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녕하세요. 아마추어 철학자로서는 처음 인사를 드린 김봉석 전도사입니다.
지난 주일 여러가지로 미숙하고 자격도 갖추지 못한 제게 강의 기회를 주신 교우님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무엇보다 어리버리한 강의를 끝까지 들으며 참고 자리를 지켜주신 분들께 더욱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가급적 전문용어를 사용하지 않으려 했는데, 그렇게 준비를 못해 죄송스러웠습니다. So Sorry!!
혹시 참석하지 못하신 분들 중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이 있을 것 같아서
강의 내용과 질의응답을 대략 정리해서 올려드립니다. 혹시 궁금한 것 있으시면
언제든지 문의해 주시고요, 혹시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바로잡아주면 감사하겠습니다.
니체의 『우상의 황혼』 中, “네 가지 중대한 오류들”
니체는 목사님들이 아주 싫어하는 대표적인 철학자이다. 왜냐하면 신의 죽음을 선언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마도 철학자 중에 설교에 가장 많이 언급되면서도 그의 저서는 잘 읽혀지지 않는 것 같고 그래서 그만큼 오해도 많은 것 같다. 사실 니체의 철학은 아주 매력적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개인적으로는 내가 이원론을 극복하는 데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래서 내 전문분야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들고 나오게 되었다.
1.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1900)의 생애
1844년 10월 15일 독일 뢰켄 출생
아버지: 카를 루트비히 니체, 루터교 목사
어머니: 프란치스카 욀러, 5대째 목사집안 딸
1849년 뇌연화증으로 부친 사망, 같은 해 2살 남동생 요제프 사망
어머니와 여동생, 할머니와 두 고모와 한 집에서 생활.
갈등과 불안정한 분위기에서 성장.
12살 때부터 작시, 작곡 시작, 고전어, 문학, 음악에 비상한 재주가 있었음.
소년기 때부터 빛에 예민한 눈의 통증, 위장 장애, 두통에 시달림.
이러한 병증은 니체를 평생 괴롭혔다. 니체는 이것이 유전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1864년 겨울부터 본 대학에서 신학과 고전문헌학 공부시작. 고전문헌학에 두각을 나타냄.
1869년 4월 바젤대학에 고전어와 고전문학 담당 비전임교수로 위촉. 당시 나이 24세. 박사학위도 교수자격 논문도 없었음.
1871년 철학교수 자리 신청. 거절당함. 문헌학보다는 철학이 자신의 소명에 맞는다고 생각함.
1872년 첫 철학적 저술 출판. 『비극의 탄생』. 초기에는 쇼펜하우어와 바그너에 영향을 받음.
1879년 5월 만성적인 건강 악화로 바젤대학 퇴직. 당시 34세. 이후로는 휴양지에서 요양을 하면서 저술활동 이어감.
1883~85년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완성
1887년 심각한 우울증 시작.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성한 저술활동 이어감.
1887년 『도덕의 계보』
1888년 『바그너의 경우』, 『우상의 황혼』, 『안티크리스트』, 『이 사람을 보라』, 『디오니소스 송가』, 『니체 대 바그너』
1889년 1월 3일 카를로 알베르토 광장에서 쓰러짐. 44세. 이후 10년간 증세가 점차 심해짐.
1892년 자신을 방문한 친구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 증오심 폭발.
1893년 척추가 경직되어 휠체어 의지.
1894년 말을 하지 못함.
1897년 모친 사망.
1900년 8월 25일 니체 사망. 55세. 당시 의사소견은 매독균에 의한 점진적 뇌연화증.
