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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은 금화산을 일구고 애오개, 만리재를 지나 용산에 이르니
2024년 7월 서울학교는 <안산과 용산 사이 역사유적들>
짙은 실록의 7월, 서울학교(교장 최연. 서울인문지리역사전문가) 제102강(제6기 제12강)은 연세대학교 뒤편의 안산(鞍山)에서 금화산, 용산(龍山)까지 이어지는 산줄기를 따라 그곳에 기대고 있는 많은 역사유적을 둘러볼 예정입니다. ▶참가신청 바로가기
아울러 서울학교 제6기 12강좌는 예고한 대로 이번 제102강으로 끝낼 예정이었으나 교장선생님이 새롭게 준비하신 <봉산에서 서오릉까지>와 <수원화성>의 두 답사코스를 추가로 더하고 마무리하겠습니다. 이후 회원님들의 성원과 요청에 따라 제7기 12강좌를 서울학교의 <마지막 강의>로 진행하고 대미를 찍을 예정입니다.
▲안산에서 금화산을 거쳐 용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서울학교
서울학교 제102강은 2024년 7월 14일(일요일) 열립니다. 이날 아침 9시까지, 서울 신촌 연세대 정문앞(서울시 서대문구 연세로 50) 왼쪽에서 모여 출발합니다(정시에 출발하니 출발시각을 꼭 지켜주세요).
이날 답사 코스는 다음과 같습니다.
연세대정문앞-수경원터(정자각/비각)-광혜원건물-연세대근대건축물(스팀슨관/아펜젤러관/언더우드관)-봉원사(아소정건물/가야사동종/한글학회창립터)-안산(동,서봉수대)-금화산-능안정-애오개/떡전고개-만리재-점심식사겸뒤풀이-효창원터(효창공원)-김구묘-삼의사묘역-임정요원묘역-왜명강화지처비(심원정터)
*현지 사정에 따라 코스가 일부 변경될 수 있습니다.
▲7월의 서울학교 답사도Ⓒ서울학교
*코로나19와 독감 관련, 안전하고 명랑한 답사가 되도록 출발 준비 중입니다. 참가회원님은 항상 실내 마스크 착용, 손소독, 거리두기를 잘 챙겨주시기 바랍니다. 발열·근육통·호흡기 증상이 있는 경우, 참가를 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7월 <안산과 용산 사이 역사유적들> 답사에 대해 들어봅니다.
안산의 줄기는 금화산을 일구고 애오개, 만리재를 지나 용산에 이릅니다.
안산(鞍山)은 한양도성을 이루는 내사산에는 들지 못하지만, 그 산세와 위치적인 조건이 한양도성에 지정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내사산 중 우백호에 해당하는 인왕산이 그 산줄기를 서쪽으로 뻗치면서 무악재에서 낮아졌다가 안산에서 솟구쳐 한줄기는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금화산을 일구고 아현(阿峴)으로 이어져 약현(藥峴)과 만리재를 지나 용산(龍山)에서 한강에 숨어들고, 다른 한줄기는 서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연세대학교의 서쪽을 감싸안고 신촌에서 동교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인 계당치(鷄堂峙)를 지나 홍익대학교 뒷산인 와우산(臥牛山)을 일으키고 양화진의 잠두봉(蠶頭峰)에서 한강으로 숨어듭니다.
풍수지리적으로 서울의 종조산(宗祖山)인 삼각산의 인수봉[負兒岳]이 어린애를 업고 있는 형상이라 아이가 어미 등을 뛰쳐나가면 위험하므로 이를 막기 위해 인수봉이 마주 바라보이는 안산에서 목멱산에 이르는 산줄기에 지명으로 비보책을 썼습니다.
안산을 무악(毋岳)이라 하여 뛰쳐나가지 말라[毋] 하고, 안산 동남쪽 끝자락에 있는 고개를 떡전고개[餠市峴]라 하여 떡[餠]으로 아이를 달래고, 목멱산 동쪽에 있는 고개를 벌아령(伐兒嶺, 버티고개)이라 하여 아이가 달아나면 혼[伐]내준다고 얼렀던 것입니다. 하지 말라 하고[毋岳], 떡으로 꾀이고[餠市峴], 혼내겠다고 얼러서[伐兒嶺] 어머니의 등에서 뛰쳐나가지 못하게 비보책을 썼습니다.
