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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가는 길에서 만난 조강지처 (糟糠之妻)
뜻별 예문
조강지처 (糟糠之妻)
'지게미와 쌀 겨로 끼니를 이을 때의 아내' 라는 뜻으로,
곧 몹시 가난하고 비천할 때에 고생을 함께 겪어 온 아내를 이르는 말.
《후한 서(後漢書)》 <송홍전(宋弘傳)>에서 나온 말이라 합니다.
제가 이 말을 처음 들은 게 아니고. 처음 결혼했을 당시 귀에 딱지가 붙을 만큼 외우며 살던 사람입니다.
그런 제가 지금 이 말을 이야기 제목으로 삼고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저는 이제 '어찌해야 합니까"
"여러분은 저의 이런 생각에 어떤 생각을 가지시는 지 알고 싶어서 입니다."
저는 이미 "3 혼의 아픔을 딛고 살았습니다(나의 이야기 29)로 찾아 뵈었던 사람으로서,
지금 이 글로 여러분의 조언을 들으려 한다는 것 자체가 남의 일에 무슨 관심이 있으실까 생각도 해 봅니다.
1956년 고등학교 1학년 때 충청도에 사는 친구가 제 짝꿍이 되었습니다. 정 정원.
그와 가까이 지내던 어느 날 "친구 야. 이번 토요일 우리 집에 같이 가자." 하더군요.
친구의 요청에 친구네 사정도 궁금하여 당시에는 군산에서 충청도 화양까지 하루에 한번 가는 여객선을 타고
갔습니다.
아버님이 한의사이셨는데 친구가 미리 제 이야기를 많이 했던 지 아주 반갑게 맞아 주셨습니다.
그 후 가끔 가게 되면서 친구의 당 고모였던 나의 첫사랑이 된 지향(芝香)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예쁜 모습에 내가 바로 마음이 꽂혔습니다. 친구와 동창 생으로 저보다는 두 살이 아래였지만 제가 늦게 학교에
다니는 관계로 같은 학년이었습니다. 점차 가는 횟수가 많아지고 갈 때마다 지향의 부모님은 저를 집에 초대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렇게 사랑이 익어가는 중에 지향의 아버님이 간암으로 일찍이 소천(召天)하셨는데 그간 학교, 면 사무소,
파출소에서 부여하는 여러 요직을 맡아 봉사하시다가 갑자기 소천 하시는 바람에 가산이 급격히 내려 앉아 형편이
매우 어렵게 되어 지향은 학교마저 중단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저는 원래 가난한 집안 태생이라 1년 쉬다가 중학교에 갔지만 매일 왕복 80 리를 걸어 다녀야 했으며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는 대학을 가지 못하는 충격으로 극단적 선택을 하는 아픔까지 겪어야 했습니다.
그 때 병원에 입원하고 있을 때 유일하게 보고 싶은 사람이 지향이어서 아버님께 말씀 드렸더니, 아들을 위해
아버님이 찾아가 사정을 얘기하고 오기를 바랬으나, 거절을 당하고 오셨는데, 지향은 이미 집안 형편으로 일찍
정혼한 상태여서 거절한 사실을 나중에서 야 알고 남이 되고 말았습니다. 가난이 갈라 놓은 경우였습니다.
1년 후 무작정 상경한 운이 천운으로 기회가 되어 대학을 졸업하고, 군에 자원 입대하여 군 복무 중 상병 때 휴가
나와 친구 정원 이를 만난 게 운명의 갈림을 만들고 말았습니다. 친구를 만나자 자연스럽게 지향 이의 안부 이야
기가 나왔고 지향(芝香)이는 이혼하려 집에 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까맣게 잊었던 사랑에 불이 당겨지더군요. 결국 저의 요청에 의해 군산에서 지향을 보는 순간 저는 그만 놀라고
말았습니다.
나와 헤어지고 시집 간 지 6년 차였는데 지향은 중년의 여인으로 변해 있었고 선생님의 아내였는데 차리고 나온
모습을 보고 지향이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습니다.
만남에서 사랑을 다시 찾아주고 나는 귀대(歸隊) 하였지만 온통 지향 생각으로 모든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마음을 달래려 지향에 대한 사랑 이야기 일기를 쓰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일기는 지금도 보관하고 있습니다.
그러던 중 1966년 4월 10일 제가 상병 때 지향은 결혼해서 낳은 5살 된 딸을 데리고 저의 근무지 강원도에 왔습니다.