2. 니체의 문제의식
니체 철학의 의도는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의 삶과 그 삶의 터전인 세계를 긍정하는 데에 있다(“있는 것은 아무 것도 버릴 것이 없으며, 없어도 좋은 것이란 없다”). 그 이유는 이천년이 넘는 서구 사유의 역사와 문명이 삶을 부정하는 쪽으로 흘러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고대 희랍과 중세 그리스도교의 현실에 대한 경시와 금욕적 삶의 태도를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자연과학을 중시하고 자본주의, 사회주의와 민주주의가 꽃을 피운 근대의 경우 그 모양은 고중세와 다르다고 볼 수 있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어느 시대보다도 인간이 소외되어버린 시대라고 할 수 있다. 과학기술에 의해, 자본에 의해, 권력에 의해, 심지어 진보라는 이념에 의해, 종교에 의해. 그런 점에서 인류의 역사는 인간의 삶을 멸시하고 위태롭게 하는 방향으로 흘러왔다고 할 수 있다. 니체는 그 혐의가 형이상학(신, 영혼, 이데아)과 도덕에 있다고 생각했다.
전통적으로 서양 철학이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은 존재와 생성으로 구분된다. 존재는 변함없이 있는 것이고 생성은 없던 것이 생겨나는 것을 말한다. 이해를 돕기 위해 예를 들어보자. 김봉석이라는 사람을 볼 때, 생성에 속하는 것은 무엇인가? 몸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몸은 헤아릴 수 없는 세포로 이루어져있는데, 매순간 생성과 소멸이 반복된다. 그래서 7년이 지나면 7년 전에 내 몸을 구성하고 있던 세포는 모두 소멸되고 새로운 세포로 대체된다. 그럼 7년 전의 김봉석이라는 사람은 이 자리에 없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는 지금 이 사람을 7년 전의 그 사람과 같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 사람들은 영혼이라는 것을 고안해내었다는 것이 니체의 생각이다. 몸이 생성이라면 영혼은 존재에 해당한다.
르네상스 시기의 작품인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에서 우리는 존재의 영역을 예술 작품으로 구현해보고자 애쓴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아름다움을 기하학적으로 표현하려고 했다. 코와 눈썹, 턱과 코, 인중과 입술, 입술과 턱의 길이의 비율, 얼굴의 가로와 세로의 비율 등이 황금비율인 1:1.618이다. 그런 균형미를 갖춘 사람이 아름답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8등신, 베이글을 선망하듯이. 이런 식으로 미의 기준이 정해지면 그로부터 위계질서가 생기고 필연적으로 소외가 발생한다. 그런 세계관을 풍자한 개콘의 유행어가 하나 있다. “일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 – 박성광” 반대로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 "별이 빛나는 밤"(후기인상주의)은 생성의 세계를 표현한다. 밤하늘을 본 느낌(인상)을 그대로 표현하고자 했고 또한 자연의 변화무쌍함, 즉 “생성”의 세계를 그림에 담아 보여주고 있다.
사람들은 존재의 영역은 영원하고 완전하기 때문에 선하다고 생각했고 생성은 일시적이고 불완전하고 고통을 주기 때문에 악하다고 생각했다. 니체는 이러한 이해의 발전과 확대가 서양 철학의 전통이라고 보았고, 우리의 삶을 무의미하고 부정하게 만드는 허무주의를 낳았다고 비판했다.
이러한 허무주의를 극복하고 현실과 삶의 의미를 되찾기 위한 니체의 전략은 전통적 가치 체계를 뒤집어엎는 것이다. 우상의 황혼 역시 그러한 기획에서 나온 저작으로, 부제가 ‘망치를 들고 철학하는 방법’이다.
http://youtu.be/EVQdReUBnSc?t=5m19s
(혹 아래에 제가 첨부한 영상이 짤린다면, 위 링크를 클릭하시면 영상자료를 보실 수 있습니다.)
영화 밀양에서 우리는 니체식의 가치 전도를 찾아볼 수 있다. 밀양은 종교의 기원이 고통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음을 암시한다. 잔혹한 현실을 마주한 인간이 끔찍한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신을 만들어내었다. 고통은 도덕적 완성과 현세로부터의 구원을 위한 신의 뜻이라는 믿음은 고통을 이겨내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교도소에서 개종한 가해자의 모습을 보았을 때, 즉 현실을 직면하였을 때, 가련한 여인은 신에 대한 믿음이 허구였다는 것을 논리적 증명이 아닌 실존체험을 통해 온 몸으로 깨닫고 증오와 허무적인 상황에 빠지고 만다. 전형적인 니체의 사유다. 니체 역시 이런 방식으로 신, 도덕과 관련한 전통적 가치 체계에 대한 해체를 시도한다.
