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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비공개 입니다
서해랑길 62코스(충청수영성 – 천북굴단지)
여 행 일 : ‘24. 11. 9(토)
소 재 지 : 충남 보령시 오천면·천북면 일원
여행코스 : 충청수영성→보령방조제→하만저수지→사호회전교차로→사기점저수지→사호리 노두길→천북굴단지(거리/시간 : 15.9km, 실제는 15.28km를 3시간 30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서해랑길’은 서쪽 바닷길을 말한다. 땅끝마을(전남 해남)에서 시작해 강화(인천)에 이르는 서해안의 해변길과 숲길, 마을길 등을 잇는 1,800km(109개 코스)의 걷기 여행길이다. 코리아둘레길(해파랑·남파랑·서해랑·평화누리) 4면 중 가장 길며, 거치는 지자체만도 5개 광역에 기초가 26곳이나 되는 긴 여정이다. 오늘은 62코스를 걷는다. 8개로 이루어진 서천·보령·홍성 구간(56-63코스)의 일곱 번째 코스이기도 한데, 보령시의 해안선을 따라 북진하는 여정이다. 난이도는 별이 2개(전체 5개), 수월한 코스로 분류된다.
▼ 들머리는 충청수영성 주차장(충남 보령시 오천면 소성리)
서해안고속도로 광천 IC에서 내려와 광천읍까지 온다. 단아래사거리에서 21번 국도(보령방면으로 8km), 청소면의용소방대 앞에서 610번 지방도(도미항로)로 옮겨 7km쯤 들어오면 충청수영성 주차장에 이르게 된다. 서해랑길(보령 62코스) 안내도는 ‘충청수영성’의 서문 입구에 세워져 있다.
▼ ‘오천항’에서 보령시의 서쪽 해안선을 따라 북진, ‘천북굴단지’까지 가는 15.9km짜리 여정이다. 주요 볼거리로는 충청수영성(‘보령9경 더하기’의 7경)과 사호리해안의 노두길, 천북굴단지 등이 꼽힌다. 하나 더, 이 구간은 물때에 맞춰 답사해야 한다는 특징이 있다. 바닷물이 차오르면 해식애를 낀 ‘노두길’을 걸을 수 없기 때문이다.
▼ 11 : 30. 충청수영성의 ‘서문(西門)’으로 올라가면서 트레킹이 시작된다. 조선시대 서해 해군사령부였던 ‘충청수영성(忠淸水營城)’은 대흥산 상사봉에서 북서쪽으로 달리는 능선 말단부에 축조된 석축산성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충청수영의 규모는 군선 142척, 수군 8천414명에 이른 것으로 기록돼 있는데 고종 33년(1896)에 폐영(廢營)됐다.
▼ 뒤돌아본 서문. 충청수영성에는 진남문(鎭南門)·만경문(萬頃門)·망화문(望華門)·한사문(漢舍門) 등 4곳의 성문이 있었으나 현재는 서문인 ‘망화문’만 홍예문 형태로 남아 있다.
▼ 성곽은 대흥산의 상사봉에서 북서쪽으로 달리는 능선 말단부에 축조됐다. 그러니 잠시지만 가파른 언덕을 오를 수밖에 없다.
▼ 서문을 들어서자 진휼청(賑恤廳, 도 문화재자료 제412호)이 맞는다. 하지만 보수공사가 한창이다. 덕분에 대청·온돌방·툇마루·부엌 등으로 이루어진 내부구조는 고사하고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마저도 눈에 담을 수 없었다. 참고로 진휼청은 흉년이 들면 충청수영 관내의 빈민구제를 담당하던 곳이다. 수영이 폐쇄된 후 민가로 팔렸다가 1994년 다시 매입했다고 한다.
▼ 충청수군의 군선과 수군들로 북적였을 오천항. 천혜의 입지 덕택에 오천항은 삼국시대부터 중국과의 교역항 역할을 맡아왔고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거점이었다. 그런데 포구가 낯설지 않은 이유는 뭘까? 어쩌면 ‘동백꽃 필 무렵’의 촬영지임을 알리던 초입의 안내판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사랑하면 다 돼!’를 외치던 그 생활밀착형 치정 로맨스에 나 역시 푹 빠져 있었으니까.
