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효과학의 결정체 김치
글 - 대순진리회 여주본부도장 교무부
농번기가 한창인 이 무렵, 한낮의 땡볕에서 일을 하던 농군들이 잠시나마 나무 그늘에 앉아 휴식을 청한다. 어느새 도착한 새참에 삼삼오오 모여 앉아 시원한 막걸리 한 사발 단숨에 들이키고, 묵은 김치 한 젓가락을 입에 넣으면 갈증과 피로가 단숨에 사라진다. 더욱이 햇빛이 강한 오후에 온몸이 땀으로 뒤범벅이 되었을 때, 깊고 개운한 맛이 일품인 열무김치를 살얼음 되게 살짝 얼려 여기에다 국수를 말아먹으면 땡볕에 그을린 입맛 걱정은 끝이다. 이렇게 김치는 우리 삶과 결코 뗄 수 없는 사이인 듯하다. 오죽하면 김치 없이는 정말 못산다는 노랫말까지 있으니 말이다. 현대에 와서는 과학적인 발효 식품이라는 칭송을 받고 있는 김치, 더 놀라운 것은 세계 5대 식품(스페인의 올리브유, 그리스의 요구르트, 인도의 렌틸콩, 일본의 콩식품, 우리나라의 김치)으로 선정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의 전통음식인 김치, 그 김치 속의 숨은 발효과학 이야기에 접근해보자.
끊임없이 변화해 온 김치 01
김치는 우리 민족에게 밥만큼이나 중요한 음식이다. 예로부터 김치는 조상들이 겨울에 채소를 오래 보관해 두고 먹기 위해 만든 음식이다. 오늘날 우리가 쓰고 있는 김치란 말이 생기기까지는 여러 단계의 변화가 있었다. 상고시대 김치류를 총칭하는 고유의 옛말은 ‘지’였다. 예전 김치를 짠지·묵은지 할 때의 지가 그것이다. 그 지가 한자가 들어오면서 ‘침채(沈菜)’·‘팀채’가 되고, 다시 ‘딤채’로 발음 되었고, 이 딤채는 오늘날의 ‘김치’가 되었다.
그렇다면 예전에는 어떤 김치를 먹었을까. 『삼국사기』에 신라(新羅) 신문왕이 683년 왕비를 맞이하면서 음식을 준비하는데, 그 중 장아찌나 짠지처럼 소금에 절인 단순한 초기 김치류를 먹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리고 고려(高麗)의 문인 이규보가 지은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는 “순무를 장에 넣으면 여름철에 먹기 좋고, 청염(알이 굵고 거친 천일염)에 절이면 겨우내 먹을 수 있다”는 구절이 나온다. 여기서 청염에 절인 순무란 동치미와 같은 형태로, 숙성과정에서 생성된 독특한 국물이 무와 곁들여지는 김치류이다. 이러한 장아찌·짠지·순무 등과 같은 단순한 김치류가 조선 초까지 유래되었다.
하지만 조선(朝鮮) 중기에 고추가 들어오면서 김치에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지금껏 김치에 젓갈만 넣으면 상해서 비린내가 날 수도 있는데, 고추를 함께 넣으면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더욱이 요리법의 변화를 주면서 김치의 가짓수도 끝없이 늘어났고, 계절 따라 고장 따라 여러 가지 김치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순무 대신 댓무가 쓰였고, 배추가 주재료로 각광받기 시작했다. 그래서 단순한 절임식의 김치에 고추·파·마늘·생강과 같은 양념과 젓갈·해산물을 함께 버무려 담금으로써 오늘날과 같은 김치의 모양이 갖추어져 더욱 발전된 모습으로 전승되었다.
김치 속의 발효과학 02
김치는 자연발효를 통한 독특한 감칠맛과 건강에 좋은 여러 가지 효능들이 과학적으로 증명되면서, 세계 곳곳에서 사랑받는 음식이 되었다. 그래서인지 발효과학의 결정체라 불릴 정도로 웰빙 음식의 대표주자로 각광 받고 있다. 그렇다면 김치 속의 발효과학이란 어떤 것일까?
김치를 담그기 전에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주재료인 배추를 소금으로 절이는 것이다. 여기에 삼투압(透壓)의 원리가 적용되어 있다. 삼투는 농도가 다른 두 액체를 막아놓을 때 농도가 낮은 쪽의 액체가 높은 쪽으로 이동하면서 평형이 이뤄지는 현상이다. 즉 채소를 고농도의 용액인 소금물에 담가놓으면 채소조직 속의 수분이 빠져 나옴으로써 활성 세포들의 숨이 죽는다. 이 때문에 배추를 소금에 절이는 것을 ‘배추의 숨을 죽인다’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채소의 숨이 죽으면 배추에 간이 배어든다. 그리고 자연발생적으로 다량의 젖산균이 생성된다. 이를 젖산발효 또는 유산발효라고 한다. 젖산은 부패 변질을 초래하는 다른 유해한 잡균의 발육을 억제하며, 김치의 독특한 향미를 만들어낸다. 이때 유해한 세균을 죽이는 유산균이 바로 ‘루코노스톡 김치 아이’이다. 우리나라 김치에만 들어 있는 유산균으로서 식중독균인 살모넬라균을 억제하고, 위염의 원인균인 헬리코박터를 억제시킬 수 있는 강한 힘을 갖고 있다.