3. “네 가지 중대한 오류들” 훑어보기
니체의 『우상의 황혼』은 이성, 피안의 세계, 도덕의 문제를 차례로 다룬 후 「네 가지 중대한 오류들」에 이르러 그 배후에 깔려있는 인과적 세계관의 문제를 다룬다. 인과적 세계관이란 세계를 원인과 결과의 연속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여기서 질문. 장수의 비결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_____ 니체 당시 코르나로라는 사람은 소식(小食)이 장수의 비결이라는 책으로 대박이 났던 것 같다. 니체는 그것이 원인과 결과를 혼동하는 오류라고 한다. 그는 체질이 비결이라고 주장한다. 느린 신진대사와 낮은 에너지 소모가 소식의 원인이자 장수의 비결이라는 것이다.
그는 종교와 도덕이 그런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말한다.
“모든 종교와 도덕의 기초에 놓여 있는 가장 일반적인 정식: “이것과 이것을 행하라. 이것과 이것은 멀리하라-그러면 너는 행복해질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 모든 도덕, 모든 종교가 이런 식의 명령이다.“
“내 입에서 그 정식은 반대로 변한다-나의 “모든 가치의 전도”의 첫 번째 예: 좋은 체질을 갖추고 있는 자, ‘행복한’ 자는 특정 행위들을 해야만 하고, 다른 행위들은 본능적으로 피해야만 한다.“
즉 행복은 덕의 결과가 아니라 원인이라는 말이다. 니체는 다음과 같은 식으로 예를 들어 설명한다.
“신문 독자는 말한다: 이 정당은 이런 과오로 인해 자멸의 길을 걷는다. 좀 더 고차적인 나의 정치론은 말하기를: 그런 과오를 저지르는 정당은 이미 끝장나버린 정당이다.”
다소 피상적인 논의를 거쳐 다음으로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인 의지의 문제를 다룬다. 네 가지 오류들 중 첫 번째 것을 제외한 나머지(잘못된 원인성의 오류, 가상적 원인들이라는 오류, 자유의지라는 오류)는 모두 의지와 관련된 문제인데, 니체는 인간 행위에 대한 이해를 세계에 투사한 것이 인과적 세계관이라고 주장한다.
“우리는 의지 작용에 있어서 우리 자신이 원인이라고 믿었다; 우리는 거기서 적어도 행위에 작용하고 있는 원인을 포착했다고 생각했다. 마찬가지로 한 행위의 모든 선행 조건, 그 행위의 원인들을 의식 안에서 찾을 수 있고, 거기서 찾아보면-그 행위의 ‘동기’로서 다시 발견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 말은 먼저 언급했던 존재로서의 “나”라는 것이 우리 행위의 원인이라는 말이다. 니체는 여기서 근대철학의 상징적 인물인 데카르트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데카르트는 방법론적 회의를 통해 코기토의 자아를 확실성을 담보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로 상정하였다. 그러나 사유라는 의지 작용은 외부세계와의 관계성 속에서만 이루지는 것이다. 데카르트가 방법론적 회의를 자신의 철학의 원리로 기획한 것은 당시의 정치, 경제, 문화, 사회적 배경과 그 안에서 살아가는 다양한 사람들과의 수많은 만남과 대화들, 심지어 당시의 자연 환경과 기후 조건, 그리고 몸 상태 등의 외부조건들과의 복잡한 관계의 총체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니체의 통찰에 의하면 “나”는 존재가 아닌 생성의 영역에 속한다. 사실 니체에게는 모든 것이 생성의 영역에 속한다. 즉 “모든 것이 힘에의 의지”이다. 반면 데카르트의 코기토는 이러한 사실들을 극단적으로 축소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고립된 자아, 존재로서의 자아. 이런 식으로 축소된 의지 개념을 니체는 “신화적”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신화적 의지 개념을 세계이해로 확장시킨 것이 인과적 세계관이라는 것이다. “즉 인간은 자신의 세 가지 ‘내적 사실들’을, 그가 가장 확고하게 믿었던 의지와 정신과 나를 자신의 외부 세계에도 투사했던 것이다.”