그때는 지금처럼 즉시 연락할 수단도 없을 때이기에 이혼을 하고 전연 연락도 없이 갑자기 오는 바람에 깜짝 놀랐지만
육군 상병의 몸인 저에게 왔으니 당장 살 일이 걱정이었고 또 부모님에게는 어떻게 말씀 드려 양해를 구해야 하는
걱정이 있었지만, 인연이었던 지 결혼해서 둘째 아이가 생기지 안 했던 사람이 저와 만나자 저의 첫 아기가 잉태되
었습니다.
그해 12월 말 일로 제대를 앞두고 저는 지향을 먼저 고향 집으로 가게 했습니다.
상상이 되십니까? 자식이 목숨이 오고 갈 때 내 자식 살리는 마음으로 한번 올 수 없느냐며 아버님이 배를 빌려
충청도를 찾아가 청했을 때 응하지 안 했던 사람이, 며느리가 되어 배가 불러 나타났으니 시골에서 얼마나 큰 소동이
일었고 부모님은 얼마나 황당해 하셨을까 짐작이 됩니까? 더구나 5 살 먹은 아이까지 데리고 나타났으니 그 소동은
짐작이 가리라 봅니다.
이듬 해 직장을 얻고 아내를 서울로 데려와 살림을 시작했습니다. 1968년 5월 입니다. 저의 월급이 8500원이었는데
6만 원 짜리 전세 방으로 시작한 신혼 살림이었습니다. 이미 저에게는 큰 딸이 태어나 한 살일 때입니다. 쥐꼬리 만한
월급에 단 칸 방에 고등학교 다니는 처남을 데리고 살았습니다. 상상이 되십니까? 정말 바닥 살림이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삶이 7번의 전세 집을 전전하며 살았고 마지막 7번째 전세 집에서 내 집을 장만하여 이사할 때 짐이
리어커로 옮겨도 되는 살림이었습니다. 그 사이 둘째 딸, 아들 하나가 태어났습니다. 그 삶이 바로 조강지처의 삶이
었고. 그렇게 어려운 삶을 살면서 어렵다는 말 단 한번도 하지 않고 살아온 지향이었습니다.
새 집을 장만하고 눈물 짓던 그 아내의 눈물을 저는 지금도 또렷이 기억합니다. 그 후 2년 후에는 대지 83평에 56평
단독 주택으로 이사하였습니다.
이사 후 저는 저의 대학 졸업식에도 참석하지 못한 부모님을 모셔와 부모님 고생으로 이 불효자 여기까지 왔음을
보여 드리며 그간의 마음 고생도 잊으시라 하였고, 부모님도 흐뭇한 마음을 가지고 귀향 하셨습니다.
또한 제가 강원도에서 군대 생활할 때 데려왔던 5살 먹은 딸은 저의 아버지가 데려간 후 고등학교 졸업 후 상경하여
저와 살다 직장에서 만난 학원 영어 선생님과 결혼하여 미국으로 이민을 가 살고 있습니다.
그 지향이 여유로워져서 그랬나요? 그 지긋지긋한 삶이 해방이라는 마음이 들어 그랬나요? 가구를 들여 놓고 인켈
오디오를 사다 놓고 소파를 들여 놓고 하더군요. 그 때 저는 영업 본부장이라는 직책으로 5년을 전국을 헤매고 다닐
때였습니다.
5번의 사주 변경에 16분의 사장을 모시며 사주가 바뀔 때마다 새로운 점령군(?)에게 좌천이라는 수모를 당하며
견디고 이겨내며 살았으니 그 삶 어떠했겠습니까? 월요일 집을 나서 금요일에나 귀가하는 삶이었습니다.
그렇게 살고 있던 어느 날 어느 사람이 저를 보자 하더군요.
" 지나 아빠! 지금 이러실 때 아니어요? 지나 엄마 잘 살펴 보세요"
청천벽력이었습니다.
"무슨 말씀이세요? 자세히 말씀 해주세요."
"내가 해 줄 말은 거기 까지에요. 이제 알아서 하세요. 여러 번 말렸지만 지나 아빠 올라오면 안 그런다 하더니 올라
오셨는대도 그래서 말씀 드리는 거에요. 안 그러려고 해도 밤이 되면 나가지 않고는 잠이 들지 못한 대요." 그러더군요.
