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는 산에 오르시어 군중 앞에서 참행복을 선언하신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제시하신 참행복의 기준이 세상의 기준과는 판이하다.
세상은 하느님에게서 행복을 찾지 않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에게서 참행복을 찾을 수 있다고 하시기 때문이다(복음).
오늘 복음에 소개된 가난한 사람들, 슬퍼하는 사람들, 박해받는 사람들은
인간적인 기준에 따를 때 결코 행복하게 보이지 않습니다.
도대체 어떤 근거에서 행복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이는 복음 정신 없이는 결코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복음 정신에 근거를 둔 행복의 기준이 무엇이겠습니까?
행복을 위한 첫 번째 조건은 절망과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비록 가난하거나
슬픈 상황에 놓여 있다 하더라도 절망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회 소속의 송봉모 신부의 글에 따르면,
『성경』 전체에는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이 365회 나옵니다.
이 말씀은 우리 인생에 놓인 어떤 장애물이나 어려움이 다 제거되었기 때문에
편안한 마음으로 살아가라는 뜻이 아닙니다.
비록 우리의 삶이 험난할지라도 주님께서 늘 함께하시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인간적인 안목의 행복의 기준은
헛된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구약 시대에 가장 성공한 임금으로 꼽히는 솔로몬은 지혜롭고 부유하여
인간적인 눈으로 보았을 때 그에게서 부족함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한 솔로몬이 『코헬렛』의 첫머리에서
“허무로다, 허무! 모든 것이 허무로다!”(1,2)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는 세상의 것으로는 온전한 만족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행복은 주님 안에서 희망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현실이 인간적인 눈에는 절망적이더라도
주님 안에서 행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신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소개된 이들이
'행복의 조건을 지녔기 때문에 행복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행복하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시니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예수님의 이 선언을 통하여 우리도 희망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진정
하느님의 위로를 받아본 이들은
그 슬픔의 끝을 알 수 있다네.
이 세상에서
큰 슬픔을 겪어본 이들은
그 슬픔의 끝자락에 맺혀있는
하느님의 은총과
인내의 골짜기마다 내밀고 계시는
하느님의 손길을
금방 찾아낼 수 있다네.
하느님의 위로를 받아본 이들은
그분께서 과연
우리에게 어떤 분이신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네.
- 김혜선 아녜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