니체는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가 잘못된 원인성의 오류의 동기 무엇인지 밝히기 위해 다시 또 심리분석을 시도하고 이로써 인과적 세계관의 허구성을 드러내 보인다.
“알려지지 않은 것에는 위험, 불안정, 걱정이 수반된다.” 따라서 “알려지지 않은 어떤 것을 알려진 어떤 것으로 환원하는 것은 마음을 편히 해주고 안심시키며 만족하게 하고 그 외에도 힘을 느끼게 한다.” 여기서 ‘원인-충동’이 발생하고 “이미 알려진 것, 체험된 것, 기억에 각인된 것을 원인으로 설정하는” ‘원인-해석’은 “그런 필요의 첫 번째 결과”가 된다. “알려지지 않은 것을 알려진 것으로 설명해주는 첫 번째 생각은 어찌나 좋게 작용하는지, 그것은 ‘참으로 간주될’ 정도이다.”
결국 도덕과 종교가 정식화하는 모든 명제는 쾌감 혹은 불쾌감이 불러일으킨 원인-충동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이에 입각한 원인-해석은 가상적인 것이며, 종교적 도덕적 행위는 실상 생리적 상태에 따라 수행된다는 것이 니체의 주장이다.
인과적 세계관은 결국 여러 면에서 종교와 도덕을 정당화하기 위한 고안물일 수 있다는 것이 니체가 우리에게 던져주는 중요한 문제의식 중 하나일 것이다. 니체는 앞서 인과적 세계관의 근원은 인간이 자신의 ‘내적 사실들’을 세계에 투사한 데에 있음을 밝혔다. 학자들이, 특히 신학자들과 그리스도교적 철학자들이 ‘내적 사실들’ 즉 의지, 정신, 자아를 규명함으로써 주체를 수립하고자 고군분투한 데에는 한편으로 도덕적 책임을 질 수 있는 주체를 확보하려는 의도를 내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자유의지’ 개념은 도덕적 종교적 책임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겠다.
니체에 따르면 “의지에 대한 학설은 근본적으로 벌을 목적으로 고안되었다. 즉 죄 있다고-여기도록-원하게 하는 목적에서 고안되었다. 옛 심리학 전체, 의지의 심리학은 전제 조건이 있다. 그 심리학의 창시자이며 공동 사회의 우두머리 격인 성직자들이 자신들이 벌을 규정하는 권한을 갖고자 했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다-또는 신에게 그런 권리를 부여하고자 했던 사실이 바로 그것이다……판결하고 처벌될 수 있기 위해-죄지을 수 있기 위해, 인간은 ‘자유롭다’고 생각되었다 … … 그리스도교는 사형 집행인의 형이상학이다……” 성직자들이 정말 이러한 의도로 처벌을 정당화 했다면 이로써 그들이 얻고자한 권한은 아마도 통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사람들을 통제하고 복종시키기 위해 그들은 처벌을 정당화했다는 것이다. “즉 인류를 그들에게 의존적으로 만드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
니체의 글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을 매우 불편하게 만든다. 그러나 교회사를 돌이켜본다면 니체의 비판이 지나치다고 잘라 말할 수는 없는 게 사실이다. 니체의 비판에 수긍이 간다면 니체를 비판하기 전에 그의 사유를 빌려 우선적으로 우리 자신에게 던져야할 질문이 있다. 현세에 대한 부정이 성경의 가르침인가?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무엇으로부터 연유한 것인가? 성경은 어떤 형식으로 현세를 긍정하는가? 이 질문에 답하고자 애쓸 때 이원론을 극복할 단서를 찾을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니체에 대한 많은 오해 중에 하나는 니체를 도덕무용론자, 또는 반도덕주의자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반도덕주의자가 아니라 도덕적 절대주의를 반대하는 의미로 비도덕주의자이다. 그는 오히려 도덕적 자연주의를 주장한다. 도덕은 인간의 삶에 유용한 범위 내에서만 효력이 있다고 보는 것이고 도덕 상대주의에 가깝다. 니체가 보는 세계는 각 개별들이 매순간 필연적으로 얽히고 섥힌 관계 세계이다. 그렇기 때문에 특정 개별자의 행위는 전체와의 긴밀한 상호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근대적인 주체 및 자유 개념이 이러한 이해를 결여하고 있음을 드러낸 것이 니체의 철학사적 공헌이라고 평가할 수 있겠다.