▲안산 정상에서 내려다 본 경성감옥(서대문형무소) 터Ⓒ서울학교
무악재는 중국 사신이 드나들던 중요한 길목이었습니다.
안산은 동, 서의 두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어 멀리서 보면 마치 말의 안장 즉, 길마와 같이 생겼다고 붙여진 이름으로, 그래서 현저동에서 홍제동을 넘는 고개를 예전에는 길마재 즉 안현(鞍峴)이라고 하였습니다만 지금은 공식적으로 무악재라고 부릅니다.
인왕산과 안산 사이에 있는 무악재는 황제의 나라 중국을 사대(事大)했던 제후의 나라 조선으로서는 황제의 사신이 드나들던 길목으로 매우 중요한 길이었습니다.
황제의 나라 사신들은 제후의 나라 관리들로부터 홍제원에서부터 접대를 받고 무악재를 넘어 모화관에 이르러 조선의 국왕과 문무백관의 영접을 받고 한양의 정문인 숭례문으로 도성에 들어와 궁궐 가까이에 있는 태평관에서 유숙하였습니다.
그래서 안산의 동쪽 자락에는 중국의 사신들을 영접하는 모화관과 그 입구에 영은문과 모화관에 딸린 연못인 서지(西池)가 있었습니다. 모화관은 원래는 누각 형식으로 지어져 모화루라 불렀으나 세종 때에 모화관으로 바꿔 불렀고 입구의 문은 원래 홍살문이었으나 중종 때 김안로의 건의에 따라 두 개의 기둥에 청기와를 덮어 격식 있는 문으로 거듭나서 영조문(迎詔門)이라 이름도 지었으나 3년 뒤에 명나라 사신 설정총의 제안으로 영은문이라 개칭하였으며, 서지에는 개성 숭교사의 연못에서 가져온 연꽃이 가득하였습니다. 이 터는 지금의 영천시장과 금화초등학교 일대입니다.
안산에는 동, 서에 두 개의 봉수대가 있었습니다.
안산의 두 봉우리는 각각 동봉수와 서봉수가 설치되어 있어 평안도와 황해도 길의 통신 임무를 맡았습니다.
동봉수는 평안도 강계에서 시작하여 육로를 따라 고양시 봉현을 거쳐 이곳에 이르러 목멱산 셋째 봉수로 전해졌고 서봉수는 평안도 의주에서 시작하여 해안을 따라 파주 교하를 거쳐 이곳에 이르러 목멱산의 넷째 봉수로 전달되었습니다.
지금은 동봉수대만 복원이 되어 있고 서봉수대는 통신회사의 철탑이 서 있으니 그것도 현대판 봉수임에는 틀림이 없는 것 같습니다.
안산 자락은 천도 후보지의 하나였습니다.
안산의 남쪽 자락은 태조 이성계가 개성에서 천도를 단행할 때 도읍지로 추천된 세 곳 중의 하나입니다. 고려 말 천도 예정지는 계룡산, 한양, 그리고 안산의 세 곳으로 경기도 관찰사 하륜은 안산을 적극적으로 주장하였습니다.
계룡산은 <정감록>에도 나와 있는 길지로서 제일 먼저 천도 후보지에 올라 도성 축성을 일정 부분 진행하였습니다만 그 위치가 나라 전체에 비추어 볼 때 너무 남서쪽에 치우쳐 있고, 도참사상에 의하면 계룡산 일대는 정씨가 도읍을 세우는 곳이라는 주장 때문에 10개월 만에 공사가 중단되어 기단 일부의 석축만 남아서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곳의 지명이 ‘새로운 도읍지’라는 뜻으로 신도안(新都案)으로 불리게 되었으나 이곳의 이름을 계룡대라 고쳐 부르며 육, 해, 공군의 참모부가 들어섰습니다.
다음으로 하륜이 주장한 안산 주산론은 이곳의 지형이 앞이 확 트여 한강으로 접근하기가 쉽고 한강은 바로 서해와 맞닿아 있어 해양 진출이 쉬워 도성으로서 적합하다는 생각이었습니다만 오히려 풍수지리적으로는 주산 앞에 안산(案山)이 있어 내룡한 기운이 어느 정도 맺혀야 그 기운을 받을 수가 있는데 이곳 지형이 막힘이 없기에 맺힘도 없어 풍수지리적으로는 길지가 되지 못하였습니다.