▼ 영보정(永保亭)은 연산군 11년(1504) 수사로 부임한 이량(李良)에 의해 세워졌다. ‘영원히 보전한다’는 뜻으로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뜻(忠君憂國之意)’도 담고 있단다.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아름다움을 노래했다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그중에서도 채팽윤(蔡彭胤, 1669-1731)은 ‘호서의 많은 산과 물 중에 영보정이 가장 뛰어나다’고 극찬했을 정도라나? 충청수영성이 폐쇄되면서 함께 사라졌으나 2015년 복원을 마친 덕분에 그 아름다움을 실제 체감해 볼 수 있었다.
▼ ‘천상누대 화중강산(天上樓臺 畵中江山)’라고 쓰인 편액이 눈길을 끈다. ‘천상의 누대에 오르니 그림 같은 강산이 펼쳐지는구나.’ 영보정에서의 조망을 이 여덟 글자로 표현하고 있다고 보면 되겠다.
▼ 편액의 자랑처럼 영보정에서의 조망은 뛰어나다. 발아래로 ‘광천천’의 하구역이자 ‘천수만’ 입구의 바다가 펼쳐진다. 충청수군의 군선들로 붐볐을 바다는 푸른 하늘을 가득 담았다. 그리고 그 바다는 지금 자그마한 어선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 10 : 40. 영보정을 지나온 길은 충청수영성의 성벽으로 향한다. 이어서 성곽을 관통하고 있는 ‘610번 지방도(충청수영로)’를 횡단한다. 북문지(北門址)로 예상되는 지점인데, 충청수영성도 세월의 무게를 이겨내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이렇듯 성곽은 도로개설이나 호안매립 등으로 인해 많이 훼손됐다. 그나마 성지(城址)나 그 주변 지형은 거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었던가 보다. 국가 문화재(사적 제501호)로 지정된 걸 보면 말이다.
▼ 도로를 건너자 ‘장교청(將校廳, 사진)’과 ‘내삼문(內三門)’이 맞는다. 객사(장교청)인 ‘운주헌(運籌軒, 도 문화재자료 제411호)’은 수군절도사가 왕을 상징하는 전폐를 모시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대궐을 향해 절을 올리던 곳이다. 중앙에서 내려오는 관리들의 숙소로도 이용되었다. 또한 삼문(위 사진에서 어렴풋이 보이는 건물)은 수군절제사가 집무하던 공해관(控海館)의 출입문 역할을 하던 문이다.
▼ 장교청 앞의 선정비들. 충청수영성은 충청도 수군 전체를 관리하던 성이다. 저 많은 빗돌들이 그 증거다. 참고로 충청수영성은 관할 해역이 북쪽 아산만에서 남쪽 금강 하구 장항만에 이르렀다. 해안선을 따라 점점이 흩어진 섬들이 250개나 된다.
▼ 탐방로는 이제 성벽을 따라 간다. 성벽은 바깥쪽은 돌로 쌓고 안쪽은 자연적 지형을 이용해 흙을 돋우어 메운 외축내탁(外築內托)의 축성술을 이용했다. 길은 그런 성벽 위로 나있다. 참고로 충청수영성은 1509년(중종 4년) 수군절도사 이장생이 서해로 침입하는 적을 방어하기 위해 돌로 축성했다. 성벽은 길이가 1650m에 이른다.
▼ 그렇다고 앞만 보고 걷지는 말자. 뒤돌아볼라치면 장교청과 영보정은 물론이고 성벽까지 충청수영성의 전모를 가늠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 충청수영성은 아름답기로도 유명하다. 천수만 입구와 어우러지는 경관이 수려하여 조선시대 시인묵객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다산 정약용과 백사 이항복도 영보정을 조선 최고의 정자로 묘사했단다.
▼ 탐방로는 산등성이를 따라간다. 성벽이 있었다지만 지금은 그 흔적, 아니 그마저도 웃자란 잡초더미 속에 묻혀버렸다.