좌측의 그림은 인과적 세계관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한 명의 주인공(영웅)을 중심으로 스토리가 진행된다. 선과 악이 분명하고 악의 세력은 척결과 소멸의 대상이 된다. 20~30년 전만해도 우리나라의 대부분의 어린이들은 이런 만화를 보고 즐겼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자녀들은 대개 우측의 만화를 보고 즐긴다. 제목은 “뽀로로”지만 스토리는 뽀로로 중심으로 흘러가지 않는다. 서로 다투고 질투하고 거짓말도 하지만 쿨하게 화해하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재미있게 어울려 논다. 선과 악은 없다. 그래서 폭력도 없다. 다만 성격과 재능의 차이만 있을 뿐. 그래서 모두가 소중한 친구이며 어느 누구도 소외되지 않는다. 니체가 희망한 관계 중심의 세계를 잘 보여준다.
니체의 철학은 그리스도교에 대해 대단히 배타적이다. 그리고 그의 비판은 분명 매도적이고 편파적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철학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해함에 있어서 새로운 지평을 열어 준다. 니체는 분명 인과적 세계관을 담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도덕적 종교적 가르침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니체가 말하는 관계적 세계관의 이상을 삶을 통해 가장 잘 구현한 인물 중 하나라고 평가할 수 있겠다. 간음한 현장에서 잡혀온 여인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대응 방식이나 세리 삭개오와 같은 인물을 대하는 태도 등등, 그리고 결정적으로는 온 세상의 죄와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가 택한 십자가의 길은 인과적 세계관에 입각해서는 잘 설명이 되지 않는 국면들이다.
마지막으로 니체의 사상이 잘 드러나는 팝송을 들으며 마무리.
http://youtu.be/DVg2EJvvlF8?t=38s
(혹 아래 영상이 짤린다면, 위 링크를 클릭하셔서 보세요.)
Imagine there's no heaven,
It's easy if you try,
천국이 없다고 상상해 보세요.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랍니다.
No hell below us,
Above us only sky,
우리 아래 지옥이 없고
위로는 단지 하늘만 있음을.
Imagine all the people
living for today...
모두가 오늘을 위해 살아가는
모습을 상상해 보세요.
Imagine there's no countries,
It isn't hard to do,
국가가 없다고 상상해 보세요.
어려운 일이 아니랍니다.
Nothing to kill or die for,
No religion too,
죽일 일도 죽을 일도 없으며,
종교도 없이,
Imagine all the people
living life in peace...
모든 사람이
평화롭게 삶을 사는 모습을 상상해 보세요
REFRAIN(후렴)
You may say I'm a dreamer,
but I'm not the only one,
날 몽상가라고 부르겠지요.
하지만 나만 그런 게 아니랍니다.
I hope some day you'll join us,
And the world will live as one
언젠가 당신도 우리와 같아지길 희망합니다.
그럼 온 세계가 하나가 되겠죠.
Imagine no possessions,
I wonder if you can,
소유가 없다고 상상해 보세요.
당신이 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No need for greed or hunger,
A brotherhood of man,
욕심도 굶주림도 필요 없이,
형제처럼 지내겠죠.
imagine all the people
Sharing all the world...
모든 사람들이
모든 세계를 공유한다고 상상해 보세요.
REPEAT REFRAIN(후렴 반복)
4. 질의문답.
(대략적인 기억을 토대로 작성했기 때문에 실제와는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음. 괄호 안의 글은 질의문답 시간에 하지 않았던 말에 대한 보충설명.)
1) 니체의 철학을 심리학적으로 분석한 시도는 없었는가?