더욱이 성리학에 기초하여 나라를 세운 조선은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신분을 분명히 나누었는데 해상무역은 바로 가장 낮은 층인 상(商)에 해당함으로 그 직업을 천하게 여겼던 당시의 사정이 반영된 것이라고 보입니다.
역사적으로 백제, 신라, 고려는 동아시아의 해상왕국으로서, 백제는 중국의 동쪽 바닷가 도시에 백제원(百濟院)을 개척하였고 신라도 그 전통을 이어 신라방(新羅房)을 두었고 고려의 도읍 개성에서는 복식부기를 사용할 정도로 무역의 거래가 활발하였으나 조선에 이르러 성리학을 치국이념으로 삼았기 때문에 그 전통을 잇지 못하였습니다.
안산을 주산으로 삼으면 궁궐터는 연희동 입체교차로 어름일 것이고 좌청룡은 서강대 뒷산인 노고산, 우백호는 서대문 구청 건너편 백련산이 됩니다. 그러나 풍수지리적으로 터가 옹색하고 한강까지 훤히 트여 있어 산의 정기를 담아내지 못한다고 많은 신하가 반대하여 아쉽게도 그 뜻을 이루지는 못했습니다.
또한 안산은 한양도성을 쌓을 때 논란이 많았던 곳입니다. 지금의 한양도성은 우백호인 인왕산에서 바로 안산(案山)인 목멱산으로 이어져 있지만, 무학대사는 인왕산에서 무악재를 가로질러 안산으로 와서 금화산 지나 약현에서 목멱산과 이어지는 도성을 쌓자고 제안했는데 인왕산 자락에 있는 장삼 입은 승려 형상의 선바위가 도성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경계한 정도전의 반대로 성사되지는 못했습니다.
또한 무학은 한양의 좌청룡 산줄기의 허약함을 비보하려고 궁궐을 동향으로 하는 ‘인왕주산론’을 주장하였으나 <주례(周禮)>에 따라 군왕은 배북남면(背北南面)하여 통치하여야 해서 궁궐의 좌향은 반드시 남향을 할 수밖에 없다는 정도전의 주장에 힘을 잃고 말았습니다.
조선 초기에는 태조 때 계획을 세워 세종 때 준공한 이궁이 세 곳에 있었는데 동쪽에는 진접면의 풍양궁, 서쪽에는 연세대학교 부근의 연희궁, 남쪽에는 한양대 앞 살곶이다리 근처의 대산이궁이라 하는 낙천정입니다. 북쪽에 이궁이 없는 이유는 세 곳에 이궁이 설치되기 전부터 태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았던 잠저인 장의동 본궁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추측해 봅니다.
안산은 금화산을 일구고 애오개, 만리재를 지나 용산에 이르니
2024년 7월 서울학교는 <안산과 용산 사이 역사유적들>
짙은 실록의 7월, 서울학교(교장 최연. 서울인문지리역사전문가) 제102강(제6기 제12강)은 연세대학교 뒤편의 안산(鞍山)에서 금화산, 용산(龍山)까지 이어지는 산줄기를 따라 그곳에 기대고 있는 많은 역사유적을 둘러볼 예정입니다. ▶참가신청 바로가기
아울러 서울학교 제6기 12강좌는 예고한 대로 이번 제102강으로 끝낼 예정이었으나 교장선생님이 새롭게 준비하신 <봉산에서 서오릉까지>와 <수원화성>의 두 답사코스를 추가로 더하고 마무리하겠습니다. 이후 회원님들의 성원과 요청에 따라 제7기 12강좌를 서울학교의 <마지막 강의>로 진행하고 대미를 찍을 예정입니다.
▲안산에서 금화산을 거쳐 용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서울학교
서울학교 제102강은 2024년 7월 14일(일요일) 열립니다. 이날 아침 9시까지, 서울 신촌 연세대 정문앞(서울시 서대문구 연세로 50) 왼쪽에서 모여 출발합니다(정시에 출발하니 출발시각을 꼭 지켜주세요).
이날 답사 코스는 다음과 같습니다.