▼ 10 : 46. ‘만경문(萬頃門)’이 있던 동문지(東門址). 안내문은 동문이 성벽 사이에 누각을 짓는 개거식(開拒式)이라고 적었다. 성문 가까이의 성벽에 돌출시켜 만든 ‘적대(敵臺)’도 있었단다. 하지만 지금은 터로만 남아있을 따름이다.
▼ 10 : 49. 동문지에서 바닷가로 내려간다. 이어서 ‘소성2리 경로당’을 지났다싶으면 이내 610번 지방도(충청수영로)로 올라선다. 인도가 따로 없어 안전에 각별한 유의가 필요한 구간이다.
▼ 10 : 58. 보령방조제의 남단인 ‘소성삼거리’. 안내판 하나가 눈길을 끈다. 오른편 산등성이에 ‘충청수영 해안경관조망대’가 있다는 것이다. 오천의 아름다움을 파노라마로 만끽할 수 있는 곳이라는데 다녀오기에는 너무 먼 거리다. 하나 더. 직진하면 도미부인의 영정을 모신 사당 ‘정절사’도 만나볼 수 있다. 이 역시 잠깐 다녀오기에는 부담스러운 거리지만.
▼ 서해랑길은 이제 ‘홍보로(국도 40호선)’를 따라간다. 오천면과 천북면을 잇는 ‘보령방조제’의 제방 위로 동명의 차도가 나있다. 양옆에 인도를 따로 내놓았음은 물론이다. 이 구간에서의 자랑거리는 조망이다. 둑길을 걸으며 오천항과 충청수영성, 보령호의 풍경을 색다른 각도에서 감상할 수 있다. 운이라도 좋을라치면 천북마리나에 정박된 요트들의 이국적인 풍경도 함께 눈에 담을 수 있다.
▼ 이즈음 천수만에 어깨를 기댄 충청수영성이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진다. 충청수영성은 안면도·원산도로 둘러싸인 천수만에서도 좁은 내만(內灣)에 깊숙이 들어앉아 있다. 하지만 앞바다의 수심이 깊은 데다 서해안의 심한 조수간만의 차이에도 다른 포구와는 달리 배가 드나드는 데 어려움이 없단다. 주변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뒷동산의 자연 지형까지 감안하면 천혜의 해군 요새라 할 수 있다.
▼ 이곳은 낙조 감상의 포인트이기도 한 모양이다. 포토존 안내판까지 세워놓았다. 안내판은 또 정절의 상징인 ‘도미부인’의 설화를 바탕으로 주변 경관을 연계시킨 ‘도미부인 솔바람길’이 지나간다는 것도 살짝 귀띔해준다.
▼ 오른쪽에는 ‘보령호’가 있다. ‘보령방조제’를 쌓으면서 생겼으니 당연한 지명이겠으나, 그 보령호가 ‘광천천’의 물길을 가로막은 내수면임을 감안하면 마땅치 않은 이름일 수도 있겠다. 하나 더. 호수 너머로 보이는 섬은 정절을 상징하는 도미부인의 설화가 전해져 내려오는 ‘빙도(미인도)’다. 도미부부가 태어난 곳으로, 백제 개루왕으로부터 수난을 당하기 전까지 살았다고 한다.
▼ 11 : 09. 배수갑문. 길이 1,082m(높이 20.7m)의 보령방조제를 쌓으면서 생긴 보령호의 담수를 관리하기 위해 만든 수문이다.
▼ 11 : 16. 도로를 따라 5-6분쯤 걸었을까. 서해랑길 표식이 오른쪽으로 난 샛길로 들어가란다. 농로를 따라 들녘을 에둘러가는 구간인데, 속도를 올리기 딱 좋은 직선도로인데다 인도까지 없는 국도를 피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 하지만 난 계속해서 국도를 따르기로 했다. 오가는 차량들을 조심해서 걷기만 하면 되는데, 눈요깃거리도 그렇다고 특별한 이야깃거리도 없는 들녘을 일부러 에둘러갈 필요가 없을 것 같아서이다. 거기다 거리까지 1km 가깝게 단축할 수 있는데 뭘 망설이겠는가.