→ 있을 것 같기는 하지만 제가 니체 전공자가 아니라 잘 모르겠습니다.
2) 니체의 의도는 긍정의 철학이지만 결국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 아닌가?
→ 제가 쇼펜하우어를 잘 몰라서 확답은 어렵습니다. 하지만 니체는 초인(위버맨쉬)의 경지에 이르기 위한 과정으로 허무주의를 말합니다. 허무적 상황은 초인이 되기 위한 필연적 과정으로 이해를 합니다. 그 과정을 거쳐 분명히 삶을 긍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고 볼 수 있습니다.
3) 관계적 세계관도 필요하지만 기독교가 진리임을 보이기 위해서는 인과적 세계관도 함께 조화를 이루어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은가?
→ 물론 그렇습니다. 기독교는 어디까지나 계시 종교이고 창조주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세계의 원인은 하나님라고 믿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론적으로 우리의 신앙이 진리라는 것을 입증하긴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말씀이 절대 진리라고 믿기는 하지만 우리 자신이 말하는 것에 오류가 있을 수밖에 없음 또한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유한한 인간이니까요. 니체는 아예 자신의 말이 오류라고 드러내놓고 인정을 합니다. 인간은 저마다 나름의 관점을 가지고 사물을 이해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인간의 아는 것은 그 자체로 오류라고 하는 것이고 그걸 인정하는 것이 위버멘쉬의 삶의 자세라고 합니다. (생성, 삶, 현실에 대한 긍정이란 결국 오류에 대한 긍정이라고도 할 수 있겠죠.) 저는 그런 건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문제가 되는 윤리적 차원에서 기독교인들이 좀 더 신중한 자세를 취하는 것이 21세기 한국교회의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니체가 기독교는 사형집행인의 형이상학이라고 했는데, 오늘날 한국교회의 행보를 보면 니체의 비판이 그대로 맞아떨어지는 면이 많습니다. (니체는 인과적 세계관은 반대하지만 인과적 이해의 불가피성은 인정합니다. 우리가 자연 현상이나 사회를 이해하고 설명할 때, 인과적인 이해와 말을 할 수밖에 없죠. 다만 그것이 객관적 사실이 아니라 하나의 해석에 불과하다는 제한을 두어야 한다는 입장이지요. 예를 들면 과학에서는 인과적 탐구와 추론에 의해 일반적으로 진화론이 객관적 사실로 간주됩니다. 반면 니체의 입장에서는 그건 그저 가능한 하나의 설명에 불과한 것이 되는 것이죠. 우리 삶에 유용한 하나의 설명은 될 수 있으나 "객관적 사실"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니체의 입장입니다.)
4) 니체도 사랑에 대해 말하는가?
→ 인류애에 대한 강조가 있기는 하지만 그게 그리 중요하고 적극적으로 다뤄지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니체는 오히려 개인적인 성향이 강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사랑과 같은 면은 약하죠. 그런 한계들이 있기 때문에 오늘날에는 레비나스와 같은 사상에 기독교인들이 많이 관심을 갖게 되는 것 같습니다. 니체는 현대 사상의 물꼬를 틀었다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5) 자유의지가 있다고 하면 어떤 문제가 있는가?
→ 모든 책임이 행위자 자신에게 있는 것이고 사람을 그렇게 이해한다면 그 행위자만 척결 대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행위자 자체가 악이 되는 것이죠.)
6) 니체가 자유의지를 부정한다면 그 반대를 주장하는 것인가?