연세대정문앞-수경원터(정자각/비각)-광혜원건물-연세대근대건축물(스팀슨관/아펜젤러관/언더우드관)-봉원사(아소정건물/가야사동종/한글학회창립터)-안산(동,서봉수대)-금화산-능안정-애오개/떡전고개-만리재-점심식사겸뒤풀이-효창원터(효창공원)-김구묘-삼의사묘역-임정요원묘역-왜명강화지처비(심원정터)
*현지 사정에 따라 코스가 일부 변경될 수 있습니다.
▲7월의 서울학교 답사도Ⓒ서울학교
*코로나19와 독감 관련, 안전하고 명랑한 답사가 되도록 출발 준비 중입니다. 참가회원님은 항상 실내 마스크 착용, 손소독, 거리두기를 잘 챙겨주시기 바랍니다. 발열·근육통·호흡기 증상이 있는 경우, 참가를 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7월 <안산과 용산 사이 역사유적들> 답사에 대해 들어봅니다.
안산의 줄기는 금화산을 일구고 애오개, 만리재를 지나 용산에 이릅니다.
안산(鞍山)은 한양도성을 이루는 내사산에는 들지 못하지만, 그 산세와 위치적인 조건이 한양도성에 지정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내사산 중 우백호에 해당하는 인왕산이 그 산줄기를 서쪽으로 뻗치면서 무악재에서 낮아졌다가 안산에서 솟구쳐 한줄기는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금화산을 일구고 아현(阿峴)으로 이어져 약현(藥峴)과 만리재를 지나 용산(龍山)에서 한강에 숨어들고, 다른 한줄기는 서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연세대학교의 서쪽을 감싸안고 신촌에서 동교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인 계당치(鷄堂峙)를 지나 홍익대학교 뒷산인 와우산(臥牛山)을 일으키고 양화진의 잠두봉(蠶頭峰)에서 한강으로 숨어듭니다.
풍수지리적으로 서울의 종조산(宗祖山)인 삼각산의 인수봉[負兒岳]이 어린애를 업고 있는 형상이라 아이가 어미 등을 뛰쳐나가면 위험하므로 이를 막기 위해 인수봉이 마주 바라보이는 안산에서 목멱산에 이르는 산줄기에 지명으로 비보책을 썼습니다.
안산을 무악(毋岳)이라 하여 뛰쳐나가지 말라[毋] 하고, 안산 동남쪽 끝자락에 있는 고개를 떡전고개[餠市峴]라 하여 떡[餠]으로 아이를 달래고, 목멱산 동쪽에 있는 고개를 벌아령(伐兒嶺, 버티고개)이라 하여 아이가 달아나면 혼[伐]내준다고 얼렀던 것입니다. 하지 말라 하고[毋岳], 떡으로 꾀이고[餠市峴], 혼내겠다고 얼러서[伐兒嶺] 어머니의 등에서 뛰쳐나가지 못하게 비보책을 썼습니다.
▲안산 정상에서 내려다 본 경성감옥(서대문형무소) 터Ⓒ서울학교
무악재는 중국 사신이 드나들던 중요한 길목이었습니다.
안산은 동, 서의 두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어 멀리서 보면 마치 말의 안장 즉, 길마와 같이 생겼다고 붙여진 이름으로, 그래서 현저동에서 홍제동을 넘는 고개를 예전에는 길마재 즉 안현(鞍峴)이라고 하였습니다만 지금은 공식적으로 무악재라고 부릅니다.
인왕산과 안산 사이에 있는 무악재는 황제의 나라 중국을 사대(事大)했던 제후의 나라 조선으로서는 황제의 사신이 드나들던 길목으로 매우 중요한 길이었습니다.
황제의 나라 사신들은 제후의 나라 관리들로부터 홍제원에서부터 접대를 받고 무악재를 넘어 모화관에 이르러 조선의 국왕과 문무백관의 영접을 받고 한양의 정문인 숭례문으로 도성에 들어와 궁궐 가까이에 있는 태평관에서 유숙하였습니다.