▼ 예상대로 인도는 따로 없었다. 거기다 안전선이랄 수 있는 흰색 페인트 선의 바깥도 한 사람이 걸어가기조차 부담스러울 정도로 폭이 좁았다. 나를 믿고 따라오는 도반들에게 약간 미안할 정도로... 하지만 아름답게 물들어가는 단풍나무가 그 미안함을 약간이나마 덜어주었다.
▼ 나지막한 고개를 넘으면 ‘하만3리’, 이즈음 오른쪽으로 ‘두룽개들’이 펼쳐진다. 서해랑길은 저 들녘을 가로지르며 나있다.
▼ 도로변에는 ‘두만소류지’라는 둠벙에 가까운 저수지도 있었다. 입질이 좋은지 강태공들 여럿이 세월을 낚고 있었다.
▼ 11 : 36. ‘하만3리 노인정’에 이른다. 옆에 있는 ‘천북농협 벼 건조·저장시설’의 규모가 무척 크다. 천북면 주민들의 삶이 그만큼 풍요롭다는 얘기일 것이다.
▼ 11 : 43. ‘동음마을’ 버스정류장 앞에서 ‘서해랑길’과 다시 만났다. 샛길(농로)이 국도를 가로지르는 간이 사거리인데, 이정표(종점 8.5km/ 시점 7.4km)는 왼쪽으로 난 샛길로 들어가란다.
▼ 도로를 건너면 ‘대궁골(하만4리)’. 전형적인 시골 풍경과 마주친다. 민가 대여섯 채가 산자락에 기대듯 들어섰는데, 마을 앞으로 산골 치고는 제법 너른 들녘이 풍요롭게 펼쳐진다. 널찍한 들녘은 인심까지도 넉넉하게 만드나보다. 주민 한 분이 처음 본 나그네에게 요기나 하라며 삶은 밤을 한 움큼이나 주셨다.
▼ 11 : 59. ‘하만4리 노인정’ 앞에서 ‘하학로’로 올라선다. 아까 걸어왔던 ‘홍보로(국도 40호선)’가 하만교차로에서 가지를 쳐놓은 지선이다. 보령과 홍성을 잇는 ‘홍보로’는 천북굴단지‘로 가고, 갈려나온 ‘하학로’는 이곳 하만4리 대궁골과 사호3리 짓개마을을 거쳐 천수만으로 나간다.
▼ 12 : 06. ‘하만 회전교차로’. 공룡발자국 화석이 발견된 ‘맨삽지(학성리)’로 가는 길이 나뉘는 곳이다. 다리품만 조금 더 팔면 다녀올 수 있다는 몽중루 작가님의 조언에 귀가 솔깃했던 지점이기도 하다. 하지만 상록암(고성)과 사도·추도·낭도(여수)에서 실컷 보았던 기억이 있기에 그냥 지나치기로 한다.
▼ 12 : 10 - 12 : 20. ‘사호1리’ 버스정류장. 걷기 여행자들에게 ‘쉼터’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그리고 그 역할은 주민들의 참새 방앗간인 마을 정자가 대신해주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오늘처럼 정자를 만나지 못한 경우에는 버스정류장에서 쉬어갈 수밖에 없다.
▼ 사호교차로부터는 ‘사호장은로’를 따라간다. 나지막한 산자락 아래 가을빛으로 가득한 농촌 마을들을 차례로 지나간다. 마을 앞. 추수가 끝난 들녘은 텅 비어있다. 아니 곤포사일리지가 그 빈자리를 채워주고 있다. 늦가을의 진풍경이라 하겠다.
▼ 12 : 32. ‘사호축산(영농법인)’의 거대한 축사를 지나자 ‘사기점저수지’가 얼굴을 내민다. ‘사기점(사호1리)’ 마을의 입구이기도 하다. ‘사기점(沙器店)’은 사기그릇을 굽던 곳이라는 데서 유래된 지명이라고 한다. 가마터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있단다.