→ 니체는 자유의지를 부정하지만 그 반대인 반자유의지도 부정합니다. 자유의지가 아예 없다고 하면 핑계만 대고 사는 것인데, 그런 것은 삶을 긍정하고 창조적으로 끊임없이 자기를 극복해 나아가는 위버멘쉬의 삶의 자세와 거리가 멉니다. 그래서 니체는 두 경우 모두를 반대하고 상호관계성을 주장합니다. 모든 것이 힘에의 의지이기 때문에 강한 힘과 약한 힘의 문제라고 보시면 됩니다. 힘이 강하다고 해서 다른 힘에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이 아니고 힘이 약하다고 해서 다른 힘에 영향을 전혀 못주는 것도 아닙니다. 자연적인 힘들의 관계를 생각하시면 됩니다. 니체는 의지의 문제를 그런 식으로 보는 것이죠. (하지만 세계 안의 힘들의 상호관계는 너무도 방대하고 복잡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과학자들의 믿음과는 달리 그 관계를 객관적으로 파악하거나 기술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어디까지나 우리 인간의 생리적 필요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해석”을 할 뿐이라는 것이죠. 이런 점에서 모든 것이 힘에의 의지라는 말은 모든 것이 해석이라는 말과 통합니다.)
7) 니체의 관점에서 보자면 예수 그리스도는 니체의 이상에 잘 들어맞는 인물 아닌가?
→ 그렇습니다. 그래서 니체는 그리스도교는 아주 맹렬히 비판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만큼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인정을 하죠.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실패로 지적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의 죽음을 스스로 선택하지 못했고 그래서 너무 빨리 죽었다는 것입니다.
8) 니체는 현세를 긍정하고 내세 혹은 초월 세계를 부정하지만 그가 말하는 초인의 경지에 이르고자 한다면 결국엔 초월 세계도 있다고 해야 하는 것 아닌가?
→ 여기에는 용어에 대한 오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보통 우리말에서 초인이라고 하면 뭔가 염력을 가지고 있거나 물질세계를 초월한 사람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니체는 오히려 그 반대의 의미로 초인을 말한다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초인은 힘에의 의지를 자신의 토대이자 이상으로 하는 사람인데, 여기서 “힘에의 의지”라는 것은 진리에의 의지, 내세 또는 신에의 소망(의지) 등과 반대되는 입장을 말하기 위한 개념입니다. 생성의 영역을 힘에의 의지라는 말로 표현한 것이죠. 그래서 진리, 내세, 신 이런 초월적인 것들을 부정하는 사람이 오히려 초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니체에게 있어서는 그런 초월적인 것들을 인정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초인이 아니라 보통 인간들인 것이고 (그것을 가지고 사기치고 사람들을 오도하는 놈들을 인간말종이라고 부릅니다.)
첫댓글 와아~~
주일에 못들었는데 정말 고마워요~~^^
전도사님~~
관심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삽입한 동영상 때문에 수정을 좀 했어요. 이제 수정 완료했으니 영상도 문제없이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우와~~~^^
넘아쉬웠어요.전 가족음악회모임으로 참석못했어요.이렇게 올려주셔감사해요.
전도사님 정말 넘 멋지신것같아요.
주일학교 설교도 매주 대박인데~~~~
인문학강의도 대박인데요?ㅡ대충만봤지만~~
시간내서 꼼꼼히 읽을께요. ㅎㅎ
감사합니다^^ 사실 제가 말이 어눌해서 강의나 설교에 항상 컴플렉스를 가지고 있어요. 그럼에도 집사님께서 늘 지지해주시고 응원해 주시니 힘이 됩니다.
우와~~~ 이걸 또 어느틈에 정리하셨어요??
대단하십니다. 차근차근 읽으면서 다시 생각해볼 수 있겠네요 감사요~~
원고랑 자료들은 강의 때 이미 준비된 것이라서 복사해서 붙이기만 한 것이 거의 대부분이에요.
질의응답 부분은 강의 후에 새로 작성했어요. 처음에는 잘 생각이 나지 않았는데 작성하다보니 신기하게도 기억이 나더라구요ㅋㅋ 저도 감사하고요, 언젠가는 이집사님처럼 조리있게 말을 잘 할 수 있게 되길 소망합니다^^
정리에 달인이시네요.
ㅋㅋ 동규씨가 제 모델이지요^^
@김봉석 무슨 말씀을 ㅎㅎ 암튼 정리의 달인이십니다. 전 이렇게 못해요.
두 분은 무슨사이?.... 아니 뭐 아웅~...ㅋ
@신성식 같은 학교에서 공부했던 사이라서요 ^^
@신성식 물의를 일으켜 죄송해유~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