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공인 토목공학과는 전혀 무관한 경찰에 투신하신 아버지는 약관 33세부터 강경, 홍성, 공주, 당진 경찰서장을 거치셨고, 1960년 만 36세의 나이에 총경으로 승진하셔서 천안경찰서장에 부임하신 후, 서울 청량리 경찰서장, 서울시 경찰국 보안과장(現 경찰청 보안국장)을 거쳐 전주경찰서장에 부임하신 지 3개월 만에 위암 말기 판정을 받으셨고, 불과 5개월 후인 1964년 1월, 40회 생신을 며칠 앞두고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너무 안타까운 짧은 생이었습니다
제가 철들기 전이지만, 몇 가지 에피소드는 기억에 생생합니다. 아들 3형제를 앞세운 새벽 약수터 운동과 “교통 안전의 노래” 캠페인 전에 아들 3형제에게 손수 가르치시던 일이 생각납니다. 비오는 날이면 진창으로 변하는 등교길을 걱정하신 할머니의 당부에 저를 Jeep차에 태우셨지만, 집이 안보이는 곳에서 차에서 내려 걸어가게 하셨습니다. 붓글씨 시간에는 습자지 대신 여느 아이들처럼 신문지를 잘라 가야 했습니다. 몽당연필의 사용은 당연했습니다. 자칫 어린 나이에 우쭐거릴 수 있는 소지를 미연에 없애려는 아버지의 뜻이었습니다. 1962년 집에 TV가 들어왔습니다. 오후 5시에서 7시까지의 제한 방송시간 중에 서장 관사는 동네 주민들의 사랑방이 되었습니다. 노처녀 막내 고모와 함께 밤에 몰래 AFKN을 시청하다가 할아버지에게 들켰습니다. 그 다음날로 TV는 저희 집에서 사라졌습니다.
아버지의 타계에 모든 친지들이 비통해 하며 애도했습니다. 그후 집안 대소사가 이어질 때마다 친지들의 입을 통해 그 동안 곳곳에 미쳤던 아버지의 손길이 하나 둘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해마다 겨울 땔감과 양식을 외할머니 댁에 나누고 오신 일, 어머니께서 패물을 처분해서 곤경에 처한 작은 이모를 도운 것을 눈치채시고 별도의 도움의 손길을 주셨던 일, 삼촌들과 고모들, 그리고 친가, 외가의 먼 친척들에게 이르기까지 베푸신 자상한 일화들이 계속 이어졌습니다. 평소 엄하시던 모습 이면에 따뜻함이 가득하셨던 것입니다.
집사람과 사귀고 있을 때에, 대전의 고모님들이 저 모르게 맞선자리를 만드셨습니다. 누구나 알만한 지역 재벌의 둘째 사위 자리였습니다. 이관형 씨의 아들이라면 50% 믿고 들어가겠다고 했답니다. 물론 저는 고사했습니다. 그런 결혼은 당치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결혼 시에 장인어른께서 사돈의 부재를 아쉬워하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뜻하지 않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은퇴 후 작은 사업을 하시던 장인 어른은 같은 빌딩 내 사업하시는 두 분과 매일 tea meeting을 가지셨다고 합니다. 그 중 한 분은 당시 저희 회사 사장님과 대학 동창 분이었고, 다른 한 분은 경남경찰청장을 지내신 분으로, 두 분 모두 연배가 한참 위셨습니다.
그 중 경남청장을 지내신 분의 태도가 거만해서 평소 조금 거슬리시던 차에, 우리 사돈도 경찰이셨다는데 오래 전에 돌아가셨다고 운을 떼셨더니, 여전히 거만한 자세로 누구냐고 묻더랍니다. 아버지 성함을 거론하자 그 분이 갑자기 놀라서 자세를 바로 잡으면서, 그 분이 사돈이시냐고 되묻더랍니다. 그 분의 갑작스러운 태도 돌변에 오히려 놀란 장인어른에게, 그 분은 아버지가 천안경찰서장 시절 본인은 파출소장이었다고 하면서 아버지에 대한 칭송과 존경심을 표시했다고 합니다. 기분이 한껏 고양되신 장인어른께서 한 밤중에 다소 흥분하신 목소리로 전화를 주셨습니다. 타계 후 30여 년이 지난 시점이었습니다.
그 날 이후, “Leave a legacy”가 저의 삶의 중요한 모토가 되었습니다. 저희 아이들이 언제, 어디서건 저를 아는 사람과 만났을 때, “저희 아버지는 누구십니다.”라고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 부끄럽지 않은, 자랑스러운 아버지가 되는 것이 저의 삶의 한 지향이 된 것입니다.
서울 전근 후 “젊은 서장의 공부 잘하는 아이들”을 당시 명문 여자중학교, 명문 국민학교에 편입시키지 않고, 인근 변두리 학교에 넣어서 모두와 더불어 살아가는 정신을 익히게 하신 그 깊은 뜻을, 환갑이 지난 지금에서야 겨우 깨달은 우매한 아들에게, 빛 바랜 기억으로 남아있는 아버지는 저의 영원한 표상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