그래서 안산의 동쪽 자락에는 중국의 사신들을 영접하는 모화관과 그 입구에 영은문과 모화관에 딸린 연못인 서지(西池)가 있었습니다. 모화관은 원래는 누각 형식으로 지어져 모화루라 불렀으나 세종 때에 모화관으로 바꿔 불렀고 입구의 문은 원래 홍살문이었으나 중종 때 김안로의 건의에 따라 두 개의 기둥에 청기와를 덮어 격식 있는 문으로 거듭나서 영조문(迎詔門)이라 이름도 지었으나 3년 뒤에 명나라 사신 설정총의 제안으로 영은문이라 개칭하였으며, 서지에는 개성 숭교사의 연못에서 가져온 연꽃이 가득하였습니다. 이 터는 지금의 영천시장과 금화초등학교 일대입니다.
안산에는 동, 서에 두 개의 봉수대가 있었습니다.
안산의 두 봉우리는 각각 동봉수와 서봉수가 설치되어 있어 평안도와 황해도 길의 통신 임무를 맡았습니다.
동봉수는 평안도 강계에서 시작하여 육로를 따라 고양시 봉현을 거쳐 이곳에 이르러 목멱산 셋째 봉수로 전해졌고 서봉수는 평안도 의주에서 시작하여 해안을 따라 파주 교하를 거쳐 이곳에 이르러 목멱산의 넷째 봉수로 전달되었습니다.
지금은 동봉수대만 복원이 되어 있고 서봉수대는 통신회사의 철탑이 서 있으니 그것도 현대판 봉수임에는 틀림이 없는 것 같습니다.
안산 자락은 천도 후보지의 하나였습니다.
안산의 남쪽 자락은 태조 이성계가 개성에서 천도를 단행할 때 도읍지로 추천된 세 곳 중의 하나입니다. 고려 말 천도 예정지는 계룡산, 한양, 그리고 안산의 세 곳으로 경기도 관찰사 하륜은 안산을 적극적으로 주장하였습니다.
계룡산은 <정감록>에도 나와 있는 길지로서 제일 먼저 천도 후보지에 올라 도성 축성을 일정 부분 진행하였습니다만 그 위치가 나라 전체에 비추어 볼 때 너무 남서쪽에 치우쳐 있고, 도참사상에 의하면 계룡산 일대는 정씨가 도읍을 세우는 곳이라는 주장 때문에 10개월 만에 공사가 중단되어 기단 일부의 석축만 남아서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곳의 지명이 ‘새로운 도읍지’라는 뜻으로 신도안(新都案)으로 불리게 되었으나 이곳의 이름을 계룡대라 고쳐 부르며 육, 해, 공군의 참모부가 들어섰습니다.
다음으로 하륜이 주장한 안산 주산론은 이곳의 지형이 앞이 확 트여 한강으로 접근하기가 쉽고 한강은 바로 서해와 맞닿아 있어 해양 진출이 쉬워 도성으로서 적합하다는 생각이었습니다만 오히려 풍수지리적으로는 주산 앞에 안산(案山)이 있어 내룡한 기운이 어느 정도 맺혀야 그 기운을 받을 수가 있는데 이곳 지형이 막힘이 없기에 맺힘도 없어 풍수지리적으로는 길지가 되지 못하였습니다.
더욱이 성리학에 기초하여 나라를 세운 조선은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신분을 분명히 나누었는데 해상무역은 바로 가장 낮은 층인 상(商)에 해당함으로 그 직업을 천하게 여겼던 당시의 사정이 반영된 것이라고 보입니다.
역사적으로 백제, 신라, 고려는 동아시아의 해상왕국으로서, 백제는 중국의 동쪽 바닷가 도시에 백제원(百濟院)을 개척하였고 신라도 그 전통을 이어 신라방(新羅房)을 두었고 고려의 도읍 개성에서는 복식부기를 사용할 정도로 무역의 거래가 활발하였으나 조선에 이르러 성리학을 치국이념으로 삼았기 때문에 그 전통을 잇지 못하였습니다.
안산을 주산으로 삼으면 궁궐터는 연희동 입체교차로 어름일 것이고 좌청룡은 서강대 뒷산인 노고산, 우백호는 서대문 구청 건너편 백련산이 됩니다. 그러나 풍수지리적으로 터가 옹색하고 한강까지 훤히 트여 있어 산의 정기를 담아내지 못한다고 많은 신하가 반대하여 아쉽게도 그 뜻을 이루지는 못했습니다.