김치의 발효 과정을 도와주는 숨은 공신을 말하라면 단연 젓갈과 고추를 손꼽을 수 있다. 젓갈은 김치의 숙성을 촉진시키고 특유의 감칠맛을 낸다. 고추는 김치가 쉽게 물러지는 것을 방지한다. 백김치가 일반 김치보다 잘 물러지는 이유다.
한편 우리 조상들이 김치를 저장하는데 이용한 옹기도 김치의 발효를 돕는다. 옹기 파편을 현미경으로 살펴보면 숨구멍이 있는데, 공기는 투과되면서 물은 투과할 수 없을 정도로 작아서 외부의 맑은 산소를 옹기 내의 내용물에 지속적으로 공급한다. 또한 안과 밖의 공기를 잘 통하게 해서 음식의 신선도를 오랫 동안 유지하면서 천천히 발효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렇게 김치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각종 화학반응 덕분에 비타민과 유기산 등 유익한 성분이 풍부하게 함유돼 있다. 따라서 김치는 배추와 양념이 단순하게 버무려진 음식이 아닌, 미생물의 활동에 의해 복합적인 발효 반응이 일어나는 과학적 음식이다.
김치의 숨은 힘 03
최근 미국 건강전문 월간지 『헬스』는 김치에 대해 비타민이 풍부하고 소화를 돕는 유산균이 요구르트에 비해 더 많은 양을 함유하고 있으며, 섬유질이 많은 저지방 다이어트 식품이라고 평가했다.
또한 김치에 들어 있는 고추의 매운 성분이 스트레스 해소에 도움이 된다고 한다. 몇 해 전, 일본에서는 스트레스를 해소해 준다는 건강기능성 식품이 출시되어 큰 인기를 끌은 적이 있었다. 그 기능성 식품의 재료가 바로 김치였다. 그리고 김치를 담그는 과정과 숙성 과정에서 채소의 맹독 성분이 제거된다고 한다. 소금 자체의 세정능력과 숙성과정에서 발생되는 특이한 화학적 변화가 잔류농약을 소멸 촉진시킨다는 것이다.
더욱이 김치가 항암효과를 지니고 있다는 것은 이미 밝혀진 사실이다. 김치의 주재료로 이용되는 배추 등의 채소는 대장암을 예방해 주고, 김치의 재료로 꼭 들어가는 마늘은 위암을 예방해 준다. 뿐만 아니라 김치는 베타카로틴의 함량이 비교적 높아 폐암을 예방하고, 고추의 매운 성분이 폐 표면에 붙어 있는 니코틴을 제거해 주기도 한다. 이와 함께 김치 추출물은 인체 암세포의 증식률을 50% 줄이는 것으로 연구결과 나타났다.
한국의 김치가 다시금 전세계에 조명을 받게 된 것은 몇 년 전 아시아를 강타한 사스(SARS :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 때문이었다. 같은 아시아권임에도 한국에선 단 한 명의 사스 환자도 발생하지 않자, 미국의 질병통제센터에서 조사에 착수한 적이 있었다. 조사 결과, 한국에 일곱 번 사스가 들어오긴 했는데, 단 한 번도 전염된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한국인의 매운 음식인 김치에 사스 균을 억제하는 성분이 다량으로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외에도 김치가 조류독감을 일정한 부분 억제를 시켰다는 것, 식중독을 예방할 수 있다는 것, 숙성 과정에 생성된 유산균(젖산균)이 장을 깨끗이 하는 정장작용을 한다는 것, 혈중에 있는 나쁜 콜레스테롤을 떨어뜨려서 각종 성인병의 예방 및 치료 등이 입증되었다.
우리 민족의 위대한 발효 음식인 김치. 이렇듯 김치는 우리 조상들의 지혜의 결정체이기도 하다. 그리고 김치는 이제 더 이상 우리나라만의 음식이 아니라 전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고 있다. 맛과 영양뿐만 아니라 건강 면에서도 뛰어난 김치의 우수성을 세계인들이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등잔 밑이 어둡다’는 속담처럼 우리는 정작 우리 음식의 우수성을 잊고 살아가는 듯하다. 오늘 저녁이라도 식탁에 국수에다 살짝 얼려둔 열무김치를 넣고, 항아리에서 막 꺼낸 묵은 김치에 두툼하게 삶은 삼겹살을 얹어 먹어 보는 것이 어떨까 싶다.
01 풀무원 김치박물관 자료실(http://www.kimchimuseum.co.kr) / 유애령, 『식 문화의 뿌리를 찾아서』, 교보문고, 1997. 참조
02 『과학동아』, 2002년 12월호 참조
03 MBC다큐멘터리 3부작 『곰팡이』 「발효가 사람을 살린다」편, 2005년 3월 방영. 참조
출처 - 대순진리회 여주본부도장 대순회보 84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