그래서 나는 살피기 시작했고 결국 이야기가 사실인 것을 알고 달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한번 빠진 수렁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는데 나는 자식들을 위해서 직장을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내가 광주에 근무할 때 시작된 일이 내가 올라와 전국을 다닐 때 5년까지 그렇게 7년을 견디며 어떤 일이
있어도 헤어지지 않고 살려 했던 것은 부모님에게 지은 죄 다시 안겨 드려서는 안 된다였고, 내 자식들을 위해서도
나만 참으면 언제인가 는 돌아올 날 있겠지 하며 참았습니다.
그 사이 저는 제 자식들에게 처가에게도 단 한 번도 그런 사정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습니다. 돌아오면 살 사람이니
그 누구도 알아서는 안 된다였지요.
그러나 꼬리가 길면 잡힌다 했던가요? 결국 흥신소에 많은 돈을 들여 현장을 덮친 날 그 날 저는 현장에 처제 둘 하고
처남을 동반하여 갔습니다. 그때서야 처가 집에서 모든 사실을 알고 말았지요. 내 자식들도 그렇고요.
경찰서에 붙들려 가서 조사 받고 유치장에 묵었다가 다음 날이면 구치소로 가게 되었을 때, 한번만 용서해 주면
집으로 돌아 오겠다 용서해 달라 하고 처남(내가 우리 회사에 취직 시켜 다니는 처남)이 "매형, 한번만 용서해
주세요. 제가 책임 지고 모시고 가겠습니다." 하여 용서해서 풀려 났지요.
그런데 한번 지은 죄를 그처럼 쉽게 바뀌겠습니까? 저를 속인 거지요.
며칠이 지난 후 저의 사무실에 찾아오더니 이혼해 달라 하더군요. 제가 임원으로 있을 때인데 일 주일을 줄곧 찾아와
매달리니 제가 무엇이 되겠습니까? 앞으로 자식들을 생각해서 더는 버틸 수 없었습니다., 결국 법정 이혼을 하기로
하고 조정 심판을 받는 자리에서 판사 님이 "이혼할 거냐 묻기에 저는 하지 않겠습니다 했더니 그럼 조정이 되지 안
하셨네요. 조정하시고 오세요". 하여 다시 나와 사정 하였으나 아내는 하겠다 하더군요. 결국 우리의 결혼은 깨진
날이 바로 1990년 2월 23일 바로 35년 전 오늘입니다.
그리고 그 후 저는 재혼을 하였고 이혼 후 저는 한번도 그 사람에 대해 알려 하지 않았습니다.
이혼 후 . 그렇게 살고 있는 저에게 저를 지향에게 소개한 정정원 친구의 아내가 전화가 왔었습니다.
친구의 아내는 지향이와 한 동네 같이 살던 3총사 중 한 사람이었지요.
"지나 아빠. 지향이 한 번 만나주세요."
" 왜요? 무슨 일 있으세요?"
"그저 꼭 한 번 만나주세요."
그래서 바람대로 꼭 20년이 지난 2010년 6월 28일. 저는 당시 부산에 살고 있던 지향이가 올라 와 불광동에서
만났습니다. 불광 전철 역 1번 출구에서 만나 층계에서 만나는 순간 눈물을 보이고 말았습니다. 아직도 사랑하고
있는 저의 마음이었지요.
점심을 사 주려 주문하는데 "당신 칼 국수 좋아하잖아. 그것 먹어요? 하더군요. 세상에 그처럼 오랫 만에 만나
식사 하자는 데 칼 국수라니... 그 사람의 삶의 가치관이었습니다. 아끼고 아끼며 사는 삶이 몸에 지니고 사는
사람이었지요.
그리고 2년 후 부산에 사시던 사촌 형님 댁에서 백모 님이 소천 하신 날 아들이 제 어머니를 모시고 왔더군요.
헤어진 제수가 나타나니 사촌 형님 댁에서는 작은 소동이 일었습니다. 이게 무슨 일인가/? 다시 합치는 것인가?
상상을 하였겠지요.
그리고 그렇게 24년의 세월이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세월이 흘렀습니다.
2024년 6월 28일. 지향은 결국 만난 사람에게 버림을 받고 아들이 사는 동네로 이사 왔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부산에 살던 때 가끔 전화로 통화는 한 적이 있기는 했지만 서울로 온 때는 오고 나서야 알았습니다.
아들이 일려주더군요.