또한 안산은 한양도성을 쌓을 때 논란이 많았던 곳입니다. 지금의 한양도성은 우백호인 인왕산에서 바로 안산(案山)인 목멱산으로 이어져 있지만, 무학대사는 인왕산에서 무악재를 가로질러 안산으로 와서 금화산 지나 약현에서 목멱산과 이어지는 도성을 쌓자고 제안했는데 인왕산 자락에 있는 장삼 입은 승려 형상의 선바위가 도성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경계한 정도전의 반대로 성사되지는 못했습니다.
또한 무학은 한양의 좌청룡 산줄기의 허약함을 비보하려고 궁궐을 동향으로 하는 ‘인왕주산론’을 주장하였으나 <주례(周禮)>에 따라 군왕은 배북남면(背北南面)하여 통치하여야 해서 궁궐의 좌향은 반드시 남향을 할 수밖에 없다는 정도전의 주장에 힘을 잃고 말았습니다.
조선 초기에는 태조 때 계획을 세워 세종 때 준공한 이궁이 세 곳에 있었는데 동쪽에는 진접면의 풍양궁, 서쪽에는 연세대학교 부근의 연희궁, 남쪽에는 한양대 앞 살곶이다리 근처의 대산이궁이라 하는 낙천정입니다. 북쪽에 이궁이 없는 이유는 세 곳에 이궁이 설치되기 전부터 태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았던 잠저인 장의동 본궁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추측해 봅니다.
안산은 금화산을 일구고 애오개, 만리재를 지나 용산에 이르니
2024년 7월 서울학교는 <안산과 용산 사이 역사유적들>
짙은 실록의 7월, 서울학교(교장 최연. 서울인문지리역사전문가) 제102강(제6기 제12강)은 연세대학교 뒤편의 안산(鞍山)에서 금화산, 용산(龍山)까지 이어지는 산줄기를 따라 그곳에 기대고 있는 많은 역사유적을 둘러볼 예정입니다. ▶참가신청 바로가기
아울러 서울학교 제6기 12강좌는 예고한 대로 이번 제102강으로 끝낼 예정이었으나 교장선생님이 새롭게 준비하신 <봉산에서 서오릉까지>와 <수원화성>의 두 답사코스를 추가로 더하고 마무리하겠습니다. 이후 회원님들의 성원과 요청에 따라 제7기 12강좌를 서울학교의 <마지막 강의>로 진행하고 대미를 찍을 예정입니다.
▲안산에서 금화산을 거쳐 용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서울학교
서울학교 제102강은 2024년 7월 14일(일요일) 열립니다. 이날 아침 9시까지, 서울 신촌 연세대 정문앞(서울시 서대문구 연세로 50) 왼쪽에서 모여 출발합니다(정시에 출발하니 출발시각을 꼭 지켜주세요).
이날 답사 코스는 다음과 같습니다.
연세대정문앞-수경원터(정자각/비각)-광혜원건물-연세대근대건축물(스팀슨관/아펜젤러관/언더우드관)-봉원사(아소정건물/가야사동종/한글학회창립터)-안산(동,서봉수대)-금화산-능안정-애오개/떡전고개-만리재-점심식사겸뒤풀이-효창원터(효창공원)-김구묘-삼의사묘역-임정요원묘역-왜명강화지처비(심원정터)
*현지 사정에 따라 코스가 일부 변경될 수 있습니다.
▲7월의 서울학교 답사도Ⓒ서울학교
*코로나19와 독감 관련, 안전하고 명랑한 답사가 되도록 출발 준비 중입니다. 참가회원님은 항상 실내 마스크 착용, 손소독, 거리두기를 잘 챙겨주시기 바랍니다. 발열·근육통·호흡기 증상이 있는 경우, 참가를 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7월 <안산과 용산 사이 역사유적들> 답사에 대해 들어봅니다.
안산의 줄기는 금화산을 일구고 애오개, 만리재를 지나 용산에 이릅니다.