▼ 12 : 42. 서해랑길은 ‘사호3리’ 버스정류장 앞에서 차도(사호장은로)와 이별을 고한다. 그리고는 농로를 따라 천수만으로 간다. 들머리의 표지석이 사호3리의 자연부락 중 하나인 ‘짓개’로 들어가고 있음을 알려준다.
▼ 바닷가에 가까워지자 주변 풍광이 확 바뀐다. 농경지였던 들녘이 어느새 대하양식장으로 변해있는 것이다.
▼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이라 했던가? 오늘도 난 새로운 사실을 깨닫는다. 대하양식장의 바닥이 비닐로 코팅되어 있다는 걸 말이다. 물만 빼면 대하를 쓸어 담을 수 있으니 이 얼마나 효율적인 방법인가.
▼ 12 : 48. 대하양식장을 기웃거리다 작은 방조제(싯개 들녘을 만든) 위로 올라선다. 이어서 바닷가를 따라 북진한다.
▼ 둑에는 서해랑길 이정표(종점까지 5km) 말고도 ‘천북굴따라길’의 이정표가 세워져 있었다. ‘천북굴단지’를 종점과 시점으로 각각 삼고 있으니 두 길이 겹친다는 얘기일 것이다.
▼ ‘천북 굴 따라 길’은 장은리 ‘천북 굴단지’에서 공룡발자국 화석이 발견된 학성리 맨삽지까지 천북면의 서쪽 해안선을 따라 내놓은 길이 7.8km의 둘레길이다. 해식애로 이루어진 아름다운 바닷가를 걸으며 굴을 길러내는 양식장을 가까이서 눈에 담을 수 있어 가족이나 연인과 함께 걷기에 제격이다.
▼ 12 : 54. 잠시 후, 나지막한 그러나 경사가 무척 가파른 산 하나가 앞을 떡하니 가로막는다. 길은 오른쪽으로 나있다. 하지만 서해랑길은 바닷가 방향이다. 해안선을 따라 ‘데크 로드’를 내놓았다.
▼ 이곳은 물때에 따라 진행방향을 달리해야 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출렁다리까지는 노두길을 걸어야 하는데 바닷물이 차오르면 통행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선지 초입에 우회로 안내 현수막을 설치하고 QR코드로 만조시간을 확인할 수 있도록 했다. 하나 더. 간조 시각 전후로 2시간 정도 여유를 두고 걷기를 권한다. 바닷물은 생각보다 빠르게 차오르기 때문이다.
▼ 이후부터는 데크 로드를 따른다. 산자락과 바다의 경계를 따라 다리를 놓듯 길은 내놓았다
▼ 천수만 입구 쪽 풍경이다. 건너편 학성리(천북면) 해안 앞에 작은 섬 하나가 오롯이 떠있다. 공룡발자국화석이 별견되었다는 ‘맨삽지’일지도 모르겠다. 보령시에서 ‘공룡 테마공원’을 조성하겠다는 야심찬 포부를 갖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 13 : 01 : 그렇게 얼마를 걷자 작은 포구가 길손을 맞는다. ‘사호3리’의 자연부락 중 하나인 ‘열호동(烈湖洞, 우리말로는 여르문이)’인데, 안면도와 마주하는 해안에 포구가 들어서 있다.
▼ ‘여르문이’ 마을 앞에서 바닷가로 내려섰다. 그리고는 노두길을 따라 북진한다. 갯마을 주민들의 ‘삶의 터전’이어선지 바닷가를 따라 시멘트로 길을 내놓았다. 이곳은 그 유명한 ‘천북 굴’이 생산되는 곳이다. 주민들이 생산한 굴을 가득 실은 경운기들이 노두길을 따라 줄지어 나오는 풍경을 상상으로나마 그려본다.
▼ 서해랑길은 이제 ‘천수만’의 해안사빈(海岸沙濱)을 따라간다. 같은 천수만인데도 앞서 오천항에서 보았던 바다와는 사뭇 다른 풍경을 보여준다. 선박들이 오가는 푸른 바다 대신 검붉은 갯벌이 드넓게 펼쳐지는 것이다.