그래서 통화를 하고 만나자고 약속하고 기다리기를 보름이 지난 어느 날 2025년 7월 15일 몸에 이상이 있어
검진 결과 대장암 판정을 받고 치료하다가 지금은 요양 병원에 가 있다 하여, 지금의 아내 모르게 1주일에 한번
꼴로 찾아 보고 위로 하면서 함께 살 때 못해준 삶을 이어주며 살아 나기 바라고 있었는데,
7개월이 지난 지금은 폐렴까지 걸려 다시 대학 병원에 보름 있다가 요양 병원으로 왔다 하여 어제 찾아 가보니
코에 호스를 데고 있었고 손은 장갑으로 싸인 채 눈만 멀둥 거릴 뿐 아무 말도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간 온갖 정성 다하며 보살폈습니다. 살기를 바라면서,....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생명으로 여겨졌습니다. 일주일에 한번 꼴로 자식들 모르게 찾아가 온갖 희망의 말 다 해주며
먹고 싶다는 것 사다 먹여 주며 보냈는데 그래서 회복이 되면 조강지처로 살던 어려운 삶에 대해 감사하며 미워하지
않으려 했는데 저렇게 저를 알아 보지 못하니 이제 남은 삶 얼마인가 싶습니다.
자 이제 저는 어떻게 하는 것이 답일까요?
먼저 아이들에게 너의 어머니 돌아가시면 어떻게 하려느냐 물어도 될까요?
아버지 생각은 이랬으면 한다 말해도 될까요?
아무 것도 생각이 되지 않습니다.
어제 가서는 눈물 만 흘리다 왔습니다. 지난 7개월 간 과거 조강지처로 살던 때 못해 준 것 해주려 노력했는데
이제 이승에서 의 마지막 날이 금방 앞에 닥치니 어찌 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저 불쌍하구나 생각 만 나고 다른 생각은 아무 것도 안 나고 지나온 삶이 주마등처럼 스치네요.
오늘은 저와 헤어진 후 22년 만에 두 번째 만날 날입니다.
2012년 음력 2월 3일 부산에 사시던 백모 님이 서거하신 날 아들이 제 어머니를 모시고 왔더군요.
그 자리에 어떻게 참여할 생각을 했는지 와서 만난 날입니다.
여러 분! 저는 어찌함이 저의 길일까요? 어떤 가르침도 받아드리겠습니다.
2025년 2월 3일(음력)
어느 남편
<끝>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저는 또 선생님
글 일까 아님 옮겨온 글?
참 재밌게
글을 쓰십니다.
그런데 수정할
부분이 있습니다.
2025년 년도가
나와서요.
아마도 2024년을
잘못 기재하신 것 같아요. 선생님께서
수정하셔야 될 것 같습니다.
늘 건강하소서.
별빛 은하수 님! 저의 필명(筆名)이 '쇠뭉치' 인데 선생님은 참으로 아름다운 이름이네요.
그간 제 필명에 대해 조언도 받은 적이 있습니다만 70년 넘게 이 닉네임을 사용하는 이유는
이 필명이 곧 저의 삶의 증언이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는 바로 저의 이야기 입니다. 나의 이야기 29에 있듯 첫 사랑이 이혼 후 만나 24년을 살다가
나를 떠나 만 20년이 지난 2010년 6월 28일 처음 만났고,2년 후 백모님이 돌아가신 자리에 아들이 제
어머니를 데려와 2012년 음력 2월 3일에 부산에서 두 번째 만났습니다.
그 후 전화로는 가끔 연락하던 중 2년 전 버림을 받고 하필 20년 만에 처음 만난 날(28일)에 14년 후
온 것이지요. 그런데 서울로 온 지 보름 만에 몸이 이상이 생겨 검진 결과 '대장암' 판정을 받고 항암
치료하던 중 치료를 중단하고 요양병원으로 온지 7개월째입니다.
그 사이 미움 다 접고 1주일에 한번 꼴로 찾아보면서 온갖 수발 하였는데 폐렴에 걸려 입원 후 퇴원하더니
이제 '마지막 가는 길에 서 있네요.이런 사실 제 아이들은 모릅니다.
2025년 3월 2일이 부산에서 두 번째 만난 날 음력 2월 3일이라 맞습니다.
아~선생님 제 생각이 맞군요.
"아픔의 사랑"
아님 "아름다운" 사랑"이라고
말해야 좋을까요?
애정을 쏟았던
잊을 수 없는 첫사랑이라
아마도 선생님의
발길이 그저
옮겨지는 것 같습니다.
죄는 미워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자 라는 교훈 같은 말이
문득 생각납니다.
얼마남지 않은
생 같으니 마지막의 길까지
따뜻하게 보살펴
주시길요.
다시 한번 더
읽어보았습니다.
선생님의 건강도
함께 챙기소서
2025년 7월15일이 쓰여져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