안산(鞍山)은 한양도성을 이루는 내사산에는 들지 못하지만, 그 산세와 위치적인 조건이 한양도성에 지정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내사산 중 우백호에 해당하는 인왕산이 그 산줄기를 서쪽으로 뻗치면서 무악재에서 낮아졌다가 안산에서 솟구쳐 한줄기는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금화산을 일구고 아현(阿峴)으로 이어져 약현(藥峴)과 만리재를 지나 용산(龍山)에서 한강에 숨어들고, 다른 한줄기는 서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연세대학교의 서쪽을 감싸안고 신촌에서 동교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인 계당치(鷄堂峙)를 지나 홍익대학교 뒷산인 와우산(臥牛山)을 일으키고 양화진의 잠두봉(蠶頭峰)에서 한강으로 숨어듭니다.
풍수지리적으로 서울의 종조산(宗祖山)인 삼각산의 인수봉[負兒岳]이 어린애를 업고 있는 형상이라 아이가 어미 등을 뛰쳐나가면 위험하므로 이를 막기 위해 인수봉이 마주 바라보이는 안산에서 목멱산에 이르는 산줄기에 지명으로 비보책을 썼습니다.
안산을 무악(毋岳)이라 하여 뛰쳐나가지 말라[毋] 하고, 안산 동남쪽 끝자락에 있는 고개를 떡전고개[餠市峴]라 하여 떡[餠]으로 아이를 달래고, 목멱산 동쪽에 있는 고개를 벌아령(伐兒嶺, 버티고개)이라 하여 아이가 달아나면 혼[伐]내준다고 얼렀던 것입니다. 하지 말라 하고[毋岳], 떡으로 꾀이고[餠市峴], 혼내겠다고 얼러서[伐兒嶺] 어머니의 등에서 뛰쳐나가지 못하게 비보책을 썼습니다.
▲안산 정상에서 내려다 본 경성감옥(서대문형무소) 터Ⓒ서울학교
무악재는 중국 사신이 드나들던 중요한 길목이었습니다.
안산은 동, 서의 두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어 멀리서 보면 마치 말의 안장 즉, 길마와 같이 생겼다고 붙여진 이름으로, 그래서 현저동에서 홍제동을 넘는 고개를 예전에는 길마재 즉 안현(鞍峴)이라고 하였습니다만 지금은 공식적으로 무악재라고 부릅니다.
인왕산과 안산 사이에 있는 무악재는 황제의 나라 중국을 사대(事大)했던 제후의 나라 조선으로서는 황제의 사신이 드나들던 길목으로 매우 중요한 길이었습니다.
황제의 나라 사신들은 제후의 나라 관리들로부터 홍제원에서부터 접대를 받고 무악재를 넘어 모화관에 이르러 조선의 국왕과 문무백관의 영접을 받고 한양의 정문인 숭례문으로 도성에 들어와 궁궐 가까이에 있는 태평관에서 유숙하였습니다.
그래서 안산의 동쪽 자락에는 중국의 사신들을 영접하는 모화관과 그 입구에 영은문과 모화관에 딸린 연못인 서지(西池)가 있었습니다. 모화관은 원래는 누각 형식으로 지어져 모화루라 불렀으나 세종 때에 모화관으로 바꿔 불렀고 입구의 문은 원래 홍살문이었으나 중종 때 김안로의 건의에 따라 두 개의 기둥에 청기와를 덮어 격식 있는 문으로 거듭나서 영조문(迎詔門)이라 이름도 지었으나 3년 뒤에 명나라 사신 설정총의 제안으로 영은문이라 개칭하였으며, 서지에는 개성 숭교사의 연못에서 가져온 연꽃이 가득하였습니다. 이 터는 지금의 영천시장과 금화초등학교 일대입니다.
안산에는 동, 서에 두 개의 봉수대가 있었습니다.
안산의 두 봉우리는 각각 동봉수와 서봉수가 설치되어 있어 평안도와 황해도 길의 통신 임무를 맡았습니다.
동봉수는 평안도 강계에서 시작하여 육로를 따라 고양시 봉현을 거쳐 이곳에 이르러 목멱산 셋째 봉수로 전해졌고 서봉수는 평안도 의주에서 시작하여 해안을 따라 파주 교하를 거쳐 이곳에 이르러 목멱산의 넷째 봉수로 전달되었습니다.
지금은 동봉수대만 복원이 되어 있고 서봉수대는 통신회사의 철탑이 서 있으니 그것도 현대판 봉수임에는 틀림이 없는 것 같습니다.
안산 자락은 천도 후보지의 하나였습니다.