▼ 갯벌을 나누어놓은 저 경계표시는 뭘 의미하는 것일까? 경지정리를 끝낸 농경지처럼 반듯하게 나누어놓았다. 갯벌도 구역에 따라 주인이 따로 있지 않나 싶다. 그리고 각자의 구역에 돌과 자갈을 넣어 굴 생산을 하는 모양이고 말이다. 하나 더. ‘천북 굴’은 줄에 매달아 기르는 남해안과는 다른 방식으로 굴을 기른다고 했다. 갯벌에 돌을 넣거나 나무를 꽂는 방식으로 굴을 양식한단다.
▼ 길은 침식해안을 따라간다. 이때 전국의 유명 바닷가들에 비해 손색이 없는 풍광이 펼쳐진다. 인근인 서산에도 ‘황금산’과 그 아랫자락을 에돌아가는 빼어난 풍광의 해안이 있다. 해식으로 인해 만들어진 기기묘묘한 바위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놀고 있는 곳, 그리고 파도와 몽돌의 절묘한 하모니로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그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잠깐의 눈요깃거리로는 충분한 기경을 이곳에서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 해식애(海蝕崖)와 해식동, 파식대(波蝕臺), 간석지 등의 해안 지형이 번갈아가며 펼쳐지고 있었다. 그런 진풍경을 가슴에 담아가는 신선놀음은 15분 정도 계속된다. 참! ‘천북 굴따라 길’ 중에서 순수하게 갯벌을 따라 걷는 구간은 5km 남짓 된다는 것도 알아두자.
▼ 해안은 온통 해식애로 이루어져 있다. 해식작용으로 인해 곳곳에 구멍이 숭숭 뚫려있다. 파도가 만들어낸 동굴들로 해식지형의 변화과정을 살펴보는 중요한 자료가 아닐까 싶다. 해식절벽에서 해식동굴을 거쳐 ‘씨 아치(sea arch, 독립문처럼 암석 기저부가 뚫린 다리모양의 파식지형)’로 변하고, ‘씨 아치’가 세월이 흐르면 ‘시스텍(sea stack, 암석이 파도의 침식을 차별적으로 받아 만들어진 굴뚝 형태의 지형)’이 되기 때문이다.
▼ 13 : 19. 그렇게 눈의 호사를 누리며 걷다보면 어느덧 ‘하파동’에 이른다. 사호3리를 구성하는 자연부락 중 하나인데, 마을 앞 바다가 육지를 향해 푹 파고들어와 작은 만(灣)을 만들어놓았다.
▼ 이때 옛 멋을 풀풀 풍기는 ‘노두길’이 나타나면서 나그네의 눈을 즐겁게 해준다. 오래전 바닷가 사람들은 섬과 섬, 또는 육지와 섬 사이 갯벌에 돌을 던져 징검다리 길을 만들었다. 돌을 던져 만든 그 노두길은 어촌 주민들의 삶의 현장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걷기 여행자들의 마음을 끌어 잇는다. 노두길은 하루에 두 번씩 사라졌다 생겼다 한다. 물이 차면 수평선 아래로 숨었다가 물이 빠지면 다시 나타나는 신비함 때문에 호사가들은 ‘기적의 여행길’이라고도 부른다.
▼ 공자님은 ‘삼인행필유아사(三人行必有我師)’라고 했다. 배움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는 표현일 것이다. 갯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어민들의 목욕탕일 것이란 지레짐작으로 흘려버렸던 저 바닷가 저수조(‘갯샘’이라고 했다)가, 실은 바다에서 캐온 조개류를 세척하는 용도였다는 것을 새로이 알게 되는 지금의 나처럼..
▼ 13 : 23. 건너편에서 다시 데크 로드로 올라간다. 아니, 길이라기에는 길이가 너무 짧았다. 쉼터를 겸한 전망대를 만들면서 바닥과 연결시키는 구간을 조금 길해 해놓았다고 보면 되겠다.
▼ 탐방로는 잘 단장되어 있었다. 데크 길은 흠하나 보이지 않고, 경관이 좋은 곳에는 쉼터를 만들어 놓았다. 이런 곳에서는 너무 서두르지 말자. 벤치에 앉아 경치를 감상하며 잠깐의 여유라도 부려 볼 일이다.
