 정리하러 가야 한다.
20세기 영국의 전설적인 산악인 조지 허버트 리맬러리(George Herbert Leigh-Mallory, 1886년 6월 18일 ~ 1924년 6월 8일 또는 9일)는 산에서 죽어 산에 박제로 남아있다. 윈체스터 칼리지와 케임브리지 대학교에 다녔으며, 그 유명한 존 메이너드 케인스와는 친구 사이이다. 그가 과연 최초로 에베레스트를 등반했는지는 아직도 확인 불가능이다. 1924년에 산에서 실종되어서 1999년에 발견되었다.
맬러리는 "왜 에베레스트산을 오르려고 하는가"라는 질문에 "거기에 산이 있으니까(Because it is there)"라고 대답했다는 일화로 유명하다. 그는 아직도 거기에 있다. 야심한 겨울 밤길, 어머니 등에 꼭 매달린 어린아이처럼 그는 수십 년째 어머니 품 같은 거기에 있다.
언젠가 꼭 가고 싶었던 곳이 에베레스트였는데 이젠 사라져 버린 난지도나 쓰레기 매립지처럼 보인다. 크레바스는 삶에도 곳곳에 있었다. 산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고산병으로 손톱 발톱에 청색증이 보이고 숨이 차오른다. 머리가 깨질 것 같은 고통이 몰려온다. 비아그라도 매운 음식도 다 소용이 없다. 산소 농도가 적응될 때까지 난 여기서 참아야 한다. 여기저기 피어나는 연료인 야크 똥 냄새가 밀려온다. 날마다 난 평지인 여기에서 고산병을 앓는다. 거기가 거기라 난 갈 수 없다.
언젠가 거기에 가서 왜 길을 잃었는지? 에베레스트 정상이 얼마나 남았는지를 앤드루 코민 "샌디" 어빈(영어: Andrew Comyn "Sandy" Irvine, 1902년 4월 28일 ~ 1924년 6월 8일?, 영국의 산악인이며, 1924년 제3차 영국 에베레스트 원정대에 참석, 실종되었다.)에게 물어보고 싶다.
살아서 절친이었고 죽어서 함께 실종된 맬러리와 앤드루 어빈은 그래도 후회하지 않겠지! 각자만의 고통이 다르듯 기쁨도 다를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사랑하는 일을 하다 그곳에서 함께 잠들어 있을 뿐이다. 두 개의 영혼 사이의 불같은 뜨거운 고리를 난 보게 될 것이다. 내 몸이 사라지고 영혼만이 남아 쓰레기를 만들지 않는 순간이 온다면 꼭 거기에 가보리라! 그땐 산소통도 장비도 텐트도 아무것도 없이 셰르파처럼 쓰레빠신고 편안하게 거기에 가리라!
그런 순간이 온다면 삶에서 얻은 고산(苦産) 병은 절로 사라질 것이다. 정말 등반이나 정복욕이 아닌 높은 산정에 올라 당구대 만한 정상에서 고달팠던 눈의 어머니를 위로해 주고 한가득 쓰레기를 머리에 이고 가볍게 내려오리라!
에베레스트 정복은 영원히 불가능하다.
한번 올라선 것으로 정복했다고 자랑하고 사진 찍는 것은 인간의 욕망이 착각하는 것이다. 망가진 산의 침묵의 비명을 듣고 알았다. 추운 겨울밤, 홀로 돌고 있는 지구의 삐걱대는 축에 기름을 넣어주고 외로운 산허리를 백허그 해 주고 싶다. 까만 우주의 밤에 등불을 달아주고 신들을 가혹하다고 욕했던 나의 기만을 용서받으리라! 자연은 신성한 것이며 인간이 정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늘은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어차피 내려올 거 왜 올라가는 것인지? 어차피 죽을 인생 왜 사는 것인지? 답은 없다. 삶도 죽음도 언제나 핵노답이다.
어느 날 갑자기 하늘의 여신은 물을 것이다."누가 내 머리에 똥 쌌어?"라고..
세상의 모든 것들이 공부가 되는 새벽, 진정한 학문이란 삶에 대한 바른 이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