안산의 남쪽 자락은 태조 이성계가 개성에서 천도를 단행할 때 도읍지로 추천된 세 곳 중의 하나입니다. 고려 말 천도 예정지는 계룡산, 한양, 그리고 안산의 세 곳으로 경기도 관찰사 하륜은 안산을 적극적으로 주장하였습니다.
계룡산은 <정감록>에도 나와 있는 길지로서 제일 먼저 천도 후보지에 올라 도성 축성을 일정 부분 진행하였습니다만 그 위치가 나라 전체에 비추어 볼 때 너무 남서쪽에 치우쳐 있고, 도참사상에 의하면 계룡산 일대는 정씨가 도읍을 세우는 곳이라는 주장 때문에 10개월 만에 공사가 중단되어 기단 일부의 석축만 남아서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곳의 지명이 ‘새로운 도읍지’라는 뜻으로 신도안(新都案)으로 불리게 되었으나 이곳의 이름을 계룡대라 고쳐 부르며 육, 해, 공군의 참모부가 들어섰습니다.
다음으로 하륜이 주장한 안산 주산론은 이곳의 지형이 앞이 확 트여 한강으로 접근하기가 쉽고 한강은 바로 서해와 맞닿아 있어 해양 진출이 쉬워 도성으로서 적합하다는 생각이었습니다만 오히려 풍수지리적으로는 주산 앞에 안산(案山)이 있어 내룡한 기운이 어느 정도 맺혀야 그 기운을 받을 수가 있는데 이곳 지형이 막힘이 없기에 맺힘도 없어 풍수지리적으로는 길지가 되지 못하였습니다.
더욱이 성리학에 기초하여 나라를 세운 조선은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신분을 분명히 나누었는데 해상무역은 바로 가장 낮은 층인 상(商)에 해당함으로 그 직업을 천하게 여겼던 당시의 사정이 반영된 것이라고 보입니다.
역사적으로 백제, 신라, 고려는 동아시아의 해상왕국으로서, 백제는 중국의 동쪽 바닷가 도시에 백제원(百濟院)을 개척하였고 신라도 그 전통을 이어 신라방(新羅房)을 두었고 고려의 도읍 개성에서는 복식부기를 사용할 정도로 무역의 거래가 활발하였으나 조선에 이르러 성리학을 치국이념으로 삼았기 때문에 그 전통을 잇지 못하였습니다.
안산을 주산으로 삼으면 궁궐터는 연희동 입체교차로 어름일 것이고 좌청룡은 서강대 뒷산인 노고산, 우백호는 서대문 구청 건너편 백련산이 됩니다. 그러나 풍수지리적으로 터가 옹색하고 한강까지 훤히 트여 있어 산의 정기를 담아내지 못한다고 많은 신하가 반대하여 아쉽게도 그 뜻을 이루지는 못했습니다.
또한 안산은 한양도성을 쌓을 때 논란이 많았던 곳입니다. 지금의 한양도성은 우백호인 인왕산에서 바로 안산(案山)인 목멱산으로 이어져 있지만, 무학대사는 인왕산에서 무악재를 가로질러 안산으로 와서 금화산 지나 약현에서 목멱산과 이어지는 도성을 쌓자고 제안했는데 인왕산 자락에 있는 장삼 입은 승려 형상의 선바위가 도성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경계한 정도전의 반대로 성사되지는 못했습니다.
또한 무학은 한양의 좌청룡 산줄기의 허약함을 비보하려고 궁궐을 동향으로 하는 ‘인왕주산론’을 주장하였으나 <주례(周禮)>에 따라 군왕은 배북남면(背北南面)하여 통치하여야 해서 궁궐의 좌향은 반드시 남향을 할 수밖에 없다는 정도전의 주장에 힘을 잃고 말았습니다.
조선 초기에는 태조 때 계획을 세워 세종 때 준공한 이궁이 세 곳에 있었는데 동쪽에는 진접면의 풍양궁, 서쪽에는 연세대학교 부근의 연희궁, 남쪽에는 한양대 앞 살곶이다리 근처의 대산이궁이라 하는 낙천정입니다. 북쪽에 이궁이 없는 이유는 세 곳에 이궁이 설치되기 전부터 태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았던 잠저인 장의동 본궁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추측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