▼ 평생을 ‘방년(芳年)’이고 싶어 하는 집사람이 이를 놓칠 리가 없다. 냉큼 자세부터 잡고 본다. 그러자 파란 하늘과 푸른 바다가 함께 하자며 우격다짐으로 달려든다.
▼ ‘천북 굴따라 길’의 종점인 맨삽지(학성리)는 ‘공룡발자국 화석’으로 유명하다. 2015년 4월, 30센티 안팎의 원형 발자국 화석 10여 개가 발견됐는데, 역사·지리적으로 가치가 높아 학계의 주목을 받는단다.
▼ 데크 로드는 금방 끝났다. 그리고는 노두길을 따라 또 다시 북진한다. 아까만치는 아니어도 눈요깃거리로 넘치는 구간이다. 작은 바위벼랑과 손바닥만 한 백사장으로 이루어진 해안은 귀엽기까지 하다.
▼ 13 : 32. ‘불모골’이란다. 모래보다는 잔자갈에 가깝지만, 해변이 꽤 넓어 해수욕장으로 개발해도 충분하겠다. 소문난 해수욕장이 하도 많은 보령이라서 그럴 필요도 없었겠지만.
▼ 해안에는 제철 만난 ‘칠면초’가 길손을 반기고 있었다. 해마다 색깔이 7번 변한다는 바다의 단풍이다. 갯벌을 뒤덮고 있는 저 염생식물이 붉은 옷으로 갈아입으면 해변은 가을 풍경으로 물들기 시작한다. 가을철 바닷가는 그래서 더 예뻐진다.
▼ 13 : 34. 해변이 끝나갈 즈음(이정표 : 천북굴단지 1.8km/ 하파동 740m) 산비탈을 치고 오른다. 바위벼랑 바로 아래까지 바닷물에 잠기기 때문에 길을 낼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 계단 위에는 또 하나의 전망대가 만들어져 있었다.
▼ 난간에 서자 서해바다가 드넓게 펼쳐진다. 푸른 바다 위로 작은 섬들이 올망졸망 떠다닌다. 저 바다는 저녁에 방점을 찍는다고 했다. 아름다운 바다 위를 물들이는 붉은 노을이 장관을 이룬단다.
▼ ‘걸어서 행복한 작곡가 정의송 영상 노래길’이란 조형물이 눈길을 끈다. 정의송은 참아주세요(뱀이다), 빠이빠이야(소명), 어부바 등 수많은 노래를 히트시킨 유명 작곡가이다. ‘보령에 가자(문희경 노래)’라는 노래도 지었다고 하더니, 이를 들려주기라도 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조형물은 노래는커녕 전광판에 전원도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 굴은 지방이 적고 미네랄이 풍부한 식품으로 11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수확하는 것이 최고의 상품으로 꼽힌다. 특히 서해의 갯벌과 만나 찬바람을 맞으며 자란 천북 굴은 미네랄과 비타민이 많이 함유돼 있고 타우린도 많아 콜레스테롤과 혈압 저하 효능이 탁월하다고 알려져 있다. 또한 식감이 쫄깃하고 향이 강해 보령 9미 중 하나로도 손꼽혀 겨울철이면 많은 사람들이 천북 굴을 즐겨 먹는다.
▼ 이후부터는 숲속을 걷는다. 경사진 산비탈에 용케도 길을 냈다. 그것도 널찍하게
▼ 13 : 39. 또 다시 내려선 해안(이정표 : 종점까지 1.5km)은 ‘아래사정’이란다. ‘사호2리’에 속한 또 다른 자연부락이다.
▼ 아래사정 앞 해변은 장은리에서 흘러내려온 개울이 지나간다. 그곳에 출렁다리가 놓여있었다.
▼ 출렁다리를 건넌 다음 산속으로 들어간다. 울창한 소나무 숲속을 헤집으며 길을 내놓았는데, 다양한 화초들이 길가에서 꽃망울을 활짝 열고 있었다. 숲속에 들어앉은 ‘숙이뜰’이라는 산채농장에서 심어놓았지 않나 싶다.
▼ ‘개미취’도 그중 하나다. 조경용보다는 척박한 땅의 녹화용으로 제격인 화초이다.
▼ 13 : 52. 숲길을 빠져나오니 펜션단지가 반긴다. 비탈진 산자락에 숙박시설들이 꽉 들어차 있다. ‘천수만 관광휴양단지’라고 한다.
▼ 관광휴양단지답게 쉼터를 겸한 ‘전망대’도 만들어져 있었다.
▼ 드넓은 천수만에는 꼬맹이 섬들이 올망졸망 파도에 떠밀리고 있었다. 그 뒤는 안면도가 반도처럼 길게 뻗어나간다. 참고로 보령에는 16개의 유인도와 83개의 무인도가 있다고 했다.
▼ 천수만을 지긋이 바라보고 있는 저 용(龍)은 대체 뭘 상징하는 것일까.
▼ 원래의 길은 관광휴양단지를 지나 ‘천북굴단지’로 간다. 하지만 새롭게 내놓은 ‘굴따라길(서해랑길과 같이 쓴다)’은 바닷가 솔숲을 헤집으며 내놓았다. 우거진 나무들 사이로 불어오는 상쾌한 공기를 마시며 걷다 보면 지쳤던 심신이 상큼하게 되살아난다.
▼ 소나무 그늘아래 바다를 바라보는 방향으로 쉼터를 만들어놓았다. 하트모양의 박스 안에는 두 사람이 앉기 딱 좋은 그네를 배치했다. 사랑하는 이와 함께 앉아 서쪽 수평선 너머로 해가 지는 모습을 바라보는 ‘사랑 놀음’이라도 해봄 직하다.
▼ 14 : 01. 솔숲을 빠져나오니 ‘천북 굴단지’가 반긴다. 천북면 장은리 바닷가에 10개 동에 80여 개의 점포가 모여 있는데, 이곳에서 파는 굴 요리가 입소문을 타면서 보령지역의 겨울철 대표먹거리로 자리 잡았다. 날씨라도 추워질라치면 제철 만난 굴이 미식가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때문이다.
▼ 단지에 들어선 음식점들은 굴을 이용한 다양한 메뉴를 선보이고 있었다. 생으로 먹는 굴회, 굴 무침, 통통한 우윳빛이 나는 굴 찜, 굴 밥, 구워먹는 석화, 굴 전, 굴 칼국수, 굴 라면 등 굴의 독특한 풍미와 부드러운 식감을 살린 다양한 음식들이 여행자들의 입맛을 사로잡는다.
▼ 이곳에서는 매년 굴 축제가 열린다. 올해는 다음 주말(11월16일)부터 열린단다. 석화로 불리는 굴은 구워먹어야 제격이라고 했다. 굴 구이는 1990년대 초반 천수만 일대에서 채취한 굴을 주민들이 웅기종기 모여 구워먹으면서 시작됐다. 이게 별미로 알려지면서 미식가들의 입맛을 사로잡아 현재의 굴 축제 모태가 됐다.
▼ 14 : 06. 천북굴단지 광장에 이르면서 트레킹이 종료된다. 서해랑길(홍성 63코스) 안내도는 광장의 도로변에 설치되어 있다. 오늘은 3시간 30분을 걸었다. 앱이 15.28km를 찍고 있으니 적당한 속도로 걸었다고 보면 되겠다.
▼ 집사람의 얼굴이 오늘따라 더 뽀얗다. 맞다. 미네랄과 비타민으로도 부족해 타우린까지 풍부한 굴을 실컷 먹었으니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오늘은 운 좋게도 종점이 ‘천북 굴 단지’였다. 그러니 어찌 굴을 외면할 수 있겠는가. 마음씨 좋은 황사장님이 생굴을 구입해 밥상에 올렸고, 도반 한 분은 ‘갑오징어 회’를 사왔다. 거기다 날것을 썩 좋아하지 않는 나는 굴전을 챙겼다. 덕분에 영양가 많은 먹거리로 배를 채운 행복한 하루가 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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